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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공화국으로 ㅣ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사회당의 ‘방법비판’과 가라타니 고진
2001년 청년진보당이 사회당이 될 무렵, <방법비판과 정치적 맥락주의>(금민/김태호)가 사회당 당보 특별호를 통해 발표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습니다. “어렵다!” 예, 어려웠습니다. 20세기의 무수한 신조류 사상가들이 죄다 거명되고, <자본>을 꾸역꾸역 읽기에 급급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자본>에 대한 새로운 독법을 설명하니 어렵지 않을 순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외부의 반응도 썰렁했습니다. 단지 자율평론의 조정환 님 정도가 비판적 주석을 달았을 뿐입니다.
여기서 방법비판을 다시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핵심만 간략하게 되짚어보려 합니다. 가라타니 고진과 겹쳐 읽는 것을 통해서. 아무튼 이 “방법비판은 칸트․헤겔․맑스를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이며, 동시에 이들을 넘어서고자 했던 모든 신조류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이들 대가들을 넘어서지 못했는가를 밝혀보고자 하는 작업”(위의 글)입니다. 그렇습니다. 방법비판은 이처럼 원대한 작업이며, 커다란 나침반으로 제시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그것이 희미하게 잊혀지려 할 무렵 다시 상기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겁니다.
좀 길지만, 마지막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므로 다시 인용을 해봅니다.
“Ⅳ. 방법비판과 정치적 맥락주의
방법비판은 대상에 대한 서술적 비판의 맹점(盲點)을 지적하는 것이고, 그러한 비판의 불가능성의 조건을 확증하는 일이다. 이 확증은 그러나 서술 자체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그와 같은 서술, 가능한 서술은 필연적으로 물신적일 수밖에 없고, 방법비판적 단서가 없이는 언제든지 현실옹호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자는 것이다. 그러나 대상에 대한 서술이 요구되는 한에서 물신적 서술은 회피될 필요도 없으며 극복될 성격의 것도 아니다. 대상에 대한 서술을 통하여 대상을 비판하고자 하는 시도에는 서구 형이상학의 오래된 전통 -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전통 - 이 좌파적․전복적 형태로 재현된다고 본다. 그래서 방법비판은 철저히 탈형이상학적이고 반(反)실체주의적이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서술을 비판적으로 전도시키는, 이론의 외재적 장치들 - 형이상학적 전제들 -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신(神)을 통한 현실비판을 거부한다. 방법비판은 한편으로 사회의 주어진 조건하에서 그 선험적 형식원리들이 내재화하는 필연성을 인식하며, 그래서 이 원리들에 반대하는 운동들도 내재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온갖 종류의 내재성의 철학 - 20세기 좌파의 철학 - 이 간과한 문제, 모든 내재화는 현실옹호적으로 끝난다는 문제를 망각하지 않는다. 모든 비판적 서술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방법비판은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이와 같은 입장들로부터 나오는 실천철학적 결론을 - 물론 성급한 시도이겠지만 - 통속적으로 써 보도록 하겠다. 그것은 정치적․실천적 맥락주의로 표현될 수 있다. 방법비판적 실천은, 어떠한 실천도 주어진 구체적 맥락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으로부터 출발한다. 맥락을 떠나서는 비판적 실천이 정의될 수 없다. 그러나 방법비판은 아울러 이렇게 정의된 ‘비판적 실천’이 보편적 비판으로 위장하는 것, 바꾸어 말하자면 서술 불가능한 “보편적 비판”이 내재화하는 것을 부단히 경계하며, 언제나 “현실의 상태를 극복해 가는 운동” 그 자체이고자 한다. 방법비판은 그래서 “있는 것”(현실의 맥락)과 “없는 것”(현실의 효력논리의 수준에서는 서술 불가능한 대안사회) 사이의 긴장이며, 실천적․반성적 균형(equilibrium)이다. 방법비판적 실천은 현실의 맥락에서 출발하고, 현실의 운동 속에서 대안사회를 본다. 대안사회는 그래서 결코 역사의 목적론적 도달점이 아니며 현실 속에 부단히 생성되고 정정되어 가는 과정이다. 방법비판은 대안사회를 공간적으로 내재화하려는 시도(일국 사회주의)도, 또는 시간적으로 내재화(歷史內化)하려는 시도 - 목적론적 시간기획에 입각한 과학적 이행이론 - 도 철저히 거부한다. 방법비판은 한편으로 부단히 이러한 내재화를 시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루어진 내재화를 재파괴한다.”(위의 글, 강조는 인용자)
강조한 부분을 굳이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이 부분을 잘 기억하면서 역시 길지만, 가라타니 고진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역사의 목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것은 가상입니다. 다만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불가결한 초월론적 가상입니다. 칸트가 말하는 역사의 이념이란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칸트가 말하는 이념을 역사에 의미나 목적이 없다, 그런 것은 가상이라는 이유로 배척할 수는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부정하는 이념이란 ‘구성적 이념’입니다. 역사의 의미를 조소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대부분은 일찍이 ‘구성적 이념’을 믿었던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이고, 그와 같은 이념에 상처를 입고 시니시즘이나 니힐리즘으로 도피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자본주의가 야기한 비참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로서는 사회주의는 환상이다. ‘거대서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1980년 이후 세계자본주의의 중심부에서 포스트모던적인 지식인이 이념을 조소하고 있는 사이, 주변부나 저변부에서는 종교적 원리주의가 확대되었습니다. 적어도 거기에는 자본주의와 국가를 넘어서려는 지향과 실천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신의 나라’를 실현하기는커녕, 성직자=교회국가의 지배로 귀착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규제적 이념과 구성적 이념의 구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규제적 이념은 결코 달성되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는 현상에 대한 비판으로서 계속 존재합니다.”(가라타니 고진, <세계공화국으로>, 도서출판 b, 2007, 188쪽. 강조는 인용자)
방법비판의 내용과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는 것 사이에 결론적인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전혀 다른 맥락에서 서로 접근하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에 많이 기대고 있습니다. 방법비판이 비판적으로 의거하고 있는 지적유산 가운데 하나에는 “맑스에 대한 최근의 칸트주의적 독해들 - 특히 프랑크 쿠네(Frank Kuhne)”가 들어갑니다.
방법비판은 매우 강한 어조로 일국 사회주의와 목적론적 시간기획에 따른 이행이론을 거부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거부’의 의미를 잘못 이해해선 안 됩니다. 여러 선택지가 가능한데, 그 중 이러저러한 것을 거부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의 ‘거부’는 ‘불가능성’의 다른 표현에 가깝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러한 ‘불가능성’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공화국으로>에서 논증합니다. 일국 사회주의의 불가능성은 20세기 초의 맑스주의자들도 상당수 공감했던 것이긴 하지만, 곧이은 현실 사회주의에서는 일국 사회주의의 가능성이 적극적으로 웅변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었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관계 속에서의 국가 형성에 주목합니다. 국가를 형이상학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간 관계라는 현실의 맥락 속에서 파악하면, 왜 국가가 내부적인 부정만으로 지양될 수 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단 하나의 가능성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내부의 부정이 전 세계에서 일거에 일어난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선 불가능한 일입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공산주의’의 단계를 설정하는 이행이론도 목적론적 시간기획인 한에 있어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으며, 국가 간 관계와 경제적 제 관계의 세계성을 사상하고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현실과 유리된 형이상학적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대서사’를 떠받쳐 주었던 목적론과 구성적 이념이 현실에서 패배하고, 이처럼 철학적, 사상적으로도 유죄를 선고받자 불편한 심기를 많이 표현했습니다. 시니시즘과 니힐리즘으로 빠져들어가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방법비판은 한편으로 부단히 이러한 내재화를 시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루어진 내재화를 재파괴”하는 것입니다.
방법비판은 불가능성의 논증이 아닙니다. “재파괴”가 필요하다는 규제적 원리입니다. 현실을 정확히 보고, 현실 속에서 비판의 무기를 찾으며, 현실을 지양해 나가는 긴 여정에서 나침반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