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의 독
우사미 마코토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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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직업소개소에서 만나게 된 요코와 기미.

그녀들은 생년월일이 같고, 이름에 지역명이 들어가 헷갈렸다는 직업소개소 직원의 실수로 서로를 알게 되어 가까워진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기미의 소개로 무사시노에 있는 대저택의 입주 가정부로 들어가게 된 요코와 그녀의 조카 다쓰야.

빚쟁이들에게 쫓겨 도망다니던 요코는 그 곳에서 온화한 성품을 가진 당주 난바 선생과 그의 아들 유키오와 지내며 평화로운 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요코는 빚에 도망다니는 자신의 처지를 기미에게 차마 말하지 못했고, 기미 역시 무언가 깊은 비밀을 품고 있는 듯 하다.

 

그러던 어느날 요코와 다쓰야가 저택을 비운 사이 저택의 당주인 난바 선생이 급작스럽게 죽게 되고, 시간이 흐른 후 요코는 단순 사망으로 여겼던 이 죽음에 다른 무언가가 개입된 것 같다는 의혹을 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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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괜찮아. 당신을 상처 입힐 사람은 없어. 괜찮아.

끝이야. 모든 게 끝났어."

주문 같은 남편의 말이 귓가에서 들린다.

우리는 무시무시한 죄를 저질렀다.

평생 용서받지 못할 죄.

지금껏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우리는 그것을 공유하기 위해 부부가 되었다. _ p. 88

 

요코와 기미가 만나 가까워지는 1985년부터의 과거와 2015년 현재의 일들이 교차되어 소설이 진행된다.

2015년 예순다섯의 요코는 고급 노인 요양원에 입주해 생활하고 있지만 무언가 삶에 대한 의지가 크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며 종종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모습을 보이는 그녀, 그녀의 곁에는 유키오가 있다.

 

소설은 총 3장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1장의 과거는 요코의 시선으로, 2장의 과거는 기미의 시선으로 진행되며 점차 기미가 숨긴 비밀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서로를 보호하는 동시에 상처 입혀 가며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대로 평화롭게 끝나지 않는다.

죄 깊은 우리에게 합당한 삶의 끝맺음 방식이 있을 거라는 단 하나의 위안에 매달린 채 살아간다. _ p. 132

 

소설은 급작스럽게 사건을 진행시킨다기보다는, 잔잔히 그러나 음울하게 잿빛을 가득 머금은 채 서서히 진행된다.

반전이라고 하기엔 조금 미미할 정도로 책을 읽는 동안 예상가능한 부분들이 있었음에도, 요코, 기미, 유키오의 모습을 통해 도저히 벗어날 길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맞닥뜨려진 그들의 심리와 고통이 절절히 느껴져서 쉽사리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들이 더없이 나쁜 사람이었다면, 욕하고 화를 냈을 텐데...

안타깝게도 끊임없이 과거의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던 이들은 또다시 더 큰 죄의 굴레에 갇히게 된다.

깊은 죄로 마음이 텅 비어버린 이들의 마지막을 계속 지켜보는 것이 마치 나의 임무인 양 계속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독소는 천변만화의 영약이 되기도 하지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가슴속에 독을 품으십시오.

어중간한 현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야말로 그 독을 유용하게 쓸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의 독입니다. _ p. 124

 

가볍지 않은, 깊은 농도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새로운 작가를 알게 된 것 같아 기쁘다.

작가는 최근 인터뷰에서 호러든 미스터리든 오로지 '인간을 향한 관심'이 작품을 쓰게 하는 힘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작가가 그려내는 인간 본연의 마음이 드러난 소설들을 또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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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사투리 표현에서 어색한 부분이 많이 느껴져서 조금 아쉬웠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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