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을 찾아서 - 상 - 京城, 쇼우와 62년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3
복거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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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는 내내 미치오 카쿠라는 일본물리학자가 쓴 "평행우주"란 책이 떠올랐다. 거기에 다중우주이론이란 것이 나오는데 임의의 관측이 행해질 때마다 양자적 분기점이 형성되면서 우주는 끊임없이 갈라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으면 그 사건이 발생하는 우주가 반드시 존재하며, 이 모든 우주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만큼 현실적이다. 다중우주가 정말 존재한다면 지금 이 순간에 나는 다른 상태로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어떤 우주에서는 어릴 적 꿈을 이뤄 행복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르고, 지금보다 더 비참한 처지에 있을지도 모르고, 심지어는 나라는 존재는 태어나지도 않은 우주가 존재할 수도 있다. 책의 처음부분에 작가가 과학소설을 많이 읽었다고 했는데  바로 이런 개념들을 염두에 두고 쓴 작품인 듯 싶다.

   이 작품은 이토오 히로부미가 안중근의 저격에 사살되지 않고 총상만 입고 회복되었다는 가정에서 시작한다. 온건주의자였던 이토오 히로부미의 영향으로 일본은 과격한 군국주의로 나아가지 않았고 그로인해 2차세계대전에서 패전을 모면하고 조선과 대만에 대한 식민지 통치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고 만주를 대륙을 침범하기 위한 기지로 아직까지(1980년대)까지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인은 일본의 식민지라는 의식조차 없이 말과 글과 조선적인 모든 것을 잃고 일본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내지인과 같은 조상을 두었고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민족이 분명한데도 반도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데는 의문을 품기도하지만 그 차별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다. 반도에서 태어난 일본인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조선인이 아니라 반도에 사는 일본인일 뿐이다.

  주인공 히데요도 그런 일본인 중의 한명이다. 내지인으로 태어나지 못했으므로 삶의 곳곳에 차별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는 경성제국대학을 나왔고 군대에서 퇴역한 후 한도우경금속이란 회사의 과장으로 회사에서도 능력을 인정받는 처지다. 경성에서는 제일 좋다는 아파트도 가지고 있다. 열렬한 사랑으로 맺어진 사이는 아니지만 아내가 있고 사랑스런 딸이 있고, 20년간의 결실로 만들어진 시집도 갖게 되었다. 어쩌면 그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인지 모르는 시를 통해 일상에 균열이 생긴다. 합작투자건에 큰 공이 있음에도 조선인이라는 장벽 때문에 부장 승진에서 탈락한 후, 처음으로 갖게 된 자신의 시집을 들고 찾아간 큰아버지에게서 히데요는 자신의 성이 기노시다(木下)가 아니라 박(朴)이란 것을 알게 된다. 돌아오는 길에 고서점에서 "조선 고시가선"이라는 책을 통해 조선의 시를 조금씩 알게 되고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조선말과 글이 있었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호기심은 점차 커져서 경성제국대학을 찾아가게 되고 거기서 일본으로 보내지 않고 남은 "조불사전"을 복사해서 가져 온다. 혼자 조선어를 공부하면서 태어날 때부터 조선어를 썼던 사람이 낭독하는 시를 듣고 싶다는 소망을 갖는다.

  그러던 중 한도우 경금속과 유사라무와 합작투자건으로 만나는 앤드슨이란 미국인을 통해 얻은 "뉴스월드"란 잡지를 통해 상해에 임시정부가 아직 존재하고 있고 조선어사전 편찬 작업을 하고 있다는 글을 읽는다. 그런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던 히데오에게는 모든 것이 충격이었다. 유월, 아내 세쯔꼬의 어머니가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장례에 참석하러 갔던 히데요는 샤꾸오우지(釋王寺)라는 절에서 쇼우고우(小空)스님으로부터 만해 스님의 책을 물려받게 된다. 그후 히데요는 합작투자 일로 일본에 출장을 가게 된다. 조선인이 내지로 들어가는 것은 허가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히데요는 이 출장을 통해 조선에 대한 책을 더 구해보자는 목적이 있었다. 그가 일본에 있는 동안 육군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기도 한다. 드디어 유사라무와 합작투자건에 대한 정부의 허가가 떨어지고 히데요는 조선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탄다. 동경제국대학과 교오또오제국대학에서 복사해온 "조선통사, 조선어 회화, 삼국사기, 청구영언" 등을 반입하려다 공항에서 붙잡힌다. 경찰의 취조 끝에 책들은 모두 압수당하고 사상재교육을 통해 보호감찰로 풀려나게 된다. 이 사상재교육을 통해 많은 조선 지식인들이 자신과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은 완전한 일본인이 되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회사에서 사퇴하란 압력이 있고 혼자 여행을 떠났다 돌아오는 길, 히데요는 자신의 집에서 내지인인 아오끼 소좌와 밀회 중인 아내를 발견한다. 아오끼 소좌는 아내의 대학 후배의 남편으로, 세쯔꼬가 히데요를 감옥에서 나오게 하려고 부탁을 했던 인물이다. 아마도 아내는 남편의 석방을 위해 그에게 몸을 맡겨야  했을 것이다. 히데요는 용서하려 한다. 그런 아내가 가엾기까지 하다. 다행히 회사에서도 일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고 어쩌면 지금처럼 살아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내의 생일, 히데요는 아내를 위로해주려는 마음에 생일에 몇 사람을 초대해서 파티를 연다.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대학 후배 부부도 초대한다. 그 자리에 혼자 온 아오끼 소좌의 도를 지나친 행동을 보고 히데요는 자신의 행동이 대범함을 보여주려는 치기어린 짓이었다고 후회한다. 결국에는 술이 취한 아오끼 소좌가 자신의 딸까지 추행하려 한다. 히데요는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망쳐놓을지 알면서도 무서운 일을 실행하려 한다. 결국 그는 일본인 아오끼 소좌의 목을 조른다.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를 향해 떠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기노시다 히데요가 아니라 조선인 박영세로 길을 떠나는 것이다.

  어쩐지 출발선에서 소설이 끝나버렸다는 미진함은 있지만 이렇게 마무리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히데요가 살고 있는 조선은 이미 죽어버린 조선이기 때문이다. 단 한 사람도 자신이 조선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고 그런 생각조차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그런 배경에서 주인공이 일본과 투쟁을 벌이고 무슨 커다란 변혁을 꾀한다는 설정은 불가능하다. 작가는 그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개인이, 아무 의식도 없이 살아가던 개인이 자신의 참된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을 밀도 있게 그려나가는 것으로 만족한 것 같다. 히데요가 지금껏 자신이 갈고 다듬어왔던 언어를 버리는 것이 시를 쓰게 해준 모국어를 배반하는 일이 아닐까 자책하는 모습에서, 일본 출장에서 돌아오기 전에 일본 북쪽 지방을 여행하면서 내 나라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동하고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철저히 일본인으로 살아왔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는 어쩌면 마지막까지 기노시다 히데요로 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상재교육을 통해 완전한 일본인으로 살고 있는 조선의 많은 지식인들처럼 지금까지의 일이 그저 지나가는 감기였으면 하고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엄청난 가정에서 시작하고 있지만 결코 우리 현실에서 벗어난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히데요가 살고 있는 시대의 배경은 군국주의의 일본을 연상시키기보다는 80년대까지 겪었던 우리의 군사독재시대와 쿠데타 등을 떠올리게 한다. 환경오염시설이 조선에 집중되어 있고 일본에 의한 통치가 조선을 잘 살게 했다는 걸 세계에 선전하기 위한 경성올림픽이 곧 개최될 것이라는 가정들이 곧 80년대 우리의 모습과 같다. 너무 현실과 똑같아서 이 소설이 대체역사소설인가 가상소설인가 그런게 맞나 싶을 정도다. 오히려 우리 80년대까지의 역사를 풍자한 소설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해설에도 보면 도조 히데끼가 박정희를 연상시킨다든지 하는게 나와 있기도 하고. 실제와 가장이 교묘하게 잘 결합된 소설이다.

  아쉬웠던 장면들도 꽤 있었는데, 히데요가 시마즈 도끼에에게 애정을 느끼는 장면들에서는 느닷없다는 느낌이었다. 소년의 치기어린 사랑도 아니고 소설의 흐름상 튄다고 할까. 히데요가 도끼에에게 연연해하는 장면들이 꼭 필요했나 하는 느낌이다. 딱딱한 흐름에 재미를 위해서 넣었다고 하기에도 그렇고. 히데오가 이따금 등장하는 여자들에 대해 육체적 충동을 느끼는 장면들도 자연스럽지 못한 느낌이었다. 히데요란 인물설정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인물에 사실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일까. 아무리 고뇌하는 지식인이라 해도 남자임에는 분명하니까. 가끔씩 보이는 너무 잘 쓰려 해서 어설퍼 보이는 문장들도 그렇고, 아마도 초기작이라서 그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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