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에 살다 - 조선 지식인 24인의 서재 이야기
박철상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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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서재를 너무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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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을 통해 좋은 책들을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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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치스 2014-09-02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15주년 축하합니다.
 

알라딘을 통해 많은 책을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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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굴뚝청소부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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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이야기를 쉽게 잘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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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 평전 : 나는 멸종하지 않을 것이다 - 1859~1882 <종의 기원> 출간에서 말년까지 찰스 다윈 평전 2
재닛 브라운 지음, 임종기 옮김, 최재천 감수 / 김영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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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박물학자로 태어났다." (13면)

2. "자연과학에 대한 나의 사랑은 변함없이 열렬했다." 어떤 점에서 그로서는 그 말 이외에 한 말이 별로 없었다. 다윈이 거리낌 없이 인정했듯 그의 자연에 대한 애정은 그의 삶을 지배하며, 항상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멀리, 더 집중해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의대 친구가 언젠가 말했듯이 지나칠 정도로 생물의 복잡성과 환경과의 관계에 빈틈없이 '주의를 집중'한 나머지, 자연의 방법을 설명하는 일이 그가 스스로 부과한 일생의 과제이자 그의 절망과 환희가 되고 말았다. 자연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그의 실존을 지탱해주었던 실이었다. (13면)

3. 그는 다른 이론들에서 추출한 실질적인 정보로 자신의 이론들을 세웠다. 그는 사람들을 혹하게 하고 그들로부터 도움을 얻어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한 협력 체계는 대체로 위계적이었는데, 다윈은 이쪽에서 실을 뽑아내 저쪽의 파리를 끌어당기는 탐욕스러운 거미 역할을 하였다. 그는 "사실들을 소유한 수전노"였다. 그는 중년에는 그 사실들을 귀중한 보물인 양 축적하며 흡족해 했다. '종의 기원'은 결코 한 사람의 위업으로 볼 수 없다. (15, 16면)

4. 그러나 대학이나 연구소 같은 학문 공동체에서 일하는 것의 장점도 분명히 있다. 늘 다른 이들로부터 자극을 받기도 하고 수시로 내 아이디어를 검증받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다윈은 분명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다윈은 이 약점을 왕성한 편지 쓰기를 통해 극복했다. 다윈은 아마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편지를 쓴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전 세계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다윈의 편지는 무려 1만 4천통이 넘고, 사라진 것도 그 정도는 될 것이라고 다윈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20면)

5. 찰스 로버트 다윈은 1809년 2월 12일 ... 태어났다. 역사상 동시에 일어난 기묘한 사건들 중 하나를 들자면, 다윈이 태어난 날, 에이브러햄 링컨도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32면)

6. "한 인간을 체계적인 박물학자나 미술 애호가, 수전노로 만들기 십상인 수집에 대한 열정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 어린 시절에 나는 주로 인장, 우편물 뿐만 아니라 조약돌과 광물질을 수집하는 취미에 사로잡혀 있었다." (46면)

7. 그 책에 각각의 식물들이 처음 꽃을 피거나 잎을 내는 것을 기온과 날씨와 함께 매일 날짜 별로 기록해놓았다. (51면)

8.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교사들과 아버지는 나를 아주 평범하며, 지적인 면에서는 평균 수준에 조금 못 미치는 소년으로 여겼던 것 같다. (68면)

9. 그는 교사들의 눈에 학문적으로 뛰어나 보이지도 않았다. 그가 당시에 자신이 지니고 있다고 느꼈던 유일한 특성들은 "강하고 다채로운 취향, 흥미를 일으키는 것이면 어떤 것에든 보이는 대단한 열정, 그리고 어떤 복잡한 주제나 사물을 이해하는 것에서 느끼는 쾌감"이었다. (72, 73면)

10. 여생 동안 다윈은 자연과학이 모든 것에 스며들어 있는 보이지 않는 힘들 및 가상의 가설들과 관계가 있다고 믿었다. 거짓말, 그리고 표본을 소유해서 느끼는 흥분은 그의 화학 연구가 요하는 상상력이 풍부한 일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융합되었다. 그의 젊은 영혼은 사색적인 자연철학의 창조적인 경이로움을 한 송이 꽃처럼 활짝 피웠다. (81면)

11. 그는 실험 연구의 미묘한 면에 커다란 매력을 느꼈다. (81면)

12. 이즈래머스 다윈은 존재를 신의 권능이 아닌 '자연의 법칙'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으로 보았다. (91면)

13. 다윈은 자신이 경험한 걸 좋아했다. "난 저마다 각각의 증상을 가진 환자들의 용태를 가능한 한 빠짐없이 전부 기록했다. 그러고는 아버지 앞에서 큰 소리로 읽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몇 가지 질문을 한 후에 내게 어떤 약을 처방해야 할지 충고해주셨다. 난 아버지 말씀에 따라 약을 조제했다. 한때 나는 적어도 열두 명의 환자들을 맡기도 했는데, 그 일에 열렬히 흥미를 느꼈다. (101면)

14. 아버지는 성공의 핵심 요인은 일에서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확신이라고 단언했다. (102면)

15. 많은 교수들에게는 자신들 일의 가장 중요한 면은 고등교육이 대체로 영국의 상류계급 사회와 아카데믹한 환경에서 인기있는 자연신학 체계를 강화하고 정당화하는 길이었다. 자연과학은 외부 세계의 특징들을 이용해서 신성한 창조자의 존재를 확증하고, 자비심과 지혜와 권능의 증거를 제시하고자 했다. (115면)

16. 날마다 일상적인 의학교육의 판에 박힌 실습은 점점 불쾌감을 더해갔다. 다윈은 수업을 빼먹기 시작했다. (131면)

17. 다윈은 그 이후로 내내 피만 보면 움츠러들었다. (133면)

18.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이 박물학이 주는 조용한 만족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1826년 여름방학이 다가올 무렵, 그는 의학을 그만두어야만 한다고 마음속으로 확신했다. 문제는 아버지에게 어떻게 말할 것인가였다. (135면)

19. 이후 박물학은 다윈의 안전판이 되었고, 예전에 소년기의 열정에 불과했던 것이 전혀 다른 정서적 깊이를 띠게 되었다. (137면)

20. 그 강좌(토머스 찰스 호프의 강좌의 화학 강좌)는 다윈이 에든버러 대학의 수업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지루하다는" 보편적인 비난으로부터 유일하게 면제받은 강좌였다. 호프는 이미 오래전에 독창적인 연구라는 핑계를 모두 버린 채 수강자들 편에서 가능한 한 쉽게 강의하는 데 전념했다. ... 호프는 또한 광물학, 결정학, 일종의 식물화학, 대기 물리학, 기상학 뿐만 아니라 경쟁관계에 있는 지구의 지질 이론들을 포함해 여러 박물학 논제들을 두루 아우렀다. 모두 흥미로운 시각적인 효과를 동반한 현란한 스타일로 설명했다. (139면)

21. 젊은 다윈이 개인적으로 알게 된 사실인데, 그가 의사가 되어야 할 재정적인 필요나 의술을 업으로 할 실질적인 필요성은 전혀 없었다. "나는 여러 가지 사소한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아버지가 내게 어느 정도 편하게 살 수 있을 만큼 재산을 물려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지금처럼 부자가 되리라고는 결코 상상해본 적이 없었지만, 그러한 확신은 굳이 힘들게 의학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갖기에 충분했다." (143면)

22. "2년째 되는 해에 나는 내 멋대로 지낼 수 있었다. 자연과학을 좋아하는 여러 젊은이들을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런 자율적인 생활은 내게 이로웠다." (151면)

23. 그랜트의 영향 아래 다윈은 해양 동물학의 매력에 사로잡혔다. 채집 여행 후 해변가에 있는 그랜트의 집으로 돌아오자, 그랜트는 다윈에게 단일 렌즈 현미경으로 바닷물을 자세히 분석하는 방법과 관찰해야 할 사항을 보여주었다. 그랜트에게서 다윈은 그때까지 배우지 못했던 것들, 그리고 그 당시의 영국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웠다. 그랜트는 그에게 그의 진화론에 대한 초기의 이해와 토대를 심어주었고 '일생일대의 이론가'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 후로 다윈은 결코 이 생명체와 기타 주목을 받지 못하는, 그들 나름대로 바다 밑에서 알려지지 않은 채 삶과 죽음과 변태의 위대한 모험담을 실천해가는 생명체들에 대한 연구에 열정을 잃지 않았다. (163면)

24. 공부도 몹시 하고 싶고 의료업에 뚜렷이 불만을 가지고 있던 다윈은 기꺼이 대단히 광범위한 연구 계획에 사로잡혔다. 이미 오래전에 그랜트는 다윈에게 연구 중이던 식충류의 표본을 주면서, 그를 제자로 대하기 시작했다. 그랜트의 이런 태도에 다윈은 비굴한 심정으로 동의했다. 다윈은 그 무렵에 쓰기 시작했던 노트에 바다 민달팽이, 연체동물, 그리고 그랜트의 섬모가 있는 알에 해당되는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바다 벌레 등 많은 상이한 종들을 검사한 사실을 기록했다. (165면)

25. 다윈은 어느 날 저녁, 그랜트가 빌려준 '질 나쁜 현미경' 속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그 생명체들도 헤엄치는 알에 의해 번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한순간 그는 해초들과 그외 다른 단순한 미생물들이 자유롭게 수정 작용 춤을 추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젊은 시절에 겪은 가장 강렬한 순간이었다. .. 다윈은 최초의 동물학적 발견에 감정이 북받쳤다. 그리고 현미경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모든 경이로운 활동과 그 활동하고 있는 생명을 보면서 매우 흥분한 나머지 그 경이로운 춤을 보지 못한 일련의 유명한 동물학자들을 자랑스럽게 되뇌었다. (166면)

26. 그랜트는 다윈에게 이처럼 전도유망한 전문가로서의 길을 터준 것 이상의 일을 했다. 그는 다윈에게 진화론적 사고의 날카로운 자극을 처음 경험시켜주었다. (167면)

27. 다윈의 독서는 한창 때인 시절에 진화론이 불러온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170면)

28. 하지만 그 무렵, 다윈은 이미 그랜트에 대한 존경심을 잃은 상태였다. 직업적인 경쟁이 이미 그들 사이에 장벽을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다윈의 춤추는 플루스트라 알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172면)

29. 스코틀랜드 대학교들과는 달리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는 신학교육 기관으로 사실상 영국 국교회의 양 날개이기도 했다.

30. 존 스튜어트 밀은 한숨 지으며 케임브리지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어떤 생각도 설 자리가 없었다. 그저 정설과 타협할 수 있을 뿐." (183면)

31. "일부나마 이런 책들을 기계적으로 암기하려 하지 않고 꼼꼼히 공부한 것이, 그때도 지금도 같은 생각이지만 나의 정신 교육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던 대학의 정규과정 공부의 전부였다." (193면)

32. 다윈의 대학생활의 주요 초점은 확실히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그는 이미 박물학에 대한 크게 발전한 관심과 함께 여우 사냥, 승마, 사격에 이르는 스포츠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윈은 그런 스포츠야말로 최상의 기쁨을 준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스포츠를 즐기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94면)

33. 케임브리지에서 몰두했던 일 중에서 딱정벌레를 채집하는 것만큼 내가 대단한 열정을 보였거나 큰 기쁨을 경험한 적은 없었다. (196면)

34. 마찬가지로 그의 노력은 희귀종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오래된 나무껍질을 벗기다가 희귀한 딱정벌레 두 마리를 발견했다. 그래서 한 손에 한 마리씩 집어 들었는데, 다음 순간 세 번째 새로운 종류의 딱정벌레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놈도 놓칠 수 없었기에 오른손에 들고 있던 놈을 얼른 입에 집어넣었다. 아뿔싸, 놈이 지독히 역한 냄새의 분비액을 배설했다. 순간 혀가 타들어가는 것만 같아서 나는 딱정벌레를 뱉어내야만 했다. 그 바람에 그놈을 놓친 것은 물론이고 세 번째 놈도 놓치고 말았다." 나중에 그는 그 딱정벌레가 잡히고 싶어 하지 않았다면서 웃었다. 곤충들은 결코 다윈이 예상했던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뼈저리게 깨달았듯이, 강한 기억과 결단은 채집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었다. (201면)

35. 이처럼 거만한 태도 - 그 시대의 신사 계급의 대학생들 사이에서 지배적이었던 관습 세계의 전통적인 주인과 노예의 관계 내에 스며 들어 있던 -로 다윈은 이후 채집 일과의 토대를 수립했다. 그가 깨달은 바에 의하면, 바로 가까이에 조수를 두어서 그 편의를 일단 경험하고 나면 포기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 후로 다윈은 수집(채집)가의 본분에 있는 천한 면을 대신해 주는 사람을 두는 것을 좋아했다. (204, 205면)

36. 이처럼 케임브리지에서 채집을 하며 보낸 나날은 그 범위와 독창성에 있어 다른 사람들을 무색케 할 만큼 거센 욕망을 보여주었다. 또한 가능한 모든 수단을 충분히 활용하는 조직적인 체계의 시작을 보여주었다. (205면)

37. 1872년 무렵에 다윈은 백발이 성성한 판사였던 허버트에게 편지를 썼다. "자네가 내게 익명으로 선물했던 현미경을 기억하나? 내 인생에서 그 일 이상으로 나를 놀라게 하고 기쁘게 했던 사건은 기억나는 게 없어." (213면)

38. 그 당시에 다윈의 애착의 대상으로 현미경에 필적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총이었을 것이다. ... "가장 성스러운 대의에 열정을 보이는 그 어떤 사람도 내가 새사냥에 기울이는 열정을 따라오지 못한다." (215면)

39. 다윈은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내가 정말 얼마나 사냥을 즐겼던가. 만일 지상에 천국의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냥일 것이다." (216면)

40. "촉촉한 표면의 화분립을 관찰하던 중에 나는 관상기관이 돌출한 걸 보고는 이 놀라운 발견을 알려주기 위해 당장에 그에게로 달려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어느 식물학 교수든 그런 대화를 나누기 위해 그토록 허겁지겁 달려오는 내 모습에 웃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내가 발견한 현상이 정말 놀랍다며 공감을 표해주면서, 그 의미를 내게 설명해주었다. 내가 명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아주 잘 설명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걸 알아낼 때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내 스스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무척 흐뭇했지만, 앞으로는 그런 발견을 알리기 위해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243, 244면)

41. 예전에 이번처럼 흥분하여 그랜트에게 달려갔을 때 그토록 충격을 주었던 난데없는 직업적인 질투의 흔적이 헨슬로에게서는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244면)

42. 다윈은 다른 사람들처럼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친구들로부터 최고의 대접을 받았던 점은 그들이 그의 결점을 기꺼이 긍정적인 특성으로 보려 했던 습관에 있었다. (256면)

43. "이미 전에 다양한 과학서적을 읽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과학이라는 것이 일반 법칙이나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도록 모아진 사실들에 있다는 점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271면)

44. 제닌스는 항상 자신의 상상력이 부족했던 결정을 후회했고, 몇 년이 지나는 사이에 다윈이 더더욱 과학 여행가 및 작가로서 명성을 쌓아갈 때, 비글호 항해에 관한 다윈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정말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를 알게 되었다. ... 제닌스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더라면, 다윈에게는 거의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가 받은 그 제안은 지금까지 그에게 일어났던 가장 흥미로운 일이었다. ... '나는 가겠다고 즉각 대답했다." (291면)

45. "교수님은 제가 온종일 얼마나 바쁜지 모를실 겁니다. ... 저는 왕이 된 듯이 행복합니다." (301면)

46. 다윈은 22세였다. (343면)

47. 그때, 새로운 감동에 흠뻑 취한 다윈은 기쁨을 숨기지 않은 채 그 섬의 박물학에 관심을 돌렸다. 박물학적 탐사를 시작할 장소를 거의 알지 못했던 그는 찾을 수 있었던 모든 것을 수집했다. ... 다윈은 저마다 신기하게 생긴 그 생물들을 발견할 때마다 기쁨에 환호성을 질렸다. 그는 몸을 감추려고 황급히 달아나는 사이에 극단적으로 몸이 붉게 변하는 문어를 보고 완전히 매료되었다. (345면)

48. 세인트자고의 절벽의 수평 층리를 설명하는 데 훨씬 더 그럴듯한 상황적 사실은 상승한 육지가 아니라 점차 바닷물이 뒤로 물러났다는 점이었다. 분명 다윈은 자신을 처음 가르쳤던 사람들과는 다르게 아주 야심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내 다윈은 자기가 생각한 대로, 예전에 어떤 지질학자도 연구해본 적이 없는 땅을 가로지르면서 모든 현지 조사자들이 느끼는 소유의식에 완전히 사로잡혀 이곳이 자신이 마음대로 이해하고 스스로 만든 '자신'의 나라인 것처럼 생각했다. 이런 생각에 젖은 다윈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견해가 자신의 교수들이 받아들이고 있던 일반적인 방향과 급진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만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견은 문제될 게 없었다. 오히려 그런 사실이 자신의 견해가 갖고 있는 매력적인 요소였다. (347, 348면)

49. 그는 죽는 날까지 그 순간을 잊지 않았다. 인근 퀘일 아일랜드의 해변에 앉아, 원래 이처럼 사색적인 기쁨을 누리던 암벽면에 등을 기딘 채 점심으로 '익힌 타마린드 열매와 비스킷'을 먹다가, 문득 자신이 발견한 사실들에 대해서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때 처음으로 떠오른 생각은 내가 방문한 다양한 지역의 지질에 관한 책을 한 권 써봐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에 나는 온몸이 떨릴 만큼 기뻤다. 내게는 잊지 못할 순간으로 남아 있다. 낮은 용암 절벽 아래에서 쉬곤 했던 기억이 뚜렷이 떠오른다. 태양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고, 여러 낯선 사막식물들이 주변에 자라고 있었고, 내 발치에 있는 썰물 때 생긴 물웅덩이에는 살아있는 산호가 있었다. (348면)

50. 찰스 라이엘이 저서 '지질학 원리'에서 주장했던 이론들이 다윈의 세인트자고의 구조에 대한 이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그 외 나머지 지역을 항해하는 동안에 실천했던 다른 모든 활동들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과학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상호 교환들 중의 하나로 라이엘의 책은 다윈에게 자연에 관해 사고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라이엘이 없었다면 다윈도 없었을 것이다. 라이엘이 없었다면 보통 알려진 바처럼 지적인 여행도, 비글호의 항해도 없었을 것이다. 젊은 여행자에게 미친 라이엘의 영향과 충격은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349면)

51. 두 대학 교수가 그토록 몹시 싫어했던 것은 지구의 변화가 사실상 꼭 진보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라이엘의 주장이었다. 라이엘의 지구는 영원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가 강조하는 바에 의하면, 그 움직임은 어느 곳으로도 향하고 있지 않았다. 미래의 어느 지점으로 향하고 있지 않았다. 혹은 그 움직임은 최초의 기원에 의해 영향을 받지도 않았다. ... 라이엘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한 바에 의하면, 모든 것은 이런 따위의 신학적 토대 없이도 설명될 수 있었다. (350, 351면)

52. 그 체계는 어떤 외적인 힘에 의해 방향성을 지닌 것도 아니었고, 내부의 힘으로부터 조절되지도 않았다. 그 대신에 라이엘이 생각한 지구는 스스로 균형을 유지했고 독립적이었다. 현대적인 용어로 말하면 지구는 '정상 상태'를 유지했다. (351면)

53. 라이엘의 방법의 핵심에 놓여있는 이러한 스스로 균형을 유지하고, 비진보적인 지구라는 개념은 이후에 윌리암 휴웰에 의해서 '동일과정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352면)

54. "나는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 제1권을 가지고 가서 세심하게 탐독했다. 이 책은 여러 면에서 내게 가장 커다란 도움을 준 책이었다. ... 지질학은 라이엘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 내 생각에 그보다 지질학에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없다. ... 나는 자랑스럽게 기억하는 일이 있다. 첫 발을 내디뎠던 곳, 바로 케이프베르데 제도의 세인트제도에서 지질조사를 하게 되었는데, 나는 그곳을 조사하는 순간, 라이엘의 견해가 다른 어떤 저작이 주장한 견해보다 월등하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354면)

55. "나는 항상 '지질학 원리'의 대단한 장점은 그 저작이 한 사람의 전체적인 색조를 바꾼다는 점이고 따라서 라이엘이 본 적이 없는 사물을 볼 때면, 어느 순간 부분적으로 그의 눈을 통해서 그것을 보게 된다는 점이라고 생각했다." (355면)

56. "세인트 자고는 제게 여러 가지 분과의 박물학 분야에서 대단히 풍부한 수확을 주었어요. ... 그런데 제게 그토록 많은 걸 가르쳐주었고, 대단한 기쁨을 안겨준 이 섬이 우리가 항해 중에 만나게 될 지역 중에서 가장 시시한 곳일 거라는 거예요." (356면)

57. 이러한 일지를 쓰는 일상적인 일은 곧 그에게 완전한 제2의 천성이 되었다. (362, 363면)

58. 바이아(살바도르)에 상륙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항구에 정박한 비글호에서 빠져나왔을 때, 다윈이 자신이 철저한 노예사회에 있다는 걸 깨닫고는 심한 혐오감을 느꼈다.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격분했다. .... 그가 알고 있던 대다수 사람들처럼 그는 영국 지배계층의 자본주의적 에토스에 태연하게 굴복했다. 하지만 노예제도의 실상은 그의 인도주의적인 본능을 강하게 자극했다. 그는 이글거리는 정당한 분노를 드러내지 않고는 차마 눈뜨고 그 실상을 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366면)

59. 윌리암 커비는 수백 명에 이르는 영국 박물학자들의 은밀한 소망들에 대해서 '일단 이름을 붙이게 되면 그 동식물을 영원히 소유하게 된다'는 자신의 경구로 표현했다. (384면)

60. "기쁨이란 박물학자가 난생처음 혼자서 브라질의 숲 속을 거닐며 느낀 기분을 표현하는 말로는 불충분한 단어이다. .. 그런 날은 박물학자에게 다시 경험할 수 없는 최고의 기쁨을 안겨 준다.' (393면)

61. 보토포고의 오두막은 곧 행복한 열대 지방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가 말하길, 그곳에서의 생활은 학창시절의 방학과도 같았다. (395면)

62. "어떠한 박물학자라도 아름다운 새들과 원숭이와 나무늘보들이 살고 있는 숲과 기니피그와 악어들이 살고 있는 호수를 답사한다면, 브라질 사람의 발에 묻은 흙조차도 핥게 될 것이다." (397면)

63. 그는 열대림은 박물학자에게 금광이라고 외쳤다. (399면)

64. 그가 그렇게 고향에 돌아가 첫 연구로 그 동물(편형동물)을 택했던 이유는 부분적으로 무척추동물에 대한 연구를 계속 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고, 동물학계에 가능한 한 빨리 새로운 결과를 내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402면)

65. 이처럼 다윈은 동식물들이 지닌 개성을 깊이 있게 인식했는데, 그러한 인식은 그가 자연에서 차지하는 자신의 위치가 얼마나 하찮은가를 깨닫는 데도 중요했다. 숲은 "자연의 신이 창조한 가지각색의 창조물들로 가득한 신전"이었다. 그 속에서 인류는 단 하나의 종에 불과했다. 감탄과 더불어 겸손해졌던 그는 그런 마음 덕분에 자신과 그 밖의 인류가 훨씬 더 큰 지구상의 생명 체계 - 서로 연결된 -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404, 405면)

66. 그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육지에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 ... 이처럼 육지에 있는 동안에 그는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자기 일에 몰두했다. (423, 424면)

67.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부과한 박물학 과제를 수행하는 것에서 최대한 가장 큰 기쁨을 경험했고, 자신이 정말 즐길 수 있는 일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일할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424면)

68. "박물학을 연구하는 것이 내 본분을 다하는 것이다. 만일 그 본분을 내가 무시한다면, 나는 동시에 수년간 내게 그토록 큰 기쁨을 주었던 것을 무시하는 꼴이 될 것이다." ... "그 일을 추구하는 것이 내가 누릴 수 있는 최상의 기쁨의 원천이야." (424, 425면)

69. 다윈은 또한 인종의 구별이 노예제도에 대한 노골적인 정당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453면)

70. 이처럼 인류의 변화 능력에 대한 다윈의 깊은 관심은 이후 진화론으로의 전환에 바탕이 되었다. (461면)

71. 그리고 항해 중에 겪은 모든 다양한 경험 중에 다윈의 마음에 가장 커다란 동요를 일으켰던 것은 이처럼 세계 전역에 있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었다. ... 그는 문화의 얇은 껍질은 인류에게 주어진, 개개의 환경에 따라 입거나 벗어버린, 겉옷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깨달음과 함께 그는 문명이 가진 덧없는 인공적인 특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462면)

72. 그는 가족에게 열정을 담아 편지를 썼다. "지질학보다 더 나은 학문은 없어요. 굉장한 화석 뼈 무더기의 발견은 처음으로 자고 사냥을 했던 날보다 처음으로 사냥을 했던 날의 기쁨과 비교할 게 아니예요. 그 뼈들은 마치 살아 있는 혀로 옛날의 자신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 같아요." (481면)

73. 다윈 또한 항상 공공연하게 도르비니에 대해 관대했지만, 자신이 박물학계에서 하고 싶었던 것의 대부분을 그가 선취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속이 탔다. (495면)

74. "나는 지질학에서 끊임없이 흥미로움을 발견하고 있어. 천문학이 우주에 관한 장대한 사유들을 창조하듯이 지질학은 지구에 관한 장대한 사유들을 창조해." (514면)

75. 이미 책을 통해 그에게 친숙했던 라이엘의 체계가 마치 그의 눈앞에서 구체화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추상적인 이론이 갑자기 논리적으로 옳은 영향과 움직임을 완비한 인상적인 지질학적인 성과로 구체화되었다. (534면)

76. "영국을 떠난 이후로 나는 그토록 성공적인 여행을 한 적이 없었어. .. 나는 아메리카에서 내 모든 지질학적 결론을 그토록 멋지게 지을 수 있었다는 것에서 느꼈던 기쁨을 도저히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어. 나는 며칠 동안 연구했던 걸 반복해서 생각하느라 정말로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 (544, 545면)

77. 방문한 첫 항구는 열대 지방인 에콰도르의 해안에서 600마일 떨어진 적도에 걸쳐 있던 15개 정도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갈라파고스 제도였다. 후에 다윈은 그곳에 가 본 사람이라면 결코 그 제도를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윈 또한 그 제도를 결코 잊지 못했다. 그 군도는 아주 인상적인 "그 자체 내의 하나의 작은 세계"였다. (549면)

78. 이 제도는 모든 파충류에게는 천국인 것 같았다. (558면)

79. 비글호가 킬링 제도를 떠날 무렵, 다윈의 자아 인식과 미래에 대한 바람은 영국을 떠날 때 그의 마음속을 관류했던 것과는 아주 달랐다. 이미 과학적인 삶의 매혹이 확고히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진정한 지질학자와 박물학자가 되고 싶었다. ... 그와 동시에 목사가 되려는 생각은 그의 마음속에서 점차 사라져갔다. (592면)

80. 5년은 무척 긴 시간이었다. (629면)

81. "나는 매일 한결같이 많은 시간을 연구에 할애하고 싶어." (634면)

82. 그는 1837년 1월부터 9월까지 열정적으로 그 책을 썼다. .... '비글호가 방문한 여러 지역의 지질학 및 박물학 연구일지' (637면)

83. 라이엘은 기꺼이 동료를 환영했다. 그는 따뜻하게 말했다. "마음 맞는 사람들을 만나기란 찾아 나선다 해도 쉽지 않다. 다윈이 지질학자들이 모인 내 학회에 가입한 일은 우리로서는 명예로운 일이다. 그는 열심히 연구하며 자신의 책과 우리의 토론 모두에 비상함을 보이고 있다." (648면)

84. 하지만 처음엔 그러한 견해에 대해서 보여불 만한 성과가 다윈에게는 거의 없었다. 그의 최초의 진화론적 사고는 산만하고 체계가 잡혀 있지 않은데다 거칠었다. (663면)

85. 노트 한 권은 지질학 전용으로 A라는 명칭이 붙어 있었고, 다른 한권은 동물학이라고 불렀다. 다음으로 B라는 명칭이 붙어 있던 노트는 오로지 종의 변형에 관한 내용만을 기록했다. (666면)

86. 그는 휘갈린 그림으로 그 말을 뒷받침했다. 바로 생명의 나무였다. 나무의 둥치는 원시 조상의 종들이 있었고, 맨 꼭대기는 현대 종들이 있었다. "하늘이 이 그림이 자연에 부합되는지 안 되는지 안다. 신중해라." (668면)

87. 이때부터 변형은 다윈의 비밀에 붙여진 인생의 중심축이 되었다. 진화론의 길을 8년 더 나아가 일을 마무리 지었을 무렵, 그는 이미 E자가 붙은 노트에 이르기까지 다섯 권의 노트를 채운 상태였다. (668면)

88. 그는 지루한 과학 모임 중에도 남몰래 노트에 기록하는 일을 계속했다. 모임에서 나와 집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도 그 일을 멈추지 않았다. 노트들의 그의 삶 자체였다. 그의 인생 전부가 노트에 끊임없이 만들어냈던 상상의 세계로 흘러들었다. 그는 지금까지 항해에 관해 생각했던 모든 것을 재평가했고, 자신이 항해했던 지역에서 발견한 자연에 관해 배우고 있던 모든 것과, 자신의 개인적인 희망과 두려움을 해결할 만한 모든 것도 재평가했다. (669면)

89. 지적인 경험의 범위는 분명했고, 노트들은 활기 넘치는 놀랍고 다양한 생각들과 정보로 가득했다. (670면)

90. 다윈의 열의는 그가 예전에는 그저 어렴풋이 매력을 느꼈던 영역을 공부하려는 일생의 계획에 첫발을 내디뎠다는 점에서도 드러났다. 그는 데이비드 흄, 애덤 스미스, 그리고 존 로크에 차례로 달려들었다. (672면)

91. "저는 다만 반나절이라도 연구를 하지 않는 걸 참지 못합니다." ... 정말로 그는 연구를 멈출 수 없었다. 이미 그는 지식인의 내몰린 삶 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 있었기에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리고 해답을 찾아내려 힘쓰며 마침내 그 해답, 통찰력에 이르면서 얻게 되는 희열감에 완전히 사로잡히고 말았다. (675면)

92. 다윈은 남은 1837년 내내 미친 듯이 일했다. 그리고 다음 3년 남짓동안 'H.M.S. 비글호 항해의 도물학'이란 제목을 짓게 된 책을 편집하면서 보냈다. 그 이후 5년 동안 그는 지질학을 완성하는 데 몰두했다. (679면)

93. 그는 정신없이 돌아가는 지적인 생활의 매력에 흥미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영국으로 돌아와 과학 공동체에 가입해 흥분 속에서 바삐 움직이며 생활해보고 나서 그는 부단히 이어지는 생산적인 고역이 그리 재밌지는 않다는 걸 깨달았다. 다윈은 종종 화가 치밀었다. 거친 날씨가 그의 신경을 갉아 먹었다. 그는 런던의 지긋지긋한 음침한 분위기를 몹시 싫어했다. (683면)

94. 노트에 글을 기록하는 속도는 1838년 내내 아주 크게 발전했다. 그는 그해 3월에 노트 B를 마쳤다. 그리고 6월에는 노트 C를 모두 채웠고, 10월에는 노트 D와 노트 M을 마쳤다. (684면)

95. "하지만 아이들이 있고 가난하다면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부양할 아내가 있으면 그는 봉급을 받는 직업을 구해야 할 것이다. 아마 케임브리지에서 교수 자리를 얻을 수 있을 테지만, 그 덕에 그의 개인 프로젝트는 뒷전으로 밀리고 말 것이다. 그는 런던의 과학 서클을 떠날 경우 "시골에 처박혀 지내게 될 일"을 차마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운명은 케임브리지 교수가 되든지, 런던의 변두리, 작은 구역 따위에 사는 가난뱅이가 되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연구를 할 것이다." (688면)

96. 다윈의 서른 번째 생일 2주 전인 1839년 1월 29일, 두 사람은 메이어의 작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에마는 이미 서른 살이었다. (732면)

97. 자신의 연구에 대한 보상은 다윈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빨리 찾아왔다. 1839년 1월 24일, 그는 왕립학회의 특별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엘리트 단체에 가입하면서 다윈은 전 세계적으로 불과 800명인 과학계의 유명 인사들 중 한 명이 되었다. (744면)

98. "정확히 7시에 일어나 아직 편안히 잠에 취해 있는 에마 곁을 떠나, 우선 둔감한 기분을 떨쳐낸 후에 연구를 시작해서 10시까지 산호의 형성에 관한 글을 써. 그러고 나서 계단을 오르면, 에마는 30분이나 되어서야 계단을 내려오지. 그럼, 우리는 안락의자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해. 그러고는 난 시계를 보는데, 시곗바늘은 슬프게도 너무 빨리 움직여서 벌써 11시 반이 되어 있어. 이젠 난 서재로 가서 2시에 점심을 먹을 때까지 연구를 해. 에마는 보통 내 방에 와서 자질구레한 일(바느질)을 하곤 해. 그녀는 생쥐처럼 조용히 앉아 있지. 점심 식사를 마친 후에 나는 보통 다른 곳에서 할 일을 하는데, 에마는 내가 집을 나설 때면 어느 정도까지 나와 함께 길을 걷곤 해. 우리는 여섯 시에 저녁 식사를 하는데 정말 훌륭해. 그러고는 7시 30분까지 앉아서 독서를 하면 흥분하곤 하지. 그 다음엔 차를 마시고, 독일어 공부를 하고, 이따끔씩 음악을 듣고 잠깐 독서를 하지. 그러고는 취침 시간이 되면 유쾌하게 하루를 마감해." (746면)

99. 하지만 다윈이 여름에 맞은 가장 중요한 사건은 6월이나 7월에 있었던 '일지'의 출간이었다. "만일 제가 80세까지 산다면, 저는 제가 작가라는 사실에서 느끼는 경이감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경이감을 느끼기 전인 여름에 누군가가 제게 이 무렵이면 천사가 된 기분일 거라고 말해주었더라면, 저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754면)

100. 마침내 훔볼트의 격찬을 담은 회답을 받고는 다윈은 전율을 느꼈다. 그 노인은 저명 인사답게 행동했다. 그의 펜에서 꿀처럼 흘러나온 듯한 따뜻한 축하 메시지는 다윈의 책을 "감탄할 만큼 뛰어난 책'이라며 찬사를 담고 있었다. ... "... 저작들은 더 좋은 저작을 낳게 할 경우에만 저작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 선생의 앞날은 무척 밝을 것이빈다." 훔볼트는 이어 다윈이 묘사한 항해가 "대단한 영감을 주었다"고 언급했다. (76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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