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버티고
베르나르 앙리 레비 지음, 김병욱 옮김 / 황금부엉이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470페이지 분량의 책을 끝까지 읽는 건 쉽지 않았다. 1년에 걸친 미국 여행기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되, 저자가 만난 사람과 장소에 대한 사진은 거의 없다. 유대계 프랑스인 지식인이 바라본 미국에 대한 단상은 한마디로 ‘현기증’(vertigo)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상징과도 같은 키치와 기념품 메카니즘, ‘미국을 구성하는 모든 조직들이 다 해당된다 싶을 만큼 보편화된’ 경제적.재정적.정치적 비만, 그것을 추동하는 무절제, 과잉, 과장과 무분별의 힘들, 저자가 ‘발칸화’라고 지칭한 사회적.정치적 공간의 분열과 차등화, 도처에서 목격되는 이른바 ‘회색지대’, 즉 극단적 빈곤의 영역인 사회적.시민적 무인지대의 팽창, 그것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카오스. 저자가 경험한 미국에 대한 인상을 일컬어 ‘현기증’이라 명명한 것은 적절해 보인다.

비행기 여행이 시간과 거리를 파괴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인지도 모르게 우리를 곧장 도착지점으로 데려다주는 여행이라면, 그리고 기차라는 것이 프루스트의 말마따나 어떤 노력이나 단계적 변화 없이 파리에서 피렌체 혹은 어느 다른 곳까지 요술처럼 우리를 옮겨주는 ‘마술적’ 수단이라면, 이 여행, 자동차로 떠나는 이 길고도 아득한 여행, 시간과 공간 상의 어떤 우연한 사건들과도 맞닥뜨릴 수 있는 이 여행은 여행자로 하여금 풍경들과 얼굴들의 유한성과 결합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의 양식인, 유한의 양식을 체험하게 한다. (p32.)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책은 처음 읽었다.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굳이 그 광대한 영토를 비행기가 아니라 ‘자동차’로 선택한 이유를 위와 같이 밝히고 있다. 하지만 저자가 만난 풍경들(특히 감옥과 같은 특정한 장소와 그가 인터뷰한 사람들)에 대한 기술을 읽어가노라면 ‘우연성’이 아니라 ‘기획성’이 감지된다. 우연히 포착된 풍경, 사람들 보다는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대상들, 미리 그의 머리 속에 있었던 지도에 의해 포착된 대상들과의 만남. 이 책에 대한 단상을 한마디로 하자면,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할 말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 한 출판사의 지원을 받은 이 여행을 기획하던 당시 유럽에는 ‘반미주의’ 정서가 팽배했고, 이러 저러한 이유로 인해 173년 전에 미국을 여행한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궤적을 좇아 ‘미국’이라는 낯선 곳을 통해 대서양을 사이에 둔 유럽이라는 곳을 새롭게 바라보고 의미화하고자 했던 기획. 어쩌면 이 책은 그러한 기획에 충실하고자 했기에 오히려 ‘우연’이 가져다주는 미지의 보물들을 놓쳐버린 건 아닐까 싶다.

바락 오바마...이 이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중략) 바락이 스와힐리어로 ‘축복받은’을 의미한다는 어느 신문 기사 내용을 다시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는 그가 뭐라고 하든 간에, 모든 공동체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진 그 틈 속에 뭔가가 작용하고 있음을 느낀다. 어쩌면 그는 이제는 죄의식에 호소하길 그만두고 매력을 행사해야 함을 이해한 최초의 흑인이 아닐까? 아메리카에 대한 비난 대신 아메리카의 희망이고자 한 흑인이 아닐까? 투쟁하는 흑인에서 안심시키고 결집시키는 흑인으로의 변화를 구현하는 인물? 미래의 혼혈 대통령? 언젠가 힐러리와 함께 티켓을 거머쥐지는 않을까?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이데올로기들의 종말이 시작된 것일까? (p85-86.)


한번 읽기 시작하면 우짜든동 끝을 봐야하는 고지식함 때문에 지루함을 이틀 동안 참고 참으며 끝까지 읽었던 건 난생 처음 하게 된 미국 여행을 앞두고, 그저 막연하게 상상했던 미국에 대한 대략적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서였다. 책장을 덮었으나, 살짝 허망한 느낌이 든다. 이 책을 통해서 ‘평범한’ 미국인과 풍경에 대해 감을 잡고자 했던 욕망이 컸기 때문인 듯하다. 어쨌든, 환갑을 넘긴 저자가 쓴 이 책은 오랜 세월 누적된 사유의 깊이, 풍부한 통찰력과 영감들로 가득한 것은 분명하다. 특히 캐리 상원의원이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섰던 당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버락 오바마에 대한 저자의 노련하고도 명쾌한 분석과 선견지명에는 감탄할 수밖에.

사족. 대학 시절, 잠깐 만나보았던 어느 프랑스인에게서 받은 인상, 일상적 대화에서조차 논쟁적인 태도, 계속되는 지식의 인용, 그리고 그 앞에서 그 당당한 합리성의 정신과 (유럽 대륙의) 지적 전통의 무게에 위축되고 압도되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프랑스에 유학했던 한 친구의 전언에 따르자면 프랑스인들은 북부와 남부가 기질적으로 사뭇 다르다고 했다. 자본주의 산업이 발달해 있는 북부 도시인들의 경우, 깍쟁이에다가 손해 보는 짓은 안 하려 들지만, 주민들 상당수가 농업과 수산업에 종사하는 남부인들의 경우 소박하고 소탈한 품성을 보인다는 것. 어쨌건 이러한 기질적 분류는 지식인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것 같다.

(일반화하기는 힘들겠으나) 프랑스인이 (특히 ‘지식인’이) 쓴 책을 읽노라면 간혹 그 현학적인 말잔치 때문에 질릴 때가 있다. 최근에 읽었던 비비안느 포레스테의『경제적 공포』, 노엘 샤틀레의『맞춤 육체』, 그리고 이 책을 읽을 때 잠깐씩 느꼈던 거부감은 동질적인 요소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저자들은 놀랄 만큼 아는 것이 많고, 읽다보면 신랄한 태도, 촌철살인의 풍자와 멋진 은유를 통해 문장을 만들어내는 솜씨에 감탄하게 된다. 하지만 간혹 이런 멋진 문장들을 따라 가다보면 조금 짜증이 난다. 현학적인 태도에 대한 거부감일까? 자기가 잘난 줄 아는 사람 특유의 나르시즘에 대한 거부감일까? 뭐 그럴 수도 있고...사유의 치열함과 깊이가 있는 건 분명하지만, 내가 느낀 거부감의 핵심은 아마도 ‘보는 자’와 ‘보임을 당하는 자’간의 간극, 아마도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보는 자’의 권력적 시선 때문인 것 같다. 많이 아는 자의 시선, 그(녀)가 갖고 있는 지도가 너무 견고하고 촘촘해서, ‘우연’이 침투할 수 있는 공간이 그다지 없는 듯한 그 답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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