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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붉은 울음 - 한센병 할머니의 詩, 삶을 치유하다
김성리 지음 / 알렙 / 2013년 11월
평점 :
저자는 7년간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고, 간호학과 문학을 접목하여 “치유 시학”을 연구자가 되었다고 한다. 간호사에서 치유시학 연구자로의 경로 변화는 얼핏 상당한 반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은 저자가 줄곧 인간의 고통, 그리고 몸과 마음에 대한 ‘치유’에 몰입해 왔다는 점에서 일련의 연속선 속에서 만들어진 듯하다. 저자의 독특한 이력과 80대 한센병 할머니가 시를 통해 자신의 삶을 완성해 가는 과정, 당장 호기심이 생겼다.
책에 소개된 ‘할머니’는 1927년에 태어나 18∼19세 이후 줄곧 한센병 환자로 살아온 분이다. 저자는 ‘할머니’의 구술사와 시세계를 엮어 독특한 방식으로 서사를 만들어낸다. 그 서사를 따라가 보면, 한 인간이 세상과 맺는 관계에 따라 자신의 지나온 삶, 고통, 그리고 인간과 사물에 대한 관점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명료해진다.
“벌레도 풀의 이슬을 먹고 사는데, 나는 사람이다 하고 소리 질렀다. 나는 벌레도 아인기라.”라고 말하는 할머니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p.43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청년과 사랑하여 광복절에 미혼모가 되었고, 임신한 상태에서 한센병 환자가 되었다. 동시에 ‘비인간’의 상태로 추락하여 태어나 살아왔던 곳에서 추방되고, 평생 이웃과 같은 물을 마실 수 없는 추방자 신세로 살아간다. 공권력에 의해 쓰레기로 취급되어 산 속에 내버려진 존재들, 주민들의 폭력과 살해 위협,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상황들. 그녀의 고통은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전해진다. 어머니와 형제자매의 사랑,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소중한 기억들 역시 그 속에 포함된다.
온 들에서는 코스모스가 피었고
길에도 피어 색색가지로
자기를 나타내며
뽐을 내고 웃고 있는 그 모습이
교만해 보이더라.
할머니의 시, 「가을」 중에서
할머니의 유년 기억 속에 유난히 꽃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중략) 삶의 아픔을 지닌 사람들에게 꽃은 아름다움의 대상이라기보다 자신이 도달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다가온다. p.206
꽃 도매 시장 상인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3일』에서 한 상인이 인터뷰에서 “하루에도 여러 번 꽃을 대하는 자신의 마음이 달라진다.”고 했다. 아침에 꽃을 보면 예쁘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들뜨지만 저녁에 팔리지 않은 꽃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무거워지면서 꽃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 할머니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고 저자와 함께 시를 만드는 여정에서 할머니의 시선이 궁극적으로 머무는 시점은 발병 이전의 꽃다웠던 10대 시절, 자신이 온전히 인간으로 살았던 시기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자신의 현재를 긍정해야 치유가 가능하다고 어느 정도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한센병 할머니’가 살아온 삶의 궤적과 고통, “꽃보다 붉은 울음”을 접하고 나니, 그러한 생각을 유보하게 된다.
저자는 ‘할머니’와의 만남이 ‘치유 수단으로서의 시’의 가능성에 대한 하나의 실험에서 출발했다고 말한다. 질적 방법론에 천착하는 연구자라면 그녀가 연구 과정에서 겪은 고민, 몸과 마음의 진동에 공감할 것이다. 자신의 삶을 재료로 삼아 시와 이야기를 지어낸 여정이 끝난 후, ‘할머니’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눈을 감으셨을까? 그것은 알 수 없다. 다만 적어도 스스로 충만해졌다는 느낌을 가졌을 것을 같다. 이야기를 상실한 자로 남아있을 때는 갖지 못했던 자신만의 장소를 가졌으므로.
사족. 이 책을 통해 ‘미감아’라는 단어를 알게 된 것도 또 다른 수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