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사람들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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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갚지 못한 빚 때문에 열세 살때부터 '재'의 밑에서 일하게 된 '나'. '재'는 나의 아버지가 나를 담보로 빚을 졌고 그 빚을 갚지 못했으므로 이제 자신이 나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처음 한 일은 재의 사무실 건물 앞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숫자를 세는 일이었다. 처음엔 졸기도 하고 지나가는 아이들이 자신을 괴롭히기도 했지만, 나는 차츰 일에 익숙해지고 더이상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이나 목소리, 표정이나 옷차림 등에 관심이 없는, 그저 그들을 하나의 선(숫자)으로만 보게 된다.

- p. 21

너의 빚이 '0'이 되는 순간 너는 자유다. 그때 너는 그 누구의 아들도 아니란다. 알겠니?

그렇게 숫자를 세던 나는, 이어 숨어 있는 표적들을 찾아내는 임무를 맡게 되고, 그 후 열아홉부터 서른이 될 때까지 직접 표적을 처리하는 일을 했다.

빚을 0으로 만들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그러나 마지막 임무라고 생각했던 일을 실패하게 되고, 다시 재에게 새로운 이름을 받아 새로운 표적을 처리하게 된다.

- p. 39

지난 이름은 폐기되었고 이제 나는 더 이상 이름이 없는 상태였다. 재가 새로운 이름을 구해주기 전까지 나는 그저 무력하게 시간을 죽이고 있어야만 했다.


'재'는 지난 실패한 일을 언급하며 새로운 표적은 B구역에서 처리하라고 지시한다. 'B'구역은 수년 전 화학공장들이 화재로 폭발한 이후 폐쇄된 재난 구역으로, 그곳의 독성물질에 감염된 사람들이 식인귀가 되어 눈에 띄는 사람들을 죽인다는 소문이 있는 곳이었다.

나는 그런 B구역에서 살아남아 돌아오기 위해 어린 시절 살았던 집, 지금은 재개발을 앞두어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는 동네에 들러 언젠가 재에게 받았던 폴딩나이프를 챙긴다.

동네를 나서던 때 예전 자신의 표적이었던 '서유리'를 만나게 되고, 서유리는 살고 싶다면 자신을 만나러 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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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빚으로 인해 어느 순간 살인마가 된 남자는 자신의 자유를 찾기 위해 다른 이의 목숨을 빼앗는다.

책 속에서 등장하는 도시는 너무도 화려하고 랜드마크의 꼭대기에서 늘 반복되는 광고는 그저 행복하고 환한 세상이었다. 그러나 남자가 발을 디디고 있는 세상은 어둡고 돈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걸거나 자신의 친모의 생명을 담보로 걸기도 한다. 자신부터가 아버지의 빚 때문에 이런 세상에 던져졌으니 오죽하랴.

그래도 남자는 빚이 0이 되는 날을 꿈꾸며 표적을 처리하고 재의 지시를 따른다. 그러나 슬프게도 남자는 재의 본심을 알게 된다. 자신에게 전혀 자유를 줄 생각이 없었던 재의 본심을, 자신이 그동안 사용했던 새로운 이름들의 실체가 어떤 결과를 맞이했는지를 말이다.

자유를 갈망했던 남자는 이 도시에서는 자신이 있을 자리를 찾지 못한다. 자유를 되찾고자 '재'의 밑에서 일했지만, '재'가 없더라도 또다른 '재'는 언제까지고 자신을 옭아맬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남자가 정착하게 되는 곳은 세상에 버려진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오히려 그들에겐 세상이 지옥이었기에 이름없는 이 곳에서의 생활이 더 평안했으리라.

- p. 205

나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이름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로 했다. 세상의 끝인 이곳에서 나는 모든 걸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물론 이름을 버렸다고, 그 이름으로 내가 저질렀던 악행들이 사그라지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곳에서라면, 다시 시작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곳은 세상의 끝이 아닌 세상의 시작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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