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시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일주일동안 사랑이 무엇인가 생각하다 시집을 꺼내 읽었다. 자연스레 시집을 선물받았던 순간도 떠올랐다. 시집의 제목을 속으로 읽고는 꼭 그가 그 말을 한 것처럼 어색해하던 그날의 미묘한 감정 변화도 떠오르는 듯 했다. 책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그건 분명 글자보다는 목소리에 가까웠다.


그 이후 그는 떠났지만 이 새는 책장에 남았다. 새가 보일 때마다 그가 보이는 것 같아 두꺼운 책들 사이에 시집을 숨겨두었는데 그렇게 해도 그 문장은 여전히 눈에 들어와 마음을 찔러댔다. 방에서 거실로 나올 때마다, 거실에서 방으로 들어갈 때마다 시선이 나도 모르게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다 어느 날은 울었고, 하필이면 친구에게 전화가 와서 고작 이별을 했다고 운다고 놀림을 당했는데 황당하게도 그날부터 그 문장이, 그 새가 생각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꺼낸 이 시집의 새는 여전히 소리를 내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이다. 쉽게 지저귀는 새들과는 달리 꾹 다문 부리는 아무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그 어떤 따뜻한 고백의 말도 하지 않을 것만 같다. 사랑을 시작할 땐 품어주고 싶었던 그 새가 사랑이 끝날 땐 까맣게 타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난 절대 연인에게 시집만은 선물하지 말아야지. 그 시절의 나는 다짐했었다.


지금은 목소리가 아닌 글자로 그 문장을 읽는다. 곁에 있어도 그리움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에리히 프롬이 말한 사랑의 기술을 아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에 이른다. 꽃을 보면 물을 주듯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 사랑을 줘야지. 이번 주말에, 아니 당장 내일 사랑한다는 고백의 말을 듬뿍 해주어야지. 


2


남들이 다 이해할 수 없는 내 몫의 슬픔이라는 것이 있다. 그 같은 슬픔은 타인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이 그들의 잣대로 규정짓고 재단하려 할 때 슬픔을 견뎌야 하는 사람에게 더 큰 슬픔이 되곤 한다. 아버지를 잃는 것도, 아버지 없이 홀로 신부 입장을 해야 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딸들의 몫이다. 그리고 그 슬픔은 영원할 것 같지만 영원하지 않다. 어느 시점이 되면 다른 형태로 각자의 삶에 녹아들어서 새로운 형태로 전환한다.

- 김범석,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中


난 슬픔으로 유세를 떠는 아이였다. 아주 어렸을 때는 슬픔이 부끄러워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아무도 없을 때 울고, 울던 나를 다그치며 울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슬픔이 부끄럽지 않아졌다. 얼마나 유세를 떨 게 없으면 슬픔으로 유세를 떠나 싶겠지만, 지금의 나를 키운 것은 구 할이 슬픔이다. 나는 철썩같이 그렇게 믿고 있다.


슬픔에 단단히 대비를 하고 살다보면 정작 슬픔이 찾아왔을 때 아무렇지 않은 척 굴 수 있게 된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같은 심정으로, 나를 찾아온 슬픔을 맞이해주면 슬픔과 내가 만나 슬픈 내가 되는데 난 그런 나마저도 사랑했던 것 같다. 비오는 날 비를 맞으며 집에 가기도 하고(그래서 생긴 일화가 많다..) 야자시간마다 우수에 젖은 표정으로 멍을 때리며 창문 밖을 내다보면서 슬픔을 온전히 만끽했던 걸 보면. 선생님들이 보기엔 중2병 말기 환자처럼 보였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니 슬픔이 나를 키웠다고 철썩같이 믿을 수밖에.


그러다가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슬픔이 있다는 것을 2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알게됐다. 처음에는 그 몫이 절대적으로 같은 양이 아니라는 사실에 탄식하고 신에게 주먹을 들이밀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언제부턴가는 절대적인 양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건 정말로 자기 몫만큼 찾아오는 법이라는 걸 무던하게 인정하게 됐다. 그래서 누군가가 사소한 슬픔으로 코를 찡긋거리더라도 그를 미워하거나 질투하지 않게 됐다. 그렇게 된 건 정말이지 얼마 되지 않았다.


처음에 슬픔은 절대적인 크기로 판단하고 말아버리지만, 때때로 그건 눈덩이처럼 불어버리기도 하고 진눈깨비처럼 흩뿌려지기도 하고, 녹아서 내 삶의 모든 국면에 스며들어버리기도 한다. 가끔 그건 끔찍한 핵폭탄으로 둔갑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영양가 있는 흙으로 바뀌어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채연이 싸이월드에 적었던 '난....ㄱ ㅏ끔.. 눈물을 흘린ㄷ ㅏ...'로 시작되는 그 글도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다.


3


떠난 이들은 남지 못한 게 아니라 남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고, 남은 이들은 떠나지 못한 게 아니라 떠나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제는 안다. 어느 쪽을 선택했든 묵묵히 그 길을 걸으면 된다는 것을. 파도에 이겨도 보고 져도 보는 경험이 나를 노련한 뱃사공으로 만들어주리라는 것을.

- 심채경,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中


이제는 모든 것을 인정할 수 있다. 자기 몫의 슬픔, 자기 몫의 행복, 자기 몫의 인성. 아니 마지막은 제외다.


주간문학동네에 연재되던 글이 묶여 나온 책인데 기대했던 과학 내용은 별로 없다, 라고 쓰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그게 딱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는 그녀의 이야기와 들어맞는 것 같아 조금 웃긴 느낌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오해하며 살고 있을까. 현실은 이상이나 예상과는 늘 다르게 간다. 그러다보니 예상치못한 재미가 불쑥 나타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예상치못함'에게 내 뒤통수를 내주어야 한다. 올해 초만 하더라도 올 한 해 내가 이런 식으로 일하고 있으리라곤 예상치 못했는데. 물 위에 떠있는 여러 개의 작은 튜브들을 위태롭게 걸어가면서 "그래도 걷고 있잖아!"를 외치는 느낌이다. 지난 일기에서 변화를 주겠다고 마음 먹었던 것 같은데 역시 다짐 따위는 하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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