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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 신달자 에세이
신달자 지음 / 민음사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환자 생활 24년간 뒷바라지하면서 증오심도 끓어올랐고 억장 무너지는 순간순간을 맞으며 남편의 마지막 시간이 언제인지 하느님께 질문하려다가 입을 닫은 적이 어디 한두 번이겠니. 나는 아프지 않았지만 죽었고 그는 아팠지만 살아 있었다. 그것이 24년간의 우리 부부생활이었다. (본문중에서)
나는 24년 동안 많은 죄악을 저질렀다. 그 죄악의 동기는 남편이었고 그 죄악을 근절한 것도 남편이었다. 나는 그 동안 소리 없는 총기를 구하고 다녔다. 그래, 물론 그의 심장을 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말이야. 얼마나 그가 죽기를 기다렸겠니. 아, 그런데도 그가 숨이 멎는 그 순간에 나는 신통력을 갖고 싶었다. 아! 소리치며 시간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그가 죽는 일에 죽어도 동의할 수 없다는 폭발적 외침이 저 밑바닥에서 절절 끓어올랐다.’ (본문중에서)
이 책은 신달자 시인의 지난 30년 삶을 중심으로 담아낸 수필이다. 제자인 희수에게 지난날을 술회하는 형식으로 44개의 장을 구성했다. 산문 중간중간에 수록된 13편의 시는 삶과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고통을 이겨 낸 신달자 시인의 감동적인 드라마를 담았다. 저자는 지금껏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상처를 온몸으로 고백하고 있다.
대학교수인 남편이 결혼 9년 만에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한 달 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만 반신불수가 된 남편, 간신히 학교에 복귀하지만 뇌졸중 후유증으로 사회생활이 쉽지 않은 남편을 물심양면으로 돌보지만, 자괴감과 절망감에 빠진 남편은 시인에게 매질을 하는 등 점점 난폭해져만 간다. 팔순 시어머니, 어린 세 딸아이를 뒷바라지하며 보따리 장사로 생활을 꾸려 가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지옥 같은 현실을 헤쳐 나간다. 그녀는 문학과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한다. 대학교수의 꿈도, 베스트셀러 작가의 꿈도 이루지만 끝내 남편은 세상을 뜨고, 이젠 저자가 유방암 진단을 받고 수술대에 눕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설상가상으로 시어머니까지 쓰러져 9년 동안 병상에 계시다 돌아가신다. 기구한 운명 앞에 신을 원망하였지만 종교에 귀의한 후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뇌출혈로 쓰러지는 남편의 머리를 받아 안았던 저자는 무려 24년 동안 남편의 병치레라는 고통의 십자가를 어깨에 매게 된다. 고통을 당하는 순간엔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과 암울한 현실에 몸서리쳐진다. 그러나 어느 순간 먼발치에서 이 때를 되돌아 보면 자연스럽게 치유되고 회복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녀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깨달은 인생의 빛과 그림자를 보여주며 그녀의 삶이 어떻게 그녀 시의 뿌리를 이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영원히 싸우고 사랑해야 할 것은 오직 인생뿐’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진다.
시인은 남편의 죽음을 보면서 자신이 살아온 생이라는 거대한 얼굴의 실체를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모습은 자신이 암에 걸려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완성된다. 무엇보다 시인은 생에 대해 넉넉한 생각을 하게 됐고, 어떤 젊음도 부럽지 않을 만큼 늙어가고 있는 것이 편안하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그녀 나이 마흔.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다.
대학원을 들어간다. 첫번째 이유로써 자신의 어머니의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서 두번째는 아이들을 위해서이다.
다시 공부를 하고, 글을 쓰고, 책을 내고 그냥 정신없이 앞만 보며 달려온 시간을 보낸 뒤 문득 뒤를 돌아보니 마흔이 되어 버렸다는 어떤 시인의 말처럼 나이먹음을 인식해 볼때 나이 마흔은 늙지도 않고 젊지도 않은 연령대다. 나이 마흔이 되면 사람들은 외부를 변화시키는 것에 무력해진다고 한다. 도전보다는 포기라는 단어를 더 떠올리는 나이라는 것이다. 가슴아프고, 아리고, 외롭고, 쓸쓸하지만 희망을 보았던 그녀에게 느낄 수 있던 감정들이 많았던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