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과연 우리의 자손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가? 나에게 의미 있는 내용과 아름다운 색깔을 준 이 삶을 너희도 살았으면 좋겠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삶을 우리는 살아왔는가? 
"어떤 삶을 사는 것이 나와 같은 인간 존재에게 최선의 
삶인가?"라고 묻는 젊은이들에게 긍지와 자긍심을 갖고 
가르칠 수 있는전통이 우리에게 과연 살아 숨 쉬고 있는가?  - P7

오늘날 우리는 분명 도덕적 다원주의의 덫에 걸려 있다. 
권리와 자유의 절대화로 말미암아 생겨난 다원주의 자체를 자유와 권리로 착각하는 것이 아마 현대의 병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추구할 수 있는 공동선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다원주의는 가치와 목적의 문제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자유의 토대를 
침식시킬도 모른다.  - P10

우리에게 가치 있는 삶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형식과 
제도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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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의 2월 혁명과 6월 사이의 몇 달을 제외하면 
제3공화국의 수립까지 19세기 프랑스의 좌파는 항상 
반대였다. 그로부터 좌파와 반대의 혼동이 기인했다. 

좌파는 왕정복고에 반대했다. 왜냐하면 좌파는 스스로 
프랑스 대혁명의 상속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좌파는 
이 혁명으로부터 모든 역사적 요구, 과거 영광의 꿈, 
미래의 희망을 끌어냈다. 하지만 이 혁명을 계승했다고 
자처했던 좌파는 이 거대한 사건과 마찬가지로 모호했다. 
이 향수적인 좌파는 신화적인 통일만을 이루었을 뿐이다. 

- P21

좌파는 1789년부터1815 년까지 한 번도 통일된 적이 
없었다. 오를레앙왕국의 붕괴로 인해 공화국이 헌법상의 
공백을 메울 기회를 얻었던 1848년에도 좌파는 여전히
통일을 이룩하지 못했다. 물론 우파가 더 통일된 것도 
아니었다. 1815년나폴레옹의 몰락 후에 왕당파는 
구제도로의 복귀를 꿈꿨던 과격파와 현실을 받아들이려 
했던 온건파로 양분되었다. 루이 필리프의 등장으로 정통 
왕당파는 고립되었으며, 루이 나폴레옹이 승리했을 때 
오를레앙주의자들과 정통 왕당파는 찬탈자에 대해 모두 
적개심을 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타협에 이르지 못했다. - P21

과거를 돌아보면 대혁명의 업적으로 보였던 핵심적 
요소들이 왕정에 의해 점차 도입되는 경우도 별 어려움 
없이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대혁명을 일으킨 정신이 
왕정과 전적으로 화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프랑스왕국의 사상 체계가 뿌리부터 
흔들렸으며, 대공포 시대를 야기한 왕정의 합법성의 
위기가 초래되었다. 어쨌든 구제도는 거의 저항 없이 
일격에 무너졌으며, 또 그 뒤로 프랑스에서는 국민 
대다수의 환영을 받는 새로운 체제가 구성되기까지 
한 세기가 걸렸다는 것은 부인할 수없는 사실이다. - P22

대혁명의 사회적 결과들은 19세기 초부터 뚜렷하게 
나타났으며, 왕정복고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특권적 질서의 회복, 민법, 만인의 법 앞에서의 평등을 
뒤집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공화정과 왕정 
사이의 선택은 여전히 유예 상태였다.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은 의회 제도와 결부된 것이 아니었다. 

보나파르트는 민주주의 사상이란 명목으로 정치적 자유를 탄압했다. 그 당시에 활동했던 프랑스의 진지한 저술가들 
중에서 프랑스의 옹호자들에 맞서 대혁명의 계승자들을 
대표하는 통일된 의사를 가진 단일 좌파의 존재를 인정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진보적 정당이란 반대파들의 
신화였으며, 심지어 그 정당에 투표하는 실체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다. - P23

공화국의 잔존이 확실해지자 클레망소는 모든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혁명이란 하나의 진영이다"라고 선언했다. 이 주장은 좌파들 사이의 싸움이 종식되었음을 보여 준다. 
민주주의와 의회주의가 화해했고, 모든 권위는 인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게다가 보통선거를 통해 
전제 군주의 등극이 아니라 인민들의 자유 보장이 촉진되기도 했다. 자유주의자와 평등주의자, 온건파와 과격파는 더 
이상 서로 싸우고 제거할아무런 동기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여러 당파가 세웠던 목표가 마침내 동시에 달성된 것이다. 
보통선거로 시민의 법률상의 평등이 보장된 제3공화국은 
입헌적임과 동시에 민중적인 정체가 되어 스스로 혁명의 
진영이라는 영예로운 가상의 선조가 되었다. - P23

하지만 제3공화국의 강화가 부르주아 좌파들 사이의 
내분에 종지부15를 찍은 순간에 새로운 분열이 갑자기 
발생했다. 그런데 이 분열은(공상적 공산주의 운동의 
선구자였던 바뵈프François-Nol Babeur를 사형에 처한) 
바뵈프 음모 사건 이래로, 또 민주주의 사상이 생겨난 
때부터 잠재해 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좌파가 구제도에 반대하는 좌파를 계승한 것이다. - P23

하지만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경제활동의 국가 관리를 
주장하는 이새로운 좌파가 독단적인 왕정, 특권적 질서 
및 농업조합 조직에 맞서 반기를들었던 구좌파와 동일한 
철학과 목적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가? - P24

마르크스주의는 신좌파가 구좌파를 계승했다고 증언함과 
동시에 신구좌파 사이에 단절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제4계급은 제3계급의 뒤를 잇고,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봉건제도의 쇠사슬을 끊고, 지역공동체, 개인적 충성, 
지방에 대한 봉사라는 사슬에서 인민을 해방시켰다. 
전통적인 구속에서 해방되었으나그와 동시에 보호 
장치를 상실한 개인들은 이제 시장의 맹목적인 메커니즘과 전능한 자본가들의 힘에 방어 수단 없이 내맡겨졌다. 
이런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해방을 완수하고, 
자유주의 경제의 대혼란 대신에 인간적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 - P24

국가, 학파, 환경에 따라 사회주의가 가진 자유의 측면이나, 또는 조직의 측면이 따로 강조되었다. 부르주아지와의 단절을 강조하는 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또 때로는 대혁명과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자들도 있었다.

1914년 이전에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민주주의가 
내세우는 고유한 정치적 가치들에 기꺼이 무관심을 
표명했다. 또한 그들은 보통선거와 의회민주주의를 
굳건히 지지했던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이 채택한 태도를 
약간 경멸하면서 비난을 숨기지 않았다. - P24

프랑스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갈등은 
부르주아 좌파의 여러 당파 사이에 있었던 예전의 갈등과 
같은 대립을 보여 준다.  - P24

현실에서 이런 대립이 아주 격렬했던 만큼 더 격렬한 
언어로 그 심각성이 부정되고 있다. 최근까지, 어쩌면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 좌파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를 드물게 문자 그대로 해석했다. 

또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민주주의자들을 
포함해 그때까지의 모든 정권 담당자들 사이의 과격한 
대립 역시 드물게 인정했을 뿐이다. 좌파 지식인들이 
자발적으로 찬동했던 철학은 조레스의 철학이었다. 

그의 철학은 마르크스주의의 여러 요소들을 이상주의적인 형이상학과 개혁에 대한 신호에 결합시킨 것이었다. 
공산당은 ‘계급 대 계급의 대립이 극심했을 때보다도
인민전선Front populaire이나 애국적인 레지스탕스 
운동 속에서 훨씬 더 빠른진전을 보였다. 공산당에 투표한 
수많은 국민들은 여전히 다른 좌파 당파와 같은 임무를 
더 성공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이 당에서 계몽주의 운동의
계승자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 - P25

진보적 정당이 사후적으로 선과 악, 미래와 과거라는 
두 원칙 사이의대립을 고안해 낸 것은 바로 이 정당이 
25년간의 혼란 없이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가 제3계급과 
제4계급 양편의 대표들을 포함하는 하나의 좌파를 꿈꾼 
것은, 바로 이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가 노동자계급을 
다른 국민들과 통합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 P26

이런 좌파가 완전히 신화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투표자들 
앞에서는 가끔 통일 전선을 형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왕정복고로 인해 지롱드파, 자코뱅파, 보나파르트
주의자들이 다 같이 반대파로 전락했을 때에1789년의 
혁명가들이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연합한 것과 마찬가지로, 급진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도 역시 파악이 안 되는 적, 
곧 반동 세력에 맞서면서, 또 이미 시작되었을 때 시대에 
뒤진 교권주의에 대한 투쟁에서만 의견의 일치를 보았을 
뿐이었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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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독수리와 양

니체는 좋음의 두 가지 다른 기원을 설명한다. 
하나는 독수리에서 유래하며, 다른 하나는 양에서 유래한다. 독수리는 양을 잡아먹는 포식자이며, 양은 자신을 공격하는 독수리를 두려워한다. 양을 잡아먹는 맹금류(독수리)는 
고기 맛이 좋다, 나쁘다로 판단한다. 반면 양은 선(좋음)과 
악함으로 판단한다. 좋음은 한편으로 나쁨의 반대말이자 
악함evil의 반대말이다. 독수리는 양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양고기가 맛있기 때문이다. 반면 양은 자신을 
잡아먹는 독수리가 사악하다고 생각하고, 그와 반대로 
자신은 선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약자인 양이 생각하는 
좋음은 원한에 비롯하며 강한 자들이 강하게 나타나기를 
바라지 않는 공포감에서 비롯된다.
- P38

그러나 약자들이 강한 자들이 강하게 나타나기를 바라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니체는 이를 위해 주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모든 작용을 작용하는 자. 즉 ‘주체‘에 의해 
제약된 것으로 이해하고 오해하는 언어의 유혹(언어 속에서 화석화된 이성의 근본 오류) 아래에서만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377). 

그 오류는 주체와 작용을 분리하여, 마치 중립적인 기체인 
것으로 간주된 주체가 그 행위를 할 수도, 하지않을 수도 
있다고 책임을 지우는 것을 말한다. - P39

이러한 맥락에서 주체이론은 독수리가 양을 낚아 채어
가거나 해치지 않는다는 자유와 책임을 근거 짓는다. 
이 내용은 언어철학 비판과도 관련되는데, 번개 치는 
것에서 주체와 활동으로 구분하여, 앞(섬광)을 원인으로 
뒤(번쩍임)를 결과로 보는 것은 활동의 활동, 곧 활동을 
중복시키는 오류다. 주체(원자, 물자체 등)는 환상이며 
오직 활동만이 있다는것이다.
- P39



"마치 사람들이 번개를 섬광에서 분리하여 후자를 번개라 
불리는 어떤 주체의 활동이며 작용이라고 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민중의 도덕도 마치 강자의 배후에는 강한 것을 나타내거나 나타내지 않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종의 중립적인 기체가 있는 것처럼, 강한 것을 강한 것을 표현하는 것과 분리한다. 그러나 그러한 기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활동, 작용, 생성 뒤에는 어떤 존재도 없다. 활동하는 자는 
활동에 덧붙여 단순히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활동이 모든 것이다. 사람들은 번개가 번쩍일 때, 
실제로는 활동을 중복시킨다. 이것이 활동의 활동이다. 
같은 사건을 한 번은 원인이라고 보고 다른 한 번은 결과라고 보는 것이다"(378). - P40

자연과학자들은 원인과 결과를 통해 사물의 본질을 
분석하지만, ‘언어의 유혹‘에 사로잡혀 있으며 ‘주체‘라는 
믿음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주체 개념을 비판할 때 주체란 
우선 ‘언어‘를 사용하는 ‘이성‘의 오류로 전제되는 것이다. 

그것이 원자나 물자체 등으로 확장되면서 ‘작용을 
작용하는 자‘로 오해된다. 그뿐만 아니라 ‘번개가 친다‘고 
할 때 ‘번개‘와‘친다‘를 구분해 원인과 결과로 둘로 나누는 
것이 오류다.

곧 하나의 현상을 주어와 술어, 원인과 결과의 둘로 
나누는것이 오류다. 활동이 모든 것이며, 활동하는 
자(주체)는 활동에 덧붙여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 P41

다시 말해 ‘중립적인 기체로서의 주체에 대한 믿음을 통해 
마음대로 행위할 수 있는 의지의 자유와 그것에 책임을
지우는 권리가 확보된다. 그 결과 독수리에게 양을 해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는 것과 양을 해치는 것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이 가능해진다. - P41

주체에 대한 요청으로 "복수와 증오의 감정이 ‘강자가 
약해지는 것도, 맹금류가 어린 양이 되는 것도 마음대로이다‘
는 믿음"(378)을 자유의지로 인식하게 하고 "맹금에게 
맹금이라는 책임을 지우는 권리를 스스로 획득하게 된다"
(378). - P41

니체는 이러한 도덕을 ‘화폐위조‘로 비판한다. 
곧 양은 타인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신의 무력감, 
무능함을 ‘선‘으로 포장한다. 

화폐위조는 영리함을 바탕으로 약함을 미덕과 공적으로, 
공격하지 않음을 자유와 공적으로 뒤바꾸는 속임수다. 
보복하지 않은 무력감은 선이 되고 겸허, 순결, 비겁함이 
덕이 되며 인내, 가련함은 신의 선택이 된다. 곧 자신은 
선하고 정의로운 자가 된다. 약자는 그렇게 해서라도 
언젠가 강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 P42

양들은 복수심에 불타는 간계로 독수리와 같은 악한 존재가 아니라 선한 존재가 되고자 한다. 그러나 겉과는 달리
마음 속에는 강한 독수리를 이길 수 없다는 ‘무력감과 
복수심‘에 악한 존재와 다른 선한 존재가 되고자 한다. 
독수리라는 악한 존재와는 반대로 ‘선한 존재‘는 ‘능욕하지 않는자‘, ‘상처 주지 않는 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는자‘로 여겨질 뿐만 아니라 겸손하고 공정한 자이다. 
따라서 인내, 겸손, 공정은 약자인 선한 자의 덕목이다. - P42

다시 말해 공격하지 않는 행위가 선한 것이 되면서 
자신이 선하고 정의로운 자로 변모한다. 
양과 같은 선한 존재가 자신의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 
‘영리함은 무력감이라는 저 화폐위조와 자기기만‘을 
고안하고, ‘약자의 약함‘을 ‘미덕‘으로 변장한다. 
그것을 "공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379) 이다. 
"이러한 종류의 인간에게는 거짓으로 자기 자신을 
신성시하곤 하는 자기 보존과 자기 긍정의 본능에서 
선택의 자유를 지닌 중립적인 ‘주체‘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379).

따라서 주체, 영혼과 같은 개념을 통해 약자의 ‘약함을 
자유로 해석하고, 더 나아가 "그들이 그저 그렇게 존재하는
모습을 공적으로 해석하는 저 숭고한 자기기만을 가능하도록 했기 때문이다"(379). - P43

그러나 이러한 노예도덕의 이상은 어떻게 제조되는가?
바꿔서 그 물음은 누가 이상을 만드느냐의 물음과 같다. 
그 비밀은 마치 화폐를 위조하는 것과 같은 원리로 ‘약한 
것을 공적으로 바꿔 기만하는 것이다. ‘보복하지 않는 
무력감‘은 ‘선‘으로 바뀌고, 불안한 천박함은 ‘겸허‘로 
바뀌며, 복종은 명령하는 신에 대한 ‘순종‘으로 바뀐다. 

- P43

뿐만 아니라 약자의비공격성, 비겁함, 기다림이 ‘인내‘라는 
미덕으로 불린다. 또한 복수할 것이 없는 것이 복수하고자 
하지 않는 것으로바뀌면서 심지어 ‘용서‘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렇듯 이상의 제조란 화폐위조를 통한 가치의 전환이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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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선과 악:적극적인 것과 반동적인 것

원한을 지닌 노예는 적에 대한 사랑이 없고, 적을 악으로
증오하며 자신을 선한 자로 생각한다. 우선 원한으로 
적으로서 악한 사람을 생각해 낸 다음 나중에 
그 대립물로서 자신을 선한 인간으로 생각해 낸다. 
그 반대로 귀족은 스스로자신을 두드러지게 하려고 
자신의 적을 요구한다. 존경할만한 적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노예는 ‘적에 대한 사랑‘을 결핍하고 있다.


- P35

고귀한 인간은 이미 자신의 적에게 얼마나 큰 경외심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경외심은 이미 사랑에 
이르는 다리이다. ・・・ 그는 자신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적을 요구한다. 그는 경멸할 것이 전혀 없고, 아주 크게 존경할 만한 적이 아니면 참을 수 없다! 

이에 반해 원한을 지닌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적‘을 
상상해보자 -바로여기에 그의 행위가 있고 그의 창조가 있다:
그는 ‘나쁜 적‘을, ‘악한 사람‘ 을 생각해내고, 사실 그것을 
근본 개념으로 거기에서 그것의 잔상 또는 대립물로 
다시 한 번 ‘선한 인간을 생각해 낸다- 그것이 자기 자신인 것이다!" (371). - P36

요약하면 고귀한 인간은 자기의 좋음에서 나쁨을 
만들어내지만, 노예는 증오에서 타자의 악함bose 을 
만들어 내고 자신을 선한 자gut로 규정한다. 
나쁨은 귀족적인 기원을 갖는 반면, 악함은 노예적인 
기원을 갖는다.  - P36

귀족적 가치에서 나쁨은 병렬적으로 나중에 보색
(2차)으로 나타나지만, 악함은 원형이자 시원이자 
노예 도덕이라는 구상에서 나온 본래의 행위다(1차), 
좋음 개념에 대치된 나쁨과 악함은 기원이 다르다. 
좋음과 나쁨 좋음(선)과 악에서 좋음은 다른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 나쁨은 2차적인 것이며, 악함은 1차적인 것이다.  - P36

여기서 누가 악한 자인지 물음을 제기해야 된다. 
왜 강한 지배자가 악한 자로 해석이 뒤바뀌었는가? 
좋은 사람, 고귀한 자, 강한 자, 지배자가 본래 악한 
사람이라는 가치평가는 변색되고 뒤바뀐 해석이다. 
그 원인은 독기 어린 눈으로 보는 노예 도덕이다. - P36

7. 문화는 야수를 길들이기 위한 것

문화는 금발의 야수를 길들이기 위한 잔인한 과정이다.
길들이기는 원한본능, 반응본능에서 비롯된 것으로 금발의야수에 대한 공포에서 생겨났다. 그 결과는 왜소화, 쇠약화
등 허무주의이다. - P37

"인간‘이라는 맹수를 온순하고 개화된 동물, 즉 가축으로 
길들이는 데 모든 문화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 어찌 되었든 
오늘날 진리로 믿어지고 있는데, 만일 이것이 진실이라면, 
고귀한 종족과 그들의 이상을 결국 모욕하고 제압하게 된 
저반응본능과 원한본능은 모두 의심할 여지없이 본래의 
문화의 도구라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 (374). - P37

근대의 유럽문화는 야수를 길들이기 위한 억압적이고 
보복적인 충동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은 인류의 퇴보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인류의 문화는 왜 발전하지 못하고 
퇴보하게 되었는가? 니체의 문화 일반에 대한 회의와 
반론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그것은 고귀한 종족인 
금발의 야수에 대한 공포와 경계심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 왜소한 자, 쇠약한 자들이 그런 감정에 사로잡혀 결국 인류는 문화를 통해진보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허무주의라는 문명의 비극적 퇴락으로 귀결되고 만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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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좌파의 신화

좌파와 우파의 선택은 아직도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곧바로 의심을 받는다. 
알랭 Alain은 이렇게 쓰지 않았던가! "좌파 정당과 우파 
정당의 대립, 좌파에 속한 자들과 우파에 속한 자들의 
분열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내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 질문을 던진 자가 
분명 좌파에 속한 자는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이런 판단을 수긍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성에 기초한 확신이라기보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 P17

리트레Litte 사전에 의하면, 좌파는 "프랑스 의회에서의 
반대당, 국회의장의 왼쪽에 자리 잡고 있는 정당" 이다. 
하지만 좌파라는 단어는 반대파라는 단어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정당들은 정권을 교대로 잡는다. 
하지만 좌파 정당은 정권을 잡아도 좌파로 남는다. - P17

좌파와 우파라는 단어의 의미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단언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즉, 정치 세력의 메커니즘에서 중도파가 계속 침해를 
받기 때문에 이 세력이 두 진영으로 분리되기 쉽다고 말이다.

게다가 그들은 다음 세 가지를 암시한다. 
태도가 근본적으로 다른 두 유형의 인간 또는 제도와 
용어의 변화를 통해 계속 대화하는 두 유형의 철학,
또는 마지막으로 여러 세기의 연대기를 채우는 투쟁에 
돌입하는 두 진영의 존재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두 종류의 인간과 철학과 진영은 드레퓌스
사건의 경험과 선거 사회학의 분명치 않은 해석에 현혹된 
역사가들의 상상속이 아니라면 다른 어느 곳에 존재하는가? - P18

지금까지 스스로 좌파로 여겨지고자 하는 여러 집단들 
사이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통일은 결코 없었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면서 명령어와 강령이 
계속 변한다. 어제 입헌제도를 위해 싸운 좌파는 
인민민주주의제 안에서 그 정당성을 주장하는 오늘의 
좌파와 아직도 어떤 공통점을 가지는가? - P18

회고적인 신화

프랑스는 좌파와 우파가 대립하는 나라로 여겨진다. 
영국에서는 이용어들이 2차 세계대전까지 정치적 언어로 
사용된 일이 거의 없었던 반면, 프랑스에서는 오래전부터 
그 존재 권리를 확보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좌파의 
위신이 아주 높아 보수 정당이나 중립 정당까지도 적대 
세력인 좌파의 용어에서 가져온 몇몇 수식어로 꾸미려고 
노력한다. 프랑스의 정당들은 공화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서로 경쟁하고 있다. - P18

최근의 여론에 따르면 두 가지 상황으로 인해 프랑스에서는
좌파와우파의 대립이 예외적으로 심해지고 있다. 
구제도의 지지자들이 고수해 온세계관은 기독교 교리에 
의해 고취되어 왔다. 프랑스 대혁명의 폭발을 야기한 
새로운 정신은 절대적 권위의 원칙에 정면으로 도전했는데, 그 권위는 실제로 왕과 교회의 권위였다. 

18세기 말과 19세기의 전반에 걸쳐 진보적 정당은 왕권과 동시에 교권에 맞서 싸웠고, 또 반교권주의로 기울었다. 
왜냐하면 교회의 위계질서가 반동 세력을 지지하거나, 
또는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17세기에 종교의 자유가 혁명 발생의 기회이자 중요한 쟁점이었다. 하지만 이 나라의 여러 진보적 정당들은 무신론적 합리주의보다는 오히려 독립교회파, 비국교과, 
급진파, 기독교파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 P19

프랑스에서는 구제도에서 근대 사회로의 이행이 아주 
끔찍하고도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도버 해협 건너편인 
영국에서는 입헌제도가 점차적으로 정립되었으며, 중세의 관습에서 시작된 대의제도가 의회에서 발달했다. 

18세기와 19세기에 민주제적 정통성이 군주제적 
정통성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채 그것을 대체하게 되었다. 
법 앞에서의 시민들의 평등으로 ‘신분‘ 구분도 점차 
일소되었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전 유럽을 휩쓴 이념들, 예컨대 
인민주권, 규칙에 맞는 권위의 행사, 대의제도, 개인의신분 차이의 철폐 등과 같은 이념들은 프랑스에서보다는 
영국에서 더 빨리 실현되었다. 그런 만큼 영국 국민들은 
프로메테우스처럼 사슬을 끊을필요가 없었다. 영국에서 
‘민주화‘는 대립하는 여러 정당들의 공동 산물이었다. - P19

프랑스 대혁명을 끔찍한 파국으로 보든 아니면 웅장한 
서사시로 보든간에, 이 혁명은 프랑스의 역사를 두 부분으로 나눈다. 이 혁명을 계기로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프랑스가세워진 것처럼 보인다. 그중 하나는 사라지기를 거부하고, 
다른 하나는 과거에 대해 가차 없는 도전을 계속 감행하고 있다. - P19

1789년 대혁명 이후의 프랑스 정치사는 ‘우파‘나 ‘좌파‘에 
속하는 당파가 통치하기 위해 단결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으며, 그 결과 차례로 정권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특징을 보여 준다. 이렇듯 좌파의 신화는1789년에서 
1848년까지 계속되는 혁명의 실패를 보충하기 위한 
허구적인 보상이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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