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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 구멍을 내는 것은 슬픔만이 아니다
줄리애나 배곳 지음, 유소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3월
평점 :

모든 것이 완벽하게 통제된 사회, 연애 평점이 도입된 사회, 바쁜 주인을 대신해 결혼식에 참석하는 휴머노이드, 누구든 지배하고 조종할 수 있는 AI 가스라이터, 하루에 10년씩 젊어지는 역노화 프로그램, 어디로 연결될지 모르는 포털, 독성 포자 때문에 집에 갇히게 된 사람들..., 미래 사회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통제되고 암울한 사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문명의 혜택을 모두가 누릴 수는 없는 불평등한 사회, 어쩌면 그 격차는 점점 더 커질지도 모릅니다.
<우주에 구멍을 내는 것을 슬픔만이 아니다>는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SF 소설로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이야기는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지를 생각해보게 합니다. 이 책에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통제되는 공동체 옥스헤드에 전기가 끊기면서 일어나는 놀랄만한 이야기 <옥스헤드의 아이들>, 시간을 멈추는 능력이 축복인지에 대한 이야기 <지금의 지금>, 누구든 지배하고 조종할 수 있는 AI 가스라이터 이야기 <가스라이터>, 유년기의 기억으로 만든 가상현실 게임 이야기 <내가 그린 그림>, 치사율 100퍼센트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의 이야기 <멘털 디플로피아> 등 15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요. 그 중 인상적인 이야기는 <당신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아요>, <버전들>, <역노화>, <포털>입니다.

몇 년 전 거대 테크기업과 사이버 보안을 겨냥한 통합법안이 통과되면서 재수없는 연애 상대로부터 사용자를 보호하는 장치가 모든 앱에 의무화되었다. 우리 같은 인간들을 가려내기 위한 연애 신용점수 같은 것이 고안되어 일괄 적용된 것이다. p.21
<당신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아요>는 연애 평점이 도입된 사회에서 연애 신용점수가 낮아 데이트 앱에서 영구 퇴출 처분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헤어진 애인들에게 꾸준히 낮은 점수를 받은 연애 신용불량자들은 정부에서 지급한 팔찌를 의무적으로 영구히 부착하고 있습니다. 브랜다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연애 신용불량자들을 지지하는 모임에 나가는 브랜다는 그곳에서 벤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요.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 커플이 되어 서로가 가치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합니다. 하지만 벤의 정체를 아는 순간 브랜다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벤은 누구이며 그는 왜 연애 신용불량자들의 모임에 들어온 걸까요?
벤과 아트리스가 서로를 보고 둘 다 버전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자비스 샤피로의 잘난 척하는 한마디가 없었다면 과연 알아차렸을까? 동족을 알아보고 교류하는 기능도 프로그램에 있던가? 알 수 없다. p.103
<버전들>은 바쁜 주인을 대신해 결혼식에 참석한 휴머노이드 버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트리스와 벤은 열한 번 결혼식에 참석했는데, 딱 한 번 결혼식이 겹치는 때가 있었습니다. 만약 둘이 이 결혼식에 참석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하필 이때 둘 다 다른 일정이 겹쳐 결혼식에 갈 수 없었습니다. 기억을 공유하고 싶은 두 사람은 휴머노이드 버전을 대신 보냈습니다. 결혼식에는 휴머노이드 버전들 외에도 결혼 당사자들의 죽은 가족들이 홀로그램으로 참석했습니다.
결혼식장에 온 버전을 본 적이 없는 손님들은 벤과 아트리스를 보고 수군거렸고, 그 때 벤과 아트리스는 서로가 버전임을 알아차렸습니다. 버전을 보낸 친구를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서로에게 끌린 둘은 제한된 행동과 어휘로 진심을 전하려 애를 썼습니다. 서로에게 끌린 벤과 아트리스 버전, 그렇다면 실제 벤과 아트리스가 결혼식장에서 만났다면,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볼 수 있었을까요?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았을까요?

나는 아홉 살 소년 시절의 아빠가 제일 좋다. 그 시절의 아빠는 생각이 깊고 재미있다. 아직 세상이 두렵지 않은 나이, 그래서 세상에 맞서기 위해 강해져야 하기 이전이다. 편협한 원한들을 무겁게 품고 있지도 않고, 자기도취로 고립되지도 않은 나이. 아빠는 아빠 자신이었다. 사실 아홉 살 먹은 아빠야말로 가장 진정한 자신이었던 것 같다.
(중략)
나는 서른네 살.
아빠는 아홉 살.
p.179
<역노화>는 죽음을 앞둔 아버지가 하루에 10년씩 젊어지는 역노화 프로그램을 선택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무관심한 아버지이자 형편없는 남편이었던 아버지가 역노화 과정을 참관할 사람으로 딸 헤더를 지목합니다. 두 명의 아내는 이미 세상을 떠났기에 역노화 과정을 참관할 수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역노화 과정은 시작은 있지만, 멈출 수는 없습니다. 역노화는 노년에서 중년기, 청년기, 십 대 그리고 어린 아이가 되고, 폐 미발달로 죽음을 맞게 됩니다. 80세 아버지는 하루에 10년 정도를 살 수 있으니, 8일 후면 임종을 맞게 됩니다.
역노화 시설에서 만난 아버지는 원기왕성한 모습의 칠십 대가 되어 있었고,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육십 대의 아버지, 오십 대의 아버지, 사십 대의 아버지, 그리고 딸 헤더와 같은 삼십 대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또 하루하루가 지나며 이십 대의 아버지, 십 대의 아버지 그리고 아이가 되고 그 다음엔......, 그렇게 두 사람은 아버지와 딸로 지내는 마지막 날들을 보내며 서로에게 미처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며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합니다. 어린 아이가 된 아버지를 본 딸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역노화 과정을 멈출 수 있다면, 혹시라도 과학자들이 방법을 알아낸다면, 그러면 아버지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딸은 어린 아기가 된 아버지를 안고 달립니다. 고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우주에 구멍을 내는 것은 슬픔만이 아니다. 누군가가 두려워하는 것, 원하는 것...... 비밀과 수치심도 구멍을 낼 수 있다. 우리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p.266
<포털>은 갑자기 생겨난 포털, 어디로 연결될지, 무엇에 닿을지 모르는 포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가까운 이들을 떠나보내 사람들에게 보이는 포털, 애도할 사람들이 많아지자 포털은 더 많아집니다. 사람들은 포털을 지켜보고 귀를 기울이고, 손을 넣어보고, 포털을 찢어 그 안으로 들어갔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포털 안에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포털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포털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우주에 구멍을 내는 것을 슬픔만이 아니다>는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SF 소설로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이야기는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지를 생각해보게 합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통제된 사회, 연애 평점이 도입된 사회, 바쁜 주인을 대신해 결혼식에 참석하는 휴머노이드, 누구든 지배하고 조종할 수 있는 AI 가스라이터, 하루에 10년씩 젊어지는 역노화 프로그램, 어디로 연결될지 모르는 포털, 독성 포자 때문에 집에 갇히게 된 사람들..., 미래 사회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통제되고 암울한 사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문명의 혜택을 모두가 누릴 수는 없는 불평등한 사회, 어쩌면 그 격차는 점점 더 커질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시대를 초월하여 변하지 않는 가치,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꿈오리 한줄평은 천선란 소설가의 추천 글로 대신합니다.
우리가 이곳에, 미래와 현재의 혼돈 속에서도 타오르지 않고 머물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책이다. '천선란 소설가 추천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