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에 신혼여행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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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의 소설책이 재밌다는 이야기를 듣고 ‘표백’을 이북으로 잠시 읽다가 몇 장을 넘기지 못하고 흥미를 잃어 덮어 버렸다. 그런데 이 사람이 에세이도 썼다고 하여 궁금한 마음에 도서관에서 빌렸는데 웬걸, 꽤나 좋았다. 에세이의 뒷내용이 궁금해지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소설도 아니고 뒷내용이 궁금할 리가 있나.

나 같은 경우 에세이는 편안한 마음으로 그 사람의 일상이나 생각을 훑는 기분으로 읽는다. 특히나 여행 에세이에 대한 기대치는 정말 낮은 편이다. 멋지고 아름다운 건물에 대한 감탄을 듣고 있자면 감탄을 듣는 시간이 아깝다. 그럴 바에야 직접 찾아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분명 이 책에 임하는 나의 자세는 다른 여행에세이를 대할 때와 변함이 없었는데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이런 저런 깊은 생각에 빠져 고개를 들고 생각에 빠져 먼 곳을 응시하기가 일쑤였다. 잠깐 물만 묻히려 냇가에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 수심이 1m가 넘는 강이었던 거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가가 그런 깊은 사유를 하며 이 책을 썼으리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편안한 마음으로 글을 쓴 것이 티가 난다. 다만 장강명이라는 사람은 평소에 이런 생각하기를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이 아닐까. 그래서 큰 맘을 먹고 쓰지 않아도 평소의 사유했던 방식들이 습관처럼 글로 쏟아져 나온 것이 아닐까.

그의 아내로 추정(?)되는 HJ는 꽤 매력 있는 여자라고 판단이 되는데, 일단 같은 여자 입장에서 이런 마인드를 가지거나 유사한 발언을 하는 여자를 본 일이 거의 없다. 물론 그러한 성향을 지닌 것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작가의 성향과는 꽤 조화가 잘 되는 아내를 만났다고 판단된다. 책 안에서 둘의 케미가 좋다. 함께 여행을 가서 싸우고 화해하기까지 울적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온다. 단순한 긍정주의자가 아니라 끝없는 비관주의자인데도 불구하고 우울하지 않다는 것이 매력적이다.

장강명 또한 꽤 매력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케어하기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비축할 줄 아는 남자는 현명하다. 누군가의 눈에는 상식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행동일 테지만 그는 아마 자기 인생의 철학이 확고하게 있어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을 본받고 싶다.

물론 좋은 것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비판하는 내용 중에는 그리 정당하다고 볼 수 없는 내용도 있었는데 자신의 관점이 옳다는 것을 너무 확신하는 것 같아 인상이 찌푸려진 부분도 있었다. 대개 사람들은 특정한 사실을 비판할 때 비판 자체에 빠져 역으로 비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주 적은 구절들이 그러했고 대부분의 내용들은 납득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좋았던 구절들을 남겨둔다.

p.29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 그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원하는 바가 뭔지 정확히 모를 것이다. 그냥 막연히 명절에는 가족이 다 모여야 한다고 하니까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일 뿐이다.

p.30
기타노 다케시는 가족에 대해 “누가 보지만 않으면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고 말했다. 내 가족관은 기타노 다케시보다 훨씬 건강하다. 나는 내 가족을 아무도 내다 버리고 싶지 않다. 다만 그들을 서로 만나게 하지 않을 뿐이다. 그들이 서로를 대형 폐기물로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해.

p.40
자식이 위험에 빠지길 바라는 부모는 없다. 그런데 모험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른다. 그러므로 자식에게 모험을 권하는 부모도 없다.(선량한 부모들이 자식에게 모험을 허락하는 순간은, 자식에게 닥칠 최악의 위험도 자신들이 수습할 수 있을 때이다. 그래서 부자 부모 아래서 자란 젊은이가 더 많은 모험을 누리게 되고, 더 진취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인생에는 부잣집에서 태어났건 아니건 간에, 그리고 부모가 뭐라 하건 간에,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벌여야 할 때가 반드시 찾아온다.

p.52
“사고 나는 거야 사고 나는 거지. 뭐 어쩔 건데? 고사라도 지낼 거야? 사고가 나면 그냥 죽는 거야. 그것보다 자칫 잘못하면 여덟 시간이나 굶게 되니까 그걸 대비해야 돼. - 나 배에서 굶어 죽는 거 아닐까.”

p.83
‘쾌락 또는 행복의 총합 이론’에서 HJ의 부재는 내가 죽어야할 이유가 될까? - 이 점수에 따르면 나는 HJ없이도 사는 게 합리적이다. ~~~

p.122
선글라스를 쓴 채로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해를 바라보고 있으니 정신이 다시 멍해졌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왜 사람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다니는지, 왜 자전거를 타고, 왜 수십 킬로미터를 달리며 러닝하이를 느끼려 하는지. 사람들은 멍해지려고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마음을 피로하게 만든다. 생각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대신 괴로움에 빠뜨린다. 이것이 선악과의 정체다.

p.156
그러나 신세계를 찾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될 수 있을까? 끊임없이 직업을 바꾸고, 분기마다 새 취미에 열정적으로 도전하며, 어딘지 모를 이상향을 찾아 쉴 새 없이 떠돌아다니는 삶이 바람직한 걸까? 그걸 낭만이라고 포장하는 건 시시한 사기 아닐까. 그것은 기실 그 사람의 세계가 그만큼 황량하고 별 볼 일 없음을 폭로할 따름이지 않은가. 어느 정도 날씨가 괜찮고 마실 물과 식량이 있는 평평한 땅을 찾으면 방랑을 멈추는 게 정상이다. 거기에 건물을 짓고 사람을 불러 모아야 한다.

p.188
허구와, 허구가 만들어 내는 구속을 받아들일 대 의미 있는 삶이 시작된다. 그것이 내가 이해하는 ‘2더하기 2는 4’다. 이 수식은 넘어설 수 없는 한계지만, 동시에 많은 가치를 가능하게 하는 출발선이기도 하다. 공리없이는 수학도 없다. 때로는 멍해지는 것이 좋지만, 언제까지나 선셋 세일링을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의 삶은 바다가 아닌 뭍 위에 있다.

p.197
나는 이 여행이 인생에 대한 비유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정의 중반을 넘기고서야 어떻게 하면 시간을 의미 있고 즐겁게 보낼 수 있는지 알게 된다. 다시 한번 처음부터 시작하면 진짜 잘할 수 있는데, 생각하면서.

p.202
“토요일 아침에 소파에 편히 앉아서 컴퓨터로 <라디오 스타>보면서 자기가 사 온 샌드위치 먹으면서 모닝커피를 마셨다, 이런 게 적혀 있어. 그게 그렇게 행복했던 거야. 그런데 보라카이에서는 행복을 느끼지 못했어.”

p.237
나는 허구에 대해서 생각했다. 때로는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해방이라는 명목으로, 때로는 삶의 의미라는 구실을 내세워 다가오는 허구들. 나는 그 허구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쉴 새 없이 허구를 만들어내고 그 허구 속에서만 살 수 있는 존재다. 심지어 나는 그 일로 돈을 벌려 하고 있다. 허구는 익사에 대한 공포와 수면 위로 탈출할 수 있다는 믿음이며, 바닷물이자 산소통 그 자체다. 어떤 허구에는 다른 허구로 맞서고, 어떤 허구에는 타협하며, 어떤 허구는 이용하고, 어떤 허구에는 의존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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