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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31.
주변인들에게 몇 번 접한 작가여서 읽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책들에 밀려 읽지 못하고 또 아니에르노의 ‘세월’이 맨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듣고 괜한 반발심에 읽지 않다가(요상한 고집...) 추천으로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었다. 최근 재발간된 ‘진정한 장소’나 ‘세월’이 아니라 ‘집착’이라는 이름의 제목. 글씨체만으로도 제목이 느껴지는 기분.
1. 별점 6개는 없나요
요즘 별점을 후하게 주게 된다. 독서력이 늘어서 웬만해선 재밌게 읽히는 것도 있겠지만 나름 좋은 책을 고르는 안목이 늘어서 그런 것 같기도? 그래서 별점 5개 짜리 책이 늘어가고 있었는데 이건 5개도 모자란 느낌. 이 책이 내게 큰 영향을 주었다거나 큰 변화와 깨달음을 주었다거나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말 그대로 ‘집착’하는 여자의 마음을 글로 썼으니 내용도 찌질하고 더군다나 자전적 소설의 느낌이 강해서 매력적인 인물이 있지도 않고, 뛰어난 소설가들이 늘 그러하듯 탄탄한 배경을 구축한 것도 아니고 뭐 대단한 거라곤 하나도 없다. 천천히 이야기를 진행해나가다가 빵 터지는 그런 대목조차 없다. 그냥 조곤조곤 이야기를 해나갈 뿐이다. 그런데 그게 뭐? 그래도 난 6개를 주고 싶은걸. 이유라면..음...
2. 이런 감정 묘사의 달인같으니라고
그 이유라면 그녀의 묘사때문에. ‘집착’이라는 감정의 표면과 그 밑바닥에 있는 찌질함, 그 찌질함을 알면서도 끌려갈 수밖에 없는 심리를 너무나 잘 포착하여 글로 써냈기 때문이다. 집착이 뭘까, 라고 생각하면 고작 상황으로밖에 표현되지 않는 그 찌질함을 세밀하게 관찰한다는 것.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철학책이나 심리학 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소설이 이 책 같았으면 좋겠다. 물론 서사가 한참 이어지면서 그 안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감정 변화 또는 태도 변화가 일어나는 모습을 독자가 (자연스럽게) 지켜보게 만들면서 무언가를 자연스레 느끼게 하는 교훈적인 소설도 아름답다. 하지만 그보다는 매순간 인간 내면의 감정에 귀기울이고 나도 몰랐던 내 생각과 감정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도록 일깨워주는 소설은 더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집착’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집착하는 여자의 구차함을 아주 세밀하게 나타낸다. 그게 마음에 든다. 좀 이상한 취향인가.
3. 그놈의 자극적인 표지와 글귀. 그놈의 못생긴 글씨체.
지하철에서 이 책을 읽으면서 출근중이었는데 이상하게 사람들이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왜 쳐다보지 싶었는데 직장에 거의 도착해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문제는 그놈의 뒷쪽 표지. 표지에 자극적인 문장이 적혀있는 걸 깨달았다. 물론 그 문장이 이 책의 주요한 구절이기는 하지만 그건 그 앞의 글들이 이어져왔기 때문에 특별해지는 것이다. 그 구절만 따로 떼어내서는 그냥 싸구려 야한 소설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표지를 이렇게 만들어 놓다니.
우리나라 출판사에 대한 신뢰가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흑흑. 독자를 유혹하기 위해 그 문장을 나름 야심차게 새겨놓은 것 같은데, 내가 생각하기에 그 출판사는 그 문장을 적음으로써 아니에르노의 글을 진지하게 접해보고 싶은 독자도 잃었을 것이고 야한 소설을 기대하고 이 책을 집었던 독자 또한 잃었을 것이다. 그 문장 하나로 이 책은 예술이 아니라 외설, 소설이 아니라 야설이 된 셈이다. 이런 바보같은 출판사!
심지어 집착의 느낌이 뿜뿜하는 글씨체는 정말이지 이 책을 사고싶지 않게 만든다. 지금은 절판되어 구매할 수 없어서 어렵사리 중고책을 찾아서 구매했는데 표지때문에 이걸 정말 사야하나 한참을 고민했다.(뒷표지까지 세트로 대환장파티..) 책표지를 만든 사람은 이 책을 제대로 읽긴 한걸까? 안 읽고 만든 거겠지..?
4. 야한 이야기의 본보기
프랑스에서 아니 에르노의 작품이 19금 스러운 탓에 이슈가 되었었다고 하는데 의미있는 19금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 여작가가 멋지게 느껴졌다. 소설에서 종종 어떤 의미로 넣은 것인지 당최 이해할 수 없는 19금 장면들을 본다. 야하냐 안 야하냐를 떠나서 (그게 별로 야한 장면이 아니더라도) 그런 책들은 예술이냐 외설이냐를 따지게 만드는데 그 장면의 목적이 어디를 향해있는가,가 혼란스러운 탓이다. 더더군다나 그 장면이 필요한 이유가 단순한 인과관계 때문일 때는 그게 정말로 소설가가 말하고자하는 바인가 싶어 좌절스럽다. 단순한 능력 부족이 아니고? 작가라면 삶의 행복과 비참함이 주는 아름다움을 표현해야지. 그것이 비참할지라도 아름다워야지. 그저 19금 장면만 넣으면 프리패스가 되는 것처럼 말이야........(할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어쨌거나 이 소설은 그런 이야기의 본보기가 된다고 느꼈다. 필요한 묘사와 문장이었다고 생각한다. 아, 물론 그 구절이 그렇다뿐이지 야한 장면이 나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걸 기대하고 읽는다면 무조건 실망할 것이다.
대체 그놈의 대환장 문장이 뭔지 궁금하다면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어보시기를. 종이 표지를 떼어내면 그래도 봐줄만하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