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겨울
아들린 디외도네 지음, 박경리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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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는 방이 네 개 있었다.

내 방, 동생 질의 방, 부모님 방, 그리고 시체들의 방.


                                           - <여름의 겨울>, 7쪽 -


책의 시작부터 슬픔과 우울이 밀려왔다.

'시체들의 방'이라니... 뭔가 정상적이지 않은 가족의 모습이 눈에 그려져 마음이 무거웠다.

거대하고 폭력적인 아버지, 그 폭력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아메바 같은 어머니, 그리고 젖니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 사랑스러운 동생 질...

TV 속의 가족들은 함께 이야기하고 행복하게 웃고 서로 사랑하지만, "우리 집에서의 가족 식사란, 커다란 잔에 담긴 오줌을 매일 마셔야만 하는 벌과 비슷했다(P. 26)".

그래도 질과 함께 놀고 이야기를 해 주는 그런 생활들은 너무 행복했었다. 그 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꽃의 왈츠'가 울려퍼지며 집 앞으로 아이스크림 트럭 할아버지가 왔다. 크림을 얹은 아이스크림을 주문했을 뿐인데, 사이펀 기계의 폭발로 우리의 눈 앞에서 크림을 뽑아내던 할아버지의 얼굴이 날아갔다.

그리고 그 사건 이후로 질이 달라졌다.

아버지의 사냥 전리품이 가득찬 '시체들의 방', 그 곳에 있는 하이에나가, 혹은 그 방에 있는 어떤 사악한 것이 질의 머릿 속에 스며들었다. 그 짐승이 질의 안에서 살기 시작했다.

- p. 52

부모님은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아버지는 TV에 온 정신을 쏟았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데 온 정신을 쏟았다.

낯선 눈빛의 질을, 예전의 그 사랑스러운 질로 되돌리기 위해 영화 '백 투더 퓨처'처럼 타임머신을 만들고 싶었고, 그래서 과학 공부를 열심히 했다. 자신이 과학을 맡으면, 숲 속에 사는 어른 친구 모니카가 폭풍을 맡아줄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과거로 돌아가 예전의 질로 돌려놓고 싶었던, 결전의 날에 모니카는 슬픈 눈빛으로 말한다. "하지만... 이건 그냥 놀이일 뿐이라는 사실을 아는 거 아니었니?"라고.

점점 잔인해지는 질, 소녀는 그런 질을 되돌리기 위해 과학 수업, 특히 물리학 수업에 열정을 쏟는다.

-p. 91

마치 엄마 배 속에 있는 것처럼 따듯하고 포근한 짧은 시간. 그 시간만큼은 내가 삶의 여정을 능숙하게 지배하고 있는 듯한 환상을 품을 수 있었다. 마치 하이에나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는 벽이 존재하는 것처럼.

하지만 결국엔 항상, 분류될 수 없는 종이들이 있다는 것을, 연습문제도, 기하학도,곱셈도 진정 분류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으로 그 시간을 끝난다.

삶이란 믹서에 담겨 출렁이는 수프와 같아서, 그 한가운데에서 바닥으로 끌어당기는 칼날에 찢기지 않을고 애써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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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내는 주인공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폭력적이고 공포의 대상일 뿐인 아버지, 자기 자신조차 지킬 힘이 없어 보이는 어머니, 그리고 끔찍한 상황을 마주한 후 완전히 변해버린 동생까지, 가장 그녀 가까이에서 그녀를 보살피고 안아주어야 할 가족들은 그녀의 힘이 되어주지 못한다.

그러나 이 똑똑하고 지혜로운 소녀는 사랑하는 동생을 지켜내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열정을 불태운다.

그녀의 가족들은 힘이 되어주지 못했지만, 다행히도 깃털과 챔피언, 영 교수 등 그녀에게 마음의 위안이 되어 주는 좋은 조력자들도 있었다.

첫사랑의 열병, 몸의 변화 등 자연스럽게 닥치는 일들에도 그녀는 마음을 다잡아낸다. 질을 위해서, 그리고 어머니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히는 일들은 일어난다. 타인에 의해서가 아닌, 가족에 의해서 말이다.

아버지에 의해 낯선 타인들에게 먹잇감으로 놓이게 된 그녀,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파괴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행복해지기를, 너무 어린 나이에 이런 일들을 겪어버린 그녀가 빨리 좋은 날을 맞이하기를 얼마나 바라면서 책장을 넘겼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열다섯 살의 여름 끝자락, 그녀는 더이상 두렵지도, 약하지도 않았다. 그 사건을 계기로 그녀의 인생 2막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너무나도 반짝거리는 소녀, 그래서 그녀가 너무 눈부셔서 내 눈이 조금 따끔거린다. 어느새 내 마음도 벅차 올라, 그녀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하게 된다.

지금까지도 너무 잘 해 줬고, 그러니 앞으로도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이제는 정말 행복하기만을, 그리고 되찾은 질의 미소를 계속 지켜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

- p. 270

두렵지 않았다. 나는 약하지 않았다. 이것만은 알 수 있었다.

나는 열다섯 살에 내 죽음을 받아들였다.

나는 삶이 나에게 선사한 그 모든 경이로움을 보았다. 공포를 보았고,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리고 아름다움이 승리했다.

나는 약하지 않았다. 나는 질을 영원히 잃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약하지 않았다. 나는 먹잇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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