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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카프카 (상)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사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열다섯이었을 때, 나는 어쩌면 이 소설 속처럼 삶이 현실과 환상이 적당히 얼버무려져 있는 곳일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아주 좁은 세계에서만 살았으므로. 주인공인 다무라 카프카처럼 대도시에서 살지도 않았고 아주 작은, 어쩌면 우리 나라에서도 가장 외진 곳이었을지도 모르는 작은 마을에서 살았다. 작은 산을 오르면 저 멀리 사방으로 겹겹이 이어지는 산등성이들을 바라보면서 저 너머의 세계를 막연히 꿈꾸기도 했었던. 그러나 지금 이렇게 열다섯에는 짐작도 못 했던 나이에 이르고 보니 세상엔 환상의 세계란 존재하지 않으며, 이 책을 덮고 밖에 나가는 순간 좁은 거리에는 매연을 내뿜는 자동차들이 신경질적인 경적 소리를 내뿜으면서 달리고, 사람들은 이따금씩 별것도 아닌 일로 좁은 골목에서 싸우고, 모두들 이 현실에 발을 단단히 딛고서 하루하루 살아내기 위해 안달을 하면서 살아갈 뿐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열다섯 살 아이의 눈에는 이 사실적이고 무자비한 세상 틈으로 환상을, 현실 너머의 세계를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열다섯 살인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년의 이야기는 1인칭시점으로 전개된다. 소년은 아버지의 저주에 자신이 점점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집을 나선다. 전혀 와 본 적이 없는 작은 도시에 도착하고 우연히 고풍스런 도서관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 도서관에서 여자로 태어났으면서 남자로 살아가는 오시마상과 관장인 사에키상을 만난다. 사에키 상은 도서관 설립자의 아들의 약혼녀였지만 상대는 젊은 나이에 죽고만다. 그 후 사에키상은 20여 년을 종적을 감추었다가 이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소년은 그곳에서 해변의 카프카란 노래를 알게 되고 사에키 상의 약혼자가 썼던 방에 걸린 그림을 보게 되면서 혹 사에키 상이 자신을 버리고 가버린 어머니가 아닐까 라는 상상을 한다.
소년과의 대척점에 나카타 상이 있다. 노인의 이야기는 3인칭으로 전개된다. 예순이 넘은 노인으로 어렸을 때 불가사의한 경험(산으로 버섯을 따러 가던 날 같은 반 아이들 모두 집단 최면 같은 상태로 실신해 있다가 몇 시간 후 깨어난다)으로 인해 3주간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서 지능이 아주 낮아져 버렸다. 노인은 늘 말한다. 나카타 상은 머리가 나빠져버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말은 나카타 상에게는 너무 어렵습니다. 하지만 노인은 머리가 나빠져버린 대신에 한 번도 아파본 적이 없으며, 이따금 장어를 먹는 지금의 삶에 만족하며, 고양이와 대화를 나누는 능력을 새롭게 가지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집을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주는 일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노인과 소년의 상관 관계를 전혀 짐작할 수 없다. 노인이 고양이의 영혼을 빼앗는 조니 워커라는 기괴한 인물을 죽일 때 조차도. 조니 워커라는 인물이 소년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카타 상이 어떤 일을 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순간에야 그들의 관계가 어렴풋이 정리된다. 나카타 상은 도서관을 향해 가고 있다. 중간에 호시노 상이라는 젊은 사내를 만나 동행하게 된다. 사에키 상을 만나기 위해, 입구의 돌을 열고 닫기 위해. 실체를 띄지 않은 어떤 존재의 도움으로 입구의 돌을 찾고 입구를 연다. 환상과 현실이 넘나들고 시간이 얽힌다. 그 얽힘 속에서 아버지의 저주가 완성된다. 실체든 은유적으로든.
소년의 이야기보다는 노인의 이야기가 내게는 훨씬 흥미 있었다. 소년의 오이디푸스 컴플랙스는 좀 진부한 것이었고 15세 소년의 입에서 나오는 음악 이야기나 오시마 상의 여러 이야기나 그다지 끌릴 만한 이야기들은 아니었다. 하루키의 작품에 흔히 등장하는 소재 정도이랄까. 어쨌든 상권은 굉장히 흥미있게 읽어내려 갔다. 요즘 들어 별로 재미있는 책을 읽어보지 못했는데 모처럼 뒷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책이었다. 하지만 상권에는 환상과 현실이 적절한 균형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하권에서는 너무 환상쪽으로 기울어져버린 감이 있었다. 어느새 판타지 소설을 읽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사실 판타지 소설은 좋아하지 않는다. 일상을 다루는 소설 속에 적당히 판타지가 섞여 있는 건 좋아하지만. 커널 샌더스라는 인물이 불쑥 등장해서 입구의 돌을 찾아주는 장면은 만화 같았고, 죽은 나카타 상의 입에서 흰 물체가 기어나와서 호시노 상이 그걸 칼로 베는 장면은 엉뚱하다고 할까.
그리고 해결되지 않는 의문들... 2차세계대전 중 아이들을 집단 실신케 한 정체는 무엇이었으며, 소년의 옷에 남아 있던 핏자국은 무엇이었으며(은유적인 살인인가), 소년은 정말 새로운 세계을 찾은 것일까. 어떤 새로움이 있단 말인가. 긴 이야기에 비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 건 아닌데 뭔가 분명한 의미가 붙잡히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인가. 작가의 말대로 여러 번 읽어야 하는 걸가. 그래야 작가 숨겨놓은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작가가 너무 많이 말하고 싶었던 욕심이 앞섰던 탓에 의문만 곳곳에 던져놓고 만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