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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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라 알기를 거부한다’
(띠지에 적힌 말.)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프리모 레비‘의 책이다. 그는 86년에 이 책을 출간했고, 87년에 토리노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돌연 자살했다.

1.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는 게임

전쟁의 게임적 속성에 대해 궁금해져서 ‘전쟁 게임‘이라고 검색했는데 키워드를 잘못 고른 탓인지 여러 가지 게임들이 떴다. ‘2차 세계대전 게임‘이라는 키워드마저 떠 있다. 사람들은 은연 중에 승자와 패자를 가르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게임이 인기가 있는 거라나. 그런 경향을 은연 중에 이용하는 것이 전쟁이 아닐까 싶다. 나 또한 게임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특히나 다양한 전략으로 승리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을 때는 짜릿함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게임과 전쟁은 아주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둘 다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지만, 전쟁은 피해자가 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다는 것이다. 소설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에는 겁에 질려 자신의 역할을 순순히 하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 소설을 읽은 후 두려움을 가진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해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의 띠지를 읽는 순간, 정말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해자가 된 것인가 라는 물음이 떠올랐다.

p.15 라거의 악행을 알고 있던 수많은 잠재적 ‘민간인‘ 증인들 역시 의도적인 무지와 두려움으로 침묵했다. 특히 전쟁 마지막 몇 해 동안 라거들은 복합적이고 확장된, 지역사회의 일상생활 속으로 깊숙이 스며든 체계를 구축했다. 사람들이 ˝수용소 세계˝라고 부른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지만, 실제 그곳은 폐쇄적인 세계가 아니었다. 크고 작은 공산품 기업과 농산품 회사, 군수공장들이 수용소가 공급하는 공짜나 다름없는 노동력으로부터 이윤을 뽑아갔다.


위에 적어둔 15쪽의 문장처럼, 수용소에서 사는 사람들의 끔찍한 삶을 독일인들은 알고 있었으며 심지어 이를 이용했다고 레비는 주장한다. 그거야 뭐 당연한 소리 아닌가.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내용이 상세하다. 그는 라거에서의 그 불행들이 유지될 수 있었던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로 의식주 그리고 목숨의 문제다. 그 규모의 인원에 비해 말도 안 되게 적은 금액으로 책정된 식재료의 값만 봐도 얼마나 많은 인원이 배고픔에 굶주리다가 죽어야했는지 그 거래처는 알았으리라는 것이 레비의 주장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비교적 간단한 방법으로 생명을 앗아갔던 바로 그 가스는, 기존에 필요로 했던 양보다 훨씬 더 많이 주문이 들어갔고 그 주문을 받은 거래처가 모를 리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이야기는 64쪽에 있는 소설 ‘약혼자들‘에 대한 이야기와도 연결이 된다.



p.64 소설 『약혼자들』에서 페스트로 죽은 어린아이 체칠리아의 어머니는 마차 위, 다른 시체들 사이에 딸의 시신이 아무렇게나 던져지는 것을 거부한다. 그런 체칠리아 앞에서, 그런 개별적인 경우에 맞닥뜨렸을 때 ‘추악한 페스트 시체운반자‘가 보인 망설임과 ‘이례적인 존중‘을 우리가 어떻게 기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위의 내용은 소설의 내용이지만, 63쪽에는 소설에 앞서 이와 똑같은 상황의 일화를 레비는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악행‘에 대해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을 때, 그래서 알기를 거부할 수 있을 때 악행을 좀 더 손쉽게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악행들 속에서 하나의 개인을 발견하는 순간, 그래서 개인 대 개인으로서 자기 자신이 드러났을 때는 더 많은 죄책감을 느끼는 듯 하다. 반대로 말하자면, 개인이 숨을 수 있는 상황에서는 얼마든지 악마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라거를 통해 많은 이익을 챙겼던 그 당시의 많은 업자들이 대표적인 예다.


2. 괴롭힘은 아래로 향한다

네덜란드에서 여행을 할 때 재밌었던 점 중 하나는, 오리 중에서도 센 오리가 있어서 그 오리가 나타나면 다른 오리들이 겁을 먹고 쉽사리 먹이를 먹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우세함도 잠시, 백조가 나타나면 센 오리조차 도망다녔다. 백조가 센 오리를 공격하면 센 오리는 마치 기분이 상한 듯 작은 오리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그게 꼭 우리나라의 많은 직장인들의 모습같다는 생각을 했다.

p.43
멸시받는 연장자 무리는 새로 들어온 신입으로부터 자신의 굴욕감을 배설할 대상을 발견하고 그를 희생시켜 보상을 받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신입을 희생양 삼아 위에서 받은 모욕의 무게를 떠넘길 더 낮은 계층의 사람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태어났을 때 그 사람의 심성이 결정되어 있다는 쪽에 의견이 기울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가끔씩 내 안의 천사와 악마가 내게 귓속말로 유혹하지는 않는지? 받은 만큼 돌려주자는 마음을 느낀 적이 없는지? 내 중학교 시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우리에겐 화장이 금지되어 있었고 틴트나 색깔있는 선크림을 바르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소위 날라리라 불리던 몇몇 아이들은 화장을 하고 와선 화장을 하지 않았다고 우겼고, 쫄보인 나는 틴트 한 번 바르고는 누가 눈치채는 것은 아닐까 조마조마해하며 하루를 보냈었다. 우리가 틴트를 바르는 게 어른들한테 무슨 나쁜 점이 있다고? 우리는 억울했는데 그 억울함이 선생님들의 마음에 와닿은 것인지 어느 날 화장에 대한 규제가 우리의 후배들부터는 약화될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우리가 어떻게 했냐고? 화장을 하는 건 학생의 도리가 아니지 않냐고 단체로 소리를 질렀다. 나는 누구보다도 크게 야유 소리를 내며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외쳤다. 보다 더 유사한 이야기를 생각해볼까? 따돌림을 당하는 어떤 아이들은 종종 자신에게 기회가 생겼을 때 같은 방식으로 아이를 괴롭히는 행위를 하기도 한다. 그게 43쪽에 적힌 저 구절처럼 보상을 받으려는 심리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건, 저런 일들이 분명 빈번히 일어난다는 것이다.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하지만 그런 보상심리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일어난다면? 죽고싶다는 자아조차 사라져 자살을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그곳에서 더 낮은 계층을 향한 괴롭힘이 생긴다면, 그만한 지옥이 또 있을까.


3. 수용소에서의 언어

p.113 보르트샤츠는 ‘어휘 유산‘을 의미하지만 글자 그대로는 ‘말이라는 보물‘을 뜻한다. 이보다 더 적절한 용어는 없었다. 독일어를 안다는 것은 곧 생명이었다. (중략) 독일어를 모르는 이탈리아인 동료들, 그러니까 트리에스테 출신 몇몇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은 ‘못 알아들음‘이라는 폭풍우 몰아치는 거센 바다에 빠져 한 사람씩 죽어가고 있었다.

p.108 소나 노새가 그러하듯, 우리에게는 고함이나 주먹질이나 근본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책에서 그가 자주 언급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언어가 생존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것이다. 110쪽에서 그는 독일어를 모르는 포로들 대부분이 도착한 지 10~15일 안에 죽었다고 이야기한다. 108쪽에서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머뭇거리는 이들에게 주먹세례가 쏟아졌다는 이야기 또한 적혀있다. 레비는 같은 수용소에 있었던 사람에게 빵을 조금 주고 독일어를 배웠다고 한다. 언어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할 것이라는 걸 깨닫고 일종의 투자를 한 것이다. 그렇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수용소에 적응하려 했던 레비의 노력도 놀랍지만 사실 그보다 놀라운 것은 그 반대편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즉, 언어를 몰라서 죽어야만 했던 삶들 말이다.

특히 108쪽에 적힌 위의 문장, ‘소나 노새가 그러하듯, 우리에게는 고함이나 주먹질이나 근본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는 문장을 바꿔 말하면 독일어를 모르는 그곳에서의 삶이 소의 삶이나 노새의 삶과 같았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아주 무식할 것이라고, 혹은 어딘가 지적으로 결함이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실수를 범하곤 한다. 가장 흔한 실수는 언어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에게 유치원생 대하듯 마치 구연동화를 하는 것 같은 친절한 말투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말투가 어눌하다고 해서 그 사람의 생각까지 어눌한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수용소에서 언어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말귀를 알아듣는지 아닌지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64쪽에 설명되어 있던 그 이야기처럼, 언어가 있어야만 사람 대 사람으로써 대면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의 입장에서, 특히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언어를 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중 누구를 더 외면하기 쉬울지 맞추는 것은 뻔한 일이다.


4. 우리가 가야할 길은

기록하고 싶은 문장들이 너무나 많다. 포스트잇을 붙이고 붙이다가 문득 허무함이 밀려왔다. 이런 일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됩니다, 지나간 일을 덮지 말고 기억합시다! 그렇게 외친 후에 일어났던 수많은 전쟁들과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악행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의 책을 읽은 독자 중에는 독일인에 대해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고 그에게 메일을 보낸 이들도 있다고 했다. 그들의 주장대로 비단 독일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이미 지나간 시대의 사람들이 아닌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레비가 말한 사람들, 즉 독일의 풍족함을 두고 으시대며 말하는 사람들을 봤을 때 레비의 마음이 어땠을까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이 동떨어진 이야기같다가도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피해자들의 인분으로 쌓아올린 국력에 마냥 박수칠 수 있을 것인가. 지금도 수많은 인간 존재가 그 자리를 위협받고 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어디일까. 어떻게 해야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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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2020-11-27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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