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바이어던 - 국가라는 이름의 괴물 e시대의 절대사상 2
김용환 지음 / 살림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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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7세기 철학자들의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홉스는 대학 생활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과학 혁명의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의 교과 과정은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와 스콜라 철학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25면)




2. 그가 가장 좋아했던 역사가는 투기디데스(Thucydides)였으며, 홉스는 후에 그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영역하여 출판하였다. (27면)




3. 철학자 베이컨과 교류하게 되는데, 그의 개인 비서 일을 하게 된다. (27면)




4. 테카르트와의 만남은 잘못된 만남에 가까웠다. 이 두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른 전제 위에서 철학을 시작했다. 데카르트가 정신과 물질을 세상의 근본으로 본 이원론자라면 홉스는 오직 물체만이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일원론자이기 때문이다. (29, 30면)




5. 인과관계를 갖고 있거나 참된 추론에 의해서 얻어진 지식만이 철학적 지식이 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추론이 불가능한 것은 학문의 나무에서 잘라 버려야 할 죽은 가지들이다. 예를 들면 점성학, 교의학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암호(metaphysical codes)'로 가득 찬 스콜라 철학의 이론이 그것들이다. 철학은 더 이상 ’마제타의 돌‘처럼 오랜 세월 해독을 기다리는 그런 ’철학자의 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 홉스는 학문의 나무에서 죽은 가지를 잘라냄으로써 자신이 그런 철학의 나무가 건강학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다. (47면)




6. 홉스는 과거 철학의 병폐를 ‘불합리성’ 또는 ‘무의미한 말들’로 진단하면서 그 병폐의 제1원인을 방법론의 결핍에 두고 있다. 특히 스콜라 철학이 비생산적인 철학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도 잘못된 방법론 때문이라고 보았다. (48면)




7. 홉스는 근대 제일의 유물론자이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데모크리토스와 로마의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의 원자론과 유물론을 계승하고 있다. (52면)




8. 홉스 철학의 중심에는 언제나 유물론의 두 중심 개념인 물체와 운동의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인 홉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운동 개념을 거부하고 그 자리를 갈릴레이의 기계적인 운동 개념으로 대체했다. 그리고 데모크리토스와 르크레티우스의 물체 개념을 가지고 철학의 세 주제인 자연, 인간, 사회를 설명하고자 했다. (52, 53면)




9. “이 세상에는 보편적Iuniversal)인 것은 없고 이름(name)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름 붙여진 사물들은 모두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56면)




10. 그러므로 마음의 안과 밖에 정신적인 무엇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오직 이름으로만 존재한다. 어떤 개별적인 것이 존재하기 위해 보편적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유물론자이자 유명론자인 홉스의 세계에 ‘정신적 실체’나 ‘보편적 본질’ 같은 개념이 자리할 공간이 없다. 왜냐하면 자연은 개별적인 사물들과 그것들의 이름만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57면)




11. 언어를 잘못 사용하는 첫 번째 책임은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돌아간다. 왜냐하면 이들은 ‘정신적 실체, 무형의 물체’ 같은 무의미한 말들을 서슴없이 하기 때문이다. (61면)




12. 홉스의 견해에 의하면, ‘수사학은 이성이 맞서서 싸워야 할 최대의 교활한 적이다. 사람의 감정에 주로 작용함으로써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61면)




13. 자기 확신이 없다는 것은 자기에 대한 불신과 타자에 대한 불신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 ... 자신이 없는 사람이 더 폭력적인 경우는 너무도 많다. (77면)




14. “권력을 쉬지 않고 영원히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경향이며, 이런 권력욕구는 오직 죽어서만 멈춘다”는 홉스의 말은 니체가 모든 존재하는 것의 본질을 ‘권력의 의지(Will to Power)’로 보는 것과 한가지이다. (79면)




15. 홉스가 볼 때 ‘자기보호’와 ‘평화의 추구’는 실질적으로 동의어였다. 왜냐하면 평화를 추구하는 일과 자기보호는 동일한 목적의 다른 두 표현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82면)




16. “결과적으로 홉스는 정치적 권위에 대한 기독교적 전통을 거꾸로 만들었다. 위에 있는 신이 아니라 아래에 있는 백성들이 자신들의 통치자에게 신성에 준하는 권위를 부여했으며 통치자를 필사의 신(mortal god)으로 만들었다.” (왓킨스, 9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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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2
임마누엘 칸트 지음, 이원봉 옮김 / 책세상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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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험이라는 근거에 발을 딛고 있는 모든 철학은 경험적인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고, 반면에 오직 선험적a priori 원칙들로만 가르침을 제시하는 모든 철학은 순수한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 순수한 철학이 단지 형식적이기만 하다면 논리학이라고 한다. 반면에 지성Verstand의 특정한 대상들에 한정된다면 형이상학이라고 한다. (16면)




2. 예를 들어 ‘거짓말하지 말라’는 금지는, (인간이 아닌) 다른 이성적인 존재들은 그것에 구애받지 않는다 해도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이성적인 존재 모두에게 적용된다), 원래 도덕 법칙이라고 하는 그 외 모든 것들도 그렇다. 따라서 여기서 구속력의 근거는 인간의 본성이나 인간을 포함하고 있는 세상의 형편 안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순수한 이성의 개념들 안에서 선험적으로 찾아져야만 한다. 오직 경험에서 나온 원칙에 근거한 다른 모든 지시는, 더 나아가 어떤 점에서는 보편적이기도 한 지시는, 그것이 아주 작은 부분, 즉 단 하나의 동인이라도 경험적인 근거에 몸을 맡기는 한 실용적 규칙이라 부를 수는 있겠지만 결코 도덕 법칙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18면)




3. 그리고 인간에게 적용될 때, 도덕 철학은 인간에 대한 지식(인간학)에서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빌려오지 않고, 오히려 이성적 존재인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법칙을 준다. (18면)




4. 순수하고 참된(이것이야말로 실천에서 가장 중요하다) 도덕법칙은 오직 순수한 철학에서만 찾을 수 있으며, 그러므로 순수한 철학(형이상학)이 먼저 와야 하고, 그것 없이는 어떠한 도덕 철학도 있을 수 없다. 순수한 원칙에 경험적인 원칙을 섞는 것은 철학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하지 못하고(철학이 평범한 이성 인식과 구별되는 점은 바로, 평범한 이성 인식이 뒤죽박죽으로 파악한 것을 철학은 정돈된 학문으로 제시한다는 데 있다), 하물며 도덕 철학이라는 이름은 말할 것도 없다. (20면)




5. 왜냐하면 도덕 형이상학은 가능한 순수한 의지의 이념과 원칙들을 탐구해야지, 인간이기 때문에 ‘하려고 하는’ 행위와 조건들을 탐구해서는 안 되는데, 이것은 대부분 심리학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20, 21면)




6. 의무란 법칙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어떤 행위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38면)




7. 그러므로 의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은 객관적으로 법칙 뿐이고, 주관적으로는 이런 실천적 법칙에 대한 존경심, 따라서 나의 모든 경향성을 버리더라도 그 법칙을 따르겠다는 준칙Maxime 뿐이다. (39면)




8. 도덕법칙이란 이성적인 모든 존재에게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에, 도덕 법칙을 이성적 존재 일반이라는 보편적 개념에서 이끌어 내고, 그렇게 해서 (이성적 존재 가운데 특별히) 인간에게 응용하려면 (도덕 형이상학과 달리) 인간학을 필요로 하게 될 모든 도덕을, 마침내 인간학에 의지하지 않고 순수한 철학으로, 즉 형이상학으로 완전하게 제시하는 것이 (이러한 종류의 완전히 분리된 인식(형이상학)에서는 완전하게 제시하는 것이 쉽다) 또 이론적으로 대단히 필요하고 실천적으로 중요하다. (57면)




9. 자연의 모든 것은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오직 이성적인 존재만이 법칙에 대한 표상에 따라, 즉 원칙에 따라 행위하는 능력을 갖는데 이것이 의지이다. 행위를 법칙에서 이끌어내기 위해서는(법칙에 따라 행위하기 위해서는) 이성이 요구되기 때문에, 의지는 바로 실천적 이성인 것이다. 이성이 의지를 불가피하게 결정한다면(의지가 항상 이성을 따른다면), 그러한 존재의 행위는 객관적으로 필연적이라고 인식되며 또한 주관적으로도 필연적이다. (58면)




10. 객관적 원칙에 대한 표상이 의지를 강제하는 한(객관적 법칙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 법칙에 따라 행위하게 된다면) 그 표상을 (이성의) 명령이라고 부르고, 그 명령의 표현 양식을 명령법이라고 부른다. (59면)




11. 모든 명령법은 가언적(조건적)이거나 아니면 정언적(무조건적)으로 명령한다. 가언적 명령법은 할 수 있는 모든 행위를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이유가 달성하려고 하는(또는 달성하고 싶다고 바랄 수 있는) 다른 어떤 행위를 이루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언적 명령법은 행위를 그 자체로서 다른 목적에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는 명령법일 것이다. (60면)




12. 그래서 그 행위가 단지 다른 것에 대해 수단으로서만 선하다면 그 명령법은 가언적이다. (반면에) 그 행위가 그 자체로 선하다고 생각되고, 따라서 스스로 이성을 따르믄 의지에 필연적인 것으로, 그 의지의 원칙으로 생각된다면 그 명령법은 정언적이다. (61면)




13. 의지는 어떤 법칙에 대한 표상에 맞춰 행동하도록 자신을 결정하는 능력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은 이성적 존재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81면)




14. 칸트는 자신의 이론 철학에서 이성의 법칙이 우리가 세계 안에서 찾아낸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세계에 부과한 것이라고 말하고, 이러한 사고 방식의 전환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부른다. 칸트의 이런 사상은 실천 철학에서 ‘자율성’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칸트 이전의 도덕 철학자들은 도덕성의 원칙을, 즉 의무의 근거를 인간의 밖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에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의무의 근거는 인간이 갖는 자기 지배의 능력, 즉 자율성에서만 찾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성의 법칙을 우리의 행위에 부과하고, 행위를 함으로써 그 법칙을 세계에 부과하는 것이다. (역자해제, 17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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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적 이성 비판 - 이성의 상실
M.호르크하이머 지음, 박구용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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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관적 이성은 지난 세기 서양의 사유에서 나타난 사고방식의 근본적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징후이다. 오랫동안 이성에 대해 지금과는 정반대의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그 관점은 개인적 의식 안에뿐만 아니라, 객관적 세계 속에서도 있는 하나의 힘으로서 이성의 현존을 주장했다. 여기서 객관적 세계란 인간 사이의 관계와 사회 계급 사이의 관계들, 사회 제도와 기관들, 그리고 자연과 그것의 발현을 가리킨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콜라 철학, 그리고 독일 관념론 같은 거대한 철학적 체계들은 객관적 이성 이론의 토대 위에서 건립된 것들이었다. 객관적 이성 이론은 인간과 인간의 목적들을 포함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위계질서 또는 포괄적 체계를 발전시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한 인간의 삶이 얼마나 합리적인지는 이러한 총체성과의 조화에 따라 규정될 수 있었다. 단순히 인간과 인간의 목적뿐만이 아니라 총체성의 객관적 구조가 개인적인 사상과 행위의 척도로 작용해야만 했다(17, 18면).




2. “이성적인 것”의 객관적 질서를 자기의 이익 관심과 자기보존을 포함한 인간적 현존재와 화해시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그의 “국가론”에서 객관적 이성의 빛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또한 성공적이며 행복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18면)




3.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이성의 이름으로 종교를 공격했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그들이 무너뜨린 것은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형이상학과 객관적 이성 개념 자체, 그리고 고군분투하는 철학이 가지고 있는 힘의 원천이었다. 결국 사물의 참된 본성을 파악하고, 우리의 삶을 이끄는 원칙들르 확정하는 기관으로서의 이성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겨졌다. 사변(Spekulation)은 형이상학과 동의어이고, 형이상학은 신화와 미신의 동의어였다. (36면)




4. 토마스주의의 실패는 실용성의 결여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성급하게 실용적 의도를 허용했다는 데 있다. (119면)




5. 이러한 결합은 토마스주의가 진리와 좋음을 현실과 동일시하는 데에서 비롯한다. (122면)




6. 오늘날 모든 삶이 점점 더 합리화와 기획에 복속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예전에는 사적 영역을 형성했던 개인의 가장 은밀한 충동을 포함한 모든 개인들의 삶은 이제 합리화와 기획의 요구를 따라야만 한다. 개인의 자기보존은 체제 보존의 요구에 개인이 적응해야 함을 전제한다. 개인은 더 이상 체제를 벗어날 여지가 없다. (128면)




7. 인간은 행위의 절대적인 규범적 척도와 보편적 구속력을 갖는 이념들로부터 점진적으로 자유로워졌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척도 이외에 어떠한 척도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히 자유로운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독립성의 증대는 그에 상응하는 수동성의 증대를 낳았다. 인간은 그의 수단과 관련된 계산을 하는 데는 예민해졌지만 목적을 선택하는 데는 무뎌졌다. 예전에는 목적을 선택하는 것이 객관적 진리에 대한 믿음과 서로 연관되어 있었다. (129면)




8.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유럽을 대변하는 최초의 위대한 인물로 간주했던 지식인들은 사변을 전념할 수 있는 여가와 자신들의 실존 전체를 그들이 정신적으로 벗어나고자 했던 지배 체제에 빚지고 있다. (136면)




9. 저항하는 개인은 진리에 대한 요구와 현존재의 비합리성을 화해시키려는 모든 실용적 시도에 대항할 것이다. 그는 지배적인 척도에 순응함으로써 진리를 희생하는 대신에, 이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천에서도 가능한 한 많이 자신의 삶 속에서 진리를 표현하려고 고집할 것이다. 그는 충돌이 많은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는 극단적인 고독의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내면적인 어려움을 세계에 투사하도록 그를 유혹하는 비합리적 적대감은 그의 아버지가 어릴 적 환상 속에서 보여주었던 것, 즉 진리를 실현하려는 열정을 통해 극복된다. (146면)




10. 다윈은 신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했다는 기독교적인 믿음의 근본적인 교설을 깨뜨렸다. 동시에 다윈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헤겔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이었던 형이상학적 진화 개념을 깨뜨렸다. 그는 진화를 사건의 맹목적인 연쇄 과정으로 이해했다. 그 과정에서 생존은 엔텔레이키아에 따른 유기적 본성의 전개에 의존하기보다는 생활 조건에 대한 적응에 의존한다. (159면)




11. (다윈에 따르면) 이성은 결코 독립적인 능력이 아니라, 더듬이나 발톱처럼 어떤 유기적인 것으로서 자연 조건에 적응해가면서 진화하며, 또한 특히 식량을 획득하고 위험을 방지할 때 자연 조건을 극복하기에 적합한 수단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살아남는다. (10면)




12. 다윈주의는 신학이냐 철학이냐에 상관없이 이성이 인식하고자 하는 진리를 표현하는 어떤 것으로 자연 자체를 고찰하는 모든 학설을 파괴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자연의 반란을 돕는다. 이성이 비하되고 야생적인 자연이 추앙되는 이성과 자연의 동일시는 합리화의 시대에 전형적인 오류 추리이다. ... 인간은 자연과 이성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고 두 가지를 화해시키려고 시도해야만 한다. (161면)




13. 전통적인 신학과 형이상학에서 자연적인 것은 대개 나쁜 것으로, 정신적인 것이나 초자연적인 것은 좋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에 비해 대중적 다윈주의에서 좋음은 잘 적응한 것이고, 유기체가 적응한 것의 가치는 확고부동한 것이거나 또는 오직 계속되는 적응 여부에 따라 평가된다. (161면)




14. 겉으로 보기에 이처럼 새로운 경험적 이성은 형이상학적 전통의 이성보다도 자연에 대해 더 겸손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것은 ‘유용하지 않은 정신적인 것’을 가차 없이 무시하고, 인간의 활동에 자극을 주는 것 이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자연에 대한 모든 관점을 폐기하는 오만한 실천적 오성이다. 이러한 관점의 영향은 근대 철학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162면)




15. 개인과 이성에 관하여 전통적 철학이 품었던 환상 - 그것들의 영원성에 대한 환상 -은 이제 사라지려고 한다 개인은 한때 이성을 전적으로 자아의 도구로 파악했다. ... 기계가 조종사를 내동댕이친  것이다. ... 이성은 자신이 완결되는 바로 그 순간에 비합리적이고 어리석은 것이 되어 버렸다. (164면)




16. 우리가 하나의 역사적 범주로서 개인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단지 인류의 특수한 구성원이 갖는 시공간적이고 감각적인 실존만을 언급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에 덧붙여서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포함하여 하나의 의식된 인간적 존재로서 자신의 고유한 개별성을 인식하고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자기의 정체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165면)




17. 물론 엘리트는 언제나 계속해서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는 전략에 더 많이 몰입한다 오늘날 사회적 권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크게 사물에 관한 권력에 의해 중개되고 있다. 사물을 지배하는 권력에 대한 개인의 관심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사물이 점점 더 개인을 지배할 것이며, 개인은 점점 더 진정으로 개인적인 특성을 잃을 것이며, 개인의 정신은 점점 더 형식화된 이성의 자동장치로 변질될 것이다. (166면)




18. 철학자는 본보기를 제시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인간, 동물, 사회, 세계, 정신, 그리고 사유에 대해서 자연 과학자들이 화학적 물질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말할 수 없다. 철학자는 정해진 공식을 가지지 않는다. 정해진 공식은 없다. 다른 개념들과의 상호 관계와 미묘한 의미 차이를 고려하면서 이러한 개념들 각각의 의미를 펼쳐 보여주는 것, 즉 적확한 서술은 여전히 철학의 주요 과제다. (206, 207면)




19. 우리 시대에는 고립된 주관적 이성이 도처에서 치명적인 결과를 동반한 승리를 거두고 있기 때문에, 비판은 주관주의적 철학의 잔재를 강조하기보다는 필연적으로 객관적 이성을 강조하면서 수행하여야 한다. (216면)




20. 이성이 인간에 의해 인간적 자연과 인간 외적 자연을 지배하는 도구가 되어버린 이래로, 즉 이성의 최초의 기원 이래로 진리를 발견하려는 이성의 고유한 의도는 좌절되었다. (218면)




21. 모든 시대에 걸쳐 좋음은 자신을 태어나게 했던 억압의 흔적을 보여 주었다. 따라서 인간 존엄성의 이념은 야만적인 지배 형식의 경험으로부터 생겨났다. 가장 무자비한 봉건주의 시기에 존엄성은 권력의 상징이었다. 황제와 왕은 후광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존경을 요구했으며 존경을 받았다. 경의를 표하는데 소홀한 사람은 처벌을 받았고, 황실을 모독한 사람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오늘날 잔혹한 근원에서 풀려난 개인의 존엄성 개념은 인간적인 사회 조직을 특징짓는 이념들 가운데 하나다. (219면)




22. 철학은 언어를 통해 고통을 반영하며, 따라서 고통을 경험과 기억의 영역으로 전이시킨다는 점에서 예술과 일치한다. (221면)




23. 철학은 우리의 모든 인식과 통찰을 언어적 구조와 관계시키려는 의식적인 노력이다. (221면)




24. 철학은 고립된 낱말과 문장 속에서 이러한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는다. 이는 동양적 교파들의 이론이 추구한 방법이며, 사물과 인간의 세례에 대한 성서의 이야기 속에서도 여전히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철학은 오히려 철학적 진리를 발전시키려는 계속되는 이론적 노력 속에서 사물의 올바른 이름을 발견하고자 한다. (221면)




25. 플라톤주의와 같은 객관적 이성의 전통적인 체계들은 냉혹한 세계 질서를 찬양하고 그로 인해 신화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지지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실증주의보다는 객관적 이성의 전통적인 체계에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왜냐하면 객관적 이성의 전통적 체계는 진리란 언어와 현실의 일치라는 이념을 보존해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체계의 대변자들은 자신들이 영원한 체계 속에서 언어와 현실의 일치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정함으로써, 그리고 스스로가 사회적 불의의 한가운데 살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 참된 존재론의 구성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보지 못함으로써 오류를 범했다. 역사는 이와 같은 모든 시도가 허위임을 입증했다. (222면)




26. 전통철학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론은 과학과는 달리 몇몇 보편적 이념들로부터 사물의 본질, 실체, 형식을 도출해내려고 시도했다. 이성은 이러한 보편적 이념을 마치 자기 자신 속에서 발견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주의 구조는 우리가 우리 정신 속에서 발견하는 그 어떤 제1의 원칙으로도 소급될 수 없다. 사물의 보다 추상적인 특성이 근원적인 것이나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만 할 어떤 근거도 없다. 니체는 아마도 존재론의 이러한 근본적인 약점을 다른 어떤 철학자보다도 생생하게 그려냈을 것이다. (222면)




27. 첫째, 철학은 최고의 무한한 진리로 고찰될 것을 주장하는 이념들의 요구를 부정해야만 한다. 형이상학적 체계가 저 증서를 절대적이고 영원한 원칙으로 서술할 때마다, 그것은 역사적인 상대성을 드러낸다. (224면)




28. 둘째, 근원적인 문화적 이념은 진리의 내용을 지닌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철학은 이념을 그것이 유래한 사회적 배경에 따라 평가해야만 한다. 철학은 이념과 현실 사이의 단절을 극복한다. (224, 225면)




29. 부정은 철학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부정은 지배 이데올로기가 요구하는 절대성에 대한 부정과 현실이 요구하는 뻔뻔스러운 주장에 대한 부정이라는 양날을 지니고 있다. 부정을 중요한 요소로 가지는 철학이 회의주의와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회의주의는 형식화되고 추상적인 방식으로 부정을 사용한다. 철학은 존립하는 가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가치가 그것의 상대성을 드러내는 이론적 전체의 일부가 된다고 주장한다. (225면)




30. 그럼에도 이들은(프랑크푸르트 학파) 호르크하이머가 주장한 비판 이론의 제1과제, 즉 이질성과 타자성을 배제하는 동일성의 철학 체계와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현실을 긍정하고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함으로써 언어를 빼앗긴 것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과제를 공유한다. (옮긴이의 해제, 231면)




31. 객관적 진리를 부정하는 주관적 이성의 전면화는 이성을 목적에 합당한 수단을 계산하는 도구로 전락시켰다. (옮긴이의 해제, 232면)




32. 호르크하이머에 따르면 계몽의 기획은 형식화되고 도구화된 주관적 이성의 전면화로 발전했으며, 이로부터 현대 문명의 위기가 등장했다. 여기서 새로운 것은 주관적 이성이 아니라 그것의 전면화다. (232면)




33. 주관적 이성은 유용성 이외의 어떠한 객관적 원칙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억압적 현실과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할 수 있는 원칙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주관적 이성은 지배적 이익 관심에 쉽게 굴복하며, 비합리적인 억압적 현실을 부정하기보다는 그 현실에 적응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는다. (232면)




34. 이성을 유용성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킨 주관적 이성의 전면화는 모든 것을 사유화한다. 이성의 도구화는 1) 이념과 언어를 도구화하며, 2) 사유를 도구화한다. ... 3) 활동조차도 도구화한다. ... 4) 학문과 예술, 그리고 5) 자연을 도구화하며, 결국 6) 인간까지도 도구화한다. 결과적으로 이성을 도구적 이성으로 축소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의 모든 문화적 활동을 도구화한다. 따라서 도구적 이성이 전면화된 세계에는 이성과 사유를 비하하는 반지성주의만 남는다. (233면)




35. 객관적 이성은 현실에 내재하는 원칙으로서 수단보다는 목적의 규정과 그것의 실현 방법을 지향한다. (233면)




36. 계몽의 기획은 이제 주관적 이성의 기획으로 급진전한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주관적 이성의 전면화로 발전한 계몽의 기획은 야만에서 문명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야만적 신화로 발전했다. (234면)




37. 그렇다면 도구화된 주관적 이성의 전면화에서 비롯된 야만을 극복하기 위해 이미 해체된 객관적 이성을 부활시켜야 하는가? 호르크하이머의 대답은 ‘예’이면서도 동시에 ‘아니요’다. ... 그(호르크하이머)에게 정신으로 실체화된 객관적 이성을 부활시켜 현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시대착오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객관적 이성을 형이상학적 헛소리로 취급하는 것에 반대한다. 오히려 그는 객관적 이성을 그것을 실체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복원해야 하고 나아가 강조해야 하며, 이렇게 부활된 객관적 이성과 주관적 이성의 조화를 통해 계몽이 끊임없이 계몽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35면)




38. 현재의 문화적 위기는 실증주의 철학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236면)




39. 호르크하이머는 인위적으로 객관적 이성을 부활시켜서는 안 된다는 관점을 실증주의와 공유한다. 그러나 실증주의자들이 현대의 문화적 위기가 과학적 방법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됐다고 본다면, 호르크하이머는 자연 과학을 신화화하는 실증주의에서 위기의 원인을 찾는다. ... 호르크하이머는 실증주의가 철학을 과학으로 환원하는 가운데 과학의 정신 자체를 부정한다고 말한다. (236면)




40. 호르크하이머는 실증주의가 1) 모든 객관적 이성을 부정하고 해체하며, 2) 유용성과 그것을 보증하는 과학적 방법론을 최고의 유일한 진리 원칙으로 규정하며, 나아가 3) 비판적 사유를 부정하고 사실을 숭배하는 가운데 현실을 긍정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전락할 위험이 있으며, 따라서 4) 도구적 이성의 전면화에서 비롯되는 현대 사회의 문화적 위기를 강화하다고 비판한다. (237면)




41. 토마스주의는 종교적 믿음과 생활 태도를 유용성의 원칙에 비추어 정당화함으로써 현실에 순응한다. (237면)




42. 실증주의가 모든 형태의 형이상학을 부정하는 가운데 오히려 종교에 대한 비판을 멈춘다면, 토마스주의는 유용성의 원칙에 따라 종교와 신앙을 방어하는 가운데 실증주의와 타협한다. 보다 근본적으로 토마스주의와 실증주의는 현실 긍정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238면)




43. 실증주의가 과학을 이데올로기화했다면 신토마스주의는 신앙을 사회적 지배 세력에 봉사하도록 만들었다. (238면)




44. 그런데 호르크하이머에 따르면 개인의 유일한 목적이 자기보존인 사회에서는 보존되어야 할 개인이 사라지고 만다. 그에 따르면 개인이 자기보존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자연과 사물에 대한 지배를 강화할수록, 그는 오히려 사물에 의해 지배되고, 그에 따라 진정으로 개인적인 특성을 상실하게 되며, 결국 도구적 이성의 자동 장치로 변질되고 만다. 사물화가 강화됨에 따라 개인은 몰락되고 마는 것이다. 특히 모든 것을 도구화하는 현대 문명은 개인을 기능적으로 반응하는 단순한 세포로 위축시킨다. (243면)




45. 철학은 언어를 잃어버린 것들의 언어가 되어야 하며 억압적 현실과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비판하는 부정의 철학이어야만 한다. (244면)




46. 호르크하이머에 따르면 철학은 탈역사적이고 탈맥락적으로 정의되어서는 안 된다. 역사적 요소를 제거하고 시대 초월적으로 정의된 철학은 억압적 현실에 무관심하게 되고 결국 현실을 긍정하게 된다. (244면)




47. 호르크하이머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1) 프롤레타리아의 경제적 삶의 조건이 혁명에 대한 그들의 의지를 근본적으로 약화시킬 만큼 향상될 것이라는 사실, 2) 자본주의가 경제 공황과 같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자정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3) 현실 사회주의가 관리되는 사회로 전락할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4) 사회 정의와 자유의 변증법적 관계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했다. (248면)




48. 아도르노 철학이 총체성과 동일성의 모든 체계에 대해 급진적으로 비판하는 데서 출발한다면, 총체성에 대한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은 다소 유화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아도르노가 객관적 이성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 것과는 달리, 호르크하이머는 객관적 이성과 주관적 이성의 조화를 통해 도구적 이성의 전면화에서 비롯되는 계몽의 퇴행을 극복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차이는 아도르노의 관심을 예술과 미학으로 이끌었던 반면에, 호르크하이머의 관심을 철학에 머물게 했다. (250면)




49. 비판 이론의 이름으로 예술과 문학, 그리고 철학은 사물과 생명의 의미를 표현하고, 현실을 그것의 올바른 이름으로 부르고, 말하지 못하는 모든 것들의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 (25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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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매체의 현실 방송문화진흥총서 73
니클라스 루만 지음, 김성재 옮김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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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우리의 사회, 곧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을 대중매체를 통해 안다. (1면)




2. 혹은 호라치오가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 것처럼: 나는 그렇게 들었고, 그것을 어느 정도 믿을 수 밖에 없다. ... 우리는 모든 지식에 의문부호를 붙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에 지식을 쌓고 그 지식을 믿을 수 밖에 없다. (1면)




3. 어떤 경우에도 중요한 것은 ‘송신자와 수신자가 참석한 상황에서 상호작용이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상호작용은 기술이 중간에 개입됨으로써 배제된다. (2면)




4. 대중매체의 현실적인 현실은 대중매체 속에서 진행되고 대중매체를 통과하는 커뮤니케이션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4면)




5.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은 누군가가 보고, 듣고, 읽으며 그 다음에 올 커뮤니케이션이 연계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때에만 실행된다. 따라서 전달행위 하나만으로는 아직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다. (4면)




6. 체계가 자신과 환경에 대한 자신의 차이를 재생산하도록 하는, 실제로 진행되는 작동들... (4면)




7. 두 번째 이해의 가능성을 위해서 우리는 제2차 관찰자의 태도, 곧 관찰자들을 관찰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5면)




8. 이 차이를 견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관찰자와 관련해) 첫 번째 현실과 두 번째 현실 (혹은 관찰된) 현실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다. (5면)




9. 대중매체는 결국 하나의 현실을 구성해야만 한다. 그것도 고유의 현실과는 달리, 아직 하나의 현실을 구성해야 한다. (5면)




10. 그러나 모든 인식이 자기관계와 타자관계의 구별 때문에 완성되어야 한다면, 모든 인식은 (이와 함께 모든 현실은) 하나의 구성이라는 것 역시 유효하다. ‘왜냐하면 이 자기관계와 타자관계의 구별은 체계의 환경 속에서는 분명히 존재할 수 없고’(그곳에서 ‘자기’는 무엇이고, ‘타자’는 무엇이란 말인가?), ‘체계 자체 내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6면)




11. 이로써 우리는 인식론에서처럼 작동적 구성주의(operative Konstruktivmus)를 선택한다. 구성주의적 이론은 인지적 체계들이 현실 객체의 존재 조건과 그 객체의 인식 조건을 차별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들 체계들은 그러한 현실 객체에 대한 어떠한 인식독립적인 접근창구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결함은 제2차 관찰의 차원, 곧 ‘다른’ 체계들의 인지적 작동을 관찰하는 차원에서 보완될 수 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어떻게 다른 체계의 ‘프레임들(frames)'이 그들의 인식을 형성하는가를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제2차 관찰 차원의 문제를 반복하게 한다. 다른 관찰자의 관찰자들 역시 이들 관찰자들의 존재 조건과, 자신을 조건짓은 특정한 관찰자가 문제가 되는 인식 조건을 관찰할 수 없다. (6면)




12. 인지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최초의 현실은 ‘세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지적 작동 내에 있다. ... 곧, 최초의 현실은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는 체계를 형성함으로써 가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체계가 자기관계와 타자관계를 구별할 때만 관찰할 수 있기에 가능하다. 이 조건들은 (선험적인 조건이 아니라) 경험적인 조건으로 상정한 것이다. (6면)




13. 작동적 구성주의의 논제는 ‘세계상실’에 빠지지 않는다. 또한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논제는 세계를 대상으로 전제하지 않고 현상학적 의미에서 지평으로 전제한다. 곧,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전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을 구성한다는 것 이외의 가능성은 없다. (7면)




14. 한 체계가 복잡할수록 그리고 혼란에 더 강하게 노출되면 될 수록 세계는 현실을 상실하지 않고 더욱더 풍부한 다양성을 허용하고, 이 체계는 부정, 허구, 혹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로부터 거리를 두는 ‘단지 분석적인’ 혹은 통계학적인 가정들을 이용한 작업을 더욱 더 많이 수행할 수 있다. (7, 8면)




15. 그러나 이로써 현실에 대한 모든 발언은 더 이상 일반화할 수 없는(선험화될 수 없는) 체계관계와 결부된다. (8면)




16. 위기는 대중매체의 작동방식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자기묘사, 곧 충분한 성찰이론(Reflexionstheorie)의 결핍과 관계된다. (8면)




17. 이 기능체계는 다른 체계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상승된 수행능력을 독립분화, 작동적 폐쇄 그리고 해당 체계의 아우토포이에시스적 자율성에서 얻는다. (9면)




18. 체계는 시간을 내서 다른 것들이 뒤따를 것이라는 기대감 속에서 모든 작동들을 형성한다. 이렇게 대중매체라는 체계 역시 고유의 커뮤니케이션이 다음 시간에 혹은 다음날에 계속될 것이라는 가정 하에 업무를 수행한다. 모든 방송은 다음에 이어질 방송을 약속한다. 이때 결코 순간에 존재하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14면)




19. 주제/기능의 차별기준은 타자관계/자기관계의 차별기준에 해당된다. 이 차별기준을 가지고 관찰자는 주제를 선정하는 데 자유를 얻는다. 특히 정보를 생략하는 데 그렇다. 그는 진리를 통해 자신에게 동기를 부여할 필요가 없고, 그럼으로써 규정된 것에 자신을 종속시킬 필요가 없다. (17면)




20. “우리는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관계하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가 ‘보는’ 그대로의 세상과 관계하고 있는지 결코 확신할 수 없다.” (19면)




21. 이로써 이 체계는 작동적으로 폐쇄되고, 그 결과 고유의 작동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재생산하는 데 그 작동을 더 이상 사회내부적 환경과의 상호작용적 접촉 생산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그 대신’ 자기관계와 타자관계라는 체계 고유의 차별기준에 방향을 맞춘다. 이 체계는 막대한 저장 용량에도 불구하고 ‘빠른’ 기억과 망각에 맞추어져 있다. (22면)




22. 코드는 하나의 양-면-형식(Zwei-Seiten-Form)이고, 그 내면은 하나의 외면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하는 차별기준이다. 그러나 이 코드 형식의 내면/외면 관계는 ‘체계와 환경의 차이’와 혼동될 수 없다. (23면)




23. 그것은 체계의 자기결정에 사용된다. 이를 위해 코드의 차이는 하나의 ‘차별기준’을 사용한다. 곧, 이 차별기준은 어떤 원칙, 목표설정, 존재 발언, 결론공식이 아닌 하나의 선도차별이다. (23면)




24. 대중매체 체계의 코드는 정보와 비정보의 차별기준이다. 이 체계는 정보의 도움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정보는 긍정적인 가치이고, 이 체계 고유의 작동을 가능케 하는 지시의 가치다. 그러나 어떤 것을 정보로 간주하거나 그렇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위해서는 어떤 것을 비정보적(nichtimformativ)으로 간주할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해야 한다. 그러한 반사가치 없이는 모든 체계가 다가오는 모든 것에 노출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체계는 자신과 환경을 차별하지 못하고, 고유한 복잡성의 축소와 고유한 선택을 조직하지 못할 것이다. (23면)




25. 환언하면 이것은 선택 범위의 선택과 구체적인 정보의 선택이라는 2단계적 선택이다. (24면)




26. 정보 없이는 어떤 커뮤니케이션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마지막에는 전달한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것에 대해 얘기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25면)




27. 이러한 요구들은 그레고리 바테슨(Gregory Bateson)의 정보 개념과 일치한다. 정보는 “나중 사건에서 하나의 차이를 만드는 그 어떤 차이다.” (25면)




28. 인지에서는 정신적 체계의 산물이고,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사회적 체계의 산물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체계가 이러한 차이들을 만드느냐를 설명해야 한다. 아니면 스펜서 브라운과 함께 어떤 체계가 차별성을 만드는(draw a distinction) 모든 지시를 수행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26면)




29. 정보/비정보 코드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이 코드의 시간에 대한 관계에 있다. 정보는 반복될 수 없다. 정보는 사건이 되는 순간 비정보가 된다. 한 뉴스는 두 번 사용될 경우 의미는 유지하지만 정보가치는 상실된다. (26면)




30. 새로운 화폐와 새로운 정보는 현대적인 사회역동성의 중심 모티브다. (27면)




31. 어떤 것이 시간의 경과에서 ‘새로운’으로 표현되면 이로써 다른 어떤 것은 ‘낡은’이 된다. (28면)




32. 이에 반해 우리는 특정한 종류의 고물을 고도의 선택 과정을 통해 올드 타이머, 골동품으로 가치를 상승시킴으로써 위안을 얻는다. 우리는 다시 이 물건들에 대해 새로운 정보, 가격, 해석을 창조해 낼 수 있다. (28면)




33. 대중매체는 자신 고유의 선택도를 통제하는 데 자율적이다. 이 고유한 선택도는 자율성이 높을수록 더욱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35면)




34. 물론 어디에서나 그렇듯이 오류 확률은 고려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 확률은 일반적으로 높이 계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별적인 사건들로 남는다. 그렇지 않다면 이 뉴스와 보도의 프로그램 영역의 특수성은 파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39면)




35. 개 한 마리가 우체부를 물었다는 것은 가장 협소한 장소관계 내에서만 보도될 수 있다. 좀 더 멀리 떨어진 주변에서는 한 떼의 개들이 그 우체부를 이빨로 갈기갈기 찢었어야만 보도될 수 있다. 만일 그 일이 봄베이에서 일어났다면 베를린에서는 보도되지 않을 것이다. (42면)




36. ‘규범위반’은 특별한 주의를 끈다. 이는 법위반, 그러나 특히 도덕위반, 그리고 최근에는 ‘정치적 정확성 위반’에 통용된다. 매체를 통한 묘사에서 규범위반은 흔히 ‘스캔들’의 성격을 띤다. 이는 공진(공감대)을 강화시키고, 장면을 되살리며, 규범위반 시 가능한 이해 및 사과 발언을 배제시킨다. 스캔들의 경우 사람들이 스캔들에 대해 자신을 어떻게 말하느냐는 것은 그 다음의 스캔들이 될 수 있다. (43면)




37. 이것은 특히 대중매체가 마치 윤리적 기본 원칙을 확정할 수 있다거나, 아니면 사회의 도덕 수위를 선행의 방향으로 상승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능력을 가진 법정은 현대사회에는 없다. (44면)




38. 재생산되는 것은 단지 도덕의 코드인 선행과 나쁜 혹은 사악한 행위의 ‘차이’다. 기준의 확정은 결국 법체계의 관할 사항이다. 대중매체는 단지 사회의 지속적인 자기 자극을 수행하고, 개별적 및 커뮤니케이션 차원의 도덕적 민감성을 재생산할 뿐이다. (45면)




39. 우리가 막스 베버를 간단히 인용한다면, 행위는 유형화시키는 이해를 통해서 비로소 성립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5면)




40. 다의성은 모든 커뮤니케이션에서 발견된다. (46면)




41. 뉴스가 가진 참신성의 가치는 모두에게 똑같이 흐르는 시간에 있지 않고, 추측된 공중의 지식 상태 혹은 말을 건네받은 공중의 일부에서 탄생한다. (49면)




42. 비록 진리 혹은 진리에 대한 추측이 뉴스를 위해 불가결한 것일지라도, 매중매체는 진리/허위의 코드를 따르지 않고 대중매체 자체의 인지적 프로그램 영역인 정보/비정보의 코드를 따른다. (50면)




43. 바로 이 동일성(=정체성) 획득의 고유한 방식을 통해 하나의 ‘형식(Form)'이 형성된다. (51면)




44. 하나의 대답은 이해와 관련해 단지 새로운 것, 놀랄만한 것, 인공적인 것만 향유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것은 어떻든 있든 그대로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술이론의 답이다. 다른 대답은 커뮤니케이션의 전달자 측면과 관련된 것으로서, 여기서는 관심을 기대한다. 이것은 정치이론의 답이다. (52면)




45. 대중메체는 지속적으로 항상 자신의 고유한 불신과도 씨름한다. 대중매체는 해설하고, 논쟁하고, 자기 자신을 수정한다. 의견들이 아니라 주제들이 결정적이다. ‘숲의 죽음’에 대해 너무 많이 얘기된 결과, 우리는 마침내 무엇이 원인들인가를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경우든 거기에 대해 수많은 의견이 있다는 것을 안다. ... 우리는 오직 관찰하는 것을 관찰하고 기대될 수 있는 차이에서 갈등 자체를 현실로 체험하는 것을 배울 뿐이다.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차이는 더 크고 고유한 의견을 주장하고 자신을 이 의견과 동일화하고 싶고, 이때 그러한 행위를 내버려두고 싶은 유혹 역시 크다. (95면)




46. 아마도 가장 중요하고 지속되는 기본적인 특징은 대중매체가 정보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계속되고 또 계속되는 정보를 통해 사용되어야 하는 스스로 창조된 불확실성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다. 대중매체는 사회를 자극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고 정보를 획득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높인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커뮤니케이션은 사회가 스스로 생산하는 차이를 통해 자극에 노출되게 하는 의미의 상관관계를 높인다. (113면)




47. 그보다는 현실을 ‘무엇’과 ‘어떻게’라는, 곧 “무엇이 관찰되는가”와 “어떻게 관찰되는가”라는 양면 형식으로 가정하는 현실 이해가 더 중요하다. 그리고 이는 정보와 전달의 차이와 관련된 커뮤니케이션의 관찰과 정확히 일치된다. 오직 우리가 이러한 차이를 기반으로 할 때, 우리는 무엇인가를 관찰할 수 있다. (115면)




48. 대중매체의 현실은 제2차 관찰의 현실이다. (115면)




49. 아마도 이러한 고찰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대중매체가 현실을 창조한다고 하지만, 합의의 의무가 있는 현실을 창조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126면)




50. 작동은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고, 이 사건들의 재생산은 체계의 아우토포이에시스, 곧 체계와 환경 차이의 재생산을 수행한다. (132면)




51. 우리는 생물학적 진화론에서 널리 퍼진 인식을 사회이론에서 검증할 수 있기 위해 작동과 관찰의 차별기준을 필요로 한다. 중요한 문제는 생명체가 자신의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인지적인 능력과 성과로 돌릴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인지적인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한 체계가 존재해야 한다면, 생명과 생명을 위한 충분한 적응성이 언제나 이미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다. (132면)




52. 물론 이해(Verstehen)은 실제적으로는 미스(Miß)를 이해하지 않은 오해(Mißverstehen)이다. (134면)




53. 수백 년 동안의 전통은 우리를 현혹시켜 대중매체가 부정적으로 나타난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전통은 사회체계의 안정성이 '합의'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러나 실제로 사회의 안정성(재생산 능력)은 우선적으로 계속되는 커뮤니케이션에서 전제될 수 있는 '객체들'의 창조에서 유래한다. (137면)




54. 커뮤니케이션이 주로 시간문제를 해결한다는 사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에서 다음 커뮤니케이션으로 갈 것인가이다. ... 잘 알려진 것처럼 우리는 의견불일치의 경우에도 계속해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다. (138면)




55. 하인즈 폰 포에스터(Heinz von Foerster)에 의해 완성된 제2차 사이버네틱스(Kybernetik zweiter Ordnung)는 작동적인 구성주의의 선언으로서가 아니라면 당연히 구성주의적 이론으로서 통용된다. (163면)




56. 구성주의적 인식론들은 꼭 사이버네틱스, 1947년 미국의 수학자 위너(N. Winner)를 중심으로 형성된 과학자 그룹을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라고 명명했는데, 그 어원은 키잡이를 뜻하는 고대 희랍어 키버네데스(kybernetes)이다. 위너에 따르면 사이버네틱스는 한 체계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종류의 변량들 - 그 하나는 우리가 직접 제어할 수 없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 중 제어할 수 없는 변량의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값을 바탕으로 제어할 수 있는 변량의 값을 적당히 정하여, 이 체계를 가장 바람직한 상태에 이르게 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학문이다. (163면)




57. 누가 관찰자인가? 제2차 사이버네틱스는 이 질문을 관찰하는 모든 체계를 향해 던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이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로써 모든 인지적, 규범적 그리고 도덕적 코드, 곧 모든 윤리적 코드는 오류로 나타난다. (167, 168면)




58. 1980년대 이후 독일 사회학계는 하버마스로 대표되는 생활세계학파(Lebenswelter)와 루만이 이끄는 아우토포이에시스학파(Autopoieten)라는 양대 학파의 패러다임에 의해 이끌어진다. 전자는 인본주의적 내부참여자 입장에서 일상생활 속에서 얻은 지식을 체계화하고 연구자 기준의 외부와 내부세계의 갈등을 다루는 데 반해, 후자는 생물학적 외부관찰자 입장에서 모든 인간 활동의 단위가 열림과 동시에 닫힌 체계라는 중립적 관찰자자세를 견지한다. 이 두 학파는 오늘날까지 접점이 없는 평행선을 달리면서 상호 비판의 견고한 고삐를 놓지 않고 있다. (역자 후기, 17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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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선생 지식경영법 - 전방위적 지식인 정약용의 치학治學 전략
정민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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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존은 조용히 따지고 살펴 그 깨달음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다. 동찰은 이를 실제에 적용하여 맞는지 맞지 않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 항상 정존에서 동찰로 이어지고, 동찰이 다시 정존으로 환원되는 공부를 해야 한다. 두 가지가 따로 놀면 안 된다. (29면)




2. 나아가 그는 독서를 다음과 같이 우물파기에 비유했다. ... 석 자를 파면 축축한 물이 나오고, 여섯 자를 파면 탁한 물이 나온다. 여기서 석 자를 더 파들어가야 달고 찬 샘물을 얻을 수 있다. (30면)




3. 공부도 이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기초를 튼실히 닦아야 한다. 우왕좌왕 이리저리 기웃거리기보다 진득하니 앉아 바탕공부에 몰두하는 것이 낫다. (48, 49면)




4. 터를 굳게 다져 바탕공부에 힘쓴 사람과 한때의 가벼운 재주로 세상의 명망만 좇은 사람은 역경의 순간에 확연히 갈린다. (54면)




5. 진도를 빨리 나가려 들지 말고 터를 굳게 다져라. ...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터를 굳게 다져라. (58면)




6. 다산이 말하는 지름길이란 남들이 보기에는 돌아가는 길이다. (62면)




7. 의욕만 가지고 대뜸 윗단계로 건너뛸 수는 없다. 다음 단계를 소화하려면 이전 단계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67면)




8. 복잡한 것을 일목요연하게 분류하는 서지학은 모든 학문의 시작이다. (71면)




9. 내가 수년 이래로 자못 독서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저 읽기만 하면 비록 하루에 천번 백번을 읽는다 해도 안 읽는 것과 같다. 무릇 독서란 매번 한 글자라도 뜻이 분명치 않는 곳과 만나면 모름지기 널리 고증하고 자세히 살펴 그 근원을 얻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차례차례 설명하여 글로 짓는 것을 날마다 일과로 삼아라. 이렇게 하면 한 종류의 책을 읽어도 곁으로 백 종류의 책을 함께 들여다보게 될 뿐 아니라, 본래 읽던 책의 의미도 분명하게 꿰뚫어 알 수가 있으니 이 점을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된다. (75면)




10. 격이란 밑바닥까지 다 캐낸다는 뜻이다. 밑바닥까지 다 캐지 않는다면 또한 유익되는 바가 없다. (76면)




11. 논어고금주: 주자의 학설이 내재한 관념적 요소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실천적 접근으로 논어 이해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105면)




12. 많은 정보가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서 유용한 자료를 취하고, 쓸모없는 자료를 버릴 수 있어야 문제가 해결된다. (111면)




13. 문제는 나에게 있다. 자료에 있지 않다. (112면)




14. 무심히 지나치는 사소한 것에서도 의미를 붙들어라. 삼라 만상이 모두 책이다. 네 오성을 활짝 열어라. (123면)




15. 무릇 한권의 책을 얻더라도 내 학문에 보탬이 될 만한 것은 채록하여 모으고, 그렇지 않은 것은 눈길도 주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비록 백권의 책이라도 열흘 공부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141면)




16. 그 중요한 내용을 베껴쓰는 일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143면)




17. 눈으로 입으로만 읽지 말고 손으로 읽어라. (148면)




18. 생각한 것을 그때마다 메모하여 적어야만 실질적인 소득이 있다. (149면)




19. 메모도 해봐야 요령이 생긴다. 처음엔 두서가 없더라도 나중엔 방향이 생긴다. 방향이 생겨야 집중력도 생기고, 작업에 가속도가 붙는다. (154면)




20. 질서는 생각이 달아나기 전에 빨리 적는 것을 말한다. ... 이 질서정신의 핵심은 바로 의문을 품는 데 있다. (155면)




21. 매일매일의 일과와 주고받은 대화, 보내온 편지 등이 하나도 빠짐없이 차례대로 적혀 있다. 다산의 이러한 메모벽은 독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일상화된 생활습관이었다. (157면)




22. 이런 자세한 여행기는 절대 놀라운 기억력의 산물이 아니다. 꼼꼼한 메모의 결과다. (159면)




23. 그리하여 다산은 이 절의 첫 인용문에서 본 것처럼 모든 책을 다 걷어치우고 주역만 앞에 놓은 채 잠심완색을 거듭했다. 마침내 하루 24시간이 온통 주역 아닌 것이 없고, 일거수일투족이 주역 그 자체인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173면)




24. 공부와 삶은 별개의 무엇이 아니다. 따로 놀면 안 된다. (181면)




25. 일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준비하고 예방하며, 일이 생기면 합리적으로 처리해서 뒷말이 없게 했다. (183면)




26. 대개 말은 하기는 쉬워도 흔적이 남지 않는다. 편지는 신중이 생각하고 궁구하므로 깊은 경지에 나아갈 수 있다. (20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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