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음 속에 담아둔 문장들을 야금야금 하나씩 꺼내어 쓰면서 언젠가 그 문장들이 바닥났을 땐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걱정한 시기가 있었다.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꺼내어 쓰는 속도보다 쌓이는 속도가 더 빨랐고 무엇보다도 그 문장들을 읽을 수 있었던 사람은 다섯 손가락도 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이제 깊은 구석에 자리잡고 앉아 영원히 떠나가기만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2
철길에 서있는 한 명의 뚱뚱한 사내와 10명의 아이. 정확한 비교 대상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왜 하필 뚱뚱한 남자일까? 기차를 막으려면 마른 남자 한 명으로는 안 되니까 뚱뚱해야 하나?' 라고 생각했던 걸 보면 뚱뚱하다는 표현은 있었던 듯 하다. 수많은 상황을 제시하면서 마이클 형님은 결국 독자 스스로의 '정의'를 정의하게 한다. 그의 의도에 따르면, 생명의 가치를 수량으로 따질 수는 없다. 또, 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하나의 생명을 죽일 수는 없다. 하지만 전쟁통에는 살리기 '좋은' 조건의 환자 위주로 치료가 이루어졌었다는 의사들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냉정한 이타주의자>에서는 단순히 선한 마음만 가지고 이타성을 발휘했다간 많은 재화가 낭비될 거라고 지적한다. 비슷한 이야기를 <팩트풀니스>에서도 다루고 있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외면한 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어가는 익명의 아이들 수백 명에게 주목한다면 언뜻 비인간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극빈층 국가에서의 냉정한 계산법이다. (중략) 로트는 내게 항상 이렇게 말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상황에서는 무엇이든 완벽하게 하려 하면 안 돼요. 그러면 더 좋은 곳에 쓸 자원을 훔치는 꼴이니까요."
- 한스 로슬링, <팩트풀니스> 中
그는 자신의 병원에서 죽은 52명의 아이들이 아니라 병원에 오지도 못한 채 죽어버린 3,800여명의 아이들을 생각한다. 눈 앞의 아이가 죽어간다고 해서 밥도 먹지 않고 환자만 볼 수는 없다. 그러다가 다음 죽음은 의사 차례가 될 테니까. 의사도 밥은 먹어야 한다.
병원에서 아이들이 죽어나간다고 해도 잠시 그 아이들의 죽음을 방치한 채 세계적인 기구에 목소리를 낸다면 미래에 몇 배나 되는 아이들을 살릴 수도 있다. 현재의 아이들을 살리는 것이 정의인가, 미래의 몇 배나 되는 아이들을 살리는 것이 정의인가. 가끔 누구보다도 정의로운 이들에게 '정의'라는 잣대로 손가락질 하는 이들을 본다. 개탄스러운 일이다.
냉정한 계산법에 정의라는 잣대를 들이미는 사람들은, 죽을 듯한 갈증을 느껴보지 않은 것일까. 누군가를 등 떠밀지도, 혹은 누군가에게 등 떠밀려 보지도 않았던 것일까. 최악과 최악 사이에서 차악을 선택해본 적이 없는 것일까. 울면서 손을 놓는 이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일까.
3
나는 겁쟁이다. 온갖 쓸데없는 걱정은 다 하고 산다. 천장이 무너져서 깔려죽는 일은 없을까, 생각할 때도 있고 밤에 누군가가 집을 몰래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어느날 소행성이 떨어져 나라가 순식간에 없어지진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불이 나면 뭐부터 챙겨나갈까 생각하기도 한다. 지하철을 타고 한강 위를 건너갈 때면 탈선이 되어 한강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럴 때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과학적으로 생존 확률이 높은가를 생각하곤 하는데, 그것부터가 이미 비과학적이다.
'저 밖'은 무수히 많은 장소의 합이고, 우리는 한곳에 산다. 물론 나쁜 일은 저 밖에서 일어난다. 저 밖은 여기보다 훨씬 크다. 따라서 저 밖에 있는 모든 장소가 우리가 사는 이곳만큼 안전해도 끔찍한 사고 수백 건은 여전히 저 밖에서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 장소를 하나하나 따로 추적햅면 대부분이 얼마나 평화로운지 깜짝 놀랄 것이다.
- 한스 로슬링, <팩트풀니스> 中
한스 로슬링은 세계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통계를 이용해 설명한다. 미디어가 전하는 이야기는 극적이고 희박한 사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 배웠던 구시대적인 세계관을 여전히 끌어안고 있는 이들을 비판하는데, 나도 그 중 하나였음을 인정한다. 책의 앞 부분에는 세계에 대한 이해도를 평가할 수 있는 문제들을 제시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침팬지보다 못한 정답률을 가진다고 한다. (3지선다이기 때문에 컴퓨터든 침팬지든 정답률은 33.333..%다.) 이 책을 읽고 내가 침팬지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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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를 공부한 사람들은 대체로 통계 해석 앞에 의심병이 있을 수밖에 없다. 통계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어떤 요인이 변수로 작용하는지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라는 것에 대한 의심이다. 변인 통제는 현실 세계에서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신뢰도'라거나 '높은 확률로' 따위의 이야기를 하며 틀릴 수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곤 하는데, 그렇다고 주장하는 내용에 항상 "~~할 가능성이 높다"라는 말을 달아선 꽤나 우유부단한 인간으로 보이기 쉽기 때문에 반박 가능성을 알면서도 "~~다, 이것들아!!" 라는 식의 주장을 펼칠 수밖에 없는데 그런 건 알면서도 매맞는 발언이 아닐까, 싶다. 이 좋은 책에 별점 3점을 때린 나도 결국은 '변인 통제'에 대한 확신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꽤나 대단한 인물인 것 같으니 그 정도 의심은 모두 거치면서 결론을 얻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
5
아래의 내용은 가장 감명 받은 대목.
"그러니까 나는 누구의 면상도 갈기지 못할 거야. 주주를 만나지는 못할 테니까. 그런데 학생은 만날 거야. 이번 주말에 할머니를 찾아가서 면상을 갈겨드려. 비난할 대상이나 때릴 대상이 필요하다 싶으면 그건 노인과 안정된 주식이 필요한 노인의 탐욕이란 걸 기억해. 그리고 지난여름 자네가 배낭여행을 하는 데 할머니가 경비를 조금 보태주셨지? 이제 그 돈을 돌려드려야 할 거야. 그래야 할머니가 그 돈을 노바르티스에 가져다주며 가난한 사람들의 건강에 투자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 테니까. 그 돈을 이미 다 써버렸다면 자네가 자네 면상을 갈겨야겠지."
- 한스 로슬링, <팩트풀니스> 中
나도 저런 방법을 써볼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높은 확률로, 할머니의 면상을 갈기는 놈이 나올 것 같아서 일단은 보류하기로. 이런 해학이 담긴 깨달음을 주려면 둘의 케미가 환상적으로 잘 맞아야겠지. 우리나라에선 일단 신고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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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단점: 침팬지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책을 다 읽고나면 침팬지가 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