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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평점 :
하루키는 거품이다
-<상실의 시대>, 개인과 사회가 연결되지 못하는 관념의 세계-
워낙 유명한 소설이다. 주변 사람 중 안 읽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자자한 명성만큼은 아니었다.
그의 최근작 <1Q84>를 3권까지 다 읽고 하루키한테 질려 버렸다. 등장인물의 성격이 지나치게 깔끔하고 이야기가 빈틈없이 아귀가 맞아 오히려 현실성이 부족했다. 결국 사랑이야기인 것도 흥미롭지 않았다. 1,2권까지는 흥미로웠다. 아오마메가 발각될 것인가, 겐노와 만날 것인가가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축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등장할 때마다 침을 삼키며 읽었는데, 결국 그들은 만났고 마지막 장면인 그들의 접촉 행위를 보며 허탈했다. 섹스장면은 없었다. 그래서 공허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린 시절 어느 순간부터 영혼의 밑바닥을 훑으며 서로를 갈망해 왔는데, 정작 그들이 만나고 난 이후 장면은 그 오랜 그리움을 채워줄만한 구체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마지막 장면으로 그동안 숨넘어가게 긴장되던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물을 타 놓은 것같이 희미해졌다. 여태까지 공들인 이야기가 그냥 묽어져 버렸다. 남녀가 결국 만나게 되는 과정을 이렇게 길고 자세하게 그려놓을 필요가 있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관념으로 쓴 글의 마지막은 자기 힘을 가지지 못한 채 허무함으로 채워지는 걸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상실의 시대>를 읽으면서 하루키가 무척 관념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실의 시대>에서 주인공들이 하는 독백은 실제 사건의 느낌이 아니라 거의 다 생각이었다. 장소 묘사도 감성적이긴 하지만 추상적이었다. 살아있는 장소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작가가 만든 관념 속 장소 어딘가를 주인공이 돌아다녔다. 그래서 인물은 서로 엮이지 못하고 사연들은 주욱 나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성실한 글쓰기의 힘을 느꼈다. <1Q84>는 <상실의 시대>보다 확실히 잘 썼다. <1Q84>는 <상실의 시대>보다 덜 추상적이고 덜 관념적이다. 그건 아마 매일 글쓰기 연습을 한다는 하루키가 꾸준히 쓰고 이야기를 만들어 더욱 구체성을 가졌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어떤 언론에서는 하루키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 하루키는 노벨문학상은 절대 탈 수 없다고 본다. 그의 문학 작품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노벨문학상은 보편적인 작품을 선호한다. 하루키의 작품은 남녀 관계로 섬세하게 삶을 조망하지만 소설 속 남녀 관계는 사회성이나 역사성의 테두리 밖으로 넘어서지 못한다. 인물들이 지극히 내밀한 독백만을 한다. 그 독백은 영혼의 밑바닥까지 훑으며 삶을 성찰하지만 개인적 삶을 드러내는 것일 뿐 그 성찰이 사회과 개인이라는 테두리로 확장되지도 연결되지도 못한다.
<상실의 시대>에 시대라는 말을 붙여 주인공이나 작가가 넘어온 시대 속 청춘들의 반영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야기 속 학내 시위가 벌어지는 시대 상황은 옵션일 뿐이었다. 시대와 결합되어 있다는 건 그 시대의 특성으로 한 개인의 삶이 어떻게 변형되어 왔는지가 드러나면서 시대와 개인이 구체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는 데 <상실의 시대>에는 그게 없었다. 친했던 친구의 죽음이 다른 친구의 정신병으로 이어지고, 그 상처 속에서 청춘을 맞이하는 단지 개인의 초상만 있을 뿐이었다. 학내 시위로 대학이 휴교하고, 시위를 주도했던 인물들은 어떤 책임도 없이 학점을 따러 수업에 들어오는 묘사는 개인을 둘러싼 사회를 설명하기보다 인물의 배경이 되는 에피소드 조각의 구실에 불과했다.
그에 비하면 일본 근대문학의 선구자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은 천황의 죽음과 아버지의 죽음을 연결시켜 전 세대의 소멸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이것이 사회와 개인이 구체적으로 연결된 보편적인 이야기다. 아버지가 천황의 병을 자신의 병과 동일하게 여기며 매일 천황의 병세가 실린 신문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일어날 힘도 없는 사람이 신문기사를 샅샅이 보다 결국 천황이 죽자 아버지도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다. 아버지가 죽은 뒤 주인공이 존경하던 선생님의 자살이 잇따르면서 이 사건은 천황과 아버지, 스승의 죽음으로 앞 세대의 상실을 상징적으로 묘사했다. 결국 죽음으로 끝맺은 앞 세대와 주인공으로 이어지는 관계는 자신의 감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병들어 죽어 가는 인간 존재의 보편적 나약함을 세대를 이어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하루키는 거품이다.
하루키는 처음부터 줄곧 개인의 상실과 사랑으로 개인의 존재를 말해 왔다. 하루키가 아직까지 한국 젊은이들에게 필독으로 읽히는 건 젊음 그 자체는 죽도록 외로운 개인의 초상과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개인의 초상을 그려낸 하루키 작품에서 사회성은 음식이 끓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결국 걷어낼 수밖에 없는 거품덩어리에 불과하다. 하루키는 현실성이 결여된 관념의 이야기를 쓰고 그의 주인공들을 추상의 세계를 맴돌고 있다. 이것이 그가 남녀의 사랑이야기밖에 쓰지 못하는 이유다.
그에 반해 일본 추리소설의 거장 마쓰모토 세이초의 <점과 선>은 공무원 비리가 외롭고 소외된 여성과 연결되는 점을 자세하게 보여주었다. 사회와 개인의 현실적인 연결점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거기에 한 발 더 떠 마쓰모토 세이초의 장녀라 일컫는 미야베 미유키<화차>는 더욱 선명하게 버블 경제의 붕괴로 인한 사회 현상과 구조가 어떻게 인간의 삶을 철저하게 파괴시켰는지 적나라하게 파헤쳤다.
소세키나 세이초, 미유키는 각자 자기 자리에서 사회 속 인간을 그려냈다. 개인의 삶은 결코 사회 속 구조나 현상과 동떨어질 수 없는 사회적 삶이란 걸 그들은 자기 상상의 이야기 속에서 계속 말하고 있었다. 하루키에게는 거품이던 사회성이 그들에게는 소설이 말해야 하는 현실의 지점이었다.
결국 나는 어떤 취향이며 어떤 모습의 사람인가가 아니라 어떤 지향을 가지는가, 다시 말하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래서 어떤 의지를 가질 것인가의 문제라고 본다. 나는 이러저런 취향이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쓴다 또는 이런 모습이니까 이런 글을 쓴다며 알 수 없는 자신에게 끌려가며 모호해 질 것이 아니라, 나는 이런 태도와 자세로 살겠고, 이것을 지향하며 이런 모습으로 살겠다고 선택하며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후자가 더 구체적이라고 본다. 글도 삶도 관념도 생각도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것으로 타인과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