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킬레우스의 노래 (리커버 특별판)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1년 7월
평점 :
품절


p. 122
절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을 테다.
그가 날 내치지 않는 한 영원히 이렇게 있을 테다.

p. 193
이런 전쟁은 없을 걸세.
전설로 기억되고 후손들이 노래할, 우리 인간 역사상 최고의 전쟁이 될 테니까.
그걸 모른다면 자네는 바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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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우스의 노래>라는 제목을 보고 당연히 주인공은 '아킬레우스'이리라 생각했다.
다만 소설의 화자는 아킬레우스가 아니라 '파트로클로스'로, 그가 아킬레우스를 만나게 된 계기, 아킬레우스와의 우정, 사랑,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인 트로이아 전쟁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파트로클로스는 왕자로 태어났으나 유약한 신체와 심성으로 아버지인 메노이티오스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는 어느날 의도치 않게 사고로 귀족의 아들을 죽이게 되고, 그 사건으로 인해 프티아로 추방당한다.
그리고 프티아에서 그곳의 왕자였던 아킬레우스를 만나게 된다.

프티아의 왕 펠레우스와 바다의 님프 테티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킬레우스는 아버지를 능가하는 위대한 영웅이 될 것이라는 운명을 타고났다.
또한 그는 트로이아 전쟁에서 자신이 죽을 운명이라는 걸 알았지만, 전장에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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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도 <그리스 신화>도 읽어보지 못했지만, 익숙한 이름들이 있다.
아마 아킬레우스도 자주 들어봤을 것이다.
그런데 파트로클로스는 처음 들어봤다.
혹시나 하고 예전에 개봉했던 영화 "트로이"도 찾아봤다.
아킬레우스가 동생의 죽음으로 복수심에 사로잡혀 헥토르에게 칼날을 겨눈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그저 동생이라고 표현될 뿐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은 이 남자를 화자로 작가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아름답고 순진하고 온유했던 아킬레우스는 전쟁에 익숙해지면서 점차 날카로워지고 명예에 집착하며 조금씩 변해간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파트로클로스는 안타깝다.
그는 아킬레우스의 강인한 전사의 모습 속 진짜를 아는 유일한 친구이자 연인이기 때문이었다.

끝나지 않고 계속 길어지는 전쟁에서 많은 사람들은 지쳐가지만,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여전히 무자비하고 이기적이다.
아가멤논은 자신에게 대적하며 그리스군의 신망을 받고 있는 아킬레우스가 눈에 가시같았고, 모욕적인 행동을 해서 아킬레우스의 화를 돋운다.
자신의 명예가 더럽혀졌다고 여긴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이 사과하기 전까지는 화를 풀지 않고 전쟁에 나가지 않겠다고 말하고, 아킬레우스가 빠진 전쟁은 그리스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사람들은 아킬레우스를 원망하기 시작하고,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명성이 나빠질까봐 걱정한다.
아킬레우스에 대한 원성이 극에 달할 즈음, 여전히 화를 풀지 않은 아킬레우스를 대신해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출정한다.
그렇게 그들은 정해진 운명의 수레바퀴 속으로 한걸음씩 다가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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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랄까. 얼마전 그리스 비극과 명화를 다룬 책을 읽은 터라 소설 속 인물들이 크게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그럼에도 낯설었던 주인공 파트로클로스...
그는 소설 속 어떤 남자와도 달랐다.
싸움과 명예와 여자를 탐하던 보통의 남자들과 다르게 그는 유악했지만 부드럽고 고운 심성을 지녔다.
아킬레우스 역시 파트로클로스의 그런 면을 보게 된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는 자신의 주위에 있는 다른 많은 아이들이 아닌 파트로클로스를 자신의 친구로 선택한 것이 아닐까.
자신의 행동을 유리하게 둘러댈 줄도 모르고 자신의 저지른 과오에 괴로워하고 절망스러워하는 파트로클로스의 모습에 끌린 것이 아닐까.​


그의 얼굴은 천진난만하다.
잠에 취해서 매끈하고 귀여운 어린애 같다.
나는 그 얼굴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진지하고 정직하며 장난기 가득하지만 악의는 없는 이 얼굴이 그의 참모습이다.
그는 아가멤논과 오디세우스의 교활한 말장난과 그들의 거짓말과 권력 게임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들이 그를 농락하고 말뚝에 묶어놓고 미끼로 유인하고 있다.
나는 그의 보드라운 이마를 어루만진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그를 풀어줄 것이다.
그가 허락만 한다면. _ 3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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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예견된 운명, 그리고 그 운명을 향해가는 인간의 삶.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는 예정된 운명을 조금이나마 연장하고 싶었지만, 결국엔 운명의 이끌림대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그들은 죽어서도 여전히 함께이다.
그들에게 아무리 운명이란 게 예정되어 있었다고 해도, 그들의 사랑마저 운명이었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는 그들이 운명이란 걸 알았기에 파트로클로스를 그리도 미워했던 걸까.
그것이 운명이었든 운명이 아니었든, 그들은 사랑했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았고 그렇게 죽어서도 함께 있게 되었다.
그래,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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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른 시선의 책이라 더 좋았다.
나의 입장에서 세상의 주인공은 나인데, 나의 삶을 더 크게 확대해 본다면 나 역시 주변인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주변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에게도 이름이 있고 삶이 있고 나의 위치와 역할이 분명 존재한다.
단지 아킬레우스의 시종 정도로만 여겨졌던 파트로클로스의 따뜻한 시선으로 묘사된 아킬레우스의 삶과 트로이아 전쟁은 또다른 모습으로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소설 속 다른 남자와는 분명히 달랐던 파트로클로스,
요즘같이 모두가 잘났다고 하며 자기PR하는 혼란의 시기에 자신보다 상대방을 더 생각하고 배려하는 파트로클로스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드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작가의 다음 책은 <키르케>이다.
키르케 역시 주목받지 못하던 인물이었는데,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은 어떨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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