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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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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소설의 주인공인 찰스 스트릭랜드나 이 소설의 모델이 된 고갱이 일반적인 우리 같은 평범한 범인들과의 차이점은 바로 지독히도 솔직하다는 점이라고 본다. 특히나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기는 참으로 힘든 법이다. 일단 뭐가 뭔지 몰라서 솔직할 수도 없고, 알더라도 두려워서 솔직한 삶을 살기가 힘든 법이다. 그것을 일반적으로 인생의 무게니 뭐니 그런 얘기들로 미화하고 자위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비겁이고 한심함이다.

어느날 문득 내가 진정으로 일생을 바쳐 하고픈 일이 생긴다면 과연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아아~ 절대 현재의 삶이 바로 내가 살고픈 삶이었다고 말하지 말라. 또는 특별히 하고픈 일이 없다고도 말하지 말라. 아직 당신들은 인생을 끝까지 살지 않았고, 또한 스스로 노력해보지도 않았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고 평생을 바쳐 하고픈 일을 찾는 것도 엄청난 노력의 결과다. 그것을 찾고자 노력하지 않는 이는 대체적으로 그것을 알 가망성도 적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그런 행운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통상적으로는 그저 그런 뻔한 삶을 살다가 가게 마련이다.

하지만 문제는 노력을 했건 안했건 간에 어쩌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픈 일을 발견했을 때 과연 그것을 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것이 세속의 세계와 나의 현재의 삶에 부합한다면 문제는 없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고, 현재의 삶을 많은 부분 포기해야할지도 모르고 어쩌면 서울역 노숙자 신세로 전락할런지도 모른다고 하면 얘기는 정말 달라진다. 안그런가? 우리는 TV나 책을 통하여 혹은 영화를 통하여 당대에는 불운한 삶을 살았지만 사후에 영웅이 되는 예술가들의 삶을 보아왔다. 그리고 마음 속 깊이 존경과 찬탄의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이었다면 하는 감정이입도 하게 되고 부러운 마음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놓고 만약 당신이 그런 인물이 되어야만 한다면 과연 그 역할을 해낼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어떤 이는 후세에 그렇게 이름이 남겨지는 위대한 예술가가 되겠다고 할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위대한 예술가가 될런지 현재로서는 모를 뿐더러 죽을 때까지 모르고 죽는다고 해도 그 길을 갈 것인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인지 고등학교 시절인지 모르겠지만 수필 제목중에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제목이 갑자기 떠오른다. 참으로 오랫동안 나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화두였다. 아직도 그에 대한 답을 하지는 못했지만, 다만 한가지. 99%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삶은 참으로 싱거운 삶이고 한번 가면 끝나는 일생에서 그런 삶을 살고 간다면 죽는 순간에 엄청난 후회가 들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아니 그렇게 느꼈다. 과연 나는 내가 하고픈 일을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까지 다 잃을 수도 있다는 위기속에서도 지속할 수 있는가? 나는 그처럼 나 자신에게 솔직하고 그런 일을 추진할 용기가 있는가? 이건 그저 재능이 있으니 해봐야지. 그럼 성공할런지도 모른다라는 종류의 얘기가 아니다. 이건 내가 스스로에게 솔직한가 아닌가에 대한 문제다. 바로 과거 위대한 몇몇 인류의 선조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과연 이 나의 리뷰를 읽는 여러분들은 자신과 자신의 삶과 열정에 대하여 지독히 솔직할 수 있는가 묻고 싶다. 만약 이런 나의 물음에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분에게 무척이나 부러운 마음을 가질 것이다. 다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런 대답전에 그 길을 찾고자 하는 어마어마한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니 아마도 현실의 자신의 모습에 불만이 많은 이들이 나의 부러운 시선을 받을 확률도 높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대체 삶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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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시계 이야기
데이바 소벨 / 자작나무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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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제작자이자 수리공이었던 존 해리슨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가 해상시계를 제작하였다. 솔직히 나는 이 책을 읽기 전 해상시계가 무슨 특별한 다른 종류의 기발한 어떤 것인줄 알았다. 물론 그 당시로서는 엄청 기발한 발명품이었고, 또한 특별하였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자면 그냥 우리가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와 다를게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18세기에는 제대로 시계가 맞게 돌아가는 것조차 힘들었던 시기였다. 육상에서조차 말이다. 그러니 습도와 배의 움직임 등으로 인하여 해상에서는 보다 특별한 시계제작이 필요했다. 왜냐고?

바로 문제는 경도였다. 위도는 쉽게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적도에서는 태양이 바로 내 머리위에 있다. 하지만 경도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온 방법이 정확한 해상시계 또는 천문학으로 경도를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두 가지가 정말 끝까지 힘겹게 경쟁하게 되었고, 결론은 누구나 짐작하듯이 해상시계가 영국왕실의 상금을 받으면서 승리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세상을 주름잡던 영국으로서는 경도를 몰라 조난사고가 잇달았고 엉뚱한 곳으로 가기 일수였기에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경도문제해결이 시급한 과제였다. 그래서 상금을 걸었고, 존 해리슨이 결국 그 상금을 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늘 이런 영웅을 더욱 빛나게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그런 영웅을 모함하고 질시하고 방해하는 인물들이다. 존 해리슨을 힘들게 했던 인물은 당시 해상시계와 경쟁을 벌인 천문학을 통한 경도찾기의 권위자인 메스켈린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지독히도 존 해리슨을 방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 자신이 영국왕립과학회인가의 수석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말이다. 자존심도 꽤 상했을 것이다. 지독히 인간적인 모습일런지도 모른다.

이 책은 존 해리슨이 어떻게 해상시계를 만들었고, 그것을 발전시켜 나가는지, 또한 주위의 어려움에도 얼마나 오랫동안 그 일에 자신의 집념을 불태우는지, 그리고 결국 멋진 결말을 맺는지에 대한 얘기다. 어떻게 보면 그저 뻔한 한 영웅의 스테레오타입으로도 보인다. 솔직히 그렇다. 특별히 매력적인 구석이라고는 찾기 힘들다. 이 책이 오랫동안 영국의 베스트셀러였다고는 하나 그건 자신들의 선조 얘기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엄청난 감동같은 것도 없었고, 어찌 보면 대단히 평범한 것 같지만, 그저 그 당시 경도문제가 정말 심각한 문제였고, 나는 그런 사실에 대해 일자무식이었기 때문에 그런 나 자신의 무식을 깨기 위한 정도로 밖에는 이 책이 나에게 준 의미는 없다. 결국 책을 다 보고 남은건 '아, 경도를 알기가 힘든 거구나. 그래서 오랜 시간 그렇게 힘들게 생활했구나.' 정도였다.

사실 이런 집념을 가지고 자신의 일생을 살아가는 이들은 많다. 다만,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대상이 세상에 그렇게 필요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고, 근본적으로 경제성에 맞아 떨어지지 않아서 일 수도 있다. 솔직히 그 시기에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제국주의의 표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얼마나 경도문제가 심각했을까 반추해보는건 어렵지 않은 일이고, 그렇기에 존 해리슨이란 인물이 지금 시기에 이런 책으로 나오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나에게는 여전히 과연 그가 그렇게 위대한 인물이었나 하는 의문이 남는다. 그는 그저 습기와 움직임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 당시 기준으로는 정확한 시계를 제작한 인물일 뿐이다. 시계라는 물건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대에 처음으로 그것을 제작한 이도 아니다.

나는 아직도 누가 시계라는 물건을 처음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르는데, 나중에 그걸 발전시킨 인물이 영웅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영국에서는 확실히 영웅이지만 나에게는 아니다. 아마 18세기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에 이런 해상시계가 만들어 졌다면 그래서 영국이라는 제국주의가 다른 나라를 해상을 통해 침략하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면 그 당시 해상시계를 만든이가 이처럼 유명해 졌을까?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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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슬픔 -상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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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보면서 솔직히 완과 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직 내 눈에 인간적으로 보인 사람은 은서 한사람 뿐이었다. 자신이 버린 여자를 나중에 우연히 결혼식장에서 다시 보고 그제서야 깨닫고 매달리고 협박하는 완도,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죽자사자 다른 남자에게 달려가는데도 조용히 바라만보다가, 결국은 그녀를 의심하고 파멸하게 만드는 세도, 둘 다 정상인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게, 나의 시각으로 대단히 인간적인 모습은 오직 은서뿐!

이 책의 상권을 읽으면서 좀처럼 눈에 글자가 들어오지 않았다. 지루하다고나 할까. 그렇다. 솔직히 상권은 지루했다. 그러다 상권의 후반부에서부터 급물쌀을 타기 시작하여 하권은 순식간에 읽을 수 있었다. 나의 인내심이 조금만 모자랐더라도 나에게 있어 이 책은 또 하나의 미독의 책으로 남았으리라.

나에게 이 책은 어떤 의미일까. 사랑은 없다? 아님 위에 독자에세이에 나왔듯이 현재의 사랑에 충실하라? 둘 다 아닌거 같다. 후자의 경우, 은서는 현재의 사랑이 세가 아니었다. 그걸 나중에서야 깨달았기에 그건 신이 아닌 다음에야 알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따라서 나의 결론은 사랑은 어려운 것~! 이게 이 책을 관통하는 얘기꺼리가 아닌가 싶다. 사람의 감정은 알 수 없고, 그러기에 더더욱 사랑은 어렵다라고 본다.

하지만 만약 은서가 마지막에 죽지 않았고 이 소설이 상,하권이 아니라 1,2,3으로 나가는 소설이었다면, 또 다른 얘기가 뒤에 나올런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그 경우에는 삼류겠지만 또 은서와 완이 만날 수도 있을런지 모른다. 그랬다면 역시 사랑은 하나다. 그리고 변치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었겠지.

나는 이 소설의 작가가 과거 어떤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얼핏 듣기로는 실연의 아픔도 갖고 있다고 들었다. 그녀의 이런 과거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은서를 통해 조금이나마 표현되었을까. 그게 궁금하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작가가 경험한 과거의 사랑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고, 지독히도 운이 나빴다고 말이다. 그러니 세상을 자신의 과거로 인해 색안경을 끼고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완과 세. 둘 다 지독히도 여자인 은서를 괴롭히는 인물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입장이 반대로 뒤바뀌긴 했어도 불쌍한건 은서이고 남자 둘은 죽일 놈들이다. 그들이 여자를 괴롭히는 방법도 지독히 이기적이거나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를 나쁜 놈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내가 보기엔 은서가 전적으로 의도한 자학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망치고자 하면 한도 끝도 없다. 그것으로 인해 고통받는게 자신 혼자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주위의 사람들도 그로 인해 졸지에 가학자로서 평가받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나는 묻고 싶다. 대체 그렇게 자신을 우습게 알고 좋아해주지 않는 남자를 그토록 오래 따라다니고 스스로 상처받으라고 한 사람이 있는가? 또는 자신이 사랑한 남자가 자신을 떠났기에 그 당시 자신을 그토록 사랑하고 쫓아다닌 남자와 결혼하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나? 이런 얘기를 한다면 무척이나 욕을 먹겠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이 세 주인공중에 제일 인간적인 모습이 은서라고 말했듯이 나는 그녀가 그래서 가장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녀 주위의 남자는 그녀의 그런 인간미를 살리기 위해 다소 지독한 모습으로 등장하였고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의 두 남자가 감히 그녀로 인한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통상 여자가 남자보다 현실세계에서 물리적인 측면을 제외하고는 강하다. 이 소설속의 주인공 세명의 성을 바꿔서 생각해보면, 한 남자가 두 여자에게 당하는 과정이 훨씬 자연스럽지 않은가? 나는 그저 은서같은 여자가 과연 현실세계에 몇이나 있을지 의문스럽다. 은서같은 남자도 보기가 힘든 세상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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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장어 스튜 - 2002년 제26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권지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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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죽여 보지 못한 사람은 무언가를 사랑할 수도 없다는 거야. 이렇게 죽어 있는 닭들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닭을 다시 키운다고 해도 애정 따윈 생겨나지 않지.' 이런 대사 혹은 묘사 따위를 볼 때마다 그 작가가 얼마나 깊은 사유를 했는지 깨닫게 된다. 대상작인 뱀장어 스튜는 그런 점에서 대상을 받을 만반의 준비를 갖춘 작품이다. 비유와 상징이 아마도 심사위원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으리라. 다만, 여러 다른 분들도 지적하듯이 최근 이상문학상의 수상작들의 흐름이 다분히 우울한 분위기를 띈 것들이 다수라는 점에서 대단히 만족스럽지 못하다. 물론 예술이라는 것이 고통속에서 피어난다고는 하나, 그 고통을 형상화하는데 촛점을 맞추는 것은 아닌지 의문스럽다. 고통을 보다 담담하게 그려내고 다른 희망의 메세지를 보여줄 수는 없는 것인지.

이번 이상문학상 작품중에 단연 나의 눈을 끈 작품은 김인숙의 밤의 고속도로와 천운영의 눈보라콘이었다. '빔의 고속도로'는 분명 이상문학상의 대상을 받을 만한 작품이 아닌 것은 분명하였으나 마치 왕가위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게끔 하여 인상 깊게 보았다. 하지만, 다음해에 나온 '바다와 나비'의 경우,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기 위해 일년간 그런 쪽으로 노력한게 아닌가 싶었다. 그녀의 원래의 소설에서 주던 느낌이 솔직히 나는 더 좋다. 이혼녀의 모습 혹은 삐걱거리는 부부.....이런 것을 통해서 세상의 진실을 보여준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물론 아픔속에 진실이 보다 명확히 보일 것은 분명하나, 앞에서도 말했듯 최근에는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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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스펜서 존슨 지음, 이영진 옮김 / 진명출판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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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이 출판된 해에 읽었다. 책은 무척이나 얇고 빨리 읽기에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로 쉽다. 많은 이들이 이 책이 정말 많은 깨우침을 준다거나 혹은 아무 것도 아닌거 같지만 가슴에 와닿는 그런 가르침을 준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얘기는 흔히 사람들이 하는 말속에나 세상 어디에도 다 널려있다. 그 만큼 흔한 얘기고 뻔한 얘기다. 그저 책방 한구석에 서서 읽어보고 말 정도의 책이다. 두번 다시 읽는 다는건 시간 낭비다. 아마도 대기업 CEO들은 이런 류의 책을 무척이나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회사원들을 위해 책을 각 팀별로 사줄 것이다. 그리고는 읽게 만들 것이다. 초등학생정도의 아이들에게는 읽을만하고 권해줄만한 책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이른바 지성인이라는 사람들이 이런 책을 통해서 여지껏 몰랐던, 혹은 간과했던 어떤 세상의 진실에 접근한다는 것은 넌센스다. 이 말 한마디면 끝이다. '준비하라.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미래를 준비하라.'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다는거 자체가 얼마나 우리 독자들이 얼마나 연성화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게 하는거 같아 씁쓸하다. 쥐새끼들이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냐고.' 이것이 성인남녀에게 말해줄 말인가...?

이런 책이 없었어도 우리의 인류 조상들은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몸소 실천해왔다. 너무도 뻔한 얘기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그렇지 않았더라면 현대의 이런 문명은 이루어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6 Sigma 만큼이나 조직의 일원들을 흔들어야 겠다는 의미로 쓰여진 책이다. 너무나도 뻔한 얘기. 그 속에서 무릎을 탁치며 '아..하...그렇지....내가 간과했었군...'하는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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