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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차 적멸을 깨우네 - 다산과 추사가 사랑한 초의 선사의 우리茶 기행
박동춘 지음 / 동아시아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초의선사는 조선 정조 10년(1786) 에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15세에 출가한 후 해남 대둔사 일지암에서 40여 년간 수행하면서 선 사상과 차에관한 저술에 몰두하여 큰 족적을 남기신 분이다. 특히 당시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선풍을 일으킨 대선사이자 명맥만 유지해 오던 한국 다도를 중흥시킨 다성으로서 지금까지 추앙을 받고 있으며 시, 서, 화에 능통하여 5절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초의 선사는 어려서부터 재기가 넘쳐서, 스승이 그에게 겸손하라고 지어 준 이름이 ‘풀 옷’에 해당하는 초의의순(草衣意恂)이었다.
초의선사는 다산 정약용 선생과 추사 김정희 선생 등 당대최고의 거유 석학들과 깊은 교류를 통하여 도교는 물론 유교 등 범서에도 능통한 분이었다.우리 차 문화가 부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초의 선사가 있다. 예로부터 성현들은 모두 차를 즐겼으니 차는 군자처럼 성미에 사악함이 없기 때문이다. 초의선사의 “산천도인이 차를 사례함을 받들어 화답하여 짓다”라는 다게에는 그의 다도정신 즉 다선일미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성균관대학교에서 유학을, 동국대학교에서 선학을 공부했으며 1970년대 말 땅끝마을 해남에서 응송스님으로부터 제다법과 차 이론을 하나하나 익혀 초의차의 정통 계승자로서 지난 30여년 간 차를 만들고 차 이론을 연구해오신 분이다. ‘다산과 추사가 사랑한 초의선사의 우리 차 기행’이라는 부제처럼 초의선사의 흔적을 따라 떠난 인문학적 여행의 기록이다.
예로부터 불문에서 차는 청정한 공양물인 동시에 수행자의 정신을 맑게 씻기는 감로수라 일컬어졌다. 초의선사는 다성으로 불리었다. 그는 다섯 차례나 제주도를 다녀갔던 추사와는 신분을 뛰어넘는 친교를 나누었으며 조선후기 사멸 위기에 처했던 우리 차 문화를 부흥시켰다. 이후 범해, 금명, 응송 스님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책은 다산초당에서 청년 시절의 초의에게 시학과 주역을 가르쳐준 정약용과 평생 초의를 후원한 다산의 아들들, 초의와 동갑내기로 평생 인연을 나누며 맑은 정신세계를 교감했던 추사 김정희,박영보를 포함, 조선후기의 지식인 등 다양한 인물들을 만날 수 있어 좋았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