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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하는 인간의 태도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동규 옮김 / 쌤앤파커스 / 2026년 3월
평점 :
"본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 받아 개인적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의 작가 카를로 로벨리가 “과학”이라는 주제를 놓고 아낙시만드로스라는 생소한 과학자의 이야기로 새 책을 출간했다. 이름도 생소한 아낙시만드로스?! 과학자가 쓴 책이지만 작가의 책은 늘 과학과 철학 그 어디 중간쯤에 있다는 느낌이고, 이 책 역시 그러했다.
<과학하는 인간의 태도>라니.
아낙시만드로스는 고대 그리스 밀레토스에 살았던 과학자로 저자는 현대 물리학과 지리학, 기상학, 생물학의 토대를 닦은 인물로 현대 과학적 사고의 기초를 닦은 인물로 평한다. 이토록 중요한 인물의 이름을 왜몰랐지?!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 말했던 탈레스의 영향을 받은 과학자이면서, 그가 내세웠던 주장에 허점을 찾고, 자신만의 가설을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점은 신을 믿으면서도, 자연의 현상을 자연 그 자체로 인식한 인물이기도 하다.
여기서 저자는 아낙시만드로스가 어떻게 탈레스의 이론의 허점을 찾고 자신만의 이론을 만들수 있었는지에 대한 배경을 설명하는데, 그의 과학적 사고의 뿌리를 밀레토스 학파를 통해 설명한다. 그들의 탐구활동은 이전의 이론을 존중하면서도 비판할 수 있다는 열린 사고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다양한 문명(미케네, 아르고스, 티린스, 크노소스 등)을 통해 그리스 문명이 활짝 꽃을 피운 시기와 맞물린다고 설명한다.
“그리스” 직접민주주의의 시작에 빼놓을 수 없는 문화를 가졌던 나라. 그런 정치적 활동 역시 다양한 토론을 통해 누구나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다양한 문명을 받아들임으로써 부와 권력이 집중되었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그리고 문자. 다양한 문명의 교역을 통해 발전했던 문자.
이 문자의 존재를 저자는 꽤나 흥미롭게 다룬다. 문자는 선대가 후대에게 남기는 기록이기도 하면서, 때로는 아주 폐쇠된 기밀로써 다뤄지기도 하다. 우리의 문자를 만들고도 조선시대 양반들이 한자를 통해서 우월을 가리기도 했고, 어떤 주요한 지식을 그들만의 리그안에서 전달하는 목적으로도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낙시만드로스는 그 문자를 개방성의 기반으로 삼았다. 탈레스의 이론을 기반으로 더 나은 자신의 이론을 만들기도 했었기에.
이 부분에서 이 책의 제목의 이유가 드러난다 아마도 저자가 말하는 태도는 과학을 통해 말하고 있지만, 인간문명의 전체를 놓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명의 발전의 시작은 소수였는지 모르지만, 그 문명을 이끌고 온 것은 집단 지성의 힘이다. 리눅스 토발즈가 리눅스OS를 오픈소스로 공개했기에 지금의 스마트폰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의 기반이 되었고, 구글이 연구했던 다양한 소스가 공개되었기에 지금처럼 WWW의 환경이 되었다.(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미 국방부가 웹을 공개하지않고, 자신들만의 리그에서만 사용했다면 지금의 월드와이드웹만큼 발전할 수 있었을까.
저자가 말하는 과학의 발전은 그래다. 시작은 소수지만, 그들의 이론을 발전시키는 것은 열린 태도다. 이것이 첫 번째. 어떤 것도 완벽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이론”이나 “가설“이라 과학계는 늘 말한다. 뉴턴의 법칙도 아이슈타인이 나오면서 모든것에 통용되는 법칙은 아님을 알게되었고, 프톨레마이우스의 천동설도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뒤집혔다. 하지만 그들 모두 이전 과학자들의 이론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연구를 공부하고, 파고들면서 문제점을 찾았고, 그들의 이론을 기반으로 나은 학설을 만들어내었다. 이것이 두번째 태도다. 이것은 유명하고 보편적인 지식을 탐구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는 태도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 종교가 등장한다. 고대 문명의 다신교가 정치사회적 영향으로 일신교로 바뀌는 과정. 이 역시 과학이 나아가는 과정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역사적으로 종교는 늘 과학과 부딪친다.
어떤 현상을 과학으로 분석하려는 태도는 종교에 대한 불경으로 받아 들여지는 사회 문화적 현상 때문이다.
여전히 창조론을 믿으며 진화론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들의 행동의 합리성을 “신의이름”으로 내세우는 것도 꽤나 자주 보인다.
“우리의 삶과 생각에서 중요한 한가지 역설은 우리의 행동과 시야가 어떤 맥락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맥락이 강요하는 한게에 맞서 싸우기를 멈춘다면 우리는 삶과 이해 자세를 멈추게 된다. - 로베르토 웅거, <주체의 각성>” p.200
저자는 이런 닫힌 생각에 대한 위험성을 말한다. 이것은 꼭 종교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문화나 문명, 국가에서 타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같다. 어쩌면 지금의 정치 역시 비슷하다. 양 극단에서 각자의 귀를 막고 나만의 소리를 외치는 지금이 그러했다.
“극단적 문화상대주의의 진짜 문제는 그것이 자기모순이라는데 있다. 역사나 문화와 동떨어진 절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p.202
우리는 여전히 많은 것을 물음표의 영역에 두고 있다. 누구는 이것을 과학으로 해석하려하고, 누구는 이것을 신이라는 절대자의 영역으로 믿고 있지만, 결국 인류는 수많은 물음표들을 하나씩 열어가며 발전할 것이다. 그것은 곧 타인을 받아들이는, 그리고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에서 시작한다. 이 모든 것들의 표현은 우리의 언어를 기반으로 하기에 사용하는 언어에서도 열린 태도를 가져야 함을 저자는 설명한다.
저자는 이런 ”태도“를 아낙시만드로스라는 고대 과학자로부터 말하고 있었다.
과학인줄 알았는데, 역시나 철학이네.
하지만 저자의 의견에 나는 동의한다. 어떤 것도 절대적인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나아가면 바뀌어가고, 그 변화가 모든 것이 긍정의 시그널은 아니겠지만, 지난 역사를 놓고 본다면 우리는 어찌되었든 발전의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까. 3000년이 지나 지금 우리가 믿었던 것들이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문득들었다.
이 책에서 가장 놀랐던 점은 고대에서도 지구는 둥글다고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난 여전히 지구가 둥글다는 것도 신기한데,, 그들은 사진도 없이 어떻게 알았을까.. 오.. 대단해)
재밌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