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그네 오늘의 일본문학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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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현실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무척 철없는 정신과 의사. 다른 사람 시선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것 뭐든지 하는 의사의 설정이 대리만족을 일으킨다.

소설 속 인물의 내면은 정신 분석을 근거로 하고 있다. 서열 3위의 조폭이 선단장애를 가져 날카로운 걸 보면 기절하는 설정이 재미있다. 부유하고 힘있는 집안으로 장가 가자 기가 죽어 자신의 본 모습을 억누르며 강박증을 가지는 인물, 직장에서 점점 밀려나는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와 섞이지 못하면서 등장하는 젊은 세대에 피해의식을 느끼는 공중그네 플라이어. 자기 보다 젊은 스타 야구선수가 등장하자 느끼는 열등감으로 던진 공이 빗나가는 스타 야구선수. 다양한 인물이 등장해 다양한 삶을 묘사한 점이 좋다.

독특한 정신과 의사와 색다른 간호사의 캐릭터가 이야기를 신선하고 가볍고 재미있게 이끈다. 또 정신과 의사가 환자의 문제 있는 생활 속으로 직접 뛰어 들어 문제를 해결한다는 설정이 독특하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다 재미있다고 하지만 이렇게 가벼운 이야기에 무슨 재미를 느끼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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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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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거품이다

-<상실의 시대>, 개인과 사회가 연결되지 못하는 관념의 세계-

워낙 유명한 소설이다. 주변 사람 중 안 읽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자자한 명성만큼은 아니었다.

그의 최근작 <1Q84>를 3권까지 다 읽고 하루키한테 질려 버렸다. 등장인물의 성격이 지나치게 깔끔하고 이야기가 빈틈없이 아귀가 맞아 오히려 현실성이 부족했다. 결국 사랑이야기인 것도 흥미롭지 않았다. 1,2권까지는 흥미로웠다. 아오마메가 발각될 것인가, 겐노와 만날 것인가가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축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등장할 때마다 침을 삼키며 읽었는데, 결국 그들은 만났고 마지막 장면인 그들의 접촉 행위를 보며 허탈했다. 섹스장면은 없었다. 그래서 공허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린 시절 어느 순간부터 영혼의 밑바닥을 훑으며 서로를 갈망해 왔는데, 정작 그들이 만나고 난 이후 장면은 그 오랜 그리움을 채워줄만한 구체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마지막 장면으로 그동안 숨넘어가게 긴장되던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물을 타 놓은 것같이 희미해졌다. 여태까지 공들인 이야기가 그냥 묽어져 버렸다. 남녀가 결국 만나게 되는 과정을 이렇게 길고 자세하게 그려놓을 필요가 있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관념으로 쓴 글의 마지막은 자기 힘을 가지지 못한 채 허무함으로 채워지는 걸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상실의 시대>를 읽으면서 하루키가 무척 관념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실의 시대>에서 주인공들이 하는 독백은 실제 사건의 느낌이 아니라 거의 다 생각이었다. 장소 묘사도 감성적이긴 하지만 추상적이었다. 살아있는 장소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작가가 만든 관념 속 장소 어딘가를 주인공이 돌아다녔다. 그래서 인물은 서로 엮이지 못하고 사연들은 주욱 나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성실한 글쓰기의 힘을 느꼈다. <1Q84>는 <상실의 시대>보다 확실히 잘 썼다. <1Q84>는 <상실의 시대>보다 덜 추상적이고 덜 관념적이다. 그건 아마 매일 글쓰기 연습을 한다는 하루키가 꾸준히 쓰고 이야기를 만들어 더욱 구체성을 가졌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어떤 언론에서는 하루키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 하루키는 노벨문학상은 절대 탈 수 없다고 본다. 그의 문학 작품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노벨문학상은 보편적인 작품을 선호한다. 하루키의 작품은 남녀 관계로 섬세하게 삶을 조망하지만 소설 속 남녀 관계는 사회성이나 역사성의 테두리 밖으로 넘어서지 못한다. 인물들이 지극히 내밀한 독백만을 한다. 그 독백은 영혼의 밑바닥까지 훑으며 삶을 성찰하지만 개인적 삶을 드러내는 것일 뿐 그 성찰이 사회과 개인이라는 테두리로 확장되지도 연결되지도 못한다.

<상실의 시대>에 시대라는 말을 붙여 주인공이나 작가가 넘어온 시대 속 청춘들의 반영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야기 속 학내 시위가 벌어지는 시대 상황은 옵션일 뿐이었다. 시대와 결합되어 있다는 건 그 시대의 특성으로 한 개인의 삶이 어떻게 변형되어 왔는지가 드러나면서 시대와 개인이 구체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는 데 <상실의 시대>에는 그게 없었다. 친했던 친구의 죽음이 다른 친구의 정신병으로 이어지고, 그 상처 속에서 청춘을 맞이하는 단지 개인의 초상만 있을 뿐이었다. 학내 시위로 대학이 휴교하고, 시위를 주도했던 인물들은 어떤 책임도 없이 학점을 따러 수업에 들어오는 묘사는 개인을 둘러싼 사회를 설명하기보다 인물의 배경이 되는 에피소드 조각의 구실에 불과했다.

그에 비하면 일본 근대문학의 선구자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은 천황의 죽음과 아버지의 죽음을 연결시켜 전 세대의 소멸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이것이 사회와 개인이 구체적으로 연결된 보편적인 이야기다. 아버지가 천황의 병을 자신의 병과 동일하게 여기며 매일 천황의 병세가 실린 신문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일어날 힘도 없는 사람이 신문기사를 샅샅이 보다 결국 천황이 죽자 아버지도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다. 아버지가 죽은 뒤 주인공이 존경하던 선생님의 자살이 잇따르면서 이 사건은 천황과 아버지, 스승의 죽음으로 앞 세대의 상실을 상징적으로 묘사했다. 결국 죽음으로 끝맺은 앞 세대와 주인공으로 이어지는 관계는 자신의 감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병들어 죽어 가는 인간 존재의 보편적 나약함을 세대를 이어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하루키는 거품이다.

하루키는 처음부터 줄곧 개인의 상실과 사랑으로 개인의 존재를 말해 왔다. 하루키가 아직까지 한국 젊은이들에게 필독으로 읽히는 건 젊음 그 자체는 죽도록 외로운 개인의 초상과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개인의 초상을 그려낸 하루키 작품에서 사회성은 음식이 끓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결국 걷어낼 수밖에 없는 거품덩어리에 불과하다. 하루키는 현실성이 결여된 관념의 이야기를 쓰고 그의 주인공들을 추상의 세계를 맴돌고 있다. 이것이 그가 남녀의 사랑이야기밖에 쓰지 못하는 이유다.

그에 반해 일본 추리소설의 거장 마쓰모토 세이초의 <점과 선>은 공무원 비리가 외롭고 소외된 여성과 연결되는 점을 자세하게 보여주었다. 사회와 개인의 현실적인 연결점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거기에 한 발 더 떠 마쓰모토 세이초의 장녀라 일컫는 미야베 미유키<화차>는 더욱 선명하게 버블 경제의 붕괴로 인한 사회 현상과 구조가 어떻게 인간의 삶을 철저하게 파괴시켰는지 적나라하게 파헤쳤다.

소세키나 세이초, 미유키는 각자 자기 자리에서 사회 속 인간을 그려냈다. 개인의 삶은 결코 사회 속 구조나 현상과 동떨어질 수 없는 사회적 삶이란 걸 그들은 자기 상상의 이야기 속에서 계속 말하고 있었다. 하루키에게는 거품이던 사회성이 그들에게는 소설이 말해야 하는 현실의 지점이었다.

결국 나는 어떤 취향이며 어떤 모습의 사람인가가 아니라 어떤 지향을 가지는가, 다시 말하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래서 어떤 의지를 가질 것인가의 문제라고 본다. 나는 이러저런 취향이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쓴다 또는 이런 모습이니까 이런 글을 쓴다며 알 수 없는 자신에게 끌려가며 모호해 질 것이 아니라, 나는 이런 태도와 자세로 살겠고, 이것을 지향하며 이런 모습으로 살겠다고 선택하며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후자가 더 구체적이라고 본다. 글도 삶도 관념도 생각도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것으로 타인과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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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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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했다. 무척 많이 나돌아다니던 이름이었다. 용의자X라는 사람. 늘 주위를 맴돌았다. 결국 만났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이야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구나. 그걸 느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고 지키기 위해 자기 삶을 버리는 이야기다. 그 여자는 남자한테 해준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냥 자기 자리에서 살고 있었을 뿐이다. 그냥 존재했을 뿐이다.

사랑은 존재 그 자체를 만나는 것이다. 이 소설은 다른 말이 필요 없다. 살인사건의 논리와 논리, 수학의 이론과 등식이 빽빽이 서 있는 숲에서 주인공은 마지막에 감정을 터트리며 모든 것을 뒤집는다. 시종일관 냉정하고 건조하게 이야기가 전개된다. 감정이 흐트러지는 여지가 조금씩 나오지만 주인공의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막강하고 완벽한 논리로 감정을 한 올도 흘리지 않던 주인공이 마지막에 감정을 폭발하듯 터뜨리는 것이 압권이다. 그것으로 독자는 멍해지고, 눈물 흘리고 공감하고 감동한다. 정말 훌륭한 구성이다.

마쓰모토 세이초나 미야베 미유키의 사회파 추리소설이 사회의 부정에서 출발했고, 그 부정의 과정을 추적해 나가 원인의 부정을 확인했다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사랑이라는 행위의 긍정에서 사건이 시작해서 시종 사랑이라는 동기로 움직이고 사랑을 확인하며 끝난다. 그것이 다르다. 긍정에서 시작해서 과정도 긍정이고 끝도 긍정이다.

추리소설에서 이런 경우는 거의 드물다. 대다수 원한, 복수, 피해, 절박한 부정적인 감정들이 사건의 원인이다. 그리고 그것을 파헤치거나 찾는 과정도 씁쓸하거나 슬프거나 어두운 정서가 깔려 있다. 결국 사건의 원인에는 소외, 두려움, 불안의 부정적인 감정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명확하게 다르다. 그래서 주인공의 감정 폭발이 감동을 주고 공감을 일으킨다. 그것이 바로 이야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여기는 지점이다. 살인 사건의 원인은 온전한 사랑이다. 모든 것을 주고 모든 것을 받았다. 그래서 감정이 드러났다. 그 감정은 긍정이고 그 감정은 선한다. 선한 감정의 폭발은 파편도 선하다. 그것이 독자의 선한 본질을 흔든다. 그래서 울고 공감한다. 

 이야기는 주인공 남자가 문제를 만들고, 친구가 문제를 푸는 구조다. 주인공 남자가 문제를 만든 이유는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주려고, 자기를 온전히 희생한다. 문제를 푸는 남자는 그 과정에서 주인공의 헌신을 알고 그 헌신을 지켜준다. 이 또한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으로 문제가 풀려 나갔다. 두 살인 사건을 만든 발상도 독특했다.

다만 여자를 지키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다리 밑의 노숙자를 죽이고, 그것에 아무 갈등도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이야기 전체에서 추구하는 온전한 사랑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비록 노숙자이지만 생명을 쉽게 죽이는 장면에선 마음이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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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가미 일족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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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를 보자마자 빡 당겼다. 하얀 가면을 뒤집어쓴 상반신이 섬뜩한 느낌을 주어 선뜻 선택할 수 없었다. 무서워 읽지 못할 것같았다. 하지만 그 오싹함이 목줄을 걸어 잡아 당겼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가 있길래 그렇게 무서워 보이냐 말이지.

처음부터 작가의 감정이입이 과도하게 들어갔다. 작가가 다음에 일어날 사건을 앞서 말한 점이 독특하다. ‘앞으로 일어날 끔찍한 사건은...’ 이라고 하면서 이제부터 잔인한 사건이 벌어질 거라고 계속 광고한다. 그래서 독자는 이제나 저제나 굉장한 사건이 벌어지길 기다리며 책장을 한 장씩 넘기지만 작가는 좀체 사건을 빨리 진행시키지 않는다.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작가는 무성영화 시대의 삐에로같다. ‘개봉박두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이수일과 심순애’ 어쩌고 하면서 북을 치며 동네방네 알리는 광고쟁이를 적극적으로 한다. 독자는 그 영화를 보려고 일주일이나 되는 개봉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관객같다. 작가가 예고한 잔인한 사건을 기다리며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심정은 개봉날 극장 앞에 길게 줄서있다 겨우 표를 끊고 들어가 어서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것같다. 작가는 독자들 애간장 다 태우고 태우다 겨우 사건 하나 휙 던져준다. 몹쓸 버릇이지만 독자의 호기심을 붙잡고 들었다 놓았다 하는 재주로는 일품이다.

이야기가 재미있기는 하다. 이누가미 일족의 다양한 인간들이 얽혀 있는 것 자체가 주는 재미가 있다.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의 인물들은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은 채 행위와 말만으로 그들의 내면을 추리하는 데 반해 이누가미 일족의 등장인물들은 감정을 결코 감추지 않는다. 작가 자체가 문장 속에서 감정을 과도하게 드러낸다(소제목도 ‘아, 잔인하도다’ 이다) 인물들도 질투, 복수, 분노, 슬픔 들을 숨기지 않고 속속들이 다 드러낸다. 어쩌면 이 점이 독자에게 공감을 얻는 지점일 것이다. 이야기를 읽는 독자는 유산 상속을 둘러싼 그들의 다툼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질투, 분노를 등장인물처럼 자연스럽게 느끼고 인물들이 그 감정을 감추기는커녕 그대로 드러내면서 독자의 감정을 대신 말한다는 느낌을 준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못할 짓이 없다는 것이 이야기의 주제이고 범인인 첫째딸의 살인 동기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진부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누구나 공감하는 보편적인 주제다.

인물이 많이 등장해 이들 사이를 복잡하게 엮어놓은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그 속에서 적절한 사건이 하나씩 터져 독자의 긴장을 높인다. 인물의 감정이 풍부하게 드러나서 독자의 감정과 만난 점들이 이어지는 장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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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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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메리카 끝자락, 도미니카 공화국의 역사와 인물을 잘 버무려 놓은 이야기다. 손자인 오스카, 그 어머니 벨라, 오스카의 누나, 벨라의 아버지. 이렇게 삼대가 도미니카 독재자 트루히요 치하에서 어떻게 살았고 죽었고, 핍박받고 사랑하다 여기에까지 있는지를 오스카의 누나를 사랑했던 작가의 시각으로 풀어냈다. 작가는 때로는 이야기 속에 등장했다가 어떨 때는 상관없는 객의 눈이 되면서 이야기 속에서 활약을 하는데 그런 종횡무진하는 방식은 신선하다. 화자를 누나의 옛애인으로 삼은 건 이야기가 개인의 역사나 심리를 뿜어내기보다 독재 정권아래서 핍박받고 사랑했던 삼대에 걸친 가족의 삶이니 작가가 이 인물들과 근접한 거리에서 그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적절했다.

이야기에는 남미 특유의 낙천성이 있다. 엄격함이나 규칙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야기 구조도 자유롭다. 삼대에 걸친 가족사를 오스카, 누나, 고모, 엄마, 할아버지 순으로 풀었다가 다시 오스카에게로 돌아가 마무리 짓는 구조가 앞과 끝이 맞아 떨어져 묘하게 후련한 느낌을 준다.

작가는 도미니카 미신에서부터 미국의 코믹만화, 게임, B급 영화, 장르문학의 대가처럼 그들을 종횡무진 넘다드는 재주가 사뭇 천재급이다. 작가는 글을 쓰기보다 지껄이듯 이야기를 줄줄 말한다. 떠들 듯 내뱉는 문체에서는 도무지 엄숙하거나 진지한 점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등장인물의 삶은 처절하다. 그가 발랄하게 떠들어대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대부분 살벌한 독재 치하의 고문, 폭력, 협박, 살인, 망가진 삶들인데도 그 이야기를 듣다보면 우울한 틈이 없다.

특히 옥수수밭에서 벌어진 폭력과 살인 장면은 강렬하다. 작물들의 키가 허리 아래인 한국에서는 상상이 안 되는 깊은 옥수수밭, 그런 조건이어서 벌어졌던 폭력과 살인은 길을 잃을 만큼 무성하다는 옥수수밭이 이국적이었던 만큼 색다르고 독특했다. 한국의 고문과 살인은 대공분실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벌어졌지만, 그들은 넓은 대자연 한복판에서 그 일이 버젓이 일어날 만큼 그 자연 조건이 다르다는 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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