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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암은 지금껏 내가 알고 있던 모든 지식과 내가 보는 모든 사물과 내가 듣는 모든 소리와 내가 느끼는 모든 감각과 내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하느님과 진리라고 생각했던 모든 학문이 실은 거짓이며, 겉으로 꾸미는 의상이며, 우상이며, 성 바오로의 말처럼 사라져가는 환상이며, 존재하지도 않는 헛꽃임을 깨우쳐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낯익은 타인들의도시"는 암이 내게 선물한 단거리 주법의 처녀작이다."(p.6 작가의말 중에서)
전날 술자리에서 기억이 끊기고 휴대폰을 분실한 K씨는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과정에서 이상한 일들에 부딪친다. 시공간적으로 전혀 개연성을 찾을 수 없는 일들이 간밤에 발생한 것이다. 아내와 섹스를 하려하지만 아내의 몸이 파충류처럼 차갑게 느껴져 그의 남성의 본능은 사그라지고 만다. 다음날 아침, 주인공 K의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낯설다. 한 번도 아내에게 알몸을 보인 적 없는 그가 발가벗겨진 채 침대에 누워있고 강아지와 아내는 물론 심지어 그가 매일 바르던 스킨의 브랜드까지 다 달라 보인다. 속도와 양으로 모든 것을 압도하는 이 세계는 직장인 K에게 '분열'을 강요한다. 생명과 직결되어 있어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다. 최인호의 소설은 과거의 그의 작품이 그랬듯이 책장이 잘넘어간다. 작가 최인호의 전작인 '별들의 고향'이나 '겨울나그네'와 같은 신문연재 소설은 도시적 감수성과 섬세한 심리묘사를 통해 그의 작가적 성향을 높인 것으로 1970, 1980년대 최고의 대중소설작가인 동시에 `통속적 소비문학`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작가는 몇년전부터 암과 싸우고 있다. 암과 함께 산다는 것, 죽음을 직면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에 대한 공포 등이 어떤 것인지 나는 그 고통을 가름할 수 없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살면서 어느순간 자신의 삶이 미리 정해진 각본에 의해 충실하게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의문을 품게되는 경우가 있다.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흐르는 일상. 하루 일과를 마칠 무렵이면'이렇게 바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늘 비슷한 행동반경에서 제한된 인간관계속에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시기에는 더 더욱 그런 느낌으로 짖눌리는 경험을 하게된다. 작가가 암투병으로 받았을 고통과 그로 인한 심리적 피폐함이 어떻게 어떤형태로 나타날지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 읽어내려갔던 소설이다. 인간의 피폐함과 무능력함이 바닥에 닿는다면 어떤 심리 상태일까? 아마도 카오스적인 혼돈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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