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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표지를 가득채운 커다란 눈, 표정을 읽어내기가 힘든 그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 갈 것만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읽었었는지 안 읽었었는지, 그 기억조차 가물거리지만 고래에 맞서 싸우던 선장의 모습은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어릴 적 텔레비전으로 봤던 영화 '백경'의 장면들로 말이죠. 그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고 극복해내려는 의지를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 기억되던 선장 에이해브, 지금 책을 읽고 난 뒤엔 오히려 그와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모비딕을 쫓는 선장 에이해브의 모습은 복수심에 사로잡혀 자신뿐만 아니라 선원들까지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광적으로 모비딕에 집착하는 인간일 뿐이었다는 것이죠.
향유고래는 시계의 뚝딱 소리처럼 규칙적으로 어김없이 물을 내뿜는다. 그것을 보고 고래잡이들은 이 고래를 다른 종류의 고래와 구별하는 것이다.
(중략)
인상학적으로 보면 향유고래는 변칙적인 동물이다. 우선 진정한 의미의 코가 없다. 코는 얼굴의 중심부에 있고..., p.278~424
책을 받자마자 든 생각은 '이렇게 두꺼운 책이었던가?'였습니다. 무려 728페이지에 이르는 벽돌책, 중간 중간 다음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게 하는 고비가 오게 만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어릴 적 봤던 영화의 장면처럼 고래를 쫓고 맞서 싸우는 내용은 단 몇 십 페이지에 불과하고 나머지 내용은 고래의 어원, 종류나 해체 방법, 포경선, 기름통, 작살 등등 고래에 관한 백과사전 같은 이야기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미처 몰랐던 고래에 관한 이야기를 읽는 재미가 있었기에 끝까지 읽을 수 있었습니다.
작가 허먼 멜빌은 부유한 무역상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아버지가 파산상태에 이른 후 죽자 농장 일꾼, 가게 점원, 학교 교사 등을 전전하며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고 합니다. 22세에 포경선의 선원으로 남태평양까지 나갔으며, 군함의 수병이 되어 귀국했다고 하는데요. 모비딕은 이때의 경험을 살려 쓴 책인 듯합니다.
내 이름은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 몇 년 전 - 정확히 언제인지는 아무래도 좋다 - 지갑은 거의 바닥이 났고 또 뭍에는 딱히 흥미를 끄는 것이 없었으므로, 당분간 배를 타고 나가서 세계의 바다를 두루 돌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내가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리고 혈액순환을 조절하기 위해 늘 쓰는 방법이다. p.31
이야기는 "내 이름은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라고 시작합니다. 이슈메일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이라고 하는데요.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이슈메일은 포경선에 올라탄 초보 고래잡이 선원이자 관찰자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하는 인물입니다. 포경선 피쿼드호에 있는 30명의 선원들 중 한사람인데요. 피쿼드호에 탄 선원들 중 가장 특별하게 기억되는 인물들은 퀴퀘그와 스타벅입니다. 그리고 <모비딕>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 자신의 다리를 빼앗아간 모비딕을 향한 광기어린 집착을 보여주는 선장 에이해브도 빠질 수 없겠죠?
사람은 영혼을 감출 수 없다. 괴상하고 무시무시한 문신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순박하고 정직한 마음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 같았고, 크고 깊은 눈, 불타는 듯한 검고 대담한 눈 속에는 수많은 악귀와도 맞설 수 있는 기백이 드러나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이교도의 태도에는 어딘지 모르게 고결한 데가 있었고, 그의 거친 무례함조차 그 고결함을 손상시키지는 못했다. p.87
퀴퀘그는 이슈메일이 피쿼드호를 타기 전에 만나 함께 고래잡이를 떠나는 인물로 온몸에 문신을 새긴 야만인이지만 그 누구보다 순수한 인물로 등장합니다. 이슈메일이 혼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어찌보면 퀴퀘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하게 만듭니다.
그 대결이 우리 방식에 따라 정당하게 이루어진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고래를 잡으러 왔지, 선장님의 원수를 갚으러 온 것은 아닙니다.
(중략)
말 못하는 짐승한테 복수라니!
그 고래는 단지 맹목적인 본능으로 공격했을 뿐인데! 이건 미친 짓이에요! 말 못하는 짐승에게 원한을 품다니, 천벌을 받게 될 겁니다. p.216~217
스타벅이라는 이름은 어딘가 익숙한 느낌마저 드는데요. 바로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커피 체인점 스타벅스, 스타벅스라는 이름이 바로 피쿼드호의 일등항해사 스타벅에서 따왔기 때문입니다. 스타벅은 선장 에이해브가 모비딕 쫓기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던 인물로 피쿼드호에서 가장 이성적인 인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희망봉을 돌고 혼 곶을 돌고 노르웨이 앞바다의 소용돌이를 돌고 지옥의 불길을 돌아서라도 놈을 추적하겠다. 그 놈을 잡기 전에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중략)
하지만 복수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에이해브가 광적일 정도로 과민해져서 결국에는 자신의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라 지적. 정신적인 분노까지도 모두 흰 고래와 결부시켰다는 점이다.
(중략)
나는 끝없는 지구 둘레를 열 바퀴라도 돌 테다. 아니, 지구를 곧장 뚫고 들어가서라도 그놈을 반드시 죽이고 말테다. p.241~666
만약 에이해브가 스타벅의 말을 들었더라면 그는 아내와 아이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요? 40년 동안 고래를 잡은 에이해브가 처음 고래를 잡았던 열여덟 살 작살 잡이 소년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만약 에이해브가 바다에서 실종된 두 아들을 찾는 아버지, 레이첼호 선장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에이해브와 피쿼드호 선원들의 운명은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요?
연극은 끝났다. 그렇다면 또 누군가가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난파에서 한 사람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p.684
이야기는 이슈메일이 퀴퀘그를 위해 만들었던 관에 의지하여 망망대해를 떠돌다가 잃어버린 자식들을 찾던 배 '레이첼'호에 의해 구출되면서 끝이 납니다. 모비딕을 향한 에이해브의 광기어린 집착의 결말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이야기, 결코 정복할 수 없는 대자연을 향한 인간의 자만심을 담은 이야기, 한 번쯤은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드는 벽돌책, 지금까지 '모비딕'이었습니다. 더 많은 이야기는 직접 책을 통해 만나길 바랍니다.
꿈오리 한줄평 : 자연은 정복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할 대상, 결은 다를지라도 모비딕과 에이해브의 대결구도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