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가 온다.

비가 오면 노래 생각이 간절해진다. 


직장일을 시작한 이래로 생긴 변화 중 하나는 노래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학창시절에 내 컴퓨터에는 수많은 음악 파일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4만 곡이 넘는 노래들을 시대별로 혹은 느낌별로 정리해두었다가 자주 밤을 새우면서 그날의 기분에 따라 생각나는 노래들을 다시 또 정리했다. 컴퓨터 책상은 창가 쪽에 있어서, 그렇게 파일을 정리하고 있으면 새벽 4시쯤 하늘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가 파란색으로 되돌아왔는데 그 색의 변조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감동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아이였고, 그날 그날의 기분은 늘 달라졌기에 듣고 싶은 노래들도 매일 새벽마다 정리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음악을 듣지 않으면 하루도 버티기 힘든 때였다. 쉬는 시간이 되면 이어폰을 꽂고 그대로 책상에 엎드렸다. 누군가 말 거는 것이 싫어서 자는 척을 할 때도 많았는데 좋은 노래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몸을 흔들거리는 바람에 자는 척하는 걸 들킬 적도 있었다. 


그랬던 나인데. 그래서 이어폰을 깜빡 두고 오는 날이면 그날 하루를 완전히 망했다고 울적해하던 나인데. 어느 순간부터 음악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출근하기 싫다는 생각 밖에는.....단순히 나이를 먹으면서 음악에 대한 열정이 식은 것인지, 음악이 차지하던 마음의 공간을 다른 무언가가 차지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다행인 것은 비가 오면, 비가 오면은. 노래 생각이 간절해진다. 


오늘은 '걱정 말아요, 그대'의 구절을 빗소리에 맞춰 흥얼거렸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떠난 이에게 노래 하세요. 

후회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그대는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 버렸죠. 

그대 슬픈 얘기들 모두 그대여,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 <걱정말아요, 그대>中


그래, 간만에 이 노래를 듣자, 마음 먹고는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를 검색했는데 뜨지 않는다. 한 템포 늦게 이 곡의 제목이 '걱정말아요, 그대'라는 걸 떠올린다. 제목이 '걱정말아요, 그대'이면서 가사엔 '걱정말아요, 그대'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니 반칙이다. 사실은, 이런 반칙을 저지르는 곡들을 더 좋아한다. 가사를 음미하면서 위로받는 기분이었다가 제목을 보고 정말로 위로를 받았을 때의 그 느낌은 이루 설명할 수 없다. 이거야말로 세련된 위로가 아닌가.


가사가 반짝이는 곡들을 마주하면 그 곡의 가사를 쓰고 부르는 사람들에 대한 경외심이 마구 피어오른다. 지금은 이적이 부른 리메이크 버전을 듣고 있다. 이 순간 너무나 행복하다. 밖은 다시 비가 그친 것 같다. 출근길에 다시 음악을 듣기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한다. 



2


그대 살아있는 동안 빛나기를.

삶에 고통받지 않기를.

인생은 찰나와도 같으며,

시간은 모든 것을 앗아갈 테니.

- 세이킬로스의 비문 中


창문 밖이 번쩍, 빛났다. 동생과 내가 서로의 눈을 마주치며 놀란 표정을 할 때, 우린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같은 것을 공유하는 건 이렇게 사소한 데서 오는 커다란 기쁨이다. 비를 바라보며 예술가들은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해진다. 이미 세상을 떠난 한 시인이 귤에 대해 썼던 시가 떠오른다. 비를 보며 썼을 문장들도.


사실 이 책을 택배로 받았을 땐 거의 사기당한 기분이었다. 15,000원짜리 책이 이렇게 작고 소중하다니. 더군다나 얇기까지 하다. 생각해보니 컬러 인쇄를 하느라고 책이 좀 비싸진 모양이다. 더군다나 읽고 나니 그 가격을 할만한 책이기도 하다. 마음이 좀 풀린다. 아무래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챕터마다 들어있는 QR코드인데, 코드를 읽으면 유튜브로 연결이 되어 해당 내용과 관련된 재생목록을 들을 수 있다.(좀 허술한 건, 어떤 재생목록은 접속이 안 되고 어떤 곡은 빠져있고.....관리를 좀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각 시대에 따라 음악과 미술이 그 시대의 분위기를 띄게 된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해주는데, 쉽게 쓰여 있어 좋았다. 시대의 흐름을 크게 훑는 느낌이라 나같은 입문자에게 좋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읽을 땐 좀 허술해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모은 책들을 싸그리 정리하는 중인데 다시 읽을 요량으로 이 책은 살려주기로(?) 했다.


살아있는 동안 빛나야지. 

비어있는 모차르트의 관 위로 수북히 쌓여있던 꽃들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것들이 죽은 모차르트에게 의미있는 꽃이 될 수 있을까. 


3

엄마가 미안해.


아무래도 동생에게 한 말을 엄마가 전해들은 모양이다.

아닐까? 원래 엄마는 늘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시니까.


나도 어렸을 때 빌딩을 사주겠다고 구두계약을 해놓고 지키지 않았으니 엄마도 내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텐데. 


어린 시절을 제대로 보내지 못한 사람은 그 어린 아이를 마음에 품은 채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던가 하는 비슷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잘 자라준 나 스스로가 대견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언제까지 어린 아이로 머물러 있어야 할까 두려울 때가 있다. 이젠 많은 것을 회복했고 마음을 좀 가볍게 해도 좋으련만.


4


지난 70년의 근현대사, 우리 사회의 부의 축적 과정에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손에 쥐기 위해 누군가를 짓밟았고 그들의 가난을 비웃으며 우리의 천박한 욕망을 정당화해왔다. '있는'사람들의 배부른 세상과 '없는' 사람들의 굶주린 세상으로 구분되는 것이 우리 사회가 그토록 신봉해온 자본주의 시스템의 필연적 결과라면, 그래서 끝이 없는 욕심을 채우기 위한 핏발 선 눈들로 가득한 세상이 계속된다면, 우리는 진정 사람답게 살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SBS 제작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中



비가 그친 창문으로 시원한 밤공기가 들어온다. 비온 뒤 느껴지는 개운한 공기와 물을 많이 머금은 흙 냄새, 새로 구입한 책상과 울 일 없는 여유로움.


작은 것들을 사랑하기로 했다. 자본을 모으고 나 스스로를 단련하되 내가 가진 것들을, 내가 가진 소중한 존재들을 잊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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