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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드로 파로디의 여섯 가지 사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외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보르헤스가 쓴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동료 카사레스와 함께) 추리소설은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집어든 책이다. 오노리오 부스토스 도메크라는 도대체 있을 법하지 않은 이름 때문에 작가가 누군지 몰랐다지만 어쩐지 보르헤스적인 냄새가 풍기는 단편들이었다. 주를 다는 방식도 그렇고 다른 작가들이나 작품, 심지어 영화 속 인물 등 다양한 지식들을 인용하는 것에서, 보르헤스가 즐겨 쓰는 소재인 미궁을 연상시키는 황소의 신이란 제목이나 비밀종교단체 등등에서 보르헤스적 냄새를 곳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물론 보르헤스가 쓴 소설이라는 걸 알고 읽어서 이긴 하지만.
어쨌든 단편소설을 선호하는 작가답게 추리소설도 단편이다. 그래서 사건이 그다지 복잡하진 않고 이시드로 파로디의 한 마디에 너무나 쉽게 사건이 해결되어버리는 단점이 있다. 원래 추리소설이 그렇나. 알고 보면 실타래가 풀어지듯이 줄줄 풀려나오는 식으로.
모든 사건의 해결사 이시드로 파로디는 감옥에 갇힌 인물이다. 자신의 집에서 하숙하던 경찰이 씌운 누명으로 21년형을 선고 받고 273호 감방에 십수년째 수감 중이다. 하지만 그의 감방은 기자 몰리나리를 비롯해서 풀지 못한 사건들을 의뢰하려는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의 누명은 아직도 벗지 못하고 있지만. 한때 이발사였다는 그는 좁은 감방에서 사람들이 들려주는 사건의 내력만 듣고도 모든 걸 꿰뚫어보는 천재적인 혜안을 지닌 인물로 그려지는데 어딘지 조금은 현실감이 떨어지는 느낌도 든다.
또 한 가지 단점, 실수인가? 작가가 묘사한 이시드로 파로디란 인물은 40대의 뚱뚱하고 빛나는 민머리에 날카로운 눈빛을 지녔다는데 표지 그림의 죄수복을 입은 인물은 날카로운 눈빛만 얼추비슷하고 영 다른 인물 같다.
여섯 개의 단편 중 '황도십이궁'은 아랍의 비교를 믿는 단체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으며 '골리아드킨의 밤'은 대륙횡단철도 안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이란 점에서 우리에게 많이 익숙하고 그래서인지 제일 추리소설다운 박진감이 있었던 것 같다. 미궁을 연상케 했던 제목 '황소의 신'은 그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고 아르헨티나의 황소 목장에서 벌어진 평범한 살인사건에 불과했다. '산자코모의 숨은 뜻'은 간통을 저지른 아내와 그의 정부에 대한 복수를 색다르게 그린 작품이었고, '타테오 리마르도의 희생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호텔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그린 것이었는데 제일 맥빠지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타이안의 기나긴 탐색'은 중국인 이민자들이 중국에서 훔쳐온 보물을 찾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사실 이 책은 추리소설이란 장르만 놓고 본다면 뛰어난 장치와 기교를 곳곳에 숨겨둔 채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을 정교하게 그리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없다. 이시드로 파로디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털어놓는 이야기는 과장되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하고 그에 의해 밝혀지는 결말은 너무 명백해서 별 감흥을 주지 못한다. 추리가 전면에 나서긴 했지만 여러 군상의 인물을 볼 수 있는 단편으로 즐기는게 더 좋을 것 같다.
보르헤스가 단편에서 널리 썼던 방식(인물이나 배경이 전 세계적이라는 것,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간까지)이 여기서는 아르헨티나라는 나라에 모인 다양한 사람들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중국, 러시아, 아랍인, 유대인 등등... 온갖 인간 군상들의 삶의 모습과 그 욕망들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들을 읽는 재미도 그런대로 괜찮다. 이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무슨 사건만 터지면 273호 감방을 찾는 탓에 여섯 개의 사건이 개별적인 단편이면서도 인물들이 여러 중복되어 등장하기도 한다. 인물들이 많고 이름이 낯설다보니 누가누구인지 헷갈리기도 하지만 단편에서는 그려지지 않았던 그들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상상해보는 재미도 있다.
어쨌든 추리소설과 보르헤스, 카사레스라는 두 대가를 함께 만날 수 있었던 독특한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