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 혜민 스님과 함께하는 내 마음 다시보기
혜민 지음, 이영철 그림 / 쌤앤파커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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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부님이 추천해서 읽게 되었다. 신부님이 스님의 글을 읽으라고 권해서 처음에는 놀랐다. 하지만 읽다 보니 마음의 도는 종교를 넘는다는 걸 알았다. 역시 신부님이 권장하는 책다웠다. 한 단락 한 단락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단락들 하나하나가 묵상이나 기도 주제로 적당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은 건, ‘관계는 난로다. 너무 가까우면 뜨겁고, 너무 멀어지면 추워 견딜 수 없다’는 대목이었다. 관계에 대해 이렇게 멋지고 똑 떨어지는 비유를 본 적이 없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을 스치고 만나고 또 사랑하는 사람들과 매일 부대끼고 속상하며 때로는 즐겁기도 하면서 적당한 선을 지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있을까?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 두 번이라는 말처럼 좋아하는 표현은 아무리 많이 해도 좋다고 하지만, 좋다고 가까이 노래를 불러대도 조그만 지나면 지긋지긋해지기 마련이다. 조금 더 가까이 오기를 원하지만 정작 어느 만큼 거리에 서 있어야 하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관계인 것같다. 적절한 거리, 적당한 선. 선이 흐릿하면 서로 떡이 되어 내가 없어지고, 반대로 선이 분명하면 나만 남아 외로워진다. 나를 지키고 존중하는 적절한 선은 어디까지일까? 나와 상대의 적당한 거리는 어느 만큼일까?

  혜민 스님의 조언이 마음에 와닿는 건 그가 우리와 같은 어려움을 겪어본 사람이라는 점같다. 대개 스님의 말씀이라면 입산수도하고 도를 깨우쳐 선문답으로 그 도가 높음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지만, 정작 범부들은 고승들의 화두를 이해하지 못하다. 혜민 스님의 조언은 어렵지 않고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마음의 문이 쉽게 열린다.

그건 혜민 스님이 중고등학교 때 지옥같은 입시를 치르고 그 안에서 치열하게 부대끼고 치이면서 스스로 길을 찾은 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와 같은 시대에 나와 같은 구체적 어려움을 겪으며 여기까지 온 사람이라는 동류의식이 그의 말을 수긍하고 공감하게 하는 것같다.

  어떻게 보면 스님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적절한 선에서 말해주고 있다. 어렵지는 않지만 쉽지도 않게, 지나치게 깊지 않지만 그렇다고 결코 얇지 않게, 두툼한 학력이 있지만 표현은 쉽고 편안하게 하면서 스님의 말씀대로 우리와 적당한 거리에서 난로를 두고 앉아 이야기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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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귀족 1 세미콜론 코믹스
아라카와 히로무 글.그림, 김동욱 옮김 / 세미콜론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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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21의 <내 남자의 만화방>에 소개된 서평을 보고 찾아 읽었다. 도서관에서 구하기 힘들었다. 대출은 안 되었고,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어린이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걸 알고 찾아갔다. 그나마도 2권은 보이지 않아 결국 구입해서 읽었다.

  조용한 도서관에서 웃음을 참느라 얼마나 애썼는지, 정말 힘들었다. 시종일관 웃음과 낙관과 황당 설정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일본 북쪽 홋카이도의 춥고 거친 날씨 속에서 소를 기르고 감자 농사를 짓는 작가와 가족은 살아있는 사람들 그 자체였다. 그들은 살기 위해 건강했고, 험한 자연과 공생했다. 거친 자연의 세파를 겪으며 자기 방식으로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고, 때로는 무시무시하고 때로는 너그러운 자연을 그들 또한 한시도 잊지 않았으니 자연도 자신의 존재를 그들 속에서 늘 확인하는 셈이었다.

  이 작가의 또 다른 작품 <강철의 연금술사>의 주인공은 강인하고 너그러우면서 돈과 권력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다. 과학과 인간을 결합시킨 작가의 상상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나는 작가의 성장고백인 <백성귀족>을 읽으며 어떻게 작가가 강철의 연금술사와 같은 캐릭터를 창조해 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작가는 거칠고 험한 자연을 온 몸으로 버티며 강인함을 키웠고, 많은 가축과 동물을 돌보며 생명의 경이와 너그러움을 배웠고, 매일 달라지는 자연과 동물들 속에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풍부한 상상력을 키웠을 것이다. 가축이 새끼 낳는 걸 밤새 지켜보고, 그 새끼를 키우고, 우유와 젖을 주던 가족같은 소가 어느 날 늙고 쇠약해져 트럭에 실려 고기가 되려고 도살장으로 가는 장면을 눈물 흘리며 수도 없이 겪어야 했던 작가는 그런 생명의 순환 앞에서 돈과 권력으로는 채우지 못하는 생명의 뿌리를 느꼈을 것이다. 이 모든 경험이 아라카와 히로무가 흔들리지 않고 자기만의 만화를 그려내는 힘이라는 걸 느꼈다.

  그리고 작가가 학창시절을 보낸 농업고등학교 생활은 농업을 바라보는 한 나라의 정책이 어떻게 교육과 연관되고 문화로까지 이어지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학교에 딸린 가축을 돌보아야 한다는 이유로 학생 전원이 기숙사생활을 하고, 새벽에 일어나 가축을 돌보고 오후까지 이어지는 수업을 마치고 동아리 활동에다 밤늦게까지 가축을 돌보다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 농업고등학교 학생들의 일과를 보며 작가가 어떻게 가축과 농사 이야기인 만화를 현실에서 그릴 수 있었고, 그것이 현실 만화판에서 출판이 되고 또 그 만화를 읽어주는 사람까지 있는 순환고리가 일본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지 알게 해주었다.

  그들은 우리나라처럼 농사를 터부시하지 않았다. 또 현재 유럽의 선진국은 거의 농업국가이다. 영국은 2차 대전 이후 도시농업이 확산되어 현재 식량 자급률이 125%에 이른다. 프랑스의 식량자급률은 무려 329%에 이르고, 독일도 147%다. 미국과 캐나다, 호주도 100%를 훌쩍 뛰어넘는다.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25%. 그것도 쌀을 제외하면 4%대다. OECD 31개국 중 28위다.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업을 육성하지 않는 나라에서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커피 전문점에서 한 끼 식사값에 버금 가는 커피를 5~6천원에 사 마시고 있다. 이걸로 식사를 대신할 수 있나? 비싼 등록금을 알바로 메꾸려는 대학생들은 한 줄에 2000원 하는 김밥으로 한 끼를 떼우고 있다. 그것도 쌀은 중국에서 수입한 찰기없고 딱딱한 쌀이다. 청년 실업과 계약직 노동으로 긴 시간 일하는 젊은이들은 길거리에서 플라스틱 컵에 밥과 반찬을 담아먹으며 또 한 끼를 데우고 있다. 때때로 값싼 수입 고기로 배를 불리지만 이 또한 건강에는 적신호를 일으킨다. 학원에서 밤늦게 돌아오는 어린이나 청소년들은 식사를 대부분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이나 햄버거, 컵라면으로 떼우고 있다.

  우리는 심한 영양 불균형에 놓여 있고, 영양 부실은 신체 흐름을 깨뜨리고 이렇듯 부조화스러운 몸의 순환은 정신의 불안정까지 일으킨다. 어린이와 청소년., 젊은이들이 싱싱하고 건강한 먹을거리를 제대로 먹지 못하는 한국 사회는 어느 새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1위에 성큼 올랐다. 제대로 먹지 못하면 제대로 생각할 수 없고, 또한 제대로 느낄 수도 없고 제대로 존재할 수 없다. 우리 입으로 들어가 영양소를 만드는 먹을거리는 우리를 제대로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한국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백성귀족>은 대단히 유쾌하고 재미있다. 덧붙여 위와 같은 고민을 던져주는 것이야 말로 이 만화가 더불어 유익하기까지 하다는 증거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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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와일라잇 - 나의 뱀파이어 연인 트와일라잇 1
스테프니 메이어 지음, 변용란 옮김 / 북폴리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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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먼저 봤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영화와 비교하는 건 자연스러웠다. 더구나 그 영화가 매혹적이고 아름다웠고 신비로워 눈을 뗄 수 없을 땐 더욱 그러했다. 어찌 보면 영화가 재미있어 원작을 선택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건 영화 속 이야기를 다시 훑는 느낌이었다.

  영화로 옮겨진 대다수의 원작을 읽을 때면 이미 봤던 영화에 대해 실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 경우에는 그랬다. 하지만 영화 트와일라잇은 달랐다. 원작의 스토리로 영화 매체의 특성을 참 잘 살려 만들었다. 영화 트와일라잇은 원작에 없는 신비로운 이미지를 가미시켰다. 늘 비가 내리는 북반부의 축축한 톤을 영화는 잘 살렸다. 양치식물이 온통 뒤덮인 초록색 숲과 물기를 머금어 축축한 나무와 이파리들은 빛을 보지 않고 숨어사는 뱀파이어의 슬픈 운명과 잘 어울렸다. 어둡고 흐린 하늘빛은 창백하리만치 파리한 뱀파이어의 피부색처럼 영화의 색깔로 녹아 있었다. 영화는 특별할 것도 색다를 것도 없는 뱀파이어 이야기를 이렇듯 북반부의 축축한 색깔과 남자 배우의 독특한 생김새를 적절히 섞어 신비롭고 아름답게 그려냈다. 그게 이 영화의 매력이다.

  원작은 뱀파이어의 야수성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꾸려 나갔다. 뱀파이어 에드워드는 체취가 강렬하게 감미로운 인간 벨라를 사랑하지만, 언제든 한 입에 먹어 치울 수 있는 벨라를 자신의 야수성으로 덮치지 않으려 불쌍할 정도로 애쓴다. 인간이었다가 뱀파이어가 되어 100년 동안 야수로 살아온 그는 인간에게 없는 강력한 능력이 있다. 엄청난 힘과 무섭도록 빠른 속도, 타인의 생각을 읽는 능력과 잘생긴 외모도 있다. 이것으로 그는 100년을 갖은 위험과 방랑과 위협에서 살아남았다. 그에 비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조차도 지키지 못할 만큼 왜소하다. 벨라는 늘 넘어지고 엎어지며 사고의 위험에 놓여 있고, 경찰서장인 벨라 아버지는 10년 동안 총알 한 번 쏘지 않은 자신의 총을 매일 열심히 닦는다. 이렇듯 에드워드의 야수성은 인간을 앞서지만 그 야수성은 인간을 보호하고 돌보며 착하게 쓰고 있다.

  이렇듯 착한 야수성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보호하지만 에드워드는 여자를 집어삼킬까봐 노심초사한다. 100년을 유지해온 야수성을 조절하는 건 그의 몫이었다. 그는 인간을 먹지 않는 이유를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가 초조해하고 망설이는 건 사랑하는 여자를 먹게 될까봐, 그래서 그 여자를 잃게 될까봐서가 아니었다. 100년 동안 자신의 무기로 가져온 것들이 결국 자신을 집어삼킬까 두려워하고 있다. 그것이 자신을 파괴시킬까봐 자기 안에서 정체성의 심한 혼란을 일으킨다. 그는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걸 한순간도 부정하지 않지만, 그의 행위는 이미 뱀파이어가 아니었다. 야수는 동물의 고기를 먹고 그 피를 마시며 생명을 유지한다. 하지만 눈 앞에 맛있고 먹음직스런 동물 고기가 있는데, 그걸 먹을 수 없다. 에드워드의 불안은 자신을 부정해야 하는 존재의 혼란이다.

  그래서 이야기 전개는 에드워드와 벨라에 대화에 의지해 흘러간다. 야수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에드워드의 고민이 이야기의 초점이다. 뱀파이어의 정체를 아는 벨라와 그는 대화로 소통한다. 그래서 이야기는 사변적이다. 사건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고 주요 등장인물의 내밀한 대화가 중심으로 이어진다. 영화는 야수성을 거세해야 하는 에드워드의 고민은 빼 버렸다. 그 결과 스토리만 남게 되었고, 그들의 사변적인 대화는 흐리고 축축한 이미지 톤으로 대신했다. 그 신비로운 이미지 톤이 결국 영화를 살린 셈이었다.

  에드워드의 고민은 갈등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의 고민은 벨라를 사랑하면서 시작되었지만 그 해결은 벨라와 관계 속에서 풀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벨라를 눈 깜짝할 사이에 덮칠 수 있지만 그 능력을 조절해야 하는 건 오로지 자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고민은 고민에 그치지 갈등이 될 수 없다. 갈등은 비슷하거나 같은 조건에 있을 때 관계의 힘이나 변수로 서로 영향을 받을 때나 가능한 말이다. 벨라에 대한 에드워드의 고민은 힘 센 사자가 연약한 노루를 좋아해서 생기는 고민이다. 잡아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힘의 관계에서 권력은 늘 사자에게 있고 그래서 일방적이다.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뱀파이어를 그린 이야기는 많다. 하지만 트와일라잇은 인간을 한없이 약하고 무력한 존재로 그리고 있는 점이 색다르다. 야수성은 인간에게도 있다. 전쟁 범죄나 가정 폭력, 성폭력에서 가해자는 야수로 그려지지만 실제로 그들이 야수인 건 아니다. 그들 또한 다른 동물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지는 않는다. 그야말로 성질이 특화되었다는 의미다. 트와일라잇에선 인간의 관념적 야수성이 아니라 동물의 물리적 야수성을 다룬다. 동물의 야수성은 인간보다 우월하고 월등하게 뛰어나다.

  뱀파이어 에드워드는 한 순간도 인간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보다 강하니까. 그는 야수성을 버릴 마음이 없다. 하지만 그는 벨라를 잡아먹지 않고 식욕을 조절하는 자신을 보며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매번 확인한다. 그것이 에드워드에게 자신감과 긍지를 준다. 하지만 그래서 혼란스럽다. 자신의 강함을 확인하지만 왜 야수성을 억제해야 하는지 스스로도 납득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100년만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 느낀 야수는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상황에 놓였다. 그렇게 사랑은 100년의 야수에게서 야수성을 빼앗았다. 그래서 그는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사랑이란 이렇게 자신의 근원적인 성질을 부정하게 만드는가? 그리고 끝없는 혼란으로 정체성을 고민하게 만드는가? 그래서 달라진 게 뭐가 있나? 에드워드가 아무리 고민해도 그는 100년 동안 살아왔던 존재의 성질을 버리지 못한다. 그건 물리적이고 생물적인 존재의 현존이니까. 물리적인 신체가 없으면 인간이든 동물이든 죽으니까. 그도 그것을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지만 결코 자신을 죽일 수는 없으니까. 사랑의 한계는 딱 여기까지다. 사랑하면 나를 버려야 하고 그러면 나는 사라진다. 결국 자신이 살아있어야 사랑도 가능하다. 내가 있어야 타인도 존재하는 거니까. 때때로 이것을 뛰어넘는 성인, 성녀들이 있긴 하지만, 우리는 결국 물리적 육체를 가진 범부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누가 자신을 버린 사랑은 아름답다고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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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과 선 동서 미스터리 북스 52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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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아버지 마쓰모토 세이초의 추리소설 두 개가 실려 있다.

<점과 선>

사건이 발생했고,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이 치밀했다. 경시청 형사가 범인 찾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 열차 시간표를 구체적으로 사용해서 일본 전역을 왔다갔다 하는 사실적인 묘사가 절묘하다. 뇌물과 배임, 횡령의 공무원 비리 사건을 살인의 배후에 넣어 사회 비판한 점이 탁월하다. 범인은 그 과정에서 소외된 우울한 여성으로 설정하면서 단지 비판을 넘어 사회 속에 있는 인간의 외로움을 드러낸 점이 뛰어나다. 범인은 외로움이라고 할 수 있다.

<제로의 초점>

범인을 찾는 이, 사건을 찾아가는 이가 실종자의 부인으로 설정하는 것이 돋보인다. 남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이 결혼한 새댁이 1주일만에 남편이 실종되어 찾으면서 남편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하나씩 드러내는 점이 뛰어나다. 남편의 흔적을 예리한 느낌으로 하나하나 더듬어 나가는 한가지씩 밝혀내는 점이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결국 핵심은 남편은 어떤 인간이었나, 남편의 비밀은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이었다. 범인은 미군정 당시 매춘여성이었지만 지금은 지방 명사가 된 여성. 과거의 비밀을 감추려 계속 살인을 하는 여성을 설정한 것은 약간 식상했다.

범인을 찾으면서 남편의 동료와 관계, 시아주버니, 동서와 관계, 그들의 인물 묘사를 예리하게 했다. 이들의 작은 몸짓, 눈빛, 말투 등으로 그들의 심리를 묘사한 점이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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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4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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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고 으스스했다. 살인 사건이 책 속에서 벌어지지 않았지만, 살인을 추정하고 시체를 찾아가는 상상이 공포심을더해 간다.

현대의 신용카드 제도. 그것을 남발하며 경제를 움직여 나가는 국가나 기업을 구체적으로 비판했다. 구체적인 자료를 보여주며 사실성이 더해진다. 두 여성을 놓고, 주택 대출로 집안이 망하고 삶이 파괴된 여성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여자를 표적으로 죽이는 현실을 절묘하게 묘사했다. 법률, 통신판매회사, 신용카드 구조, 문어발 기업의 구체적인 사례를 적용하여 파괴되는 여자의 삶을 놀라울 만치 꼼꼼하게 묘사했다.

작가가 사회 현상에 아주 관심이 많고, 자료 조사를 치밀하게 한 점이 뛰어나다. 발로 뛰어다니며 쓴 글이어서 실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일본 이야기지만 신용사회, 주택대출의 단면은 현재 한국사회 현실과 비스해서 놀라웠다. 우리 한국도 경제구조나 신용대출이 지금처럼 그냥 이어진다면 <화차>안 인물들처럼 신용카드를 일상에서 늘 썼을 뿐인데, 그 빚이 넘쳐 술집에서 일하며 갚을 수밖에 없는 사회 현상이 올수도 있겠다고 느꼈다.

소설이 현실을 말하면 자칫 딱딱하고 상투적으로 갈 수도 있는데, 천만의 말씀! 미미여사의 화차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지만 뛰어난 상상력이 이야기를 예측할 수 없이 밀고 당긴다. 그래서 미미여사의 추리소설은 손에 들면 마지막 장을 덮지 않고는 도저히 책을 내려놓을 수 없게 만든다. 상상력의 힘이란 이런 것이다.

화차를 꼭 읽어보시길! 섬뜩한 현실과 만나는 순간 책 속 주인공은 내가 되어 버리는 독특한 경험을 할 것이다. 책 속 현실이 바로 현재의 내 주변의 현실이므로 나는 틀림없이 그 현실속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미미여사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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