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신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0
손보미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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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랄프 로렌>이라는 소설을 통해 손보미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다. 담담하고 조용하지만, 마지막엔 따스한 느낌을 주는 그런 소설로 기억이 난다. 또 어디까지가 실제인지 허구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는 것도...

그리고 핀시리즈로 다시 만나게 된 작가의 이번 이야기 역시 담담하고, 조용하게 흘러간다. 그렇게 마지막엔 기존의 성격에서 조금 변화된 주인공들로 인해 마음이 가볍고 편안해졌다. '조니 워커'에 대한 이야기가 어디까지가 실제이고 허구인지 역시 궁금해졌고...

 

소설 속 중심인물은 '그'와 '그녀'다.

'그'는 경찰청에서 3년을 근무한 뒤 스물아홉 살이 되던 해 민간조사원으로 직업을 바꾼다. 외국어에 능통하고 일도 유능하게 처리하는 그에게 많은 유능한 변호사들이 일을 맡기고 싶어한다.

그는 일을 처리하는 자신의 능력이 '포화 상태'에 이를 즈음이 되면 휴가를 떠나 거의 말을 하지 않는 휴가를 보내고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그 날도 그는 방콕으로 휴가를 떠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공항으로 향하기 전 그는 유명 법무법인 대표 변호사의 부탁으로 미국에서 온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 남자로부터 프랑스 리옹에 가서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마지막 '조니 워커' 화이트 라벨을 가져와 달라는 의뢰를 받게 된다.    

 

'그녀'는 열여섯 살 때 아버지가 있는 프랑스로 왔다. 파리에서 대학을 다녔고, 지금은 뉴욕의 첼시에 있는 예술재단에서 일하고 있다. 어느 날 그녀는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던, 그러나 친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그녀를 괴롭히는 쪽에 속했던 한국계 알리샤가 죽었으며 알리샤가 그녀에게 유품을 남겼으니 그걸 가지러 와 달라는 편지를 받게 된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녀는 처음에는 유품을 받으러 갈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며칠 후 첼시에서 일어난 폭발사고를 눈으로 직접 보고 겪고는 리옹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알아본다.

 

그가 화이트 라벨을 찾으러 가는 곳과 그녀가 유품을 받으러 가는 곳은 동일한 곳이다. 알리샤의 집.

원래는 전혀 계획에 없었던, 그래서 우연이라고 혹은 운명이라고 볼 수도 있을 법한 그들의 리옹행은, 당연하게도 그들을 서로 만나게 한다.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통제하며 살아왔던 그들은 순간의 우연한 결정으로 원래의 생활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게 된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일처리를 자랑하던 남자는 자꾸 자신의 계획이나 생각과는 다른 행동을 하게 되고,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다.

 

<우연의 신>이란 그리스 신화의 티케(Tyche)로, 행운의 여신 또는 운명의 여신이라고 알려져 있다고 한다. 하지만 티케가 관장하는 운명이란 '우연히' 찾아오는 행복이나 불행이라고 한다.

그 '우연'이 행복을 가져다 줄 지, 아니면 불행을 가져다 줄지는 모르겠지만, 그와 그녀가 만난 것처럼 기존 삶의 패턴을 벗어난 알 수 없는 우연들이 겹치고 겹쳐서 만나게 되는 그런 것.

그들이 다시 만나게 될 지는 아무것도 알 수는 없지만, 이런 우연한 만남과 사건들로 그들은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사람들이 되었을 것이다. 그 후 그들이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오고 원래의 패턴으로 돌아온다 하더라도 말이다.

- p. 169, 작품 해설 중

티케에 의하면 운명은 한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생 전체를 두고 봤을 때는 찰나에 불과한 어떤 사건, 즉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에 의해 계속해서 변화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연의 신'은 인간의 삶이 계속 불행하거나 반대로 계속 불행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또한 이 우연의 신으로 인해 누구나가 겪는 행복이나 불행은 그것을 겪는 시점에서 제 인생 전체를 반추할 정도로 무겁게 느낄 일이 아니라고 여기게 된다.

어떤 행복이나 불행도 끝없이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 더불어 그것이 일어난 데에는 누군가 단독으로 행한 일만이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 이 엄연한 삶의 진실들은 너무나 자주 잊히고 간혹 우연히 한 편의 소설에서 불현듯 다시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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