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6 - 사과
박솔뫼 외 지음 / 북다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 받아 개인적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수상작품집은 매년 찾아보는 편이다. 어떤 주제들이 올해는 등장했는지, 단편소설들을 보며 한해의 문학 경향을 보는 기분이 꽤 좋기 때문이다.

단편소설은 밀도가 굉장히 높은 소설들이다. 짧은 소설안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을 녹여내야 하니까.

근데 올해의 이효석문학상은 굉장히 정적인 느낌이였다.


“박솔뫼 작가의 사과”

올해의 대상작품이면서 어떤 작품보다도 정적이였다. 그냥 길을 걷는 어떤 한 사람의 하루를 보는 느낌이랄까. 그 안에는 애리와 선호의 연애인가 싶은 연애 이야기도 있었지만, 작가의 말처럼 “정처없는 하루”라는 느낌의 소설이다. 느낌엔 정말 사실적인 우리의 하루같은 느낌이면서도 굉장히 모호한 누군가의 하루인것 같은 느낌이랄까. 뚜렷하지 않은 하루.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하루이면서 의식하지 않은 채 그저 살아내고 있는 오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박솔뫼 작가의 사과는 정말 누구나 가지는 하루이면서, 블러처리 되어 있는 하루이기도 했다. 정말 신기했던 소설.


내게 슬펐던 소설 “황시운 작가의 일일업무 보고서”

아주 오래전에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라는 장애인 변호사님이 쓴 책을 본적이 있다. 담담하게 쓰여진 글이 내게는 꽤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책이다. “이동권”이라는 말이 주는 이질감. 너무나 당연했던 나의 이동이 누군가에는 주장해야할 무엇. 그리고 그 주장의 바탕엔 그들의 생존이 달려있었다. 이 소설이 그랬다. 어떤 동정이나 연민, 과장이 없이 누군가의 하루가 이토록 처절할 수 있을까. 아무도 읽지 않는 일일 보고서를 쓰는 일을 하는 세진. 사고 소송으로 받은 돈으로 빠듯하게 살아가는 세진에게 돈을 요구하는 가족들. 그리고 장애인으로 보조인을 통해 자신의 용변을 해결하는 그녀의 일상은 비장애인의 하루보다 고되다. 나가는 일조차, 먹는 일조차 그녀의 몸에 묶여버린 하루. 그럼에도 그녀에게 끊임없는 요구를 하는 가족. 담담하게 쓰여진 작가님의 글이 나를 더 숨막히게했던 이야기.


”장희원 작가의 영주“

글을 쓰는 우진을 찾아온 영주. 영주는 우진의 옆에서 죽고 싶다고 했다. 영주는 우진이 학창시절 괴롭혔던 이였다. 그리고 ”내가 죽는 순간에,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p.157

라며 서늘한 말을 건낸다. 영주는 여름을 넘기고 겨울의 초입까지 버텼다. 우진의 옆에서. 이 소설을 읽으며 왜 이토록 처연한 느낌였을까. 영주는 자신을 죽음을 우진에게 지켜보게 함으로써 자신을 괴롭혀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그녀의 과거를 우진에게 심어주는것 같았다. 오롯하게 자신의 시간을. 그리고 우진은 별것 아닌 글이였지만 자신이 더이상 글을 쓸 수 없음을알고, 그녀역시 영주가 죽어가는 시간 속에 묻혀버리는 느낌이랄까.

가해자, 피해자라는 서사와 역할의 반전이라기보다 절망에 갇히는 누군가의 삶을 아주 느린 시선으로 어떤 말도 할 수 없이 지켜보는 느낌이. 차가웠고, 무서웠던 소설.


수상작품집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내가 가지는 어떤 정형화된 생각이 조금씩 무너지는 느낌이다. 틀안에서 이럴꺼야, 저럴꺼야 하는 그런 생각의 경계가 조금씩 바뀌는 느낌이랄까. 그것이 문학이 주는 힘이면서, 그렇게 서서히 변해가는 시간에 젖어들게 만드는 것 같았다. 

앞서 언급한 세 작품 외에도 “임솔아 작가의 나의 빈묘에”는 가족이라는 경계를 “성혜령 작가의 하악”은 장애인과 비장인의 구분을 통해 내가 무엇을 배제하고 타자화 하는지를 꼬집는다. 


추천.

여전히 문학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주와 연
청예 지음 / 래빗홀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청예작가님의 이야기는 도무지 종잡을수가 없다. 어떻게 이런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평온하게 쓸 수 있는 것이지?! 그저 불륜에 대한 복수인가 싶었던 이야기는 나를 종잡을 수 없는 곳으로 끌고 갔다.

한글로는 “주와 연”이지만, 책 표기에 ‘와‘의 표기는 정말…


아버지가 바람을 폈고, 엄마를 버렸다. 부모에게 버려진 오주희는 무당을 찾아가 부적을 받았다. 사랑의 부적이였다. 그리고 그 부적을 내연녀의 손에 쥐어주고는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오연린이라는 이름으로 다시태어났다. 자신을 버렸던 아버지와 계모의 딸로. 

축복받은 삶을 살기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복수의 심정으로 태어난 그녀의 손가락은 6개였고, 해를 넘기고 태어나면 큰 복을 누리지만, 해를 넘기지 못하면 대흉일 것이라는 늙은 무당의 말에 기여코 해를 넘기기 5초전에 태어났다. 

두번째 인생이기에 많은 것이 수월했다. 알고 있는 지식들을 이용해 오연린은 그녀의 부모에게 큰 자신감을 넣어주었다. 끝없이 돈을 쓰게 했고, 그녀는 그 모든것들을 원했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에서 그녀는 모든것을 망쳤고, 아버지와 계모는 절망했다.

자신들의 딸이 왜 그런지조차 모른채.


그녀는 그녀의 삶 전체를 들여 그들에게 복수를 했다. 늙은 무당인 할머니부터 아버지 계모까지.

그러다 만난 은정. 아버지로부터 학대받고 자란 아이. 둘은 합심하여 부모에게 상처를 입히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가던 중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는데..

이 이야기를 읽으며 연린은 대체 누구에게 복수를 하고 있는것인지가 흐려졌다. 분명 시작에는 분명했던 복수의 대상이 점차 흐릿해지며, 스스로에게 가해지고 복수의 결과가 정말 그들을 위한 것이였을까.

누군가는 삶을 살아가며 잊었던 과거를 그녀는 두번의 생을 살아가면서도 잊지 못하고 스스로에 대한 가해로써 복수를 행하는 것일까.


보통의 회귀환은 통쾌하던데,ㅠ

통쾌함이라는 것 자체가 판타지려나. 복수라는 감정의 바탕에 깔려있는 그 분노가 통쾌함이라는 감정과 맞닿을 수 없는 것이니까. 그녀의 분노가 만들어낸 과정에서 빚어진 또다른 분노는 결국 또다른 결과를 낳는 결말에서 우리가 회귀환이라는 소재를 통해 가지고 싶었던 복수에 대한 통쾌함은 결고 그런 단순한 감정이 아닐 수도 있음을 작가님은 말하고 있는듯 했다. 내 인생 전체를 걸고하는 복수의 다음 생이 정말 “극락”일 수는 없을테니까.


 책의 전반에 깔려있는 윤회, 극락과 같은 단어가 의미하는 불교 철학사상은 결국 흘러갈 것을 흘러가게 두지 못하고 끝내 쥐고 놓지 못해 또다른 억겁의 시간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슬펐던 걸까.

무시무시한 이야기 한편을 읽었는데,

왜 내게는 슬픔으로 남는 것일까.


“할머니가 아무리 많은 부적을 써서 칠갑으로 붙여두어도, 이미 닿은 연을 지우지는 못한다.” p.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 거장의 재발견, 윌리엄 해즐릿 국내 첫 에세이집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이 금지어같은 느낌이 책. 1800년대 초반에 쓰여진 이 책이 왜 지금에서도 이토록 짜릿한 것일까.

책은 마치 그때도 지금도 금지어로 가득한 내용을 써놓은 것 같았다. 죽음, 혐오, 질투 등등.

내밀한 감정이기에 누군가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았던 감정을 시원하게 고급진 언어로 퍼부어주는 느낌이랄까.(그래서 조금 어려웠다는건 안비밀)


개인적으로 표제작인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보다는 “죽음의 공포에 관하여”라는 에세이가 더 눈에 들었다. 개인적으로 관심가는 주제이기도 하지만, 지나고보면 짧은 인생이면서도 우리는 왜 현재를 낭비하듯 살아가고, 꼭 마지막에서야 생을 들먹이며 아쉬워하는 것인지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찰나의 삶을 안달복달하며 열띠게 산 뒤, 헛된 희망과 하찮은 두려움으로 점철된 삶을 산 뒤, 다시 마지막 편안한 잠에 빠지고 삶이라는 불온했던 꿈을 잊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다니!“ p.65

개인적으로 두려운 죽음은 내가 아닌 내가 아끼는 이의 죽음이고, 물리적으로 나는 나의 죽음을 알 수 없으니, 결국 죽는다는 물리적 엔딩의 결말 전, 딱 그 사건 전까지의 두려움을 없애는 것은 결국 삶의 가치에 있다고 전한다. 활동적이고 위험한 삶. 그것이 죽음의 공포를 경감시켜 준다니. 흥미롭다.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한 두려움의 경감은 삶을 가장 격정적이고, 과감하게 살라는 것이다. 진짜일까?


그리고 ”질투에 관하여” - 가장 아픈 질투는 우리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향한 질투다. p. 85

저자의 말처럼 질투는  오로지 나에대한 선망과 우월감 즉 이기심이 낳은 기형아이다. 이것의 또다른 이름은 매혹이다. 나만이 가져야하는 우월감과 선망을 타인이 가졌을때, 그것에 매혹되는 마치 곁눈질을 하면서 보게되는 매혹. 그래서 100을 가지고도 1을 가진 사람이 내 눈길을 끄는 것에 견딜 수 없어하는 감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벼락부자가 질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고,  어떤 이의 재능을 부정하게 만든다. 흥미롭다. 

배움은 긍정적 속성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천재성은 부정적 속성으로 받아들인다고. 결국 내가 넘지 못할 무엇을 가진 이에 대한 질투는 인간이 당연한 속성인것이락.


뭔가 나에 대한 굉장히 부정적 감정, 입밖으로 내놓을 수 없은 어두운 내면의 말을 시원하고 유려하게 써놓은것 같은 책. 기왕이면 좀더 간질거리는 말을 시원하게 내뱉어 주었으면 더 속이 뚫리는 느낌이 들었을 것 같기도 하지만 말이다.(좀 어려웠다는 말)


흥미로운 책이다.

장강명작가님의 추천사에 쓰여진 말처럼 만나서 한번 그의 글이 아니라 ‘말‘로써 때리는 작가의 신랄함이 듣고 싶어지는 책이다. 진짜 시니컬할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태양 공포
이종산.정보라.허진희 지음 / 스프링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습기가 높은 찌는 듯한 더위가 찾아오니 저절로 공포물을 찾게된다. 에어컨이 주는 시원함도 좋지만, 두려운 이야기들을 읽으며 드는 등골 서늘함이 더 그리웠달까.

그래서 단편소설집 ”태양 공포“를 짚어들었다. 하지만 이 책은 나의 예상과는 다른 공포감이었다. 

3명의 작가가 쓴 각자 다른 도심속 세가지 공포이야기.


”태양 공포“

표제작인 태양공포는 정말 나도 공포다. 여름이라 찾아오는 계절감으로서의 공포가 아닌, 말 그대로 생존과 목숨이 걸린 두려움이다. 

한국 소설에서 보기 힘든 소재가 나왔다. 태양을 두려워하는 존재들. 우리가 영화나 책 속에서 보던 절대자로써의 존재가 아닌 그들은 인간을 두려워하고, 태양을 두려워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주현은 방금 인간들 손에 부모를 잃었다. 

돈이 들어있던 가방에 있던 전화번호. 주현은 충동적으로 백화점에서 옷을 산다. 그리고 걸려오는 전화.

끔직하지 않은가. 내가 평생을 속해 살아온 사회가 나의 잘못이 아니라 나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그래서 나의 일상이 위협당한다는 사실은.  이 글을 읽으며 오래전에 읽었던 책 속에서 장애인의 이동권에 대해 고하던 부분이었다. 왜 나는 이 글에서 그 글이 떠올랐을까..


”탈출기“

그녀는 약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하는 말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녀가 찾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휴대폰 앱의 주소를 찾아 들어간 건물에서 그녀는 탈출할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놓아버렸고, 그녀가 찾으려했던 곳에서 발견된 시체. 경찰은 그녀에게 대체 그곳에 왜 있었는지를 묻는다. 그녀는 성폭행 피해자였고, 죽은 이는 가해자였다. 그리고 가해자는 그녀에게 약을 먹이고 성폭행을 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합의된사항이라 진술했고, 그래서 그녀는 마약사범이 되어버렸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마치 무한루프 속 건물을 탈출하는 스토리인가 하는 숨막힘이 주인공의 사건과 맞물려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의 굴레에 갖힌 것 같은 끔찍함이 느껴졌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내가 누군인지 조차 가늠할 수 없는.

이런 사건들을 접할때 우리가 무심코말하는 XX사건 이라며 피해자의 이름을 붙이던 때가 있었다.(요즘은 아니지만) 그 때 그 이름이 가명이였더라도, 피해자들은 어떤 마음이였을까라. 

다른 어떤 책에서 성폭행 사건을 두고, 낙인이라는 말을 하며 누군가 교통사고를 당했고, 10년이 지나면 거의 모든 사람은 그 사고를 잊지만, 성폭행은 30년이 지나도 누구집 딸 당했잖아라며 절대 잊지 않는다고. 

탈출 할 수 없는 건물은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이였다. 그녀 스스로를 포함하여. 휴.

주인공은 탈출했기를. 


”나는 반대로 생존자들이 악몽에서 탈출하여 안전한 삶으로 돌아가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그 악몽 속에는 가해자들만 남아 영원히 고통받기를“ p.103


”피터와 모“

외면, 고독. 이것이 가장 가까운 이로부터 발생했을 때, 인간이 가질수 있는 가장 어두움의 끝은 어디일까. 가장 가까운 이. 고독.

할아버지에서 손녀로 이어지는 어둠.지우는 남호가 태어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방치되었다. 동생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래서 동생에게 화상을 입혔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너도 똑같이 해주겠다 말한다. 그말이 두려운 지우는 자신에게 화상을 입혔고, 골방에 갇혀 방치되었던 할아버지는 지우의 어둠을 발견한다.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과 같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의 임종을 앞뒀던 어느날 돌아온 지우는 용서를 비는 엄마에게 자신이 돌아온 이유를 밝히고, 돌아가신 엄마의 장례를 치르던날 깨닫는다. 자신이 그곳을 떠날 수 없음을. 고독이라는 어둠이 나를 고립시켰고, 내가 그 안에 갇혀버렸음을 말이다.


이 이야기들은 일상의 평온함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종산 작가님의 소설속 주인공은 사회 전체가 그의 적인 일상이였고, 정보라작가님의 그녀는 하루가 고통이였다. 허진희 작가님의 지우는 어둠만을 끌어안고 사는 인물이였다.

 왜 이 이야기들을 읽으며 눈을 뜨는 아침의 지루함이 새삼 반갑게 느껴지는지.

서늘함을 기대하고 읽은 책에서 그저 더위가 짜증나는 하루의 일상이 다른 의미로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한 책.


추천.


모두의 안온한 일상을 바라며.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나의 원초적 애정의 대상이자 내 모든 외로움의 근원인 엄마가 내 곁을 떠나는 순간을,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허상의 탯줄을 끊고 마침내 내가 완벽하고 고독해지는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p.1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의 나쁜 무리
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5년 이상문학상 최연수 수상자였던 예소연 작가님의 단편소설집 “너의 나쁜 무리”.  <그 개와 혁명>이라는 소설이 꽤나 인상깊게 남았던 터라 다시 궁금했다. 이분이 어떤 유머를 숨겨놓으셨으려나 싶어서.


이 단편 소설집은 굉장히 신기한 관계들을 담고 있었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있는 일상적 그런 관계가 아니라 분명 남이지만 남같지 않은 그런 관계들. 가족이니까, 가족이라서 라는 말이 이제는 좀 오래된 말같이 느껴지는 요즘이여서 그랬을까, 꽤나 신선하면서도 익숙한듯 생경한 느낌이였다.


<작은 벌>의 서송이와 진정희는 묘하다. 병원간 이송을 위해 부른 사설구급차를 탈취하여 진정희의 마지막을 준비하러간다.그러면서도 그들은 ”살고 싶다“고 말한다. 사설 구급차의 운전자 이중일에게 당신은 죽고싶은 사람 같다고, “살고싶은 것과 죽고싶지 않은 것은 다른”것이라 말하는 두사람. 이중일 역시 과거로 인해 미래가 불투명해진 사람이다. 두사람은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자신의 구급차를 탈취한 이를 중일은 어떻게 그들을 응원하고 싶어졌을까. 어쩌면 아무도 없는 중일 자신에게 생길지 모르는 송이나 정희 같은 인물에 대한 갈망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은 주어지는 것이지만, 가족같은 관계는 만들어가는 것이니까. 중일도 가족같은관계를 꿈꿀 수 있게 만드는 그런 관계를 송이와 정희가 보여주었기에 그들의 탈취를 응원하고 싶어졌는지도 모르겠다. 


표제작인 <너의 나쁜 무리>는 가족일까 아닐까.

여사와 나는 어떤 관계일까. 무튼 그것은 중요치않다. 나와 여사가 함께 살고있고, 여사는 아이인 내게 숨긴적이 없었다.  그리고 여사는 많은 남자를 사랑했고, 그 중 현구 아저씨는 오래된 연인이면서 여사의 돈을 들고 튄 인간이다. 현구아저씨의 연락을 다시 받았을 때는 돈을 회수하기 힘든상태였고, 현구아저씨는 그 돈을 나중에 굴착기를 팔아 나누기로 했지만, 그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이 되었다. 이미 내가 여사를 떠났고, 현구아저씨도 여사와 헤어졌고, 나도 당시 남자친구였던 이해신과 헤어진지 오래였다. 그리고 현재.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들은  굴착기의 돈을 회수하기 위해 모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도 그들을 모이게 한 것은 마치 돈이라는 가짜 피로 얽힌 가짜 가족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작가님은 "나쁜 무리"라는 제목을 붙였던 것일까.

  가족이란 늘 좋을 수도 늘 나쁠 수도 없지만 피로 얽혀있기에 끊어지기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이 가짜 가족의 끈은 돈인 걸까. 돈으로 얽힌 사이는 피보다 진할 수 있을까. 아니면 물보다 옅으려나. 분명한 건, 이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깊은 애증과 피로감은 영락없는 '가족의 그것'을 닮아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가장..좋았던 <소란한 속삭임>.

지하철 사건으로 만난 모아와 시내. 둘은 <속삭임>모임을 만든다. 온갖 소음속에서 속삭임은 서로를 가깝게 만들고 마치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처럼 보이게도, 그리고 중요한 비밀스런 말을 하는 사이같게도 보이게 만드는.

그런 그들이 또다른 모임원을 찾아 간곳에서 만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수자를 조건부 회원으로 들인다. 그리고 수자는 또 제안한다. “시끄럽게 구는것“도 하자고. 자전거를 타고 음악을 크게 듣고, 공원에서 오카리니를 불고, 

그렇게 친해진 세사람이 수자의 초청으로 간 그녀의 집에서 윗집 사람과의 분쟁을 해결하며 또다른 모임원 두리를 만난다. 뭐지 이 진짜 묘한관계는.

생각해보면 속삭임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서로의 말을 들을 수 있고, 그래서 더 집중하게 만든다. 내가 아니라 상대의 목소리에. 그리고 그 서로에게 집중된 작은 소리는 나의 감춰진 무엇을 드러내게 만든다. 

”정말 사는 것 같았다. 모아는 그렇게 살아있음을 감각하며 속삭이는 일은 정말로 사람을 살리는 것일 수 있겟다고 생각했다.“ p.178


이밖에도 <아무 사이>에서 나타나는 할머니들과 간병인의 관계. <통신 광장> 속 여인2와 해피엔드. 만나지 않았지만, 상대의 글로써 누구보다 상대를 이해하는 사이. 책 속의 인물들간은 관계를 정의할 수가 없다. 그저 어떤 사이라고 말하기에는 가족보다 가깝고, 가족이라 말하기에는 가족은 아니니까. 하지만 끊어낼 수 없고, 나의 감정 깊은 곳을 건드리는 관계들이다. 단지 휴대폰 속 저장된 이름 하나로 나를 이해시키는 사이.

대가족에서 핵가족, 그 핵가족 속에서도 파편화 되어가는 가족이라는 관계를 대신하는 무엇이 지금 우리가 맺고있는”사이“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했다.

가볍지만 진득하고, 타인은 이해할수 없지만 당사자들 사이에서는 절대적으로 정의되는 관계?


코로나를 겪으며 우리는 어떻게든 연결되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실감했다. 여러 플랫폼이나 사회적 변화속에서 다변화 되면서도, 묘하게 좁아진 느낌이 들지만, 그만큼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는 이해의 폭도 깊어졌는지도 모른다.


추천.


”기문은 작별 인사를 아주 오랫동안 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상대가 먼 길을 갈 때는 배웅도 오래 걸리는 법이라고.“ p.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