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8년의 2월 혁명과 6월 사이의 몇 달을 제외하면 
제3공화국의 수립까지 19세기 프랑스의 좌파는 항상 
반대였다. 그로부터 좌파와 반대의 혼동이 기인했다. 

좌파는 왕정복고에 반대했다. 왜냐하면 좌파는 스스로 
프랑스 대혁명의 상속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좌파는 
이 혁명으로부터 모든 역사적 요구, 과거 영광의 꿈, 
미래의 희망을 끌어냈다. 하지만 이 혁명을 계승했다고 
자처했던 좌파는 이 거대한 사건과 마찬가지로 모호했다. 
이 향수적인 좌파는 신화적인 통일만을 이루었을 뿐이다. 

- P21

좌파는 1789년부터1815 년까지 한 번도 통일된 적이 
없었다. 오를레앙왕국의 붕괴로 인해 공화국이 헌법상의 
공백을 메울 기회를 얻었던 1848년에도 좌파는 여전히
통일을 이룩하지 못했다. 물론 우파가 더 통일된 것도 
아니었다. 1815년나폴레옹의 몰락 후에 왕당파는 
구제도로의 복귀를 꿈꿨던 과격파와 현실을 받아들이려 
했던 온건파로 양분되었다. 루이 필리프의 등장으로 정통 
왕당파는 고립되었으며, 루이 나폴레옹이 승리했을 때 
오를레앙주의자들과 정통 왕당파는 찬탈자에 대해 모두 
적개심을 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타협에 이르지 못했다. - P21

과거를 돌아보면 대혁명의 업적으로 보였던 핵심적 
요소들이 왕정에 의해 점차 도입되는 경우도 별 어려움 
없이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대혁명을 일으킨 정신이 
왕정과 전적으로 화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프랑스왕국의 사상 체계가 뿌리부터 
흔들렸으며, 대공포 시대를 야기한 왕정의 합법성의 
위기가 초래되었다. 어쨌든 구제도는 거의 저항 없이 
일격에 무너졌으며, 또 그 뒤로 프랑스에서는 국민 
대다수의 환영을 받는 새로운 체제가 구성되기까지 
한 세기가 걸렸다는 것은 부인할 수없는 사실이다. - P22

대혁명의 사회적 결과들은 19세기 초부터 뚜렷하게 
나타났으며, 왕정복고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특권적 질서의 회복, 민법, 만인의 법 앞에서의 평등을 
뒤집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공화정과 왕정 
사이의 선택은 여전히 유예 상태였다.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은 의회 제도와 결부된 것이 아니었다. 

보나파르트는 민주주의 사상이란 명목으로 정치적 자유를 탄압했다. 그 당시에 활동했던 프랑스의 진지한 저술가들 
중에서 프랑스의 옹호자들에 맞서 대혁명의 계승자들을 
대표하는 통일된 의사를 가진 단일 좌파의 존재를 인정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진보적 정당이란 반대파들의 
신화였으며, 심지어 그 정당에 투표하는 실체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다. - P23

공화국의 잔존이 확실해지자 클레망소는 모든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혁명이란 하나의 진영이다"라고 선언했다. 이 주장은 좌파들 사이의 싸움이 종식되었음을 보여 준다. 
민주주의와 의회주의가 화해했고, 모든 권위는 인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게다가 보통선거를 통해 
전제 군주의 등극이 아니라 인민들의 자유 보장이 촉진되기도 했다. 자유주의자와 평등주의자, 온건파와 과격파는 더 
이상 서로 싸우고 제거할아무런 동기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여러 당파가 세웠던 목표가 마침내 동시에 달성된 것이다. 
보통선거로 시민의 법률상의 평등이 보장된 제3공화국은 
입헌적임과 동시에 민중적인 정체가 되어 스스로 혁명의 
진영이라는 영예로운 가상의 선조가 되었다. - P23

하지만 제3공화국의 강화가 부르주아 좌파들 사이의 
내분에 종지부15를 찍은 순간에 새로운 분열이 갑자기 
발생했다. 그런데 이 분열은(공상적 공산주의 운동의 
선구자였던 바뵈프François-Nol Babeur를 사형에 처한) 
바뵈프 음모 사건 이래로, 또 민주주의 사상이 생겨난 
때부터 잠재해 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좌파가 구제도에 반대하는 좌파를 계승한 것이다. - P23

하지만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경제활동의 국가 관리를 
주장하는 이새로운 좌파가 독단적인 왕정, 특권적 질서 
및 농업조합 조직에 맞서 반기를들었던 구좌파와 동일한 
철학과 목적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가? - P24

마르크스주의는 신좌파가 구좌파를 계승했다고 증언함과 
동시에 신구좌파 사이에 단절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제4계급은 제3계급의 뒤를 잇고,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봉건제도의 쇠사슬을 끊고, 지역공동체, 개인적 충성, 
지방에 대한 봉사라는 사슬에서 인민을 해방시켰다. 
전통적인 구속에서 해방되었으나그와 동시에 보호 
장치를 상실한 개인들은 이제 시장의 맹목적인 메커니즘과 전능한 자본가들의 힘에 방어 수단 없이 내맡겨졌다. 
이런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해방을 완수하고, 
자유주의 경제의 대혼란 대신에 인간적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 - P24

국가, 학파, 환경에 따라 사회주의가 가진 자유의 측면이나, 또는 조직의 측면이 따로 강조되었다. 부르주아지와의 단절을 강조하는 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또 때로는 대혁명과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자들도 있었다.

1914년 이전에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민주주의가 
내세우는 고유한 정치적 가치들에 기꺼이 무관심을 
표명했다. 또한 그들은 보통선거와 의회민주주의를 
굳건히 지지했던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이 채택한 태도를 
약간 경멸하면서 비난을 숨기지 않았다. - P24

프랑스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갈등은 
부르주아 좌파의 여러 당파 사이에 있었던 예전의 갈등과 
같은 대립을 보여 준다.  - P24

현실에서 이런 대립이 아주 격렬했던 만큼 더 격렬한 
언어로 그 심각성이 부정되고 있다. 최근까지, 어쩌면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 좌파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를 드물게 문자 그대로 해석했다. 

또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민주주의자들을 
포함해 그때까지의 모든 정권 담당자들 사이의 과격한 
대립 역시 드물게 인정했을 뿐이다. 좌파 지식인들이 
자발적으로 찬동했던 철학은 조레스의 철학이었다. 

그의 철학은 마르크스주의의 여러 요소들을 이상주의적인 형이상학과 개혁에 대한 신호에 결합시킨 것이었다. 
공산당은 ‘계급 대 계급의 대립이 극심했을 때보다도
인민전선Front populaire이나 애국적인 레지스탕스 
운동 속에서 훨씬 더 빠른진전을 보였다. 공산당에 투표한 
수많은 국민들은 여전히 다른 좌파 당파와 같은 임무를 
더 성공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이 당에서 계몽주의 운동의
계승자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 - P25

진보적 정당이 사후적으로 선과 악, 미래와 과거라는 
두 원칙 사이의대립을 고안해 낸 것은 바로 이 정당이 
25년간의 혼란 없이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가 제3계급과 
제4계급 양편의 대표들을 포함하는 하나의 좌파를 꿈꾼 
것은, 바로 이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가 노동자계급을 
다른 국민들과 통합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 P26

이런 좌파가 완전히 신화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투표자들 
앞에서는 가끔 통일 전선을 형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왕정복고로 인해 지롱드파, 자코뱅파, 보나파르트
주의자들이 다 같이 반대파로 전락했을 때에1789년의 
혁명가들이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연합한 것과 마찬가지로, 급진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도 역시 파악이 안 되는 적, 
곧 반동 세력에 맞서면서, 또 이미 시작되었을 때 시대에 
뒤진 교권주의에 대한 투쟁에서만 의견의 일치를 보았을 
뿐이었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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