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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언약
김경민 지음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잔인한 달 5월의 싱그러움을 한 껏 담은 공원에 앉아 뛰어 노는 아이들을 기다리며 아름다운 남장 여인의 유혹에 끌려 책을 펼쳤다.
익히 알고 있는 역사 이야기. 200년도 더 훨씬 지났지만 소설보다 더욱 소설 같은 비극이기에 끊임없이 회자되고, 늘 '비운'이라는 수식어를 이름처럼 달고 다니는 사도세자가 그 주인공이다. 아무리 내 나라 역사이니 감싸 준다고해도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는 오욕의 희생양인 그를 소설은 어떻게 담고 있을지 책이 주는 두툼한 무게감의 위압에도 거침없이 손이 갔다.
오호 통재라, 오호 애재라!
아직 소설은 시작도 안했는데 '작가의 말'만을 읽었을 뿐인데,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시작된 첫 이야기는 사도세자 이 선의 마지막 가는 길이었다. 좁디좁은 뒤주에 갖혀 사모하고 은애했던 여인 비화를 그리며 생을 놓아야 했던 그의 죽음에 주체할 길 없는 눈물이 애도를 표하듯 쉼없이 흘렀다. 소설은 이처럼 시작부터 슬픔과 아픔, 비극과 울분을 품고 있다.
내가 선인듯, 내가 비화인듯 구별할 수 없을만큼 몰입되며 내 온 일상을 슬픔으로 채워버린 잊지 못할 책이다.
책을 읽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을 흘려 본 게 얼마만인지, 김경민 작가는 또 얼마나 아픈 마음 달래며 이 글을 썼을지 어렴풋이 느껴졌다.
백성을 향한 어진 마음과 당파의 싸움 속에서도 중심을 잡았던 성인의 자질이 빼어난 선을 어찌하여 아비인 영조는 그렇게 잔인하고도 매정하게 죽여야만 했을까? 나의 의문은 미움으로 바뀌어만 갔다. 광증이 심하고 비행을 저질렀다고 의심을 받은 선이라지만 실은 영조 자신의 모습인 것은 아닐런지. 제가도 못하는 임금이 치국은 무엇이고 또 평천하가 무슨 소리일까? 어이없는 쓴 웃음만 나온다.
또한 남편과 뜻을 같이하여 자식을 돌봐야 할 혜경궁 홍씨는 어찌하여 친정아비의 그늘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이선에게 등을 돌렸을까?
부부의 연은 이름뿐이었던 가보다. 그래서 이 선은 약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누구도 자신의 편으로 만들지 못하고 자신도 누구의 편에 서지 못한 채홀로 외로이 싸워야했으니...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서로를 죽여야 내가 살길이라고 덤벼들던 무리, 김상로, 홍봉한, 김한록등은 한편으로는 이해가 간다. 현명치 못한 왕 밑에서 제 목숨 부지하자면 스스로도 극악해져야 했을지도 모른다. 자식을 위해 목숨도 내어 놓는다는 것이 부모이거늘, 영조의 이기심은 어미의 본능을 뛰어넘은 것 같다. 그토록 총애하던 자식을 적으로 느꼈던 것일까? 잘난 자식이 위협적으로 느껴졌을까? 자식을 재물로 백성과 궁궐의 안녕을 보장하리라 어리석게 생각했을까?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비화의 존재였다. 작가의 의도로 만들어진 허구의 인물이지만 선에게 비화라는 여인이 있었기를, 그래서 한 많은 이승에서의 생이 후회되지 만은 않았었기를 꿈꿔 봤다. 비화는 출생의 비밀을 안고 태어나 자신의 숙명을 거스르며 살아야했던 또 하나의 비운의 여인이다. 남장을 하고 부인을 맞아 대를 이어야 했던 비이성적인 가정에서 철저히 희생된 여린 영혼이었다. 그런 비화를 벗으로 삼으며 선은 세상 시름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사랑이 너무도 가슴 아리고 애달퍼 읽던 책을 차라리 덮고 싶었다. 그러나 또한 그 사랑이 너무도 아름다워 책을 놓을 수 없었다. 강이라 남장한 비화에게 오묘한 감정을 느끼며 망측해하던 선, 그가 여인네임을 알게 되며 키워나가는 사랑, 목숨이나마 지켜주고자 매몰차게 돌아선 선과 임의 마음을 모두 헤아리기에 그대로 받아들인 비화의 이별.
이들의 사랑은 눈물이다. 그 눈물은 세상 무엇보다도 짜고 쓸 것 같다. 그런 마음이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한 편의 아름답고도 슬픈 사랑 이야기에 몇날 몇일이 소설 속 같았다. 한 동안은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