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매체의 현실 방송문화진흥총서 73
니클라스 루만 지음, 김성재 옮김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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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우리의 사회, 곧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을 대중매체를 통해 안다. (1면)




2. 혹은 호라치오가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 것처럼: 나는 그렇게 들었고, 그것을 어느 정도 믿을 수 밖에 없다. ... 우리는 모든 지식에 의문부호를 붙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에 지식을 쌓고 그 지식을 믿을 수 밖에 없다. (1면)




3. 어떤 경우에도 중요한 것은 ‘송신자와 수신자가 참석한 상황에서 상호작용이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상호작용은 기술이 중간에 개입됨으로써 배제된다. (2면)




4. 대중매체의 현실적인 현실은 대중매체 속에서 진행되고 대중매체를 통과하는 커뮤니케이션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4면)




5.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은 누군가가 보고, 듣고, 읽으며 그 다음에 올 커뮤니케이션이 연계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때에만 실행된다. 따라서 전달행위 하나만으로는 아직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다. (4면)




6. 체계가 자신과 환경에 대한 자신의 차이를 재생산하도록 하는, 실제로 진행되는 작동들... (4면)




7. 두 번째 이해의 가능성을 위해서 우리는 제2차 관찰자의 태도, 곧 관찰자들을 관찰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5면)




8. 이 차이를 견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관찰자와 관련해) 첫 번째 현실과 두 번째 현실 (혹은 관찰된) 현실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다. (5면)




9. 대중매체는 결국 하나의 현실을 구성해야만 한다. 그것도 고유의 현실과는 달리, 아직 하나의 현실을 구성해야 한다. (5면)




10. 그러나 모든 인식이 자기관계와 타자관계의 구별 때문에 완성되어야 한다면, 모든 인식은 (이와 함께 모든 현실은) 하나의 구성이라는 것 역시 유효하다. ‘왜냐하면 이 자기관계와 타자관계의 구별은 체계의 환경 속에서는 분명히 존재할 수 없고’(그곳에서 ‘자기’는 무엇이고, ‘타자’는 무엇이란 말인가?), ‘체계 자체 내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6면)




11. 이로써 우리는 인식론에서처럼 작동적 구성주의(operative Konstruktivmus)를 선택한다. 구성주의적 이론은 인지적 체계들이 현실 객체의 존재 조건과 그 객체의 인식 조건을 차별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들 체계들은 그러한 현실 객체에 대한 어떠한 인식독립적인 접근창구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결함은 제2차 관찰의 차원, 곧 ‘다른’ 체계들의 인지적 작동을 관찰하는 차원에서 보완될 수 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어떻게 다른 체계의 ‘프레임들(frames)'이 그들의 인식을 형성하는가를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제2차 관찰 차원의 문제를 반복하게 한다. 다른 관찰자의 관찰자들 역시 이들 관찰자들의 존재 조건과, 자신을 조건짓은 특정한 관찰자가 문제가 되는 인식 조건을 관찰할 수 없다. (6면)




12. 인지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최초의 현실은 ‘세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지적 작동 내에 있다. ... 곧, 최초의 현실은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는 체계를 형성함으로써 가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체계가 자기관계와 타자관계를 구별할 때만 관찰할 수 있기에 가능하다. 이 조건들은 (선험적인 조건이 아니라) 경험적인 조건으로 상정한 것이다. (6면)




13. 작동적 구성주의의 논제는 ‘세계상실’에 빠지지 않는다. 또한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논제는 세계를 대상으로 전제하지 않고 현상학적 의미에서 지평으로 전제한다. 곧,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전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을 구성한다는 것 이외의 가능성은 없다. (7면)




14. 한 체계가 복잡할수록 그리고 혼란에 더 강하게 노출되면 될 수록 세계는 현실을 상실하지 않고 더욱더 풍부한 다양성을 허용하고, 이 체계는 부정, 허구, 혹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로부터 거리를 두는 ‘단지 분석적인’ 혹은 통계학적인 가정들을 이용한 작업을 더욱 더 많이 수행할 수 있다. (7, 8면)




15. 그러나 이로써 현실에 대한 모든 발언은 더 이상 일반화할 수 없는(선험화될 수 없는) 체계관계와 결부된다. (8면)




16. 위기는 대중매체의 작동방식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자기묘사, 곧 충분한 성찰이론(Reflexionstheorie)의 결핍과 관계된다. (8면)




17. 이 기능체계는 다른 체계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상승된 수행능력을 독립분화, 작동적 폐쇄 그리고 해당 체계의 아우토포이에시스적 자율성에서 얻는다. (9면)




18. 체계는 시간을 내서 다른 것들이 뒤따를 것이라는 기대감 속에서 모든 작동들을 형성한다. 이렇게 대중매체라는 체계 역시 고유의 커뮤니케이션이 다음 시간에 혹은 다음날에 계속될 것이라는 가정 하에 업무를 수행한다. 모든 방송은 다음에 이어질 방송을 약속한다. 이때 결코 순간에 존재하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14면)




19. 주제/기능의 차별기준은 타자관계/자기관계의 차별기준에 해당된다. 이 차별기준을 가지고 관찰자는 주제를 선정하는 데 자유를 얻는다. 특히 정보를 생략하는 데 그렇다. 그는 진리를 통해 자신에게 동기를 부여할 필요가 없고, 그럼으로써 규정된 것에 자신을 종속시킬 필요가 없다. (17면)




20. “우리는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관계하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가 ‘보는’ 그대로의 세상과 관계하고 있는지 결코 확신할 수 없다.” (19면)




21. 이로써 이 체계는 작동적으로 폐쇄되고, 그 결과 고유의 작동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재생산하는 데 그 작동을 더 이상 사회내부적 환경과의 상호작용적 접촉 생산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그 대신’ 자기관계와 타자관계라는 체계 고유의 차별기준에 방향을 맞춘다. 이 체계는 막대한 저장 용량에도 불구하고 ‘빠른’ 기억과 망각에 맞추어져 있다. (22면)




22. 코드는 하나의 양-면-형식(Zwei-Seiten-Form)이고, 그 내면은 하나의 외면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하는 차별기준이다. 그러나 이 코드 형식의 내면/외면 관계는 ‘체계와 환경의 차이’와 혼동될 수 없다. (23면)




23. 그것은 체계의 자기결정에 사용된다. 이를 위해 코드의 차이는 하나의 ‘차별기준’을 사용한다. 곧, 이 차별기준은 어떤 원칙, 목표설정, 존재 발언, 결론공식이 아닌 하나의 선도차별이다. (23면)




24. 대중매체 체계의 코드는 정보와 비정보의 차별기준이다. 이 체계는 정보의 도움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정보는 긍정적인 가치이고, 이 체계 고유의 작동을 가능케 하는 지시의 가치다. 그러나 어떤 것을 정보로 간주하거나 그렇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위해서는 어떤 것을 비정보적(nichtimformativ)으로 간주할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해야 한다. 그러한 반사가치 없이는 모든 체계가 다가오는 모든 것에 노출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체계는 자신과 환경을 차별하지 못하고, 고유한 복잡성의 축소와 고유한 선택을 조직하지 못할 것이다. (23면)




25. 환언하면 이것은 선택 범위의 선택과 구체적인 정보의 선택이라는 2단계적 선택이다. (24면)




26. 정보 없이는 어떤 커뮤니케이션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마지막에는 전달한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것에 대해 얘기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25면)




27. 이러한 요구들은 그레고리 바테슨(Gregory Bateson)의 정보 개념과 일치한다. 정보는 “나중 사건에서 하나의 차이를 만드는 그 어떤 차이다.” (25면)




28. 인지에서는 정신적 체계의 산물이고,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사회적 체계의 산물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체계가 이러한 차이들을 만드느냐를 설명해야 한다. 아니면 스펜서 브라운과 함께 어떤 체계가 차별성을 만드는(draw a distinction) 모든 지시를 수행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26면)




29. 정보/비정보 코드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이 코드의 시간에 대한 관계에 있다. 정보는 반복될 수 없다. 정보는 사건이 되는 순간 비정보가 된다. 한 뉴스는 두 번 사용될 경우 의미는 유지하지만 정보가치는 상실된다. (26면)




30. 새로운 화폐와 새로운 정보는 현대적인 사회역동성의 중심 모티브다. (27면)




31. 어떤 것이 시간의 경과에서 ‘새로운’으로 표현되면 이로써 다른 어떤 것은 ‘낡은’이 된다. (28면)




32. 이에 반해 우리는 특정한 종류의 고물을 고도의 선택 과정을 통해 올드 타이머, 골동품으로 가치를 상승시킴으로써 위안을 얻는다. 우리는 다시 이 물건들에 대해 새로운 정보, 가격, 해석을 창조해 낼 수 있다. (28면)




33. 대중매체는 자신 고유의 선택도를 통제하는 데 자율적이다. 이 고유한 선택도는 자율성이 높을수록 더욱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35면)




34. 물론 어디에서나 그렇듯이 오류 확률은 고려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 확률은 일반적으로 높이 계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별적인 사건들로 남는다. 그렇지 않다면 이 뉴스와 보도의 프로그램 영역의 특수성은 파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39면)




35. 개 한 마리가 우체부를 물었다는 것은 가장 협소한 장소관계 내에서만 보도될 수 있다. 좀 더 멀리 떨어진 주변에서는 한 떼의 개들이 그 우체부를 이빨로 갈기갈기 찢었어야만 보도될 수 있다. 만일 그 일이 봄베이에서 일어났다면 베를린에서는 보도되지 않을 것이다. (42면)




36. ‘규범위반’은 특별한 주의를 끈다. 이는 법위반, 그러나 특히 도덕위반, 그리고 최근에는 ‘정치적 정확성 위반’에 통용된다. 매체를 통한 묘사에서 규범위반은 흔히 ‘스캔들’의 성격을 띤다. 이는 공진(공감대)을 강화시키고, 장면을 되살리며, 규범위반 시 가능한 이해 및 사과 발언을 배제시킨다. 스캔들의 경우 사람들이 스캔들에 대해 자신을 어떻게 말하느냐는 것은 그 다음의 스캔들이 될 수 있다. (43면)




37. 이것은 특히 대중매체가 마치 윤리적 기본 원칙을 확정할 수 있다거나, 아니면 사회의 도덕 수위를 선행의 방향으로 상승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능력을 가진 법정은 현대사회에는 없다. (44면)




38. 재생산되는 것은 단지 도덕의 코드인 선행과 나쁜 혹은 사악한 행위의 ‘차이’다. 기준의 확정은 결국 법체계의 관할 사항이다. 대중매체는 단지 사회의 지속적인 자기 자극을 수행하고, 개별적 및 커뮤니케이션 차원의 도덕적 민감성을 재생산할 뿐이다. (45면)




39. 우리가 막스 베버를 간단히 인용한다면, 행위는 유형화시키는 이해를 통해서 비로소 성립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5면)




40. 다의성은 모든 커뮤니케이션에서 발견된다. (46면)




41. 뉴스가 가진 참신성의 가치는 모두에게 똑같이 흐르는 시간에 있지 않고, 추측된 공중의 지식 상태 혹은 말을 건네받은 공중의 일부에서 탄생한다. (49면)




42. 비록 진리 혹은 진리에 대한 추측이 뉴스를 위해 불가결한 것일지라도, 매중매체는 진리/허위의 코드를 따르지 않고 대중매체 자체의 인지적 프로그램 영역인 정보/비정보의 코드를 따른다. (50면)




43. 바로 이 동일성(=정체성) 획득의 고유한 방식을 통해 하나의 ‘형식(Form)'이 형성된다. (51면)




44. 하나의 대답은 이해와 관련해 단지 새로운 것, 놀랄만한 것, 인공적인 것만 향유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것은 어떻든 있든 그대로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술이론의 답이다. 다른 대답은 커뮤니케이션의 전달자 측면과 관련된 것으로서, 여기서는 관심을 기대한다. 이것은 정치이론의 답이다. (52면)




45. 대중메체는 지속적으로 항상 자신의 고유한 불신과도 씨름한다. 대중매체는 해설하고, 논쟁하고, 자기 자신을 수정한다. 의견들이 아니라 주제들이 결정적이다. ‘숲의 죽음’에 대해 너무 많이 얘기된 결과, 우리는 마침내 무엇이 원인들인가를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경우든 거기에 대해 수많은 의견이 있다는 것을 안다. ... 우리는 오직 관찰하는 것을 관찰하고 기대될 수 있는 차이에서 갈등 자체를 현실로 체험하는 것을 배울 뿐이다.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차이는 더 크고 고유한 의견을 주장하고 자신을 이 의견과 동일화하고 싶고, 이때 그러한 행위를 내버려두고 싶은 유혹 역시 크다. (95면)




46. 아마도 가장 중요하고 지속되는 기본적인 특징은 대중매체가 정보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계속되고 또 계속되는 정보를 통해 사용되어야 하는 스스로 창조된 불확실성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다. 대중매체는 사회를 자극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고 정보를 획득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높인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커뮤니케이션은 사회가 스스로 생산하는 차이를 통해 자극에 노출되게 하는 의미의 상관관계를 높인다. (113면)




47. 그보다는 현실을 ‘무엇’과 ‘어떻게’라는, 곧 “무엇이 관찰되는가”와 “어떻게 관찰되는가”라는 양면 형식으로 가정하는 현실 이해가 더 중요하다. 그리고 이는 정보와 전달의 차이와 관련된 커뮤니케이션의 관찰과 정확히 일치된다. 오직 우리가 이러한 차이를 기반으로 할 때, 우리는 무엇인가를 관찰할 수 있다. (115면)




48. 대중매체의 현실은 제2차 관찰의 현실이다. (115면)




49. 아마도 이러한 고찰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대중매체가 현실을 창조한다고 하지만, 합의의 의무가 있는 현실을 창조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126면)




50. 작동은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고, 이 사건들의 재생산은 체계의 아우토포이에시스, 곧 체계와 환경 차이의 재생산을 수행한다. (132면)




51. 우리는 생물학적 진화론에서 널리 퍼진 인식을 사회이론에서 검증할 수 있기 위해 작동과 관찰의 차별기준을 필요로 한다. 중요한 문제는 생명체가 자신의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인지적인 능력과 성과로 돌릴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인지적인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한 체계가 존재해야 한다면, 생명과 생명을 위한 충분한 적응성이 언제나 이미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다. (132면)




52. 물론 이해(Verstehen)은 실제적으로는 미스(Miß)를 이해하지 않은 오해(Mißverstehen)이다. (134면)




53. 수백 년 동안의 전통은 우리를 현혹시켜 대중매체가 부정적으로 나타난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전통은 사회체계의 안정성이 '합의'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러나 실제로 사회의 안정성(재생산 능력)은 우선적으로 계속되는 커뮤니케이션에서 전제될 수 있는 '객체들'의 창조에서 유래한다. (137면)




54. 커뮤니케이션이 주로 시간문제를 해결한다는 사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에서 다음 커뮤니케이션으로 갈 것인가이다. ... 잘 알려진 것처럼 우리는 의견불일치의 경우에도 계속해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다. (138면)




55. 하인즈 폰 포에스터(Heinz von Foerster)에 의해 완성된 제2차 사이버네틱스(Kybernetik zweiter Ordnung)는 작동적인 구성주의의 선언으로서가 아니라면 당연히 구성주의적 이론으로서 통용된다. (163면)




56. 구성주의적 인식론들은 꼭 사이버네틱스, 1947년 미국의 수학자 위너(N. Winner)를 중심으로 형성된 과학자 그룹을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라고 명명했는데, 그 어원은 키잡이를 뜻하는 고대 희랍어 키버네데스(kybernetes)이다. 위너에 따르면 사이버네틱스는 한 체계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종류의 변량들 - 그 하나는 우리가 직접 제어할 수 없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 중 제어할 수 없는 변량의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값을 바탕으로 제어할 수 있는 변량의 값을 적당히 정하여, 이 체계를 가장 바람직한 상태에 이르게 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학문이다. (163면)




57. 누가 관찰자인가? 제2차 사이버네틱스는 이 질문을 관찰하는 모든 체계를 향해 던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이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로써 모든 인지적, 규범적 그리고 도덕적 코드, 곧 모든 윤리적 코드는 오류로 나타난다. (167, 168면)




58. 1980년대 이후 독일 사회학계는 하버마스로 대표되는 생활세계학파(Lebenswelter)와 루만이 이끄는 아우토포이에시스학파(Autopoieten)라는 양대 학파의 패러다임에 의해 이끌어진다. 전자는 인본주의적 내부참여자 입장에서 일상생활 속에서 얻은 지식을 체계화하고 연구자 기준의 외부와 내부세계의 갈등을 다루는 데 반해, 후자는 생물학적 외부관찰자 입장에서 모든 인간 활동의 단위가 열림과 동시에 닫힌 체계라는 중립적 관찰자자세를 견지한다. 이 두 학파는 오늘날까지 접점이 없는 평행선을 달리면서 상호 비판의 견고한 고삐를 놓지 않고 있다. (역자 후기, 17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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