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오래전 세네번을 읽고 간만에 다시 꺼내 읽었다. 이야기가 너무 잘 기억이 나서, 추리하는 마음으로 세세하게 읽어나갔는데 새삼 미스테리한 소설이다.

희미했던 기억이 어느 순간 또렷하게 기억이 나는가하면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완벽하게 잘못 기억했던 순간들이 있다. 언젠가 뇌과학에 대한 책을 읽었을 때(더 브레인이었던 것 같다) 사람에게 가짜 기억을 주입하는 일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를 실험으로 보여준 장면이 있었는데 어찌나 어이가 없을 정도였는지 꽤 충격 받았던 기억이 난다.

책의 원제는 The sense of an ending으로, 오랜 시간을 ‘감을 못잡던’ 토니 웹스터가 잘못된 기억과 과거의 잘못을 알아가며 최종적으로는 모두를 상실한 채 무기력한 상태에서 결말이 나버림을 의미한 게 아닌가 싶다. 제목의 의도가 영 감이 안잡히긴 한다. 그렇다고 한국어 번역으로 만들어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제목도 영 맘에 들지 않는데 어쩐지 한번의 반전을 겪은 후 묘한 기분이 들 때마다 “저 예감도 또 틀리겠지.”라고 생각하게 된 탓이다. 그래서 두번째 반전의 장면에선 약간의 기괴함을 느끼긴 했어도 반전 자체가 충격적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인간의 기억이 늘 틀리는 것이라면 역사 또한 사실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역사 선생 ‘조 헌트 영감’과의 수업 내용이 인상적이었는데 사실상 책의 모든 내용이 바로 이 역사 수업 장면에서 함축되어 등장한다.

1)‘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라는 말이나 (이 문장으로 반스는 소설을 쓰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2)롭슨의 이야기를 가지고 확실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핀의 말이나
3)1차 세계 대전에서 세르비아인 개인의 책임으로 전쟁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느냐는 말들이 그렇다.

이 일들은 소설 전체의 내용과 대응되는데

1)에이드리언의 죽음은 토니의 부정확한 기억이 사라가 보낸 유산(500파운드와 편지, 핀의 일기장)과 만나 적당한 확신으로 나타나지만
2)핀이 롭슨의 죽음에 대해 말했듯이 핀의 죽음 또한 어떤 일이 사실인지, 왜 핀이 죽었는지에 대해 적당한 확신만 있을 뿐 정확한 이유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3)또 핀의 일기장 일부에서 나타난 수식에 의하면 저주의 편지를 보내고 사라를 만나볼 것을 권유한 토니에게 핀이 그 책임을 물으려 한다는 것 또한 그렇다. 핀의 죽음과 사라의 임신이 1차 세계대전이라면 토니는 세르비아인이다. 전쟁의 시작이 세르비아인의 암살로부터 시작되었다면, 전쟁의 책임을 그 개인에게 전가할 수 있는가?

기억의 축적과 망각은 책임을 다른 개인에게 전가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 문제인데, 그런 점에서 내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자기 검열의 시간을 가지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책이 말하고자 하는대로 우리의 예감이 늘 틀리기 때문에, 늘 우리는 감을 못잡기 때문에 더 예민해질 필요가 있다. 그것이 승자의 기록인지 패자의 자기기만인지 그저 살아남은 이들의 회고인지를 엄격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 책으로 줄리언 반스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 후에 읽은 죽음에 대한 에세이나 시대의 소음이란 책이 영 별로였어서 내가 작가를 잘못 본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은 여전히 구성이 뛰어나고 이상하게도 요새 시대의 소음에 대한 내용이 머릿 속을 맴돈다. 쇼스타코비치가 엘리베이터에서 캐리어를 가지고 ‘그들’을 기다리던 장면이 자꾸만 생각난다. 역시나 반스는 무거운 공기가 가라앉은 회색빛 정경 혹은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장면 묘사의 달인인 것이 분명하다.

책에서 좋은 구절이 너무나 많아서 언젠가 필사를 시도한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구절들보다
‘감을 못잡는 앤서니’ , ‘진정한 무지가 갖는 독창성마저 결여된 타입’ 따위의 재치있는 인물 묘사가 더 마음에 든다.
언젠가 더 나이가 들면 또 한 번 꺼내어 읽어볼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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