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모자를 쓴 여자 새소설 9
권정현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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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동수와 나 '민'은 산을 뒤로하고 있는 아파트에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다.

그런 어느날 잠이 오지 않았던 민은 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는데, 의류수거함 옆에 모자를 쓴 여인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 웃으면서. 그때부터 웬지 모를 찜찜함이 들었다. 남편에게 말해도 남편은 내가 잘못본것이라며 한귀로 듣고 흘리는데,,  그 날 이후로 찜찜함과 같이 내가 강박증을 보이고 있는것은 아닌지, 자꾸 돌이켜생각하게 되고면서도, 그녀 주위에 누군가 맴돌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책은 민의 감정을 따라 움직인다. 대체 민은 왜 자꾸 주변을 의심하는 것일까? 얼마전 읽었던 고딕호러 책에도 고양이가 등장하는데, 고양이와 주인의 대결에서 보여지는 고양이는 정말 두려운 존재였다. 여기서도 민과 함께 사는 아들 동수의 반려묘 까망이가 등장하는데, 묘하다. 까망이는 오로지 동수만을 쫒고, 민을 경계한다. 민의 반려견 무지가 산책 길에 어딘가를 보며 계속 짖어대자 까망이는 무지를 공격한다. 그리고 무지는 눈을 잃는다. 대체 왜. 민을 지키는 무지, 동수를 지키는 까망이.


 민은 자신의 아이 은수를 잃고, 동수를 입양해 키우면서도, 여전히 은수를 보내주지 못한다. 그 때의 화장실이 민을 그토록 피폐하게 만든것일까. 다 털고 일어난듯하지만 여전히 민은 주변에 대한 의심을 풀지못한다. 민의 의심인것일까. 아니면 주변에 정말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상한 일들은 민을 점점 미쳐가게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민 스스로가 계속해서 스스로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일까.

책은 민의 눈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기에 무엇이 진짜 민의 생각인지를 읽고있다보면 점점 잊게 만든다. 민이 보고 있는 세상이 진짜일수도 아닐수도 있다는 여지를 계속해서 남긴채말이다. 

책을 읽고 있다보면 행복이 오는것도 가는것도 정말 순간으로 그려진다. 은수로 인해 행복했지만, 은수의 죽음과 함께 행복을 잃었고, 동수를 얻음으로 행복했으나, 민의 행복은 진짜 행복이 아니였다. 은수의 죽음을 놓아주지 못했고, 민은 여전히 불안했다. 그 검은 모자를 쓴 여인이 행복해 보였던 민의 삶 속에서 잠재되어있던 불행을 끄집어 냈고, 민은 다시 어떤 것도 믿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며도 타인에 대한 의심으로 분노를 숨기지도 못한다. 민은 스스로 잡고 있는 자신의 꼬리르 어떻게 해야 놓을 수 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책을 덮으면서는 민의 시간 모두가 민의 꿈이길 바랬다. 사실은 있을까!?


"제 꼬리를 물면 제자리를 빙빙 돌기만 하잖아요. 결국 수풀에 닿을 수 없는 운명이겠죠. 언젠가 치명적인 독이 온몸으로 퍼져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아요. "

"틀렸습니다."

.... 중략..

"우로보로스는 제 꼬리에 힘껏 이빨을 박아 넣어 허물을 벗겨냅니다. 생살이 찢어지는 아픔을 제 독으로 견디며 낡은 육체를 벗어버리죠."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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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인간에 대하여 - 라틴어 수업, 두 번째 시간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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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동일 교수님 책을 이 책으로 4권째 읽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시나 좋았다.

라틴어 수업의 두번째 수업이지만, 이 책은 좀더 신앙인으로써의 작가님 생각이 담겼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신부님에도 지금 종교가 가지는 모습이 실제 현실속에서 어떻게 보이고 있는지에 우회적으로 말씀하시는 부분이 시원했다는건 안비밀.


인간이 가지는 의미 human은 겸손(humilitas)이라는 생각에서 시작되었고, 그 근원은 비천한 신분, 상태를 말하는 의미라한다. 인간이 발전할 수 있었던 그 그원은 자신을 낮춤으로써 다른 타인을 인정하고, 배우고자하는 자세로부터 발전된 것이라고 말한다.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이런 인간이라는 말의 근원을 돌아보게 한다.


몇년전부터 계속해서 들리는 단어 혐오. 그 혐오의 발언들은 결국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 나와 같지 않은 것을 다름이아니라 틀린것으로 생각하는것. 그 시작이 우리를 혐오로 이끈다.

물론 그 "같지 않음"으로 인해 현재 발생되고 있는 것들의 역사를 현재 현상만을 놓고 판단하기에 무리가 있다는 것은 알 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작가님도 말씀하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싸움. 사실 현재는 일방적인 폭행이긴 하지만. 제 3자의 입장이기에 쉽게 이해할수 없다는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동일한 신을 믿는 두 종교의 분쟁은 종교가 가지는 보편적인 믿음을 놓고 볼 때 더 안타까움이 든다. 종교가 인간에게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지, 그들의 종교가 비 종교인에게 어떤 의미로 비춰지기를 바라는지를 돌아본다면, 어떨지. 그저 안타깝다.

 책에서 언급되진 않았지만, 다름을 인정해야 하는 것은 우리 사회 속에서도 많이 보인다. 남녀의 대립, 청장년층의 대립,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선 등등 다름을 인정한다면,  근본적으로 분노가 상대가 아니라 무엇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를 바라보는 이성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의 갈등은 많이 사라 질텐데 하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


그리고 책에서 언급된 것중 종교의 자유에 대해 상대적인 자유와 절대적 자유의 부분.

비 종교인으로써 펜데맥 2년을 보내는 동안, 모여서 예배를 금지한다는 당국의 요청에 종교의 자유를 부르짖는 부분이였다. 종교를 포기하라는것이 아닌데, 왜 저러나 하는 생각이 있었다. 물론 일부이긴 했지만.

그 부분에 대해 저자는 신앙의 자유와 신앙실천의 자유가 나뉜다 말한다. 신앙의 자유는 절대적 자유이지만, 신앙실천의 자유는 공동체의 질서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지켜지는 상대적 자유라는 부분이였다. 몇몇 기독교에서 나오는 말들이 종교의 자유라는 이름하에 타인에게 해당 종교에 대한 혐오를 더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봤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라틴어 수업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이였다면, 이 책은 종교인들을 위한 수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갈수록 종교를 믿는 사람은 줄어드는 것인지, 일반인의 시선에서 종교에 대한 혐오가 왜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신앙인 스스로 돌아보라는 측면이 강하게 느껴지는 책이다. 

 그 측면 외에도 생각을 조금 돌려보면 내가 가지는 편견에 기반한 생각으로 보여지는 배타적인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하고 나를 돌아보게도 한다. 타 문화에대한 이해 없이, 내 생각에 근거해 그 문화를, 사람을 폄훼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집단에 대한 믿음은 그 공동체를 유지하는 근원이 되기도 하지만, 요즘같은 세계화 시대에 공동체에 매몰되어 타 문화를 무조건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발전이 아니라 퇴보가 되는지도 모른다.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배타적인 입장 또한 옳은 태도는 아니라는것.


인간이라는 말의 근원, ‘겸손’이라는 뜻을 다시 되새긴다.

강력추천!


‘신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도 인간이고, 신을 옹졸하게 만드는 것도 인간입니다.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이 필요로 하는 신을, 인간의 욕망에 따라 옹졸하고 속 좁은 또 다른 ‘인간’처럼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p.242


"본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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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트 - 왜 혐오의 역사는 반복될까
최인철 외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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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혐오"라는 단어는 그 짧은 인생중에서도 최근 몇년 전부터 들린 단어다. 대체 혐오는 어디서 왜 시작되었을까. 요즘 우리사회를 뒤덮는 혐오에 대해 우리나라 여러 석학들의 강연과 대담을 모아놓은 책이다.


"저는 우리의 생존이나 행복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여겨진 부분들이 잘못 작동이 되어 생긴 파편이 혐오일 수 있다는 주장을 하려고 합니다." p.36

이 글을 보는 순간 뭔가 쾅하고 울리는듯 했다.  이 말은 공감과 혐오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혐오에 대한 대책으로 타인에 대한 깊은 공감이 어느 시기보다 필요한 때이라고 생각을 했던 내게, 혐오가 시작되는 그 근원이 공감일수 있다니... 내가 속한 in-group에 대한 애정과 공감이 과도할 경우, 해당 그룹에 속하지 않은 상대 즉 out-group을 폄하하는 혐오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혐오는 다른 집단을 미워하는 것이면서, 내 집단에 대한 애정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에서 지금 우리가 가지는 집단에 대한 혐오가 어떤 뿌리를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선택적 공감이라.


혐오의 시작은 구분에서 시작한다. 나와 타인의 구분, 내집단과 외집단의 구분 말이다. 그리고 사회가 힘들어지고,  흔들리거나(경제이슈), 전염병 등의 안전이 위협받는 경우, 우리는 문제의 원인을 그 근원에서 찾는것이 아니라, 외집단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이질적인 대상을 통해 그 문제를 전가한다.  편견과 차별, 배제, 혐오를 통해 말이다. 이런 분란을 조장하는 매체로 미디어가 대표적이다. 과거에는 공영방송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플랫폼을 통해 보다 알고리즘을 통해 편향된 정보를 취득, 가진 편견이 보다 확고해지게 만듬으로써 다른 의견을 가짜 뉴스로 취급, 완벽하게 확증편향에 빠진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혐오는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것처럼 보이는것일까. 이 원인을 1. 침묵의 나선형 모델, 2. 연쇄 하강효과, 3. 집단 극화로 설명한다. 침묵의 나선은 목소리를 내는 의견이 지배의견이 아닐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지배적인 의견과 다른 목소리를 냄으로써 집단으로부터 소외나 공격을 당하는것이 두려워, 말을 하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고 한다. 사실 기사나 특정 동영상이 아닌것 같아도 그 댓글에 다르다는 의견을 잘 쓰지 않는다, 특히 댓글에서 그 기사나 동영상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가득차있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내가 공격당할 수 있음을 알기에 더 그렇다. 그렇다면 내가 내지 않는 목소리는 그저 소수의견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소의 의견이 아닐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연쇄 하강효과는 그런 글이나 동영상에 별 의견없이 보다가, 댓글을 보고 이것이 지배의견인가?!하는 생각으로 동조하는 현상을 말한다. 집단극화는 이미 같은 의견을 가진 이들이 집단속에서 더 편향적으로 더 극단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말한다. 완전 잘못된 정보라면, 이성이 동작할 수 있겠으나, 우리나라 제주에 들어왔던 예맨 난민에 대해 우리가 당시 보였던 기사나 댓글을 본다면, 위 3가지가 딱 들어 맞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런 혐오를 줄이기 위해 나오는 대책 중 하나로 대항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혐오표현에 대한 미러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여, 상호주관적 규범 및 가치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고, 진정성과 관련된 주장을 통해, 혐오에 대한 대처 방안을 말한다. 이 것은 결국 위에서 말한 침묵의 나선형에 대항하여 나의 의견을 밝힘으로써,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게 함으로써 혐오의 내용이 지배적 의견이 되는것을 방지하고, 그 의견에 다른 이들이 집중하는 것을 막는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정당한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타인을 비하,차별,배제하는 등의 혐오의 근절을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 대책으로 책은 교육을 말한다.  이런 교육은 아이들을 말하기도 하지만, 우리 스스로도 우리가 가지는 정보의 한계를 이해하고, 판단의 오류를 늘 염두함으로써, 나의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노력이 없을 경우, 앞으로 우리는 어떤 미래를  맞이할지, 과거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인종주의의 편견이 만들어낸 홀로코스트. 홀로코스트는 2차 세계대전으로 끝난것이 아니다.  여전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분쟁의 중심에 있고, 현재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버린 요즘이다. 그리고 르완다 대학살. 역시 인종에 대한 분류로 후투와 투치의 100일동안의 피비린내 난 내전은 그들을 모두를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만들었다. 그 전에는 십자군 전쟁과 페스트, 마녀사냥등의 역사를 우리는 거쳐왔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여, 그 차별을 두었고, 당시의 문제의 근원을 타인에게 찾음으로써 벌어진 일들이였다. 지금의 혐오양상과 다를 것이 하나 없다.


타인에 대한 인정과 존중, 인류로서 갖는 보편성과 공통성을 기반에 두고 소통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그 어느때보다 필요하다.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생각을 기반으로 이런 생각을 직접적인 행동으로 표출하여, 보다 활발한 공론의 장이 필요하다. 그런 행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여론을 형성하여 긍정적인 효과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참 적극적이여야 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침묵의 나선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말이 또 다른 혐오가 되지 않도록 말해야 하는것을 의미하면서도, 혐오에 대한 미러링이 아니여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 스스로 감정을 잘 다스릴 수 있어야 하는 문제인지라. ㅎ


당장 내일부터 뭔가 바뀌진 않겠지만, 이런 책들은 나를 환기시킨다. 사실 예맨 난민이 입국했을 당시 나도 많이 불편했다. 그들이. 그리고 불편했던 내 자신이 불편하기도 했다. 뭔가 모순적인 감정 속에서 뭐지.. 했었는데,,,, 이젠 난민이라는 단어에 불편함이 생기지는 않는다. 유럽과 우리나라는 다르다. 유럽에서 보여지는 일부인의 모습이 모든 난민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 나라에선 다수자의 입장이지만 외국에 가면 소수자이다. 누군가는 우리를 불편해 할 것이고, 그 사실에 우리는 상처받을 것이다. 지금 유럽, 미국에서 동양인에 대한 혐오에 상처받고, 공격에  두려운 것처럼. 결국은 역지사지다. 내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될 수 있는 것이 혐오다. 반복되는 역사를 미래에 주지 말자. 


진짜 진짜 강력추천!


"이스라엘 히브리대학 철학과 예후다 엘카나 교수가 1987년도에 <하아레츠>라는 이스라엘 신문에 썼어요. 

제발 이스라엘인들이여, 유대인들이여, 우리는 잊자. 우리가 어느덧 나치의 심성을 갖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가장 닮지 않고자하는, 그 나치와 닮은 행동을 보이는데, 이렇게 되면 이것이야말로 나치가 제일 바라던 거 아닌가? 우리가 유일하게 간직할 수 있었던 게 도덕적인 정당성이었는데 그걸 잃어버린 우리는 뭔가, 우리는 잊자. 그리고 그 대신 가해자 측과 제 3자들이 과거의 비극을 기억하도록 요청하자고 하는 유명한 사설을 썼어요." p.379


"본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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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시 계몽 - 이성, 과학, 휴머니즘, 그리고 진보를 말하다 사이언스 클래식 37
스티븐 핑커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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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발전해가고 있는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담긴 책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정말 발전해가고 있는 것 일까? 근데 이 질문에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면 인간은 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 일까. 왜 인간은 인간의 역사를 놓고 볼 때 발전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지금은 늘 제자리 걸음 이거나 퇴보된다고 느끼는 것인지.

 인간 역사의 시작은 무지 했고, 그랬기에 미신에 의지했다. 그런 미신에 의해 현재가 아닌 죽은 이후의 행복을 그리는 등의 집단망상(?)에 시달리다가  르네상스와 함께 도시화, 기술발달, 글자, 인쇄술의 발달로 계몽 사상이 싹텄다. 그것은 곧 인간의식의 향상을 가져왔고 인간의 공감범위를 확대, 집단에서 인간 개인으로 시선이 이동되었다. 집단 인식에서 개인으로 인식으로 시점이 전환되고, 소수가 가지는 특권적 지식이 아닌 전체의 보편적 지식으로 퍼져나감에 따라 인간은 어떻게 진보되어 왔는가? 그 진보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에 대해 저자는 생명, 건강, 식량, 부, 불평등, 환경, 평화 안전 등에 대해 설명한다.


핑거교수는 우리가 고대나 중세시대 보다 나아진게 없다면, 우리가 현재를 어떻게 평가하든 아무 의미가 없으므로, 인간 그 자체를 중심으로 보기 시작한 계몽주의의 시작부터 인간의 진보를 제대로 평하기 위해, 각 주제별로 계몽과 진보의 역사를 정확히 짚어봄으로써 우리가 이뤄낸 결과를 객관적인 수치로 평가하고, 진보라는 개념에 대해 조장되어진 두려움의 실체를 파악하고, 앞으로 우리가 보다 나은 미래를 건설하기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말한다.

 

물론 삶의 전반이 나아졌으나, 여전히 굶주리는 아이들, 내전속에 살아야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안정된 국가에서 사는 중산층들은 자신들의 기반에 대한 안정감이 없다. 과거보다 나아졌다고 지금이 더 좋다 말하는 저자에 왜 불편한생각이 자꾸 드는지. 이런 감정을 저자는 저널리즘의 습성과 내가 가지는 인지편향이 맞물린 결과라 한다.  그런 효과를 가장 잘 요약해서 보여주는 말이 ‘악이 선보다 강하다’p.84 라는 말이며, 사람의 기본적인 성향은 수익보다는손실을 두려워하고, 칭찬에 대한 기쁨보다는 비판에 대한 두려움에 더 괴로워하는 부정편향의 영향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살짝 불편한 부분은 있다. 


 불평등, 즉 상대적 불평등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에서도 수치를 통해 불평등이 감소했다고 근거를 제시하지만, 글쎄.. 불평등이 인간이 퇴보했다는 말도 아니고, 불평등이 반드시 나쁜 효과만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적절한 불평등은 인간이 더 나아가야한다는 동력이 되기도 하나, 자본 계층간의 이동이 더 힘들어지는 요즘이 1960년대보다 하위계층이 줄어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맞는말 일까? 전쟁 직후 사회 전체의 기반이 바닥으로 떨어져있던 시기에서  올라간 것과 지금같이 소득 계층이 분명한 사회 속에서 계층간 이동이 불가능해진것이 정말 나아졌다는 증거일까?! 수치상으로 보여지는 것과 체감상 느껴지는 진보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 생각을 내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이 부분을 저자는 부정편향, 정확한 수치에 의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부분만 보게 되는 정체성 보호 인지라고 했다.)


환경에서도 석탄이 고갈되기 전에 석유나 천연가스를 찾아낸 인간은 지구의 자원을 100% 고갈 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전환하면서 발전한다는 저자의 말에 그렇다면 그게 맞는 방향인지에 대한 고민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간 방향이원자력인데, 그럼 원자력은 더 나은 방향인가? 그 폭팔 한번으로 지구 전체에 인류가 살지 못할 수도 있는데....


분명 최근 200년간 우리는 인류사 전반에 걸쳐 고대나 중세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이뤄냈다. 

식량,생명, 건강, 안전, 평등권 등등 거의 모든것에 대해. 또한 저자가 말했든 여전히 내전이나 전쟁으로부터 위협받는 곳이 있으나 분명 과거에 비해서 인류의 생존권의 위협은 수치상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줄어든것도 맞다. 과학의 발전이 인류발달사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과학 그 자체가 잘못됨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과학의 발전 그 자체가 문제 였던 것이 아니라, 이용하고 만들어내는 인간의 잘못된 생각이 문제였으며, 그렇기에 우리는 수학적 통계과 과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객관적 이성판단이 앞으로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내가 가지는 편향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이성적 판단을위해 교육에서부터 특정 문제의 양쪽 면을 모두 보고, 자신의 견해로 증거를 바탕으로 논증, 호소, 흑백놀리 등과 같은 논리적 오류를 찾는 등의 교육이 반드시 필요함을 말한다. 그런 교육은 결국 인간이 어떤 편향성을 가지더라도, 생각의 오류가 있다면 그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연성을 갖게하기 때문이다.(사실 이부분이 제일 어려울듯..) 이 부분과 맞물려 인간의 감이라고 불리는 주관에 의지하는 판단이 아닌 사실적 통계, 팩트를 바탕으로 한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저자의 의견에 불편함이 있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저자가 너무 긍정적으로 현재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였다. 저자의 말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잘 해왔기에 앞으로도 잘 해내갈것이라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기저에 깔려있달까. 사실 인간은 많은 실수를 통해 과거의 잘못을 보완해왔다.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전쟁은 가해국이나 피해국 모두에게 손해임을 알았고, 그 때 사용했던 핵은 우리 모두를 비극으로 만들 무기라는 것을 알았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통해 원전의 위험성을 알았다. 그렇기에 각 나라가 각종 규약과 단체의 협약을 통해 더 이상의 전쟁을 막고자, 서로의 손해와 이익을 조금씩 나눠가졌고, 원자력 발전에 안전기준은 날로 강화되고 있다. 이것 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보완하며, 크게 보면발전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 셈이 아닌가. 인간이 늘 긍정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너무 밝게보는 모습이 불편했는지도.)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나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다만 접근 방식의 차이가 있을뿐.

아마도 저자가 이 책을 읽기 원하는 분들은현재 우리가 가지는 기후위협, 핵확산(사실 핵은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사실), 탈레반, IS 등과  테러세력 등으로 인해우리가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매우 비관주의적인 생각을 하는 분들을 대상으로 쓴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ㅎㅎ 아니면 우리가 잘 해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회의감을 가진 분들 이려나.

아무튼 과거에 비해 나아진것이지, 앞으로도 나아질 것이라는 보장은 사실 없다.ㅋ 하지만 우리가 불안에 대처하고, 위험을 인지함으로써 보완하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은 맞다. (물론 모르는 사실이 있을수도.) 그러니 지금 상황이 조금 안좋아 보이더라도, 잘 헤쳐나갈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지금 다시 계몽.


“진보의 궁극적인 형태는 세계의 미적, 지적, 사회적, 문화적, 자연적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이 뷔페처럼 차려져있는 카페테리아에서 사람들이 접시에 무엇이든 마음껏 담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게 아닐까 한다” p.381


"본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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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 미래보고서 2022 - 펜트업, 멈췄던 소비가 폭발한다 지갑을 열 IT 기술들
현경민 외 지음 / 비즈니스북스 / 2021년 9월
평점 :
절판


"2021년 온택트였다면, 2022년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무엇일까? 바로 펜트업(Pent-up)이다. 펜트업은 외부요인으로 억눌린 소비심리가 폭팔하는 '펜트업 효과(Pent-up Effect)'에서 따온말로 이 책에서는 코로나19 이후 바뀐 소비 패턴에 대응하기 위해 등장한 IT 산업과 기술트랜드를 설명한다" p. 6


2019년말에 시작된 코로나19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작년에는 2021년에는 끝나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하루 확진자가 2000명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2022년 모바일 생태계는 무엇이 중점이 될것인가?에 대한 보고서이다. 

책의 전반은 새로운 기술의 도입보다는 2020~2021년동안 순식간에 변해버린 언택트 일상에 대해 보다 견고한 기술이 인간생태계 전반으로 펼쳐질 것이라 말한다. 그것을 저자는 "펜트업"으로 명했다. 

그저 게임으로만 치부됬던 메타버스가 일상으로 진입을 시작했고, 로블록스나 제페토라는 가상세계에서는 이미 일상, 경제, 부동산등의 일상과 유사한 생태계가 형성되어있다. 그 안에서 물건을 사고 팔수 있고, 그런 가상 화폐들이 일상 화폐로의 전환도 가능해진 지금 페이스북은 오큘러스를 통해 VR을 시장을 선점하고 있고, 그것을 통해 로블록스나 제페토보다 생생한 메타버스 세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그안은 물론 페이스북 전반에서 사용가능한 가상화폐 리브로를 도입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메타버스라는 환경 속에서 이미 많은 기업들이 회의나 세미나를 주최하고 있고, 일부 대학교는 그 속에서 졸업, 입학식을 하기도 했다. 아직 먼 기술 아닌가 싶지만, 이미 사용 중인 기술인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메타버스의 기술력이 영화 아바타나 레디플레이어원에서 보여지는 기술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시작 단계이지만, 이미 펜데믹을 지나 엔데믹을 준비하는 지금 펜데믹 이전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인 지금, 앞으로 메타버스라는 가상환경이 어떻게 뻗어나갈지는 지켜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올 한해 개인적으로 가장 많은 알림을 받았던 "LIVE ON". 라이브스트리밍. 

물론 라이브스트리밍은 넷플릭스와 같은 OTT 서비스도 있지만, 줌, 클럽하우스 같은 소통형 스트리밍 서비스도 포함이다. 이런 서비스들의 흥(줌), 망(클럽하우스)의 결과에서 무엇이 그 성패를 갈랐는지를 책을 통해 알았는데, 결국 모바일 Only 세대를 끌어들였는가, 아닌가에 대한 부분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바일 시장의 선점은 확실히 30-40대가 아닌 10-20대를 시장안으로 당길수 있는지 여부에 달렸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의 이탈을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넷플릭스나 디즈니의 노력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장으로이 진입도 어렵지만, 그 진입을 유지하는것은 보다 더 대단한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현실이다. OTT 서비스 외에도 줌이나 클럽하우스의 시장 점유 또한 앞으로 서비스를 어떻게 확장시킬 것인지에 대한 부분도 지켜볼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둘의 장단점이 명확하기에.


그리고 코로나19의 펜데믹을 통해 알게된 환경보호. 환경보호의 IT적인 방법에서 빅테크 기업에서 어떻게 데이터센터를 유지하는지를 보고 꽤 놀랐다. 사실 IT는 환경과 크게 관련이 없을 듯해보이지만 그 어마어마한 데이터센터를  유지하기위한 전기소모량을 생각해보면 결코 친 환경적이지 않다! 그런 전기의 기본 원료의 원천이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사용량을 줄이지 않는다면 원천 데이터로 친환경 에너지를 쓴다한들 크게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런 일환에서 바다 속 데이터센터 운영방식(열을 식히기 위한 노력)을 보고 있자니, 내가 모르는 곳에서 꽤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런 노력이 그들의 수익구조에 영향을 미치기에 하는 노력이겠지만, 그 방향을 틀게끔 만드는것이 소비자이기에 소비자들이 생각하는 환경에 대한 경각심이 꽤 높아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부분은 정말 박수!


이밖에도 AI, 5G망의 기술 UP, 빅테크를 통한 금융플랫폼과 CBDC에 대한 변화에 대해 책은 예고한다. 사실 개인적으로 2021년의 기술에서 트랜드가 크게 변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기술 그 자체는 보다 견고해지고, 더 상세해진 느낌이랄까. 막연했던 것들에서 보다 상세해지고, 가야할 방향이 뚜렷해진 느낌이다. 확실히 펜데믹 이전과는 모바일 트랜드부분에서는 많이 달라졌고, 속도가 빨라졌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많은 기업들이 트랜드의 중심에 서기 위한 노력과 함께, 보안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AI비서, 금융플랫폼, 원격의료 등등 편리하고 쉽게 모든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는 사용성의 개선과 어울러 개인의 정보를 어떻게 보호하고 있고, 기업이 개인의 정보를 편의대로 유용하지 않는 등의 대책이 마련되고 있는 것인지. 자구적인 대책은 물론 국가에서 법안과 같은 대책은 논의되고 있는것인지에 대한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AI 챗봇 이루다를 통해 이미 그 심각성을 우리모두 한번 보지 않았는가!


정말 많이 변해가는 세상이다. 그런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조심해야할지. 그리고 다음 세대의 IT는 어떤 모습일지를 상상해보게 하는 책이다.(사실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너무 휙휙 바뀌고 있는 요즘이라...)


"본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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