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만남은 서로의 책임이야. 뭐든 지나치게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 최갑수,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中



이 문장을 보고 왜 엄마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지나쳐온 연애들과 상대방에게 미안했던 상황들, 그렇게 연애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기 전에 문득 엄마부터. 엄마들은 왜 늘 미안해할까? 우리의 만남은 서로의 책임이 아니어서? 수많은 확률을 뚫고 내가 태어난 것에는 내 책임 또한 있지 않을까? 그렇게 말하는 건 조금 과장된 일일까? 누군가에게 지나치게 미안해했던 어렸을 적 기억들도 떠올랐다. 이를테면, 갈등을 피하고 싶어서 의미없이 내뱉었던 '미안해요'라는 말 같은 것들. 나는 이제 그러지 않는다. 아무에게나 미안해하지 않으려고 한다. 저 문장대로 '뭐든' 지나치게 미안해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그리고 그랬으면 좋겠다, 엄마도.



새로운 챕터에 들어갈 때마다 인용구가 적혀있는데, 그때마다 잠시 멈춰있게 된다. 좋았던 구절들을 기억용으로 적어둔다.


모든 것에는 깨진 틈이 있어. 빛은 바로 거기로 들어오지, - 레너드 코헨 'Anthem'


그렇게 세상은 어김없이 돌아가고 있다. 내 인생의 바깥쪽에서. - 에쿠니가오리, <낙하하는 저녁>


지금 나는 삶을 즐기고 있다. 한 해 한 해를 맞을 때마다 나의 삶은 점점 즐거워질 것이다. 이렇게 삶을 즐기게 된 비결은 내가 가장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서 대부분은 손에 넣었고, 본질적으로 이룰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단념했기 때문이다. -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저기 밖에는 다른 삶이 있어. 내 말을 믿어." - 레이먼드 카버,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내가 산투리를 칠 때는 당신이 말을 걸어도 좋습니다만, 내게 들리지는 않아요. 들린다고 해도 대답을 못해요. 해봐야 소용없어요. 안 되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지요, 조르바?" "이런, 모르시는 군, 정열이라는 것이지요. 바로 그게 정열이라는 것이지요."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언젠가 누가 그랬어. 누군가를 사랑하는지 생각해보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춰 섰다면, 그땐 이미 그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 -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바람의 그림자>


누군가를 잃어서 슬픈 것은 그 사람 앞에서만 가능했던 나의 모습으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외로움이다. - 히라노 게이치로의 TED 강연 중




2.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 한강, <소년이 온다> 中



독자를 '너'라고 지칭하며 쓴 책들은 처음 읽을 땐 신선하지만 그 이후에는 비루하기 짝이 없다. 가끔 어떤 책들은 신선(하다고 생각했을)한 그 방식으로 부족한 알맹이를 숨기려 애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책은 다르다.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하기 위해 이런 방식은 필연적이다. 각각의 챕터 구성은 사실 너무 아쉽다. 조금 뻔하기도 하고, 감정이 과잉되기도 해서 독자가 슬퍼지기 전에 글이 먼저 울음을 터뜨리는 느낌이다. 읽은지는 조금 지났는데 그래도 아직 '동호'라는 이름이 또렷하게 떠오르는 것을 보면 기억에 남는 책이었음은 확실한 듯. 무엇보다도 가장 좋았던 것은 인용한 것처럼 가상으로 지은 듯한 아래의 내용이다.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 다음 문단은 검열 때문에 온전히 책에 실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같은 책 내용 中



사람이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였던 사건들을 생각하면 위의 질문을 반복하게 된다.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지만 그런 상황들은 식상하다. 더군다나 그런 상황에 직면하게 될 때까지, 거대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질문은 무용하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일상을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나의 사소한 행동이 누군가에게 민폐가 되고 있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그 사람이 불안을 겪고 스트레스를 받아야 한다면 그건 낮은 단계에서의 폭력은 아닌가. 그러면 여기에서 몇 가지의 정의와 규칙이 충돌한다. 나의 안정이 우선인가 타인 또는 사회의 안정이 우선인가. 나의 안정이 우선이되 타인의 안정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라고 제한 조건이 붙는다면 그 타인의 범위는 어디까지 될 수 있을까? 우리가 서로에게 동등한 인간이라고 정말로 말할 수 있을까? 



타인은 배려하지 않으면서 혼자서 우아한 삶을 즐기는 누군가가 떠오른다. 시간을 되돌려 그때 그 자리에 당신이 있다면,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죽어가는 친구의 몸을 어떻게든 끌어왔을까, 도망을 갔을까, 총을 들었을까, 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나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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