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우리 세대는 여전히 과거의 감정을 지니고 살죠. 마음 한편에서 그걸 붙들고 버리지 않으려고 해요. 우리 내면에 가닿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계속 믿고 싶어 해요.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는 고유한 무언가가 있다고. 하지만 그런 건 없어요. 누구나 아는 사실이죠. 당신도 알고요. 우리 세대 사람들은 무언가 있다는 생각을 놓기 힘들어요. 하지만 그 생각을 버려야 해요, 크리시.”

- 가즈오 이시구로, <클라라와 태양> 中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일까. 인간의 몸이나 인간의 사고 과정이 인간성을 대표하는 것이라면, 세상이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재현할 날이 얼마 안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하느님'으로 표현된 자리에 하느님 대신 쿠팅스 머신 같은 기계가 자리잡고 있겠지만 말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소중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세뇌당하며 살아왔던 건 아닐까. 때로 인간은 전혀 존엄해보이지가 않고 어떤 때는 살 자격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한 사람의 공백이 다른 사람으로 금방 대체되는 것을 자주 보곤 한다. 프리를 선언한 후 도경완 아나운서가 예능에 나와 '나를 대체할 사람들을 반나절 만에 찾더라'라고 말할 때, '얼마나 속상할까'라는 생각보다 '그럼 대체가 안 될 줄 알았단 말야? 순진한 사람이네.'라는 생각이 먼저 든 것은 그래서였을 거다. 그러니 '대체'된다는 것은, 그게 사람이든 로봇이든 가능한 것이 아닐까.



2

'인간은 로봇으로 대체될 수 없다'라는 메세지를 전하기 위해 가즈오 이시구로가 제시하는 이야기는 너무나 친절하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는 방식이 소설이기 때문에 그가 정말로 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가 계속해서 책을 읽는 나와 대화하고 있다고 느꼈다. 


인간을 인간답게, 생명을 생명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결핍'이 아닐까 생각했다. 미치오 카쿠는 실리콘의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인간의 의식은 오랜 진화 기간 동안 비정상적인 요인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로봇에게는 이 부분이 빠져 있고 앞으로도 구현하기 어려우므로, 실리콘의식은 사람처럼 허술하거나 변덕스럽지 않을 것이다.

- 미치오 카쿠, <마음의 미래> 中




그리고 작가는 놀랍게도, 그 결핍, 불완전성마저도 모방하는 로봇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머니는 곰곰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그래, 클라라. 아주 잘 아는 것 같으니까, 조시의 걸음걸이를 그대로 따라 해 볼 수 있겠어? 해 줄 수 있겠니? 지금? 우리 딸이 걷는 것처럼?"

가즈오 이시구로, <클라라와 태양> 中



그가 위대한 작가라고 생각이 든 데는 그런 섬세함 때문이다. 그는 미래에 대한 공포를 인간 입장에서만 제시하지 않고 로봇 입장에서도 말하고 있다. 기계가 인간을 지배할 것이다, 만이 아니라 인간이 기계를 해칠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로봇인 클라라의 시점에서 소설을 쓴 점이 돋보인다.



3

책을 읽는 동안 여러가지 고민에 맞닥뜨리게 된다. 우리가 어떤 기준으로 로봇을 인간으로, 동료로 인정할 것인지.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을 때 우리가 로봇을 대하는 입장과 자세는 어떻게 될 지. 수많은 화학작용의 결과물인 인간의 뇌를 로봇으로 구현하여 같은 사고 과정을 거치도록 만든다면 그들의 생각은 자라나며 학습하는 인간과 같을텐데 그런데도 그 로봇을 로봇으로 치부할 수 있는지. 그 로봇을 생명체로 대하지 않을 거라면 어떤 윤리적인 준비가 필요한지. 우리가 그런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는 것은 맞는지. 아니, 애초에 인간의 사고를 학습하는 로봇을 만드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4

작가는 마치 '로봇은 로봇일 뿐이다'라고 쉽게 말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불완전성이 인간의 조건이라고 생각해? 자, 너희들이 말하는 불완전성도 학습하는 로봇이야. 이 로봇에겐 어떻게 대할 거지?"

그러면 나를 포함한 그들은 변명하듯 말할 것이다.

"그런 신체적인 불완전성 말고. 보다 복잡한 불완전성이지. 사고와 정서의 불완전성."

그러나 가즈오 이시구로는 그런 것조차 학습가능한 로봇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으며 우리를 압박해온다.



그러나 좀 더 관찰해 보니 이 위험한 주제(조시의 숙제라든가 사회 활동 점수 같은 주제)를 피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불편한 감정이 흐를 수 있었다. 왜냐하면 불편한 감정이 사실은 이 주제 이면에 있는 무언가와 관련돼 있으며, 위험주제들은 어머니가 조시의 마음에 어떤 감정이 생겨나게 하려고 쓰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가즈오 이시구로, <클라라와 태양> 中



모건 폭포를 다녀온 이후에 어머니의 태도도 달라져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나는 여행이 잘 진행되었다고 생각했고 이제 우리 사이가 더 따스해지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조시처럼 어머니도 냉랭해졌고 현관이나 계단참에서 나를 마주쳐도 전처럼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가즈오 이시구로, <클라라와 태양> 中



5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작가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욕심을 낸 나머지, 중심 이야기로의 몰입을 방해하는 떡밥(?)을 던진 것들이 많아서 다른 가지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쓸데없는 기대를 했다는 점.(단순한 배경 정도로 설정한 것인 모양인데 그게 조금 아쉬웠음) 그리고 스포가 될까봐 내용을 이야기할 순 없지만 서사에 필연성이 부족하지 않았나, 라는 의심이 들었던 점이 아쉽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라서 명성을 보고 평가하지 말자는 생각에 더 정확히 벌점을 주고 싶기도 했고 또, 가장 중요한 '태양'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결말에 대한 아쉬움이 있어서 4점을 줄까 했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해 페이퍼를 또 작성하고 싶을 정도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기도 했고(정말 좋은 책들은 그 책에 대해 아무리 떠들어도 또 떠들고 싶어진다) 어느 순간 그를 작가로서 존경하게 되었는지라 5점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스러웠던 '인간'들의 말들을 적어둔다.



그리고 에이에프. 네 그 계획. 그게 조시를 더 나쁘게 만들면 내가 널 분해할 거야. 쓰레기통에 집어넣을 거야.”

 <클라라와 태양> 中 멜라니아의 말



희망이란 게, 지겹게도 떨쳐 버려지질 않지.” 아버지는 분한 듯이 고개를 흔들었지만 한편 새로 힘이 솟는 것도 같았다.

 <클라라와 태양> 中 아버지의 말



무슨 문제라도 있니?”

죄송합니다. 그냥 제가 좀 놀랐어요.”

? 왜 놀랐는데?”

그게, 저는…… 솔직히 말해서 릭과 관련한 헬렌 씨의 요청에 강한 진심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 놀랐어요. 사람이 자신에게 외로움을 가져올 방법을 원한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 <클라라와 태양> 中 헬렌과 클라라의 대화




덧. 

오늘 아침, 다시 한 번 생각난 가장 큰 아쉬운 점은

(그는 인간의 선함에 대해 말하려고 했다고 하지만)

인간의 선함보다는 클라라의 선함으로 이야기가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