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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 1953-1960 ㅣ 환상문학전집 30
아서 C. 클라크 지음, 고호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평점 :
이번 책에는 대체로 짧은 단편들 위주로 실려 있다. 그래서 더욱 위트가 넘치고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 굳이 단점을 꼽자면 몇 시간이고 내리 책을 읽다보면 내가 무슨 내용을 읽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호기심에 자꾸 읽다보면 방금 읽은 단편의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쭉 진도가 나가 버린다. 책장이 후루룩 넘어가는 아쉬움 여간 크지 않다. 책은 비교적 두꺼운 편이지만 의외로 페이지가 술술 잘 넘어간다. 기억 용량의 부족 탓으로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방금 전에 읽었던 내용과 인상들이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는 조금 천천히 내용을 음미해가며 읽어야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일단 첫번째 작품인 '다른 호랑이'는 우리에게 많이 익숙한 평행우주라는 개념을 소설적으로 풀어놓은 것이라서 기억에 오래 남는다. 한편으로는 소설이 아니라 작가의 생각이 그대로 노출된 에세이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우리 우주 외에 무한히 존재하는 우주란 개념은 상상만으로도 흥미롭다. 이 무한한 우주에서는 지금 두 인물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영국의 어느 한적한 길 위에서 호랑이를 마주칠 수도 있다. 우주가 무한하다는 이론이 옳다면 이런 우주에서는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무한히 많아지기 때문에...
'더 이상 아침은 없다'는 고차원의 공간을 통과할 수 있는 다리, 혹은 웜홀을 소재로 한 이야기이다. 주인공 빌은 환각과도 같은 상태에서 다른 차원에서 보낸 텔레파시를 통해서 곧 태양이 폭발할 거라는 사실과 다른 차원을 잇는 다리를 통해 지구를 탈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에게 일어났던 일을 환각이라 치부해버림으로써 태양의 폭발과 함께 더 이상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지 못하게 된다.
이번 책에는 하얀 사슴이라는 술집을 배경으로 해리 퍼비스라는 익살스러운 인물이 황당한 이야기를 술집에 모인 동료 과학자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형식으로 씌어진 단편들이 주로 실려 있다. 해리 퍼비스가 들려주는 엉뚱하고 황당한 이야기들을 서술자인 나가 하얀 사슴이라는 술집의 분위기와 그의 이야기를 듣는 주변 인물들의 반응 등을 곁들여 해리 퍼비스의 목소리를 그대로 살려 전달해 준다. 나와 다른 동료들은 해리 퍼비스의 이야기를 대체로 재미있는 이야깃거리 정도로 여기며 믿지 않으면서도 거짓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사실적이고 세부적인 묘사까지 완벽한 이야기 솜씨에 모두들 빠져들게 된다. 주로 엉뚱한 과학자에 의해 일어나게 되는 기이한 사건에 관한 이야기인데 때로는 SF라는 영역에 넣기보다는 그저 익살스럽고 재치 넘치는 단편으로 볼 만한 작품들로 제법 있다.
그 중에서 '특허 심사'는 소리를 축적하는 축음기처럼 감각의 기억을 축적할 수 있는 기계가 발명됨으로써 다른 사람이 맛보고 느끼는 온갖 감각을 꼭 자신의 것처럼 느낄 수 있게 되고, 서투른 애인과의 육체적 결합 대신 노련한 전문가들(?)의 시범이 기록된 발명품이 주는 감각의 쾌락에 빠져들면서 애인과의 사이가 멀어지게 되고 결국에는 그 애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인물이 등장하는 다소 허무랭랑한 감이 있는 이야기다.
뭐 알 수 없기는 하다. 향기나 맛을 느낄 수 있는 텔리비전을 만들 수 있는가에 관한 의문이나 시도는 지금도 있지 않을까 싶다. 더 나아가 감각을 축적하고 그걸 다른 사람이 똑같이 느낄 수 있는 발명품을 만들려는 시도도 해볼만 하지 않을까.
'어민트루드 인치 내던지기'는 제목만 가지고는 무슨 내용인지 도통 아리송하기만 한데, 아내의 지칠줄 모르는 수다에 지친 남자가 아내와 자신이 말을 할 때마다 단어의 수를 스코어로 기록할 수 있는 선택적 단어 계수기라는 기계를 만든다. 기계에 표시된 숫자를 본 후에야 아내 어민트루드는 자신의 엄청난 수다 삼매경을 알아차리게 되고... 그렇다고 어민트루드(암만 생각하도 이름이 정말 특이하다)가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는데. 그 결과 제목과도 같은 상황이 일어나고 만다.
'궁극의 멜로디'는 스스로 작곡할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 된 컴퓨터를 이용해 궁극의 멜로디를 완성한 과학자가 그 멜로디를 듣고 혼수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그날 아침에 들은 멜로디를 하루종일 흥얼거리게 되듯이 그 궁극의 멜로디가 그의 뇌에서 끊임없이 반복됨으로써 모든 다른 기억들을 지우고 결국에는 혼수상태와도 같은 잠에 빠지게 된 것이다.
'지구의 다음 세입자'는 태평양의 한 섬에서 흰개미에게 인류의 지식을 전해주려는 일본인 과학자에 대한 이야기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각 나라에서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던 시대상황과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전쟁이 끝난 줄 모르고 섬에 남아 있던 일본군의 이야기가 맞물리면서 사실감 있게 다가오는 작품이었다. 언젠가 인류가 지구상에서 사라질 때를 대비해서 인류의 지식을 어쩌면 인간보다 더 지능적이고 생존력이 강한 개미에게 인류가 가진 지식을 남겨 주겠다는 한 과학자의 시도가 꼭 엉뚱한 것 같지만은 않다. 소설 속에서 이미 흰개미는 스스로 도구를 만드는 단계까지 진화했고 인간에게 불을 선물한 프로메테우스처럼 이제 그들에게 불을 선물하려고 한다.
이번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을 꼽자면 단연 '머나먼 지구의 노래'이다. SF소설의 원칙을 충실히 지키면서도 문학적 완성도 또한 높은 작품이다. 대체로 이 책에 실려 있는 작품들은 SF소설의 정석을 따르기보다는 하나의 과학적 아이디어를 이용해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보여주는 단편들 위주여서 조금은 위대한 SF작가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는 소품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런 갈증을 채워준 작품이 바로 '머나먼 지구의 노래'이다. 탈라사라는 광대한 바다와 하나의 섬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달이 뜨는 행성이 있다. 서기 2626년 지구로부터 이주해온 개척자들이 소박한 기계문명을 유지한 채 살아가는 곳. 그로부터 수백년이 지난 지금 지구와의 접촉은 없었다. 그런데 바로 지금 지구로부터 날아온 거대한 우주선이 탈라사의 상공에 나타난 것이다. 실은 그들은 다른 개척지로 가는 도중에 우주선의 보호막(거대한 얼음덩어리와 흡사하다)이 고장나서 탈라사의 바다에서 물을 공급받기 위해 잠시 멈춘 것이었다.
로라는 바로 그들 중의 한 사람을 첫눈에 사랑하게 된다. 다른 이유들도 있지만 그가 고향 별인 지구에서 왔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그에게 끌리는 걸 (비록 그녀에게 약혼자가 있다하더라도) 막을 수가 없다. 로라는 그와 함께 떠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는 로라에게 우주선 내부를 보여주면서 그의 삶과 로라의 삶이 얼마나 다른지 깨닫게 해준다. 그들은 300년간 동면에 든 상태에 있다가 머나먼 행성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다시 깨어나서 이 탈라사와 같은 또다른 개척지를 만들어나가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일부만 예기치 않은 문제가 생겨 100년만에 잠시 잠을 깬 것이고 또다시 개척지를 향해 항해하는 동안 200년간의 동면에 들어가야 되는 것이다. 그들은 평생 그런 일을 하도록 훈련되어져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기억 속에는 잠들기 직전의 지구의 모습이 새겨져 있지만 그 사이 지구에는100년의 시간이 흘렀고, 그들이 잠깐 깨었다가 머문 이 탈라사라는 행성은 꿈 속의 몇분에 불과한 것이었다.
결국 로라는 탈라사에 남게 되고 로라가 늙어가고 다음 세대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그들(그와 고향별 지구를 떠난 개척자들)은 여전히 젊은 모습으로 개척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우주의 카사노바'는 제목처럼 유머가 넘치는 작품이다. 우리의 주인공( 은하 탐사 대원)은 항해 도중 5000년 전 항성간 탐사 시대의 초창기에 지구를 떠난 개척자들의 후손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전파를 감지하게 된다. 그는 그들이 말하는 영어를 거의 알아 들을 수가 없는데 다행히 고대 영어를 할 줄아는 통역사가 그들 사이에 배치된다. 우리의 주인공은 화면에 비친 아름다운 통역사의 모습에 한눈에 반하고 마는데... 마침내 설레는 마음으로 그들의 행성에 도착한 주인공은 아름다운 통역사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데... 중력이 지구의 4분의 1에 불과한 이 행성에서 50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진화했을지 상상해 보길...
이제 4권의 단편집 중 한 권만 남았다. 거장이 남긴 마지막 이야기들이 어떤 것일지 무척이나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