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 - 피해자 없는 범죄, 성폭력 수사 관행 고발 보고서
T. 크리스천 밀러.켄 암스트롱 지음, 노지양 옮김 / 반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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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제목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정말 믿기 어려운 강간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2008년 8월 11일, 워싱턴주 린우드에서 열여덟 살의 마리가 자신의 집에서 성폭행을 당한다. 그녀는 경찰에 신고를 했고, 그 후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 병원의 간호사, 형사 등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다섯 차례 정도 진술했다. 그러나 그녀는 허위신고 혐의로 기소되고 벌금까지 물게 된다. 가장 믿고 친밀한 사이였다고 믿은 사람들은 그녀가 그 일을 겪은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취지로 진술을 했고, 경찰은 특별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마리가 진술을 할 때마다 세부사항이 조금씩 바뀐다는 것을 빌미로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라고 몰아붙였고, 마리는 경찰의 압박 취조에 굴복하여 사실이 아니었다라고 진술을 바꾸었다. 그 뒤로 다시 실제 일어난 일이었다고 말했지만, 이제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위탁가정을 전전하는 등 어린 시절부터 힘든 일을 겪었던 마리는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어한 열여덟 소녀였지만, 이 일로 그녀는 그 삶과 의지를 잃어버렸다.

"그 애 말투와 어조가 뭔가 이상했어요."

마리가 믿은 사람들도, 주변 사람들도, 경찰들도 마리의 행동이 그런 일을 겪은 이의 행동과는 달랐다고 말했다.

마리는 그들이 생각하는 '피해자'다운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런 일을 겪은 피해자는 어떠어떠해야하는데, 마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리고 2011년 1월 5일, 콜로라도주 골든에서 대학원생인 앰버가 자신의 집에서 성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스테이시 갤브레이스 형사는 그녀의 피해진술을 듣는다.

또, 2010년 8월 10일, 콜로라도주 웨스트민스트에서 세라가 자신의 집에서 성폭행을 당했고, 그 전인 2009년 10월 오로라 지역에서 도리스가 자신의 집에서 성폭행을 당했다.

증거가 충분히 발견되지 않았지만 범인을 찾기 위해 수사를 계속하던 갤브레이스 형사는 마찬가지로 형사인 남편에게 웨스트민스트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경찰서로 연락을 취하게 되고 세라 사건을 맡고 있던 애드나 핸더샷 형사와 함께 합동하여 사건을 진행하기로 한다.

같은 유형, 즉 범인의 시그니처를 찾아 다른 피해자들을 확인하게 되면서 범인에 대한 단서를 조금씩 발견하고 결국 희대의 연쇄강간마를 체포하게 된다. 그리고 그를 체포하면서 증거로 찾은 사진에서 '마리'의 사진도 발견하고, 마리 역시 피해자였음이 확인된다.

그렇게 마리의 허위신고 혐의는 풀렸지만, 지금까지 마리가 겪었던 일들은 어떻게 보상받아야 할지... 그녀는 1차 피해에 이어, 경찰 및 주변인들에게 2차 피해를 입었다.

"성폭력이란 트라우마에 대한 피해자의 반응이 신뢰도를 판단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10년 동안 샌디에이고 경찰서 성범죄 전담반을 이끈 조앤 아첨볼트 형사가 한 말이라고 한다.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가장 주목해야하는 말로 보인다. 도대체 '피해자다움'을 정의하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각각의 사람이 모두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는 세상에서 과연 '정형화된 피해자다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일까?

언제였던가, 여성범죄 관련 강의를 들을 때였는데 강의하시는 선생님이 '피해자다움'에 대해 말씀하셨다. 강의를 듣고 '피해자다움'이라는 것의 부당함을 느끼긴 했지만 곧바로 의문이 떠올랐다. 그럼 진짜 피해자와 가짜 피해자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라는 의문 말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떠올릴 의문일 것이다. 분명 세상에는 금전적인 목적 혹은 다른 목적으로 허위로 성범죄 신고를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책 속의 갤브레이스 형사는 피해자의 말을 경청하고 입증한다라고 하고, 애드나 핸더샷 형사는 증거에 집중한다라고 한다. 피해자의 말을 무조건 믿으라고 하기 보다는 제대로 듣고 증거를 찾아 입증하는 것, 그것이 중요한 일일 것이다.

한번은 옆에 앉아 있는 신랑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말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데, 나는 어떤 경우든지 조사를 받는 일은 없어야겠다고 말을 했다. 나는 원래도 기억력이 좋지 않고 말을 조리있게 하지도 못하는데, 조사를 받을 때 기억하지 못해 진술하지 못한 걸 나중에 말하거나 그나마도 앞뒤 순서가 다르게 말한다면 꼼짝없이 의심받고 말 거라고 말이다.

'진술의 신빙성'이라고도 하는데, 과연 신경쓰지 않고 지나친 일들을 얼마나 잘 기억하고 잘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나처럼 그저 아무 일도 겪지 않은 평범한 사람조차 시간순으로 모든 사항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너무도 고통스런 일을 겪은 직후의 사람이 어떻게 명확하게 자신의 일을 진술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진술의 세부사항이 조금 바뀌어도 중요한 사항에 대한 진술이 굳건하다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가볍게 의심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강간 사건을 대하는 형사, 교수, 판사 등의 편협한 사고는 오래전부터 존재했고, 꽤 최근까지도 남아있었다는 걸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책을 읽고 놀랐던 점은 2017년에 '강간범에 의해 임신을 했을 경우의 강간범의 양육권 인정 거부법' 법안이 통과되지 않아 미국의 메릴랜드주는 성폭력 피해자가 가해자의 양육권을 거부하지 못하는 16개 주 중의 하나로 남았다라는 것이었다. 2017년이다, 2017년... 놀랍다.

예전에 봤던 영화가 떠오른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데, 한 여성이 강간을 당해 경찰서에 신고를 하러 갔다. 그런데 경찰이 그녀에게 묻는다. 몸에 딱 붙는 스키니바지를 입고 있는데 어떻게 남자가 바지를 벗길 수가 있었냐며 진짜 강간당한 것이 맞냐고 묻는다. 이런 황당한...

몇 년 전의 영화였으니, 이제는 이런 황당한 질문으로 피해자를 의심하는 경찰은 없으리라 감히 믿고 싶다.

책을 다 읽은 지금, 여성범죄사건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마음가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편협하고 고정된 시선을 거두고 진심으로 피해자들을 대할 때, 마리와 같은 억울하고 안타까운 피해자들이 더이상은 없게 되지 않을까.

p. 294

성폭행 피해자 '데니스 허스킨즈'가 페이스북 악성 댓글에 대하여,

- 내가 한 것이라곤 살아남은 것뿐인데 나는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p. 353

조앤 아첨볼트 형사,

- 안타깝게도 피해자를 취조하듯 신문하고 진술의 불일치를 따지는 것은 그저 피해자를 입 다물게 하고 진술을 번복하게 함으로써, 많은 성폭력 고소가 사실 무근으로 끝난다는 법 집행기관의 편견을 강화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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