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론 - 고통과 해석 사이에서
천정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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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을 둘러싼 문화 정치가 한국 근현대사에서 어떻게 구축되고 작동하였는지를 탐구한 책. 저자는 계보학적 방법론을 차용해 자살을 택한 사람들의 마음의 구조, 자살 및 자살자에 대한 사회적 의미화 방식에 관한 문화사를 써 내려간다. 이 책에서 자살한 사람의 자기 서사, 자살이라는 죽음의 형식을 둘러싼 사회적 해석은 근대 국가의 통치 권력과 지배 이념의 영향력 하에 놓여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

 

국문학자답게 관련 용어의 사용례를 통해 자살에 관한 지배적 사유 프레임이 재편되는 과정을 구체화한 부분이 흥미로웠다. 예를 들면, ‘분사(憤死)’, ‘정사(情死)’, 채귀(債鬼)’ 등 당대 자살에 대한 해석에 있어 핵심 키워드로 작동했던 용어들의 사용례와 소멸 과정이 그것이다. 또한 자살을 둘러싼 문화 정치의 계보에서 자살의 “‘사회문화적원인을 무화시키기 위한 통치성의 작동 방식을 서술한 부분도 좋았다. “정신착란개념의 사용례를 추적해 보니, 자살에 대한 국가의 태도에서 자살자를 정신병자로 간주하는 현상이 일제와 해방 이후에 유사하게 나타난다는 것. 요컨대 해방 이후 군대 내 자살 사건에 대한 태도는 자살을 사회와는 무관한 개인적 사건으로 취급하려는 식민 권력의 사유 프레임과 닮아 있다.

 

대부분의 자살은 깊고도 오랜, 반복되고 누적된 절망, 갑갑하고 초라한 일상 때문에 천천히 예비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특히 생활고 때문에’ ‘빚에 내몰린자살자가 무수히 많다는 것은 죽은 그들뿐 아니라, 우리 또한 한갓된 축생일 뿐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죽은 그들은 좀 더 여린 짐승이며 살아 있는 우리는 좀더 질기고 냉정한 종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곳이 제대로 된 의미의 사회가 아니라 아귀지옥임을 말해준다. ‘사회란 인간의 교통과 연대에 의해 유지되는 곳일 터인데, 버려지는 인간-짐승과 자해하는 왕따가 많은 곳이 사회일 리가 없다. p.48

 

전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의 자살 통계를 갱신하는 한국에서 자살이라는 주제는 중요한 학문적 탐구 의제일 것이다. 이 책의 미덕은 자살이라는 주제에서 사회적인 차원’, 즉 자살과 사회의 관계를 사유할 수 있는 지평을 확장해 준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반복되고 누적된 절망”(p.48), 주변의 친밀한관계들로부터 구조받지 못하고 있는 우울한개인들이 처해 있는 넓고도 깊은 고립”(p.59)은 단지 자살자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살아있는 우리들 역시 그러한 삶의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한 자살 생존자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우리들 역시 각자도생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야만이 판을 치는 자살 공화국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죽음에 대한 더 많은 앎이 삶을 더 존중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믿기에 이 글을 쓴다. p.27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자살’을 자신의 연구 주제로 삼게 된 생애사적 계기를 서술하면서, 이 책의 목적이 우리들의 불충분한 애도, 불충분한 성찰에 대해 성찰하기 위한 작은 시도임을 밝히고 있다. 누구나 주변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본문을 읽기도 전에 자살을 둘러싼 인간의 고통과 해석이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궁극적으로 사회에 대한 고민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일깨운다.

 

비록 이 책은 자살이라는 무겁고 우울한 주제를 탐구하고 있지만, 읽다보면 통쾌한 희열과 어떤 만족감을 맛보게 된다. 그것은 저자의 통렬한 비판 정신과 신랄한 화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죽음에 대한 더 많은 앎자살이라는 죽음의 형식을 택한 사람들을 더 존중하고 이해하게 해 주고, ‘사회란 과연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살을 둘러싼 문화 정치의 계보학을 접하고 나면,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식의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고통의 탈정치화 프레임에서는 벗어날 길이 없었던 무력감이 해소되고, 대신 죽음을 강요하는 이데올로기 및 사회적 상황에 대한 비판 정신이 각성된다. 자살자와 비-자살자, 비정상인과 정상인 간의 견고한 경계가 와해되면서, 생활고나 빚에 내몰린 사람들이 처한 사회적 안전망의 결핍이 보다 광범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또한 분신자살과 같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죽음의 형식이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된다. 암울한 현실에 학자로서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깊은 고민이 와 닿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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