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라이크 미 - 흑인이 된 백인 이야기
존 하워드 그리핀 지음, 하윤숙 옮김 / 살림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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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진실을 보여주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보고서는 하나도 없었다. 나는 이들 보고서를 모두 내던져 버리고 오로지 내게 일어난 일만 출판하기로 했다. p.282


이런 문화기술지가 또 있을까? 흑백분리라는 차별적 현실이 당연한 질서로 받아들여지던 시절, 한 중년의 백인 남성이 약물과 선탠을 통해 피부색을 검게 한 다음 인종차별이 가장 첨예한 미국 남부 여행을 감행했다. 이 책은 그 50일간의 여정에 대한 기록이다. 차별에 대한 관찰이 아니라 흑인이 된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을 써내려 가는 것. 이 엄청난 모험을 위해 저자는 가족에게 동의를 구해야 했고, 생명의 위협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덕분에 백인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경험할 수도 없는 일들을 겪었고, 그것을 글로 써낼 수 있었다.

어디에 앉을 것인가를 두고 버스 안에서 흑인들이 겪는 미묘한 긴장들, 결코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언어화되지 않는 두려움과 모멸감, 공포, 매 순간 백인들의 눈치를 살피고 몸을 사리는 것이 일상이 된 삶. 존 하워드 그리핀이 기록한 이 여행기는 흑인이 겪는 차별이 무엇인지를 더 첨예하게 드러내준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는 한 번도 이런 일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두려움과 자기-모멸이 일상이 되어버린 ‘진짜 흑인’ 보다 더 충격적인 현실로 다가왔을 것이다. 또한 성공한 흑인들이 겪는 ‘분열된 개성’, 즉 흑인으로서 자신의 모든 것(흑인으로서의 자아, 흑인 문화)을 수치스러운 것처럼 숨기고 부정하게 되는 것. 이 역시 백인으로 살아가는 동안 저자가 결코 인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는 것, 그것이 차별의 본질이라는 점을 ‘온 몸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나는 두 사람이 되었다. 한 사람은 관찰하는 이고, 다른 한 사람은 공황상태에 빠져 뼛속 깊은 곳까지 흑인을 느끼는 이였다. 엄청난 외로움이 몰려왔다. 내가 흑인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한때 나였던 존재, 내가 아는 자아가 다른 이의 육체 속에 가려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p.35


인상적이었던 건 저자가 백인에서 흑인으로 변화한 후 처음으로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본 순간에 대한 저자의 단상이었다. 도대체 어떤 동기가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런 목숨을 내 건 모험을 감행하게 했으며, 이런 외로움을 감당하게 했을까? 실제로 이 책이 출판된 후 작가의 가족 전체가 도망치듯 이사를 해야 했고, 저자 자신에게도 두려워했던 폭력이 발생했다고 한다. 책을 읽다가 놀랐던 건 저자가 ‘내가 눈이 멀었을 때’라는 표현을 간혹 썼기 때문이다. ‘눈이 멀었을 때’라니? 책의 말미에 실린 발문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된 것, 저자의 독특한 삶의 이력이다. 저자는 10대에 미국의 교육 시스템과 자신이 맞지 않는다고 여겨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고, 2차 대전에 군인으로 복무하다가 폭탄이 떨어지면서 충격으로 실명했다고 한다. 한 시골에서 돼지를 키우며 맹인으로 살아가다가 어느날 갑자기 시력이 되살아난 것. 실명을 했다가 다시 시력을 되찾았다니...

이 뛰어난 작가의 생애를 읽으면서, 어쩐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어떤 운명이라는 게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탁월한 언어 감각, 섬세한 감수성, 소외된 존재에 대한 애정과 사랑, 이런 것을 갖춘 이 사람, 존 하워드 그리핀은 특별한 존재로부터 특별한 사랑과 선택을 받은 사람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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