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대신 욕망 - 욕망은 왜 평등해야 하는가
김원영 지음 / 푸른숲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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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나를 특별한 존재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진정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희망 대신 욕 망 / 김원영 p.72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지팡이만큼이나

책과 그 책에 맞는 사람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쉽사리 책을 추천하지 않는다.

책 추천이라고는 쓰지만,

그 책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순전히 그 사람의 몫이다.

그러나 이 책은 모두가 읽어야만 하는 책이라고,

강력하게 추천한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무엇이 우리를 쿨하게 만드가


물론 이때 유의할 점은 상대가 그 말을 '삐삐가 없다'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삐삐가 있다는 긍정의 "네"도 아니고 삐삐가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무지의 "네?"도 아닌, 그 중간쯤의 "네?"를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

p.69


형성부전증이라는 생소한 질병을 가지고 태어난 작가는 자다가 일어나면 뼈가 부러져 있었다고 했다. 그는 덤덤하게 말한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엎고 달려야했고, 그의 아버지는 일을 접어둔 채 서울에 있는 병원을 향해 도로를 질주했다. 골형성부전증이라는 질병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나는 장애를 가진 몇 명의 아이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장애가 김원영 변호사가 덤덤히 말한다고 해서 덤덤히 말할 수 있는 고통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는 '쿨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책의 사이사이에 쿨한 척하려 애썼던 흔적들이 그도 모르는 사이에 드러나있다. 고통에 대해 덤덤히 말할 수 있게 된 것이 단순히 시간 탓만은 아닐 것이다. 무엇이 그를 쿨하게 만들었을까? 그러니까 무엇이 장애인들을 쿨하게 만들었을까?

한 아이의 어머니는 내게 아이의 이야기를 하다가 북받치는 감정을 어쩌지 못하고 수화기를 든 채 오열했다. 이 책에서는 쿨하게 행동해야만 했던 장애인의 이야기를 주로 하지만, 나는 그보다 그 뒤에서 함께 쿨한 척 행동하고 있을 장애인의 부모님들에 대한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 오열하던 그 목소리와 죄송하다는 말 뒤에 다시 쿨한 척 이야기를 하는 그 어머님의 목소리에서 벌어진 상처의 깊이를 느꼈기에 나 또한 쿨한 척 함께 연기하며 괜찮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감히 했더랬다. '우셔도 됩니다'라는 말을 건넸어야 했을까? 울어도 된다는 말은 눈물샘에 쌓인 그녀의 눈물을 빼낼 수는 있겠지만, 그게 얼마가지 않아 채워지리란 건 뻔한 일이었다. 오히려 그녀는 내게 자신의 슬픔을 들켰다는 것을 더 힘들어할 것 같았다. 이 책을 읽으며 그 아이와 그녀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쉽게 공감하거나 위로하지 말기


한국인과 예맨에서 온 난민은 때로 이해관계가 상충할 수 있지만, 여성으로서 성폭력과 성차별에 맞설 때 한국인과 예맨 출신 여성은 하나가 된다. (중략) 우리의 가치관, 각자의 차이에 따른 주장은 자주 충돌하지만, 우리가 차이를 직시하고 그에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에 솔직하게 맞서는 과정은 새로운 연대로 이어진다.

p.9


이 희망적일 수 있다면 그건 오로지 연대와 공감 때문이다. 사실 우리 인간들에게 남은 희망은 많지 않다. 우리는 쉽게 분노하고 다른 이의 기쁨에 질투를 느끼며 작은 일에 상처받고 그보다 더 큰 상처를 타인에게 주곤 한다. 그런 우리가 연대할 수 있다면 그건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가 되는 순간들 때문일 것이다. 나와 너는 다른 사람이지만 우리는 수만 가지의 공통성 중 한 가지 공통성으로 묶일 수 있다. 그리고 그 공통성 안에는 우리가 약자가 됐던 경험 또한 포함된다. 그런 경험들이야말로 나와 너가 서로를 응원하게 만들어주는 대목이다. 그건 장애인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공감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할아버지는 좌절하지 말고 열심히 살라며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

나는 좌절했다.

p.33


하고 싶었던 나는 때때로 내 슬픔을 가리기 위해 더 쿨한 척 하곤 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불행한 아이였는데, 친구들은 그렇게 기억하지 않는 이유가 다 거기에 있다. 쿨한 척, 괜찮은 척, 하나도 힘들지 않은 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내 연기가 무너졌던 건 고등학교 3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이 '힘드냐'라는 단 한 마디의 말과 함께 내 어깨를 툭 쳤을 때였다. 김원영 변호사처럼, 나 또한 그 순간 무너져 내렸다. 물론 그때의 '힘드냐'라는 말과 이 대목에서 나오는 할아버지의 '좌절하지 말아라' 라는 말은 완전히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나는 그 말로 인해 내가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고, 울었고, 마음이 치유되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할아버지가 건네는 '좌절하지 말라'는 말은 상대에게 동정표를 건넴으로써 동정을 받는 자가 평가받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건 위로가 아닌 폭력에 가까운 일이며, 몸이 아닌 마음을 구타한다는 점에서 더 죄질이 크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건네고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어요"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선한 의도일 뿐이었는데 상대가 피해의식을 가졌을 뿐이라고 억울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 또한 상대방이 받을 준비가 되었을 때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도 또한 상대방의 입장에서 전달해야 한다는 것을 오랜 시간 경험하지 않았던가. 이 책에도 인용되어 있는,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칫솔 한 개를 베푸는 마음도 그 내심을 들추어보면 실상 여러가지의 동기가 그 속에 도사리고 있음을 우리는 겪어서 압니다. (중략) 이러한 동기에서 나오는 도움은 자선이라는 극히 선량한 명칭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은 조금도 선량한 것이 못됩니다. (중략) 뿐만 아니라 동정은 동정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동정하는 자의 시점에서 자신을 조감케 함으로써 탈기와 위축을 동시에 안겨줍니다. 그것은 공감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값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생략)

사람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을 뿐이며, 남을 돕는다는 것은 그 '스스로 도우는 일'을 도울 수 있음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중략)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


감은 애초에 어려운 것이다. 슬픈 사람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고 하여 공감하는 것이 아니다. 상처를 입은 사람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본다고 하여 공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짓는 표정이 그 사람에게 어떻게 해석될지, 내가 말하는 한 마디가 그 사람에게 어떤 의도로 전달될지, 내가 건네는 물건이 그 사람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지를 그 사람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공감이고 위로다. 슬픔을 보면서 어떻게든 눈물을 참아내는 것이 오히려 그를 위하는 일일 수도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내 고민을 듣고 "와, 정말 공감합니다"이라고 한다면 난 그 혹은 그녀가 그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를 생각할 것이다. "내 재물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 흔적 없이 사라질 재물이 받은 사람의 마음과 내 마음에 깊이 새겨져 변치 않는 보석이 된다"라고 말하는 혜민스님에게 우리가 분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조언을 하고 위로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 삶의 서사가 있다.


람들은 자기 중심적으로 사고하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가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 슬픔의 프레임을 씌워놓고는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경우가 그렇다. 만약 그 장애가 골형성부전증이라면 자기보다 운동신경이 낮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비교적(?) 합리적인 사고방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또한 '비교적' 그런 것이지 그리 합리적인 사고방식은 아니다. 더군다나 사람들은 그가 운동신경뿐만 아니라 모든 능력에서 자기보다 못하리라고 판단한다. 그건 행복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은 무조건 자신보다 불행하리라고 확신하는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각자 서로 다른 서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서사를 쓰며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으며 각자의 추억과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장애인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각 개인들을 판단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가 아주 무지한 사람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나 또한 그의 일면만 보고 상종도 못할 사람이라며 혀를 내두를지도 모른다. 그가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성별에 대해, 다양한 나이와 다양한 직업에 대해 카테고리로 묶어 판단하는 동안에 그의 삶이 끝나지는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사람들은 보통 A라는 역할에 맞는 B라는 인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충분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누구든지 자신만의 창조적인 방법으로 A를 해낼 수 있다.

p.56


사실 고백하자면 나 또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언어 장애를 가진 어눌한 아이의 말을 듣고 그 아이가 천사같은 마음을 가졌으리란 프레임을 씌웠고, 어려운 것을 시킬 수 없겠다는 판단을 한 적도 있었다. (다행히 난 삶이 끝나기 전에 알아차린 셈이다) 하지만 때때로 기대치 않은, 아니,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창의성을 볼 때도 많았고 그건 사실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 아이가 가진 '장애'는 그 아이를 구성하는 하나의 특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 가진 많은 속성과 서사가 어떤 능력을 보여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더군다나 장애를 무시할 수 있는 조건을 주변인이 함께 고민한다면, 그러한 능력이 더 잘 드러날 수 있음은 당연한 이야기다.


'다음 주'를 기다리는 동안 세탁기를 돌리고, 현금을 인출하고, 커피를 종이컵에 쏟아 부은 다음 그 포장지를 반으로 접어 컵 안을 휘젓고 있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을 것 같던' 공간에서, '도저히 상종하기 싫다던' 장애인 친구를 마음속으로 좋아하면서.

p.58


봉사를 '받아주마'


애인 시설에서 하는 다양한 봉사활동. 이제는 대학에 가기 위한 수단, 스펙을 늘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는 하지만, 예전에는 장애인들을 '돕기 위해' 가는 활동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봉사활동과 그 의도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어린 김원영'이 봉사활동을 오는 대학생들에 대해 서술한 부분 때문이다.


도시인들이 여름 한때 시골 마을에 찾아와 풍경을 즐기며 순박하고 한적한 삶에 향수를 느끼지만 그 마을에 정착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에게 그곳은 '풍경'으로 남아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p.65


종종 봉사자들의 마음에 훈훈함을 담아주기 위해 우리 같은 '봉사를 받는 사람들'이 의무를 지기도 한다. 나는 이날도 내게 주어진 의무를 충실히 따라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내용을 찾아내 학습 도움을 받았다.

p.71


봉사를 받는다는 것은, 도움을 받는다는 의미와 동일하게 사용된다.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고 그 도움을 받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는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그 도움의 의무를 지기도 한다고 고백한다. 상상했다. 봉사자의 뿌듯함을 채워주기 위해 그들에게 질문할 거리를 억지로 찾아내는 한 소년의 얼굴을. 그는 또한, 도움을 받는 사람으로 전시되었던 경험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장애인의 이야기를 듣고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는 얼굴들과 그들에게 장학금을 건네주며 뿌듯해하는 얼굴들 또한 머릿 속에 그려졌다. 그가 책에서 말하고 있듯 봉사에 '의도'가 있다면 그건 진정한 봉사가 아닐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봉사 또한 필요한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진정한 봉사자가 되기를 위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작은 행동과 말에 어떤 의도가 있는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신영복 선생님의 글처럼 동정은 공감과 구분되는 값싼 마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복잡하고 바쁜 일상을 살아가야 할 사람에게 자기만을 바라보는 외로운 존재가 있다는 것처럼 어깨가 무거운 일이 있을까. 한 사람의 세계를 온전히 책임지기에 현대인은 너무나 바쁘고 약하다.

p.83


이 책의 어떤 부분들은, 아니, 굉장히 많은 부분들은 사실 장애인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읽어도 와닿는 경우가 많았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들이고, 그런 불완전한 존재로 여겨졌던 경험을 겪어봤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일도 해야하는 워킹맘의 마음이 그럴 것이고,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가난한 아이의 마음이 그럴 것이고, 취업하지 못한 채 사랑에 빠진 젊은이의 마음이 그럴 것이다. 왜 우리는 어깨가 무거워야 하며, 누군가의 어깨를 무겁게 만들어야 하는 세상에 이른 것일까?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을까


아주 많은 곳에서 상당수의 장애인들이 집 안에만 있거나 수용시설에 갇혀 생활하고 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자립형 사립고를 몇 개 만들어야 하는지를 놓고 '100분 토론'을 한다.

p.47


스가 말한 '무지의 장막' 속으로 들어가서 내가 골형성부전증을 가진 채 태어났다고 가정해보자. 난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데 TV에서는 자율형 사립고에 대한 찬반 논쟁이 한참이다. 우리는 종종 장애인의 부모들이 너무 많은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니, 피해의식이 없는 것이 더 이상하단 생각이 든다. 실제로 너무 많은 피해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분리해서 교육하는 것은 장애아를 편안하고 전문화된 체계 속에서 성장할 수 있게 하고 때로는 그들에게 자존감을 심어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세상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라는 데 있다.

p.97


그러나 내가 경험한 바로는 저소득층 아이들은

미래에 대한 꿈의 크기 자체가 매우 작기 때문에 공부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많다.

p.281


합교육에 대해서도 우리는 많은 논의를 거쳐야 한다. 너무 많이 사용되어서 이젠 흔한 문구, "물고기를 주지 말고, 물고기를 낚시하는 법을 알려주어라" 라는 말을 장애인들에게도 적용해야 한다. 편안한 것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잠깐 편하다는 이유로 낮은 천장에 갇혀 지내게 만든다면 그 아이는 천장이 열려도 그만큼의 높이밖에 뛰지 못할 것이다.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어야 한다.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을 경험해야 하고 많은 것들을 움직여보도록 만들어야 한다.


모든 존재는 욕망할 자격이 있다.


망 대신 욕망. 이 책에 대해 얼마나 많이 떠들어야할지 모르겠다. 한 권을 읽었을 뿐인데 너무 많은 생각들이 교차해 정리되지 않는다. 책을 통틀어 나는 수많은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남자를 봤다. 그는 장애인이고 싶지 않지만 장애인인 자신을 사랑하며, 장애인과 놀고 싶지 않지만 그들을 좋아하게 되고, 다른 장애인과 다르다며 선을 긋지만 그 또한 장애인인 사내다.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나 또한 내 정체성을 찾는 기분이었다. 내가 가진 속성들은 나를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이지만 하나의 속성만으로 나를 설명할 순 없다. 그게 우리가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는 이유일 것이며 이건 비단 장애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장애인의 욕망은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를 거부한다. 우리 모두는 욕망할 자격이 있으며 자기만의 서사를 가지고 있는 주인공들이다. 그는 희망 대신 욕망이라고 외쳤지만, 아마 그건 장애인에게 있어 '욕망'에 대한 자유가 특히나 보장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고, 책 전반의 내용은 욕망보다 '자유'를 외치는 목소리로 읽혔다. 더 많은 글을 쓰고 싶지만 끝나지 않을 글일 것 같아 여기에서 줄이고, 그의 책에서 좋았던 구절들을 나를 위해 기록해둔다.



나의 자부심과 나의 꿈 앞에서 또다시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을 내세우고 싶지는 않았다. 추락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장애와 아무런 관련 없이 살 수 없을까.

p.144


내 자의식의 분열은 우리 세계가 두 극단으로 분리되면 될수록 더 커진다. 장애인들이 수용시설에 갇혀 누군가의 구경거리가 되거나 모욕의 대상이 되거나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다면 나는 그 부당함에 분노한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들과 다른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늘 애써왔다.

p.220


나는 지금까지도 가난한 가족의 구성원, 골형성부전증이라는 희귀질환을 앓는 몸을 가진 장애인, 가장 무력한 세대라 인식되는 2010년의 20대 그 어느 것에도 진심으로 속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나는 그 삼각형의 중심에서 이리저리 진동하면서 내가 혹시나 다치지는 않을까, 내 자아를 드러내고 상처받지는 않을까 두려워할 뿐이다.

p.304


행준이는 신체 능력이 떨어지는 편이었고, 뇌손상이 발달장애를 가져왔기에 '하류층'에 속했다.

그 좁은 세계에서도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무시하고 서열을 정하면서 한 가닥 남은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p.55


이 세계는 자신의 영역으로 직접 침투해 들어오는 이질적인 존재들에게는 그 앞에 선을 그어 '분리'의 뜻을 확실히 한다. 그곳에 바로 비정상의 세계가 구축된다. 정상과 비정상은 이처럼 분명하게 다른 두 세계로 분리된다. 이렇게 갈라진 세계는 자체적으로 그 체계를 반복 재생산하면서 완전히 다른 인간들의 삶을 만들어낸다.

p.188


실제로 과거 장애인은 하늘이 준 불운의 대표적인 존재였다. (중략)

그러나 장애인 인권 운동은 이러한 '불운'을 사회적 불운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p.255


국가가 산업화 시대에 모든 것을 바쳐 경제성장을 이룬 부모 세대의 노후는 책임지지 않으면서, 그 자녀들에게는 "젊은이여, 모험을 감행하라"라고 권한다면 이는 무책임하고 부당하다. 우리의 가난한 부모에게는 우리밖에 없다. 우리는 부모를 사랑하기 때문에 모험을 감행할 수 없는 것이다.

p.298


바로 이러한 명령, 장애인들의 집회 현장에서 눈물 흘리는 내 어머니 같은 사람을 바라보면서도 내부에서는 "울지 마, 울면 진짜 장애인 같아"라고 하던 명령.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내 사랑을 이야기하려는 순간 "고백하지 마, 고백하면 찌질한 장애인 같아"라고 말하던 명령. 20대로서 함께 무엇인가를 과감히 시도하려는 순간에도 "하지 마, 어차피 넌 장애인이니 네 삶에나 신경 써. 나서는 건 더 추해"라고 하던 그 명령. 이 사회로부터 혹은 내 내부로부터 자라난 이 오래된 명령 앞에 나는 언제나 굴복하곤 했다.

(중략)

나는 '장애인 치고는' 멋있는, 이라는 말을 거부한다. 나는 장애인 치고는 멋있기 위해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멋지고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뜨겁기 위해 무대 위에 섰을 뿐이다.

(중략)

나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멋질 수 있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매력적일 수 있는 어떤 메시지를 위해 이 글을 쓴다.


나는 무성적인 존재여야 했다. 그것이 나를 상처로부터, 내 몸의 진실로부터 보호해줄 것이다.

p.242


무엇을 욕망하는 것이 자연적 질서에 속하는 이들은 그 욕망을 과감히 억누르고 가치 있는 행위를 할 때 자유로워지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욕망하는 것 자체가 자연적 질서에 반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욕망을 과감히 표출하는 것이 곧 세상에서 자유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이 된다.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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