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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트 - 왜 혐오의 역사는 반복될까
최인철 외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21년 9월
평점 :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혐오"라는 단어는 그 짧은 인생중에서도 최근 몇년 전부터 들린 단어다. 대체 혐오는 어디서 왜 시작되었을까. 요즘 우리사회를 뒤덮는 혐오에 대해 우리나라 여러 석학들의 강연과 대담을 모아놓은 책이다.
"저는 우리의 생존이나 행복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여겨진 부분들이 잘못 작동이 되어 생긴 파편이 혐오일 수 있다는 주장을 하려고 합니다." p.36
이 글을 보는 순간 뭔가 쾅하고 울리는듯 했다. 이 말은 공감과 혐오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혐오에 대한 대책으로 타인에 대한 깊은 공감이 어느 시기보다 필요한 때이라고 생각을 했던 내게, 혐오가 시작되는 그 근원이 공감일수 있다니... 내가 속한 in-group에 대한 애정과 공감이 과도할 경우, 해당 그룹에 속하지 않은 상대 즉 out-group을 폄하하는 혐오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혐오는 다른 집단을 미워하는 것이면서, 내 집단에 대한 애정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에서 지금 우리가 가지는 집단에 대한 혐오가 어떤 뿌리를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선택적 공감이라.
혐오의 시작은 구분에서 시작한다. 나와 타인의 구분, 내집단과 외집단의 구분 말이다. 그리고 사회가 힘들어지고, 흔들리거나(경제이슈), 전염병 등의 안전이 위협받는 경우, 우리는 문제의 원인을 그 근원에서 찾는것이 아니라, 외집단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이질적인 대상을 통해 그 문제를 전가한다. 편견과 차별, 배제, 혐오를 통해 말이다. 이런 분란을 조장하는 매체로 미디어가 대표적이다. 과거에는 공영방송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플랫폼을 통해 보다 알고리즘을 통해 편향된 정보를 취득, 가진 편견이 보다 확고해지게 만듬으로써 다른 의견을 가짜 뉴스로 취급, 완벽하게 확증편향에 빠진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혐오는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것처럼 보이는것일까. 이 원인을 1. 침묵의 나선형 모델, 2. 연쇄 하강효과, 3. 집단 극화로 설명한다. 침묵의 나선은 목소리를 내는 의견이 지배의견이 아닐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지배적인 의견과 다른 목소리를 냄으로써 집단으로부터 소외나 공격을 당하는것이 두려워, 말을 하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고 한다. 사실 기사나 특정 동영상이 아닌것 같아도 그 댓글에 다르다는 의견을 잘 쓰지 않는다, 특히 댓글에서 그 기사나 동영상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가득차있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내가 공격당할 수 있음을 알기에 더 그렇다. 그렇다면 내가 내지 않는 목소리는 그저 소수의견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소의 의견이 아닐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연쇄 하강효과는 그런 글이나 동영상에 별 의견없이 보다가, 댓글을 보고 이것이 지배의견인가?!하는 생각으로 동조하는 현상을 말한다. 집단극화는 이미 같은 의견을 가진 이들이 집단속에서 더 편향적으로 더 극단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말한다. 완전 잘못된 정보라면, 이성이 동작할 수 있겠으나, 우리나라 제주에 들어왔던 예맨 난민에 대해 우리가 당시 보였던 기사나 댓글을 본다면, 위 3가지가 딱 들어 맞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런 혐오를 줄이기 위해 나오는 대책 중 하나로 대항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혐오표현에 대한 미러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여, 상호주관적 규범 및 가치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고, 진정성과 관련된 주장을 통해, 혐오에 대한 대처 방안을 말한다. 이 것은 결국 위에서 말한 침묵의 나선형에 대항하여 나의 의견을 밝힘으로써,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게 함으로써 혐오의 내용이 지배적 의견이 되는것을 방지하고, 그 의견에 다른 이들이 집중하는 것을 막는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정당한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타인을 비하,차별,배제하는 등의 혐오의 근절을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 대책으로 책은 교육을 말한다. 이런 교육은 아이들을 말하기도 하지만, 우리 스스로도 우리가 가지는 정보의 한계를 이해하고, 판단의 오류를 늘 염두함으로써, 나의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노력이 없을 경우, 앞으로 우리는 어떤 미래를 맞이할지, 과거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인종주의의 편견이 만들어낸 홀로코스트. 홀로코스트는 2차 세계대전으로 끝난것이 아니다. 여전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분쟁의 중심에 있고, 현재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버린 요즘이다. 그리고 르완다 대학살. 역시 인종에 대한 분류로 후투와 투치의 100일동안의 피비린내 난 내전은 그들을 모두를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만들었다. 그 전에는 십자군 전쟁과 페스트, 마녀사냥등의 역사를 우리는 거쳐왔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여, 그 차별을 두었고, 당시의 문제의 근원을 타인에게 찾음으로써 벌어진 일들이였다. 지금의 혐오양상과 다를 것이 하나 없다.
타인에 대한 인정과 존중, 인류로서 갖는 보편성과 공통성을 기반에 두고 소통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그 어느때보다 필요하다.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생각을 기반으로 이런 생각을 직접적인 행동으로 표출하여, 보다 활발한 공론의 장이 필요하다. 그런 행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여론을 형성하여 긍정적인 효과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참 적극적이여야 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침묵의 나선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말이 또 다른 혐오가 되지 않도록 말해야 하는것을 의미하면서도, 혐오에 대한 미러링이 아니여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 스스로 감정을 잘 다스릴 수 있어야 하는 문제인지라. ㅎ
당장 내일부터 뭔가 바뀌진 않겠지만, 이런 책들은 나를 환기시킨다. 사실 예맨 난민이 입국했을 당시 나도 많이 불편했다. 그들이. 그리고 불편했던 내 자신이 불편하기도 했다. 뭔가 모순적인 감정 속에서 뭐지.. 했었는데,,,, 이젠 난민이라는 단어에 불편함이 생기지는 않는다. 유럽과 우리나라는 다르다. 유럽에서 보여지는 일부인의 모습이 모든 난민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 나라에선 다수자의 입장이지만 외국에 가면 소수자이다. 누군가는 우리를 불편해 할 것이고, 그 사실에 우리는 상처받을 것이다. 지금 유럽, 미국에서 동양인에 대한 혐오에 상처받고, 공격에 두려운 것처럼. 결국은 역지사지다. 내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될 수 있는 것이 혐오다. 반복되는 역사를 미래에 주지 말자.
진짜 진짜 강력추천!
"이스라엘 히브리대학 철학과 예후다 엘카나 교수가 1987년도에 <하아레츠>라는 이스라엘 신문에 썼어요.
제발 이스라엘인들이여, 유대인들이여, 우리는 잊자. 우리가 어느덧 나치의 심성을 갖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가장 닮지 않고자하는, 그 나치와 닮은 행동을 보이는데, 이렇게 되면 이것이야말로 나치가 제일 바라던 거 아닌가? 우리가 유일하게 간직할 수 있었던 게 도덕적인 정당성이었는데 그걸 잃어버린 우리는 뭔가, 우리는 잊자. 그리고 그 대신 가해자 측과 제 3자들이 과거의 비극을 기억하도록 요청하자고 하는 유명한 사설을 썼어요." p.379
"본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