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이학문선 1
안토니오 네그리 & 마이클 하트 지음, 윤수종 옮김 / 이학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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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엇보다도 제국은 혼합된 구성에 의해 규정되며, ... 두번째로 우리의 제국은 권력 중심이 없다는 사실, 즉 우리의 제국은 로마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의해 규정된다. 이러한 사실은 권력이 혼합된 구성의 다양한 수준들 및 등록기들을 통해 분배된다는 의미에서 첫번째 요소에서 생겨난다. 마지막으로 제국은 외부를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 규정된다. (12면) 

 

2. 제국은 외부를 가지지 않는다는 이 마지막 주장은 이 책이 처음 출간된 이래 가장 반대가 심했던 주장 가운데 하나이다. ... 우리는 제국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제국에 저항할 수 있으며, 사실상 가장 강력한 반대와 가장 생산적인 대안들은 낡은 것의 껍질 안에서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면서 안에서부터 생겨날 것이다. (13면)

 

3. 제국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대안들은 대중에게서 생겨날 것이고, 이것은 우리의 책이 제시하는 두번째 근본적인 개념이다. 이 책에서 제국 개념이 잘 정교화된 데 반해, 대중 개념은 추상적이고 거의 시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13면)

 

4. 국민 국가의 주권이 쇠퇴하고 국민 국가의 경제적, 문화적 교환들을 점차 규제할 수 없게 된 것은, 사실 제국이 도래하고 있다는 일차적 징후들 가운데 하나이다. (16면)

 

5. 제국주의와는 달리 제국은 결코 영토적인 권력 중심을 만들지 않고, 고정된 경계나 장벽들에 의지하지도 않는다. 제국은 개방적이고 팽창하는 자신의 경계 안에 지구적 영역 전체를 점차 통합하는, 탈중심화되고 탈영토화하는 지배장치이다. 제국은 명령 네트워크를 조율함으로써 잡종적 정체성, 유연한 위계, 그리고 다원적 교환을 관리한다. 제국주의적 세계 지도에서 몇 가지로 구분됐던 국가의 색깔들은 제국적인 전지구적 무지개 속에서 합쳐지고 섞일 것이다. (17면)

 

6. 제국 개념의 근본적인 특징은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즉, 제국의 지배는 한계가 없다. (19면)

 

7. 제국의 지배 대상은 사회생활 전체이며 따라서 제국은 전형(패러다임)적인 생체 권력biopower 형태를 나타낸다. (20면)

 

8. 이 책을 쓰면서 우리는 광범위한 학제적 접근법을 적용하려고 최선을 다하였다. ... 왜냐하면 이전에 한정된 학문 분과적 접근들을 정당화했던 경계들이 제국에서는 점점 더 파괴되기 때문이다. (21면)

 

9. 유엔은 사실 이러한 구성 과정의 정점, 즉 국제적 질서 관념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것을 넘어 전지구적 질서라는 새로운 관념으로 나아가는 정점이라고 볼 수 있다. (29면)

 

10. 이 이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제국적 주권이 패러다임 전환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역설적으로 (그러나 정말로 그렇게 역설적이지는 않다) 켈젠의 개념이 엄밀한 형식주의적 관점에 한정되어 있을지라도 그의 개념만이 실제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33면)

 

11. 새로운 패러다임은 애초에 수평적으로 연결된 역동적이고 유연한 체계적 구조로서 윤곽지워진다. 우리는 그 구조를 정확히 줄여서 말하면 니클라스 루만의 체계 이론과 존 롤즈의 정의론의 잡종이라고 생각한다. (40면)

 

12. 체계적 총체성은 이전의 모든 변증법과 단절하고 ... (41면)

 

13. 푸코적인 이행은 근본적으로 맑스가 기술하고 그리고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재정식화하고 확장한 과정의 일차원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복수성과 다원성의 역설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렇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관점을 훨씬 더 분명하게 발전시킨다- (55면)

 

14. 통제사회와 생체 권력에 대한 이러한 개념화는 제국 개념의 중심적 측면들을 묘사한다. 제국 개념은 주체들의 새로운 범다변성을 이해해야만 하는 틀이며, 새로운 권력 패러다임이 도달하게 되는 끝이다. 여기서 (계약적인 형태 그리고/혹은 유엔 형태 속에서) 국제법의 다양하고 낡은 이론적 틀과 제국적 법률의 새로운 현실 사이의 진정한 틈이 열린다. (56면)

 

15. 이러한 관점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생체 정치적 맥락은 완전히 우리의 분석의 중심이다. ... 우리의 분석은 오히려 생체 권력의 생산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57면)

 

16. 푸코가 최종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생체 정치 사회에서의 생산의 현실적 동학이다. (59면)

 

17. 거대한 초국적 기업들이 어떤 중요한 측면에서 생체 정치적 세계의 근본적인 연결 직조를 구축한다. 자본은 항상 전지구적 국면을 노리고 조직되어 왔지만, 20세기 후반에서야 다국적이고 초국적인 산업적, 금융적 기업들이 사실상 전지구적 영토들을 생체 정치적으로 구조화하기 시작했다. (64면)

 

18. 거대한 산업적, 재정적 역능은 상품뿐만 아니라 주체성도 생산한다. 그러한 역능은 생체 정치적 맥락에서 행위적 주체성을 생산한다. (65면)

 

19. 소통 네트워크의 발전은 새로운 세계 질서의 등장과 유기적 관계를 지닌다 - 달리 말하면 그것은 결과이자 원인이고 생산물이자 생산자이다. ... 소통산업이 그렇게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해 온 이유이다. (66면)

 

20. 권력은 생산하면서 조직한다. (67면)

 

21. 소통이 지배적인 생산 부문 가운데 하나이고 전체 생체 정치적 장 위에서 활동한다면, 우리는 소통과 생체 정치적 맥락이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으로 우리는, 예를 들어 하버마스가 묘사한 낡은 지형을 뛰어넘을 수 있다. 사실 하버마스가 소통행위 개념을 발전시키고 소통행위의 생산적 형태와 그것에서 도출되는 존재론적 결과들을 그렇게 강력하게 증명할 때, 그는 여전히 전지구화의 이러한 효과들을 벗어난 관점, 즉 존재의 정보적 식민화에 반대할 수 있는 삶과 진실의 관점에 의존하였다. 그러나 제국적 기계는 이러한 외부적 관점이 더 이상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반대로 소통적 생산과 제국적 정당화의 구축은 함께 진행되며 더 이상 분리될 수 없다. 제국적 기계는 자기를 타당화하며 자기 산출적이다 - 즉 체계적이다. (67, 68면)

 

22. 새로운 권력은 자신의 권력이 형성되는 동안에 자신의 힘이 지닌 효율성을 증명해야 하며 동시에 자신의 정당성의 토대가 구축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69면)

 

23. 제국의 규범적 자원은 새로운 기계, 새로운 경제적-산업적-소통적 기계- 간단히 말해서 전지구화된 생체 정치적 기계에서 생겨난다. (76면)

 

24. 따라서 정당성의 근본적 규범은 그 기계의 깊숙한 곳에서, 사회적 생산의 핵심에서 확립될 것이다. 사회적 생산과 사법적 정당성은 일차적인 힘과 이차적인 힘으로, 토대와 상부구조의 요소들로도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히려 생체 정치적 사회를 관통해 공존하는 절대적 평행 및 상호 혼합의 형태로 이해되어야 한다. 제국과 제국의 생체 권력 체제에서는 경제적 생산과 정치적 구성은 점차 일치하는 경향이 있다. (77면)

 

25. 아마 이것은 유사성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차이, 즉 특이성들의 소통에 기초해서 기능하는 새로운 소통 유형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공통의 적을 인식하고 공통의 투쟁 언어를 발명하는 것... (96면)

 

1. 비록 근대 주권이 유럽으로부터 나왔다 할지라도, 그것은 주로 유럽과 유럽 외부와의 관계를 통해서, 그리고 특히 유럽의 식민지 기획과 식민지인의 저항을 통해서 생겨났고 전개되었다. (112면)




2. 요약하자면, 헤겔의 역사는 혁명적인 내재성 구도에 대한 강력한 공격일 뿐만 아니라, 비유럽적 욕망에 대한 부정이기도 하다. (127면)




3. 푸코는 이러한 이행을 주권 패러다임에서 통치성govermentality 패러다임으로의 이행이라고 말한다. (134면)




4. 윤리적인 자기에의 배려는 자기 창조의 구성 권력으로 재등장한다. 우리에게 ‘인간’의 죽음에 대해 깨닫게 하려고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던 저자, 자신의 전생애 동안 반인본주의의 기치를 들었던 사상가가 어떻게 마침내 인본주의의 전통의 이러한 중심 교리들을 옹호하게 되었는가? ... 즉 ‘인간’의 죽음 이후의 인본주의란 무엇인가? (137면)




5. 말콤 엑스Malcolm X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투쟁 요구의 초점을 ‘시민권’에서 ‘인권’으로 돌리고, 이렇게 하여 수사학적으로 항의의 광장을 미국 의회에서 유엔 총회로 전환하려 했다. (156면)




6. 장 주네Jean Genet는 블랙팬더당과 팔레스타인들의 혁명적 욕망에 매료되었지만, 주권 국민이 되는 것은 그들의 혁명적 특질의 종말일 것이라고 인식했다. 그는 “팔레스타인들이 제도화되는 날, 나는 더 이상 그들 편에 있지 않을 것이다. 팔레스타인들이 다른 국민들처럼 하나의 국민이 되는 그날, 나는 더 이상 그곳에 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158면)




7. 식민주의는 타자성alterity의 형상들figures을 구축하며 복잡한 변증법적 구조로 전개되는 것 속에서 그들의 흐름을 관리한다. 비유럽적 타자들을 소극적으로 구축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유럽적 정체성 자체를 창립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176면)




8. 타자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산된다. 이러한 전제는 주목할 만한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초기 저서를 포함해서 최근 몇 십년 동안에 등장한 광범위한 연구의 공통적인 출발점이다. “나는 동양Orient이 본래 활발하지 못한 것은 아니라는 ... 동양은 창조되었다는 - 혹은 내가 부르듯이 ‘동양화되었다’는 가정과 함께 시작했다”. 오리엔탈리즘은 단순히 실제 대상, 즉 동양에 대한 보다 정확한 지식을 획득하려는 학문적 기획이 아니라 오히려 담론 자체의 전개로 자신의 대상을 창조하는 담론이다. (177면)




9. 그야말로 ‘타자’의 차이가 절대적이기 때문에 타자의 차이는 두 번째 계기에서 ‘자아’의 근거로서 전도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식민화된 ‘타자’의 사악함, 야만성 그리고 방탕함은 유럽적 ‘자아’의 선함, 공손함, 그리고 예의 바름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이상하고 이국적이고 거리가 먼 것처럼 나타나는 것이 매우 가깝고 밀접한 것으로 판명된다. (180면)




10. 오직 식민지인들과의 대립을 통해서만 중심부 주체는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된다. 그러면 처음에 단순한 배제 논리로 나타난 것이 부정적인 인식 변증법으로 판명된다. 식민지는 식민지인들을 부정negation으로 생산하지만, 변증법적 뒤틀림을 통해서, 부정적으로 식민화된 정체성은 부정되면서 이번에는 긍정적인 식민자적 ‘자아’를 세운다. (181면)




11. 현실은 변증법적이지 않고, 식민주의가 변증법적이다. ... 무엇보다도, 변증법적 구축은 투쟁 중인 정체성들에 관해 본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백인과 흑인, 유럽인과 동양인, 식민자와 식민지인 모두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며 (외양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자연, 생물학 혹은 합리성에서 어떠한 현실적으로 필수적인 기반도 지니고 있지 않은 표상들이다. 식민주의는 타자성과 정체성을 생산하는 추상 기계이다. (182면)




12. 근대 주권 세계는 ‘자아’와 ‘타자’, 흑과 백, 안과 밖,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규정하는 일련의 이분법적 대립물에 의해 분할된 마니교적 세계이다. 탈근대주의적 사고는 정확히 이러한 이분법적 근대성 논리에 도전하고, 이러한 점에서 가부장제, 식민주의, 인종주의라는 근대 담론들에 도전하여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자원들을 제공한다. (195면)




13. 차이와 특유함specificity에 관한 탈근대주의적인 강조는 보편화되는 권력 담론들과 권력 구조들이 지닌 전체주의에 대항한다. 파편화된 사회적 정체성들에 대한 긍정은 ... (195면)




14. 계몽주의는 문제이며, 탈근대주의는 해결책이다. (196면)




15. 달리 말하자면, 탈근대주의 이론을 계몽주의와 근대성에 대한 전반적인 공격이 아니라, 오히려 특정하게는 근대 주권의 전통에 대한 도전으로 제시한다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더욱 정확하게는, 이러한 다양한 이론적 논쟁은 근대적인 지배, 배제, 그리고 명령의 중심 논리인 - 차이의 중요성을 이항적 대립으로 환원하고, 이어서 이러한 차이들을 통일적인 질서에 포섭하기 위한 - 변증법에 대한 도전에 매우 일관되게 결집되고 있다. 만약 근대 권력 자체가 변증법적이라면, 탈근대주의적 기획은 비변증법적이어야 한다는 논리가 된다. (197면)




16. 차이와 복수성을 ‘동일성’과 ‘타자’ 사이의 단일한 선택지로 이분법적으로 환원하는 것과 같은 여전히 낡은 적들의 그림자에 대항해 전투를 벌이고 있다. (199면)




17. 탈근대주의적 사상 흐름들은 근대 주권의 전통에서 하나의 파열의 징후이다. ... 하지만 새로운 것은 탈근대주의적 이론가들이 근대 주권의 전통을 지적하고, 근대적 이분법과 근대적 정체성의 틀에서 벗어나 사고할 수 있는 새로운 능력, 즉 다원성과 복수성의 사고를 증명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혼란스럽거나 무의식적으로라도, 탈근대주의 이론가들은 제국 구성을 향한 이행을 나타낸다. (200면)




18. 세계는 둘로 나누어져 있지도 않고 대립 진영들(중심 대 주변, 제1세계 대 제3세계)로 구분되지도 않으며, 오히려 셀 수 없는 부분적이고 이동적인 차이들에 의해 항상 규정되어 있으며 규정되어 왔다. 세계를 이분법적 분할의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바바는 또한 총체성 이론들과 사회적 주체들의 정체성, 동질성, 본질주의에 관한 이론들을 거부하게 된다. (201면)




19. 세계에 대한 이분법적 구상은 세계의 두 반쪽에 근거하여 정체성들의 본질주의 및 동질성을 함의하며, 그러한 중심적인 경계를 가로지르는 관계를 통하여 모든 경험을 일관적인 사회적 총체성 안에 포섭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약하자면, 바바의 분석을 따라 다니는, 그리고 일관되게 이러한 다양한 적대자들을 연결시키는 유령은 헤겔적인 변증법이다. 즉, 서로 대립하는 본질적인 사회적 정체성들을 일관된 총체성 안에 포섭하는 변증법이다. (201면)




20. 권력 혹은 사회적 억압 세력들은 이분법적인 구조를 강요함으로써 그리고 사회적 주체성들에 관한 논리들을 총체화함으로써, 사회적 주체성들의 차이를 억압함으로써 기능한다. .... 차이의 복수성을 긍정해야 한다. (202면)




21. 권력은 변증법적이고 이분법적인 구조를 통해 배타적으로 작동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202면)




22. 잡종성이라는 단순한 사실은 위계를 간단히 파괴할 수 있는 힘을 지닌다. 잡종성 그 자체는 차이들이 경계선들을 가로지르도록 하는, 현실화된 차이의 정치이다. (203면)




23. 제국은 근대 제국주의의 연약한 메아리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새로운 지배 형식이다. (204면)




24. 순환, 이동성, 다양성, 그리고 혼합은 바로 세계 시장 이데올로기가 가능한 조건들이다. 무역은 차이를 한데 묶으며, 차이들이 많을수록 더욱 즐겁다! (상품, 인구, 문화 등의) 차이들은 세계 시장에서 무한히 복수화되는 것 같으며, 세계 시장은 고정된 경계들을 폭력적으로 공격한다. 즉, 세계 시장은 자신의 무한한 복수성들을 가지고 모든 이분법적 분할을 압도한다. (209면)




25. 세계시장에게 국민 국가는 점차 단순한 장애물로 나타난다. ... 더 이상 국민 경제들도 없을 것이다. (209면)




26. 탈근대주의는 정말 전지구적 자본을 작동시키는 논리이다. 마케팅은 아마도 탈근대주의 이론과 가장 분명한 관계를 가지며... (210면)




27. 마케팅 자체는 차이에 기반을 둔 실천이며, 주어진 차이가 많을수록, 마케팅 전략은 더욱 발전할 수 있다. ... 탈근대적인 마케팅은 각 상품과 각 인구층의 차이를 인식하고 그에따라 자신의 전략들을 펴 나간다. 모든 차이는 기회다. (211면)




28. 탈근대적인 경영에 본질적인 것은, 조직이 이동적이며 유연하고 차이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12면)




29. 탈근대주의가 주요하게 적용되는 장소는 미국 지식인층의 엘리트 분파 안이다. (213면)




30. 확실히 세계 도처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관점에서, 잡종성, 이동성, 차이는 즉각적으로 그 자체 해방적인 것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많은 주민들은 이동성을 자신들의 고통의 한 측면으로 간주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들이 비참한 환경 속에서 가속적으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 이동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의 절망적인 곤경이 드러날 것이다. ... 실제로 살 수 있는 안정적이고 정해진 장소, 즉 어떤 고정성은 반대로 가장 긴급한 요구로 나타날 수 있다. (214면)




31. “계몽주의”에 대한 탈근대주의적인 인식론적 도전 -거대 서사에 대한 공격과 진리에 대한 탈근대주의의 비판-은 또한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엘리트 지식인층에서 벗어나 위치를 바뀌었을 때 자신의 해방적 아우라aura를 잃는다. (215면)




32. 차이, 잡종성, 이동성은 그 자체로 해방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실, 순수성, 그리고 정지도 그 자체로 해방적이지는 않다. 진정한 혁명적 실천은 생산의 수준과 관련된다. 진실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지 않겠지만, 진실 생산을 통제하는 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 것이다. 이동성과 잡종성은 해방적이지 않지만, 이동성과 정지, 순수물과 혼합물의 생산을 통제하는 것은 해방적이다. (215면)




33. 가난한 자는 빈곤하며, 배제되고, 억압받고, 착취당한다. 그러나 여전히 살아 있다@ 가난한 자는 삶의 공통 분모이며, 대중의 토대이다. (216면)




34. 탈근대성의 발견은 정치적이고 생산적인 지형의 중심에 가난한 자를 다시 놓는 것에 있다. (218면)




35. 권력은 네트워크 속에서 자신을 배치하고 스스로를 조절하는 일련의 역능에 의해 구성될 수 있다. (222면)




36. 근본적인 차이는 내제적인 주권 개념이 지닌 팽창성은 배타적이지 않고 포괄적이라는 점에 있다. 달리 말해서, 내재적 주권이 팽창할 때 이러한 새로운 주권은 자신이 직면하는 다른 역능을 합병하거나 파괴하지 않고 반대로 그 역능을 네트워크에 포함시키면서 스스로를 그 역능에 개방한다. (227면)




37. 제국적 관념에서는 대조적으로 권력은 자신의 질서 논리에 언제나 갱신되고 언제나 팽창 속에서 재창조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228면)




38. 새로운 국민은 오직 잡종적 정체성을 정치적이고 문화적으로 관리한 결과물일 수밖에 없었다. (234면)




39. 걸프전의 중요성은 오히려 이 전쟁이 미국 스스로의 국민적 동기의 작용으로서가 아니라 전지구적 권리의 이름으로 미국을 국제적 정의를 관리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으로 드러냈다는 사실에서 도출된다. (244면)




40. 그러나 제국적 세계로의 이행에서 변화한 것은 이 경계 장소border place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근대적 비판 전략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248면)




41. 더 이상의 외부는 없다. (252면)




42. 우리는 이 지점에서 제국적 인종주의 이론이 본질적으로 위계 이론이 아닌 차별 이론이란느 점을 신중하게 지적해야 한다. 근대 인종주의 이론이 인종 간의 위계를 인종 차별을 필연적이게 만드는 근본적 조건으로 설정한 반면, 제국적 (인종주의) 이론은 원리상 서로 다른 인종들 혹은 인종 집단들의 우열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제국적 (인종주의) 이론은 우열을 순전히 우연한 것으로, 실천적인 문제로 여긴다. 달리 말해, 우리는 인종적 위계를 원인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의 효과로 본다. (260면)




43. 들뢰즈와 가타리는 우리가 인종주의적 실행을 이분법적 분할과 배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차이의 포섭 전략으로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 어떠한 정체성도 ‘타자’로 지정되지 않으며, 어느 누구도 그 영역에서 배제되지 않으며, 외부는 없다. (261면)




44. 근대 사회 이론이 제기한 분석의 중심적이고 아주 공통적인 주제들 가운데 하나는 주체성이란 미리 주어져 있거나 혹은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적어도 어느 정도는 사회 세력들의 장에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263면)




45. 일반적인 제국적 명령 장치는 현실적으로 세 가지 구별되는 계기로 구성된다. 하나는 포괄적inclusive 계기이고 다른 하나는 미분적differential 계기이며, 나머지 하나는 관리적managerial 계기이다. (266면)




46. 첫 번째 (포괄적) 계기는 제국의 관대하고 자유주의적인 얼굴이다. 인종, 신념, 피부색, 성, 성적 지향 등과 상관없이 모든 것을 자신의 경계 안에 받아들인다. 포괄적 계기에서는 제국은 차이를 보지 못한다. 제국은 차이를 수용하는 데 있어서 전혀 개의치 않는다. (266면)




47. 제국적 통제의 두 번째 계기, 즉 미분적 계기는 제국 영역 안에 수용된 차이들의 긍정을 포함한다. 사법적 관점에서 차이는 무시됨에 틀림없는 반면, 문화적 관점에서는 차이는 찬양받는다. (267면)




48.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다문화주의를 공식적으로 엄청나게 장려하는 것은 전통적인 인종적 차이들과 문화적 차이들을 보편적으로 포괄하는 우산 아래 찬양하는 것을 포함한다. (267면)




49. 우연성, 이동성, 그리고 유연성은 제국의 현실적 힘이다. 제국적 “해답”은 이런 차이들을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이들을 긍정하고 그것들을 유효한 명령 장치 속에 배열하는 것이다. (269면)




50. 대개 제국은 분할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존하는 혹은 잠재적인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를 찬양하며, 그 차이를 일반적인 명령 경제 안에서 관리한다. 제국의 세 가지 명령을 포괄하라, 구별하라, 관리하라이다. (269면)




51. 우리는 이제 제국 주권이 반대로 하나의 중심적인 갈등을 둘러싸고 조직되지 않고 오히려 미시 갈등들의 유연한 네트워크를 통해 조직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70면)




52. 제국은 노동이 착취당하는 세계적 생산의 무-장소이다. ... 무-장소는 전지구에 두뇌, 가슴, 몸통, 손발을 가지고 있다. (281면)




53. 따라서 오늘날 공화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우선 무엇보다도 제국 내부에서 투쟁하고, 제국의 잡종적이고 변조해 가는 지형들 위에서 제국에 대항하여 건설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292, 293면)

 

1. 위기는 전체적으로 근대에 정상적인 조건인 것처럼, 위기는 자본에게는 자본의 종말이 아니라 자본의 경향 및 작동 방식을 가리키는 정상적인 조건이다. (298면)

 

2. 자본은 시작부터 세계 권력이 되려는, 사실상 유일한 세계권력이 되려는 경향이 있다. (302면)

 



3. 레닌이 아주 강하게 반대했던 것은 카우츠키가 평화로운 미래에 대한 이러한 전망을 당시의 현실의 동학을 부정하는 데 사용한다는 사실이었다. (309, 310면)




4. 자본주의 발전과정은 가치 증식과 착취를 전지구적 생산 체계가 지닌 기능이라고 결정하며, 그래서 이런 지형 위에 나타나는 모든 장애물을 결국에는 넘어서려는 경향이 있다. (317면)




5. 제국주의에서 제국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국민 국가로부터 전지구적 시장의 정치적 조절에 이르기까지... (318면)




6. 전지구적 권력 구조 속에서 상호 지지하는 극들로서, 지배적인 지역들은 계속해서 발전할 것이고 종속적인 지역들은 계속해서 저발전할 것이다. (373면)




7. 근대화는 끝났고 전지구적 경제가 오늘날 정보 경제를 향한 탈근대화 과정을 겪고 있다는 주장은 산업 생산이 사라질 것이라거나 심지어 지구의 가장 지배적인 지역들에서조차도 산업 경제의 중요한 역할이 끝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산업화 과정이 농업을 변형시켰고 농업을 더욱 생산적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또한 정보 혁명도 제조 과정을 재규정하고 활력을 되찾게 함으로써 산업을 변형시킬 것이다. 여기서 작동하는 새로운 경영 명령은 “제조업을 하나의 서비스로 다루라”이다. 실제로, 산업이 변형됨에 따라, 제조업과 서비스업 사이의 구분이 희미해지고 있다. 근대화 과정을 통해 모든 생산이 산업화되는 경향이 있었던 것처럼, 또한 탈근대화 과정을 통해 모든 생산은 서비스 생산을 향하고, 정보화되는 경향이 있다. (376, 377면)




8. 첫 번째 길은 서비스 경제 모델service economy model을 향하고, 미국, 영국 그리고 캐나다가 이끌고 있다. 이 모델은 산업 직업의 급속한 감소와 그에 상응하는 서비스 직업의 증가를 수반한다. 특히 자본을 관리하는 금융 서비스업들이 다른 서비스 부문들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두 번째 모델, 즉 일본과 독일이 대표하는 정보 산업 모델info-industrial model에서는, 산업 고용은 첫 번째 모델에서 감소하는 것보다 더 천천히 감소한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정보화 과정은 현 산업 생산에 긴밀하게 통합되며, 현 산업 생산의 힘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 그러므로 이 모델에서는 산업 생산과 직접 연관된 서비스들이 다른 서비스들과 비교하여 더욱 중요한 것으로 남아 있다. (377면)




9. 1930년대 디트로이트 자동차 공장은 전지구적 경제의 정점에서 지배적인 지위에 있었고 최고의 가치를 생산하고 있었지만, 1990년대 자동차 공장은, 상파울로에 있든지 캔터키에 있든지 혹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든지 간에, 전지구적 경제에서 -고가치의 서비스 생산에 종속된- 종속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 모든 경제 활동은 정보 경제의 지배 아래 들어가는 경향이 있으며, 정보 경제에 의해 질적으로 변형되는 경향이 있다. 전지구적 경제에서 지리적 차이들은 서로 다른 발전 단계들이 공존한다는 신호들이 아니라 새로운 전지구적 생산 위계의 선들이다. (378, 379면)




10. 무질이 말했던 것처럼, 정신의 생산에 관한 한, 사람들은 산업기계의 전통적인 기법을 정보 및 소통 기술의 인공 두뇌적 지성cybernetic intelligence으로 실질적으로 대체해야 한다. (380면)




11. 오늘날에는 정보와 소통이 생산 과정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수행하기에 이르렀다. (381면)




12. 대부분의 서비스업은 실제로 정보와 지식의 지속적인 교환에 기초를 두고 있다. (382면)




13. 컴퓨터가 지닌 하나의 새로운 측면은 자신을 사용하여 자기 자신의 작동을 끊임없이 수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383면)




14. 기본적인 경제적 자원은 지식이고 지식일 것이다. Peter Drucker,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 (383면)




15. 산업 경제에서 정보 경제로의 이행이 가져온 첫 번째 지리학적 결과는 생산의 극적인 탈집중화(분산)이다. ... 규모와 효율성은 더 이상 일직선으로 관련되지 않으며, 사실상 규모가 큰 것은 많은 경우 장애물이 되었다. (387면)




16. 정보 기술은 거리를 상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똑같은 과정에 포함된 노동자들은 인접성을 고려하지 않고 멀리 떨어진 장소들에서 효과적으로 소통하고 협동할 수 있다. 결국, 노동 협동의 네트워크는 영토적이거나 물리적인 중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388면)




17. 경제의 탈근대화 혹은 정보화를 특징짓는 생산 과정과 부지들의 탈중심화와 전지구적 분산은 상응하는 생산 통제의 집중화를 촉진하였다. 원심력적인(지역 분산적인) 생산 움직임은 구심력적인(중앙 집중적인) 명령 경향과 균형을 이룬다. (390면)




18. 미국 정부가 전지구적 정보 인프라의 확립과 조절을 자신의 가장 우선적인 일 가운데 하나로 설정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소통 네트워크가 가장 강력한 초국적 기업들에게는 가장 적극적인 합병과 경쟁의 지형이 되어 왔다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391면)




19. 현대적 생산의 정점에서, 정보와 소통은 바로 생산된 상품이며, 네트워크 자체가 생산과 유통 모두의 장소이다. (391면)




20. 지금은 전 세계 도처의 구석구석까지 퍼져 있는 인터넷이 이러한 민주주의적 네트워크 구조의 가장 좋은 예이다. 비결정적이고 잠재적으로 무한한 수의 상호 접속된 노드들nodes(연결점들)은 어떠한 통제 중심점 없이 소통한다. (392면)




21. 이 민주주의적 모델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리좀rhizome, 즉 위계적이지 않고 중심이 없는 네트워크 구조라 부르는 것이다. (392면)




22. 중심화된 생산, 대량 살포 그리고 일방향 소통이 방송 네트워크를 규정한다. 전체 문화 산업 -신문과 책의 공급에서 영화와 비디오 카세트에 이르기까지-은 전통적으로 이 모델에 따라 작동해 왔다. 비교적 소수의 회사들(혹은 특정 지역들에서는 루퍼트 머독, 실리오 베르루스코니, 혹은 테드 터너와 같은 개인 기업가)이 이런 네트워크 모두를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있다. 이 소수 독점적 모델은 리좀이 아니라 가지 전체를 중심 뿌리에 종속시키는 수목tree구조이다. (393면)




23. 새로운 정보 인프라의 네트워크는 이런 두 모델의 잡종이다. ...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정보 인프라를 지배하는 준독점체들을 설립하고 공고화하려는 초국적 기업들 사이의 경쟁을 목격하고 있다. ... 새로운 민주주의와 새로운 사회적 평등을 약속한 새로운 소통 기술들은 사실상 지배적인 국가들 안에서 그리고 특히 지배적인 국가들 밖에서 불평등과 배제의 새로운 선들을 창조해 왔다. (393면)




24. 20세기 복지 국가의 부흥과 몰락은 이런 공적 전유와 사적 전유의 나선형적 진행 과정에서 또 하나의 순환(주기)이다. 복지 국가의 위기는 우선 공적 자금을 통해 구축된 공적 부조와 공적 분배의 구조들이 사적 이익을 위해 사유화되고 몰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에너지 서비스와 소통 서비스의 사유화를 향한 최근의 신자유주의적 경향은 나선형적 진행 과정의 또 다른 선회이다. 이것은 엄청난 공적 자금의 지출을 통해 건설된 에너지와 소토의 네트워크를 사적인 회사들에게 제공하는 데 있다. ... 그러므로 공적인 것은 심지어 개념으로서도 해체되고 사유화된다. 즉, 사실상 사적 소유의 초월적인 권력이 공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 사이의 내재적 관계를 대체한다. (395면)




25. 오늘날은 국가와 자본 간의 관계의 세 번째 국면이 충분히 무르익었다. 이 국면에서는 거대 초국적 기업이 국민 국가의 사법권과 권위를 효율적으로 넘어섰다. 따라서 수세기동안 지속된 이러한 변증법이 끝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즉, 국가는 패배했고 기업들이 이제 지구를 지배한다! 계시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현상을 무제한적인 자본주의적 기업들이 인간성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고 국민 국가의 낡은 보호 권력을 동경하는 수많은 연구가 최근 수  동안 좌파 진영에서 나왔다. 이에 대응하여, 자본의 옹호자들은 규제 완화와 자유 무역의 새로운 시대를 찬양한다. (400면)




26. 전지국적 시민사회에서 가장 새롭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세력들은 비정부 기구들(NGO들)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407면)




27. NGO들은 현대의 권력 네트워크의 말단에 있거나 혹은 (우리의 일반적인 은유로 돌아가서) 전지국적 권력 삼각축(미국, 유럽, 일본)의 넓은 토대이다. 이제 이러한 가장 넓고 가장 보편적인 수준에서, 이러한 NGO들의 활동은 생체 권력의 영토 위에서, 삶 자체의 요구들에 대처하면서 “정치를 넘어서” 제국의 작용과 일치한다. (409면)




28. 스펙터클 사회는 구시대의 무기를 휘두름으로써 지배한다. 홉스는 효과적인 지배를 위해서 “고려해야 할 정념은 공포”라는 것을 오래 전에 인식했다. 홉스에게 있어서 공포는 사회 질서를 묶고 확립하는 것이며, 그리고 여전히 오늘날에도 공포는 스펙터클 사회를 채우고 있는 일차적인 통제 매커니즘이다. (420면)




29. 자본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표현에 따르면, 흐름들fluxes의 전반적인 탈코드화, 대규모 탈영토화, 그리고 이러한 탈영토화되고 탈코드화된 흐름들의 접속conjunction을 통해 기능한다. (423면)




30. 그러나 어떤 점에서 이러한 표준화된 부품들, 즉 제도들이 생산한 정체성들의 고정성은 이동성과 유연성을 향해 더욱 진전하는 데 장애물이 되었다. 통제 사회로의 이행은, 정체성에 고정되지 않는, 잡종적이고 변화하는 주체성 생산을 포함한다. (429면)




31. 제국주의는 극복되지 않으면 자본의 죽음일 것이다라고 한 로자 룩셈부르크가 본질적으로 옳았다. 세계시장의 완전한 실현은 필연적으로 제국주의의 종말이다. (431면)




32. 엄청난 소통 기업들이 제시하는 정보의 근본적인 내용은 공포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빈곤이라는 지속적인 공포는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노동을 위한 투쟁을 만들어 내고 제국적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갈등을 유지하는 데 핵심 열쇠이다. 공포는 새로운 분할을 궁극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다. (437면)




33. 왜냐하면 생체 권력의 전지구성 속에서 모든 고정된 가치 척도가 해체되는 경향을 지니기 때문이며, 권력의 제국적 지평이 마침내 척도 바깥에 있는 지평인 것으로 밝혀지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선험적인 것뿐만 아니라 선험적인 것 그 자체도 척도를 결정하기를 중단했다. (453면)




34. 위대한 서구 형이상학적 전통은 측정할 수 없는 것을 항상 혐오해 왔다. (453면)




35. 지오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은 ‘벌어벗은 삶’이라는 용어를 인간성의 부정적 한계를 말하기 위해 그리고 정치적 심연 배후에서 근대적 전체주의가 인간 수동성의 (다소 영웅적인) 조건들을 구축해 왔다는 것을 폭로하기 위해 사용했다. (467면)




36. “나의 명제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해명으로서 기여한다. 즉,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누구나 결국 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하며, 그때 그는 그 명제들을 넘어서기 위하여 -계단으로서- 그 명제들을 이용한다(말하자면 그(나를 이해하는 사람)는 사다리를 다 오른 뒤에는 사다리를 내던져야 한다). 그는 이러한 명제들을 초월해야 하며, 그러면 그는 세상을 똑바로 볼 것이다. (비트겐슈타인, 482면)




37. 오늘날, 자본주의가 그토록 많이 승리한 이후에, 사회주의적 희망이 환멸감에 빠져 위축된 이후에, 그리고 노동에 대한 자본주의의 폭력이 초자유주의라는 이름하에 공고해진 이후에 왜 전투성이 여전히 발생하고, 왜 저항들이 심해졌으며, 왜 투쟁이 새로운 활력을 지닌 채 지속적으로 재등장하는가? 우리는 이러한 새로운 전투성이 구혁명적 노동자 계급의 조직화된 정식들을 단순히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즉시 말해야만 한다. (519면)




38. 오늘날 전투성은 긍정적이고 건설적이며 혁신적인 활동이다. ... 투사들은 창조적인 방식으로 제국적 명령에 저항한다. ... 전투성은 내부만을 알 뿐이다. ... 이러한 전투성은 저항을 대항 권력으로 만들고 반란을 사랑의 기획으로 만든다. (5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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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초 편지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야생초 편지 2
황대권 지음 / 도솔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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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상 만물이 다 그렇겠지만 식물이 자라고 영그는 데는 다 때가 있다는 것이지. (37면)




2. 그러구 보면 맛이란 것은 음식 자체에서라기보다 허기와 정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64면)




3. “끈기를 가지고 행하되 조화와 균형 속에서!” (74면)




4. 디테일은 전체와의 관련 속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74면)




5.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무릇 정성과 열심은 무언가 부족한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76면)




6. 참으로 재미있는 게, 아무리 시끄러운 소리일지라도 그것과 자신을 일체화시켜 즐기다 보면 소음이 아니라 음악으로 들린다는 것이다. (78면)




7. 내가 야생초를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내 속의 만을 다스리고자 하는 뜻도 숨어 있다. (102면)




8. 평화란 절대적 평온, 정지, 무사, 고요의 상태가 아니라, 내부적으로 부단히 움직이고 사고하는 ‘동적평형’ 상태라는 것이지. 사회가 평화롭고, 두 사람 사이가 평화롭다고 할 적에는, 내부적으로 부단히 교류가 이루어지고 대화가 진행되어 신진대사가 잘 되고 있다는 뜻이 된다. (109면)




9. 나는 요즘 인간관계에 있어서 자연요법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젋었던 시절에는 상대방과 대화할 적에 자기 의견을 먼저 말하고 싶어서 허겁지겁 하곤 하여 자주 대화의 맥을 끊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어떤 호흡이랄까 리듬이랄까 하는 것을 대화 중에 잡아내어 그 흐름 속에서 얘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그런다. (156면)




10. 그림을 그리다 보면 무작정 정진하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알게 된다. 하다가 잘 안 되면 좀 쉬는 게 최선이지. 쉬긴 쉬지만 머릿속으로 그 그림을 계속 그린다. 그러나 어떤 때는 잠시나마 그림 그린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다른 일에 몰두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어느 때, 문득 그 그림이 그려지고 싶은 거다. 무심코 붓을 잡는다. 그림이 놀랄 정도로 잘 된다. (222면)




11. 그림 그리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는 관찰력이다. (230면)




12. 평화는 상대방이 내 뜻대로 되어지길

바라는 마음을 그만둘 때이며

행복은 그러한 마음이 위로받을 때이며

기쁨은 비워진 두 마음이 부딪힐 때이다. (235면)




13. 사회 전체가 이렇게 경제 논리에 의해서 점점 타이트하게 조직되어 가니 기존의 다소 낭만적이고 문화적인 생활양식들이 점차 사라져 가는 느낌이야. 대신 물질은 풍부하니 먹는 것, 입는 것 따위를 고급으로 해서 문화적 상실감을 대신하는 거지. (253면)




14. 저는 잡초라는 말을 안 씁니다. 대신에 저는 야초라는 말을 쓰고 있어요. (270면)




15. 대학시절 이후 지금까지도 제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질서 속에서 제3세계 민중들이 어떻게 자주적으로, 자립적으로 살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27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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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옥중서간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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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이란 생활의 결과로서 경작되는 것이지 결코 갑자기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22면)

 

2. 고립되어 있는 사람에게 생활이 있을 수 없다. 생활이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연관이 완전히 두절된 상태에 있어서의 생활이란 그저 시간의 경과에 지나지 않는다. (23면)

 

3. 독서는 타인의 사고를 반복함에 그칠 것이 아니라 생각거리를 얻는다는 데에 보다 참된 의의가 있다. (24면)

 

4. 세상이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이다. (24면)

 

5. 투쟁은 그것을 멀리서 맴돌면서 볼 때에는 무척 두려운 것이지만 막상 맞붙어 씨름할 때에는 그리 두려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어떤 창조의 쾌감 같은 희열을 안겨주는 것이다. (24면)

 

6. 슬픔이나 비극을 인내하고 위로해주는 기쁨, 작은 기쁨에 대한 확신을 갖는 까닭도, 진정한 기쁨은 대부분이 사람들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49면)

 

7. 불행은 불행끼리 위로가 된다. (52면)

 

8. 감옥을 들어오기 전에도 한 번씩 읽은 책이지만 책이란 자기가(독자가) 변하면 내용도 변하는지 다른 느낌을 받는다. (53면)

 

9. 과거가 가장 찬란하게 미화되는 곳이 아마 감옥일 것입니다. (59면)

 

10. '창조의 산실'로서 고독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고독은 무엇을 창조할 수 있는 상태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60면)

 

11. 나는 인간을 어떤 기성의 형태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개인이 이룩해놓은 객관적 '달성' 보다는 주관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지향'을 더 높이 사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너도 알고 있듯이 인간이란 부단히 성장하는 책임귀속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간관계는 상대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는 일종의 동태 관계인 만큼 이제부터는 그것의 순화를 위하여 네 쪽에서 긍정적인 노력을 경주해야 될 것이다. (65, 66면)

 

12. 하기는 평소에도 독서보다는 사색에 더 맘을 두고 지식을 넓히는 공부보다는 생각을 높이는 노력에 더 힘쓰고 있습니다. (75, 76면)

 

13. 내가 있는 감방의 벽에, 누군가가 "청년은 다시 오지 않고 하루는 두 번 새벽이 없다"고 적어놓았다. 나는 이 때에 찌들은 '낙서'를 네게 전하고 싶다. 흥미 있는 일과 가치 있는 일의 차이는, 곧 향락과 창조의 차이이며, 결국 소, 장의 차이가 되리라 생각한다. (83면)

 

14. 착한 아내, 고운 며느리, 친절한 엄마, 인자한 시어머니, 자비로운 할머니 등 긍정적 미래로 열려 있는 여자인가를 살펴야 한다. 이것은 현재를 고정불변한 것으로 완결하지 않고 과거와 미래의 연관 속에서 변화발전의 부단한 과정으로 인식하는 철학적 태도이며, 현실성 보다는 그 가능성에 눈을 모으는 열려 있는 시각이다. (87면)

 

15. 징역 속에는 '춥다'와 '덥다'의 두 계절만 존재합니다. 직절한 사고, OX식 문제처럼 모든 중간은 함몰하고 없습니다. (92면)

 

16. 잡초를 뜯어서 젖을 만드는 소처럼 저는 간고한 경험일수록 그것을 성장의 자양으로 삼으려 합니다. (94면)

 

17. 하늘의 비행기가 속력에 의하여 떠 있음에서 알 수 있듯이, 생활에 지향과 속력이 없으면 생활의 제측면이 일관되게 정돈될 수가 없음은 물론, 자신의 역량마저 금방 풍화되어 무력해지는 법입니다. (95면)

 

18. 그러나 저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려 하기에 앞서, 붓을 잡는 자세를 성실히 함으로써 먼저 뜻과 품성을 닦는, 오히려 '먼 길'을 걸으려 합니다. (96면)

 

19. 역사책에서는 심지어 같은 책인 경우에도 매번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됩니다. (98면)

 

20. 실상 획의 성패란 획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획과 획의 '관계' 속에 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101면)

 

21.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아까울 정도로 과감히 버리기로 하였습니다. 지독의 '지식의 사유욕'에, 어설픈 '관념의 야적'에 놀랐습니다. ...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버린다는 것은 상추를 솎아내는, 더 큰 것을 키우는 손길이기도 할 것입니다. (104면)

 

22. 저희들은 이 실패자들의 군서지에서 수많은 타인을 만나고, 그들의 수많은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가능성 속에 몸담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115면)

 

23. "가르친다는 것은 희망을 말하는 것(아라공)" (125면)

 

24. 저는 이 짤막한 편지를 읽으며 저의 세계관 속에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식민지적 잔재가 부끄러웠습니다. 서구적인 것을 보편적인 원리로 수긍하고 우리의 것은 항상 특수한 것, 우연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사고의 식민성'은 우리들의 가슴에 아직도 자국 깊은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133면)

 

25. 비록 여름이 아니더라도 저는 책에서 무슨 대단한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설령 책에서 무슨 지식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태를 옳게 판단하거나 일머리를 알아 순서있게 처리하는 능력과는 무관한 경우가 태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인 특유의 지적 사유욕을 만족시켜 크고 복잡한 머리를 만들어, 사물을 보기 전에 먼저 자기의 머리 속을 뒤져 비슷한 지식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만 그것으로 외계의 사물에 대치해버리는 습관을 길러놓거나, 기껏 '촌놈 겁주는' 권위의 전시물로나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그런 것인 줄을 모르는 경우마저 없지 않는 것입니다. (139면)

 

26. 지난번 새마을 연수교육 때 본 일이지만, 지식이 너무 많아 가방 속에까지 담아와서 들려주던 안경 낀 교수의 강의가 무력하고 공소한 것임에 반해 빈 손의 작업복으로 그 흔한 졸업장 하나 없는 이가 전해주던 작은 사례담이 뼈 있는 이야기가 되던 기억이 지금도 선연합니다. 그런 교수가 될 뻔했던 제 자신을 아찔한 뉘우침으로 돌이켜봅니다.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찾아봅니다. 지식은 책 속이나 서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리된 경험과 실천 속에, 그것과의 통일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140면)

 

27. 항상 생활 속에서 먼저 깨닫기로 하고 독서가 결코 과욕이 되지 않도록 부단히 절제하고 있습니다. (147면)

 

28.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주관의 양을 조금이라도 더 줄이고 객관적인 견해를 더 많이 수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의 바닥에는, 주관은 궁벽하고 객관은 평정한 것이며, 주관은 객관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객관은 주관을 기초로 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전제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각자가 저마다의 삶의 터전에 깊숙히 발목 박고 서서 그 '곳'에 고유한 주관을 더욱 강화해가는 노력이야말로 객관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곳'이, 바다로 열린 시냇물처럼, 전체와 튼튼히 연대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고의 동굴을 벗어나는 길은 그 삶의 터전을 선택하는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155면)

 

29. 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 경우, 그릇으로서의 쓰임새는 그릇 가운데를 비움으로써 생긴다. '없음'으로써 '쓰임'으로 삼는 지헤. 그 여백 있는 생각, 그 유원한 경지가 부럽습니다. (174면)

 

30. 있으면 없는 것보다 편리한 것도 사실이지만 완물상지, 가지면 가진 것에 뜻을 앗기며, 물건은 방만 차지함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마음 속에도 자리를 틀고 앉아 창의를 잠식하기도 합니다. (177면)

 

31. 스스로 신입자가 되어 자기 소개를 하면서, 나는 판에 박은 듯한 소개나 사람의 거죽에 관한 것 대신에, 될 수 있는 한 나의 정신의 변화, 발전 과정을 간추려 이야기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내 딴에는 사람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모색하는 노력의 일단이며, 자위와 변명의 도색을 허락치 않는 제3자의 언어로 표현된 자기를 가져보려는 시도의 하나입니다. (180면)

 

32. 글씨도 그 속에 인생이 들어 있는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어떤 때는 글씨의 어려움을 알기 위해서 글씨를 쓰고 있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187면)

 

33. 읽을 책이 몇 권 밀리기도 하고 마침 가을이다 싶어 정신 없이 책에 매달리다가, 이러는 것이 잘 보내는 가을이 못됨을 깨닫습니다. 몸 가까이 있는 잡다한 현실을 그 내적 연관에 따라 올바로 이론화해내는 역량은 역시 책 속에서는 적은 분량밖에 얻을 수 없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독서가 남의 사고를 반복하는 낭비일 뿐이라는 극언을 수긍할 수야 없지만, 대신 책과 책을 쓰는 모든 창백한 손들의 한계와 파당성은 수시로 상기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188면)

 

34. 생각해 보면 '창문'보다는 역시 '문'이 더 낫습니다. 창문이 고요한 관조의 세계라면 문은 힘찬 실천의 현장으로 열리는 것입니다. (194면)

 

35. 젊은이들의 생각과 경험 속에 깊숙히 들어가는 것이 곧 나의 '사회학'이기도 합니다. (196면)

 

36. 사람들은 누구나 어제 저녁에 덮고 잔 이불 속에서 오늘 아침을 맞이하는 법이지만 어제와 오늘의 중간에 '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큼직한 가능성, 하나의 희망을 마련해두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생각됩니다. (199면)

 

37. 요즈음은 F. 카프카의 현대물리학에 관한 책을 읽고 있습니다. 문학서적은 고전을, 과학서적은 최신판을 읽으라는 말을 상기시켜주는 좋은 책이라 생각됩니다. 양자론과 상대성이론이 보여주는 최근의 놀라운 성과에서 알 수 있듯이, 물질세계의 내포와 외연이 급격히 심화, 확대됨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서의 '과학사상의 확장'은 실로 경이적인 것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어느 시대에나 과학의 발전은 항상 경이의 연속임이 사실이지만 최근의 그것은 기존의 언어와 개념으로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 이른바 '사고의 근본적인 변혁'을 요구한다는 점에 그 경이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서양의 과학사상이 그 기계론적이고 분열된 세계관으로 인하여 한계를 보이자 이제는 동양의 지혜에서 그 철학의 근거를 찾는가 하면, 물리학에 인간의 의식, 즉 '마음'을 포함하기에 이르는 등 소위 '동양적 해방'의 길을 더듬고 있는 현대 물리학의 방향은 우리가 스스로의 세계관을 개선해가는데 극진한 의의를 갖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201면)

 

38. 경험이 비록 일면적이고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갖는 것이긴 하나, 아직도 가치중립이라는 '인텔리의 안경'을 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경험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신념이 부러우며, 경험이라는 대지를 튼튼히 발 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추론적 지식과 직관적 예지가 사물의 진상을 드러내는 데 유용한 것이라면, 경험 고집은 주체적 실천의 가장 믿음직한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몸소 겪었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확실함과 애착은 어떠한 경우에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는 저마다의 '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213면)

 

39.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자신의 오류를 스스로 깨닫도록 은밀히 도와주고 끈기 있게 기다려주는 유연함과 후덕함을 갖추는 일입니다. (217면)

 

40. 비극은 남의 것을 대신 체험할 수 없고 단지 자기 것밖에 체험할 수 없는 고독한 1인칭의 서술이라는 특질을 가지며 바로 이러한 특질이 그 극적 성격을 강화하는 한편 종내에는 새로운 '앎' -아름다움-을 마련해주는 것입니다. (233면)

 

41. 양쪽을 절충하여 '중간은 정당하다'는 논리 속에서 한동안 안주하다가 중간은 '가공의 자리'이며 방관이며, 기회주의이며, 다른 형태의 방황임을 소스라쳐 깨닫고 허둥지둥 그 자리를 떠나던 기억도 없지 않습니다. (237면)

 

42. 감성과 이성은 수레의 두 바퀴입니다. 크기가 같아야 하는 두 개의 바퀴입니다. (239면)

 

43. 인식의 입장피구속성(standortgebundenheit) (248면)

 

44. 불편부당이나 중립을 흔히 높은 덕목으로 치기도 하지만, 바깥 사회와 같은 복잡한 정치적 장치 속에서가 아니라 지극히 단순화된 징역 모델에서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싸울 때의 '중립'이란 실은 중립이 아니라 기회주의라는 더욱 교묘한 편당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255면)

 

45. 생사별리 등 갖가지 인간적 고초로 가득 찬 18년에 걸친 유형의 세월을 빛나는 창조의 공간으로 삼은 '비약'이 부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비약은 그 어감에서 느껴지는 화려함처럼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는 '곱셈의 논리'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262면)

 

46. 안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그것을 즐기는 것만 못하다 하여 '지'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호'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로 보는 데에 비하여 '낙'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생활화하고 있는 경지로 풀이되기도 합니다. (271면)

 

47. 이러한 역사 인식의 방법은 자주 지적되어 온 바와 같이 주관주의의 오류에 빠지기 쉽고 따라서 진실성이 유용성으로 흘러버릴 위험을 안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273면)

 

48. 그런데 징역살이에서 느끼는 불행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한 발 걸음이라는 외로운 보행입니다. 실천과 인식이라는 두 개의 다리 중에서 '실천의 다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 이처럼 실천, 인식, 재실천, 재인식의 과정을 반복하여 실천의 발전과 더불어 인식도 감성적 인식에서 이성적 인식으로 발전해갑니다. (277면)

 

49. 용기는 선택이며 선택은 골라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쪽을 버리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281면)

 

50. 관계를 맺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을 함께 공유한다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286면)

 

51. 생활 속에 실현된 것만큼의 사상만이 자기 것이며 그 나머지는 아무리 강론하고 공감하더라도 결코 자기 것이 아닙니다. (298면)

 

52.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 사고보다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은 바로 대상과 필자의 '관계'라 생각됩니다. 대상과 필자가 어떠한 관계로 연결되는가에 따라서 얼마만큼의 깊이 있는 인식이, 또 어떠한 측면이 파악되는가가 결정됩니다. 이를테면 대상을 바라보기만 하는 관계, 즉 구경하는 관계 그것은 한마디로 '관계 없음'입니다. 구경이란 말 대신 '관조'라는 좀더 움치있는 어휘로 대치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관조만으로 시작하고 관조만으로서 완결되는 인식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311면)

 

53. 이처럼 대상과 인식 주체가 구별, 격리되어 있는 경우에는 시종 양자의 차이점만이 발견되고 부각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상을 관찰하면 할수록 자기와는 점점 더 다른 무엇으로 나타나고, 가까이 접근하면 할수록 더욱더 멀어질 뿐입니다. 그리하여 종내에는 대상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자기 자신마저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312면)

 

54. 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마무는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겨울에 자란 부분일수록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훨씬 단단하다는 사실입니다. (315면)

 

55.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도의 열덩이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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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계이론과 커뮤니케이션 - 커뮤니케이션북스 596, 개정판
김성재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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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나 루만은 ‘체계합리성’만 강조한 나머지 현대 사회를 지나치게 생물학적으로(비관적으로) 관찰한다. 그 결과 사회 내부로 들어가 사회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는 이론 주체로서의 인간 부재로 인한 이론가의 휴머니즘 결핍은 루만적 체계이론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제로 상태의 사회 진화에서 출발한 체계이론은 수천년 간 전수되어 온 사회적, 도덕적 전통을 무시한 비역사적인 이론이라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서론 9면)




2. 루만은 현대 생물학의 대가들인 마투라나와 바렐라가 펼치는 관찰자(Beobachter) 입장의 인식론과 ‘아우토포이에시스’(Autopoiesis)의 논리를 받아들여 구성의 인식론을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킴과 동시에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사이에 놓여 있는 높은 벽을 허물어 버린다. (3면)




3. 마투라나와 바렐라가 발견한 사실은 인간의 가장 강렬하고 높은 욕구의 하나인 반박불가능성의 확실한 인지가 우리 눈의 ‘맹점’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보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보지 않는다.”라고 표현하는 자신에 대한 무지를 인간이 갖는 공통적 특성이자 가장 큰 ‘스캔들’의 하나로 본다. (3면)




4. 그가 관찰에 사용하는 차별의 기준, 곧 이론 틀이자 ‘맹점’은 체계/환경이다. (4면)




5. 다시 말하면 한 체계는 자신의 지속적인 유지를 위하여 우선 타인의 관찰과 무관한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Selbstreferenz)를 통해 다른 체계와 경계선을 설정해 그 안에서 폐쇄적인 작동을 전개하고, 이를 위해 외부 환경과 필요한 정보를 교환한다. 여기서 제1차 관찰자는 자신의 이원론적 차별기준에 맞춰 ‘이것’(예:체계)이라는 한 쪽 만을 지칭하고(‘이것’이 아닌 것은 이 경우 자동적으로 환경), 자신의 사용하는 이론 틀(자신이 낀 안경에 비유할 수 있음)을 보지 못한다. 이 관찰자는 자기관찰, 곧 반영의 회귀적 과정에서는 계속하여 이미 차별된 것(예:체계)에 또다시 같은 차별 기준(예:체계/환경)을 적용한다(re-entry). (4, 5면)




6. ‘차별’은 루만에게는 ‘구성’이다. (5면)




7. 이중 구조의 차별 도식을 이용한 제1차 관찰은 이 이론 틀의 맹점을 인정하고, ‘감각적 확신’을 바탕으로 하는 순진한(무비판적) 인식행위이다.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관찰자가 본 것과 그가 보지 못한 것”을 보는 제2차 관찰(Beobachtung der Beobachtung=Beobachtung zweiter Ordnung)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바로 이 제2차 관찰은 학문의 역사 이래 지금까지 끝나지 않은 인식의 객관성을 두고 벌여온 소모적 논쟁을 대체시킨다. (5면)




8. 현대사회의 특징은 루만에 의하면, 이 거절의 커무니케이션이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10년 전부터 서방세계에서 많이 논의되고 있는 신사회운동은 이러한 ‘부정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효과극대화의 전략을 보여준다. (8면)




9. 루만의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나타난 가장 주목할 사실은 커뮤니케이션이 ‘관을 통한 정보의 중계“라는 메타포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다. 종래의 많은 매스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이 범한 큰 오류 중의 하나인 이 ’정보 중계의 메타포‘는 정보와 전달의 차이, 전달자와 수신자의 상호작용이 가지는 복잡성을 무시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매번 일어나는 구조(관점)의 결합과 태도의 상호 협조를 전제로 한다. 또한 커뮤니케이션 현상은 무엇이 전달되느냐는 것보다 무엇이 수용자에게 일어나느냐는 것에 달려 있으며, 이것은 ‘중계된 정보’와는 별 관계가 없다. 매일 듣고 있는 ‘정보의 홍수’에 대한 수용자의 무관심은 이 사실을 입증한다. (8면)




10. 특정의 엘리트가 주제의 선택권을 가지고 이 주제 하에서 일어나는 커뮤니케이션을 좌우하는데, 매스커뮤니케이션은 그들만의 주의법칙인 여과장치를 통하여 대부분의 현재적 사건들을 무시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10면)




11. 정보는 현재적 선택으로서 하나의 주관적 ‘구성’이다. (11면)




12. 금세기 지성들의 가장 매혹적인 업적은 ‘관찰자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푀어스터는 관찰자 입장에서 마투라나 등과 일리노이 대학의 ‘생물학 컴퓨터 실험실’에서 제2차 사이버네틱 이론을 발전시켰다. 제2차 사이버네틱의 핵심은 관찰자의 관찰, 곧 관찰하는 체계(Observing System, 1981년 푀어스터의 저서 명)의 관찰이다. (23면)




13. 제2차의 관찰(관찰의 관찰)의 차원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사안이 항상 한 관찰자를 위한 사안이라는 것을 알아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관찰자는 보지 않는 것을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24면)




14. 단 한번으로 끝나는 관찰, 곧 관찰의 중지는 모순(Paradoxie)로 남는다. 여기서 모순이란 더 이상의 작동(Operation)을 위한 연계가능성의 상실을 의미한다(Luhmann, 1984, S. 59).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스펜서 브라운은 ‘재등장(re-entry)'이라는 구상을 시도한다. 한번 차별된 것(예;체계)에 다시 한번 차별 기준(예:체계/환경)이 회귀적(재귀적)으로 적용됨으로써 차후 활동을 위한 내부적 연계가능성이 회복된다는 것이다(Luhmann, Die Wissenschaft der Gesellschaft. S. 82-85). 이로써 관찰자 발견에 대한 세 번째 답변이 나온다. 푀어스터의 제2차 관찰, 마투라나의 아우토포이에시스 개념 그리고 스펜서 브라운의 차별이론은 구성주의의 세 기둥이 된다. (24면)




15. 마투라나와 그의 동료들이 색의 인지에 대한 연구(1959년)에서 확인한 사실은 외부 세계의 사건과 신경의 상태 사이에는 어떠한 안정된 상관관계도 창출될 수 없고, 신경체계들 내부에서만 안정된 상관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신경체계는 기능적으로 닫힌 체계이고, 살아 있는 체계는 물질적, 에너지적으로는 열려 있으며, 이들은 환경 및 다른 살아 있는 체계들과 상호작용을 한다. (25면)




16. 첫 번째 패러다임 전환으로서 전통적인(존재론적) 체계이론에서 통용되는 전체와 부분의(선도) 차별 기준을 체계와 환경의 차별 기준으로 대체한다. 이 패러다임 전환과 함께 대두된 중요한 문제는 자기관계적 체계이다. (26면)




17. 관찰된 것을 표시하는 이 차이 아니면 저 차이(예:체계 아니면 환경 혹은 선 아니면 악)의 선택은 결코 환경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고 체계의 고유한 구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26면)




18. 두 번째 패러다임 전환은 바로 자기관계적 체계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동일성과 차이(Identitaet und Differenz)의 차별 기준을 도입하는 것이다. 자기관계는 자신이 자신으로서 동일시되고 다른 것에 대해서는 차이가 나야만 현재적 활동에서 실현될 수 있다. (27면)




19. 체계는 환경에 대해 차이를 만들고 유지함으로써 자신을 구성하여 유지하고, 자신의 경계를 이 차이를 만들고 이 차이를 조절하기 위해 사용한다. (28면)




20. 이 선택의 강요는 ‘우연성(Kontingenz)', 곧 “다르게도 역시 가능하다.”를 뜻하고 동시에 모험을 의미한다(Luhmann, 1984, S. 47). 선택의 강요와 선택의 조건지움을 통해 유사한 단위들에서부터 다양한 체계 형성의 설명이 가능하다. 곧, 복합성의 축소와 이 축소의 선택적 조건 지우기를 통해 세계의 복잡성과 체계 형성의 복잡성이 발생한다. 이때 체계/환경의 차별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데, 그 이유는 모든 체계의 환경이 체계보다 더 복잡하기 때문이다. (28면)




21. 이 아우토포이에시스적 체계이론의 중요성은 비슷한 행위의 반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연계능력(Anschlussfaehigkeit)'에 있다. (30면)




22. 루만의 체계이론의 주축을 이루는 개념 중의 또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 다룬 자기관계적 아우토포이에시스 이외에 ‘시간’의 개념으로서 이는 복잡한 체계에 있어서 ‘선택의 강요’에 대한 원인이다(Luhmann, 1984, S. 70-83). 어떤 특정한 것이 일어나고 또 다른 것이 일어날 때 이것은 모두 시간 때문이다. (31면)




23. 예를 들면 인간은 종교와 보험에서처럼 현재에 해결할 수 없는 영생과 안정을 미래에 보장받으려는 시도를 함으로써, 곧 미래의 시간을 현재로 앞당겨 사안을 복잡하게 만든다. (32면)




24. 의미의 진행과정은 한 의도의 대상뿐만이 아니라 의미를 구성하는 현재성과 가능성의 차이를 항상 새로운 형태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의미는 “가능성들의 지속적인 현재화”이다(Luhmann, 1984. S. 100) 이때 현재화는 거기서 연계될 수 있는 가능성들의 잠재화를 낳는다. 의미는 따라서 현재화와 잠재화의 한 단위이다. (32면)




25. 루만은 이 의미를 다시 세 가지 차원으로 분해한다(Luhmann, 1984, S. 112-135). 사물, 시간 그리고 사회 차원이 그것이다. (32면)




26. 커뮤니케이션은 ‘이중의 우연성(doppelte Kontingenz)', 곧 두 개의 암흑상자(black boxes)에 비유될 수 있는 사회적 행위의 양 당사자가 자기관계적 결정 때문에 가지고 있는 불투명한 태도 위에서만 가능하다. 이 개념의 창시자인 파슨스는 “어떻게 사회적 질서가 가능한가?”란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이 이중의 우연성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결국은 ’4 기능도식‘과 관련된 규범적 정향(일반적으로 수긍되어 있다고 보는 기대감)을 통한 합의 형성을 불가피하게 본다. 그러나 루만에게는 이 문제가 사회적 체계 형성의 기본조건이며, 스스로 해결된다. (33, 34면)




27.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중의 우연성의 문제가 자기접촉반응(체계 형성)의 촉매(Katalysator)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34면)




28. 우리가 ‘의미’의 개념에서부터 출발할 때 커뮤니케이션은 항상 선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곧, 커뮤니케이션은 스스로 구성한 현재적 지시지평으로부터 어떤 것을 끄집어내고 다른 것은 제쳐둔다. (36면)




29. 이 중 돈과 권력은 사회의 합리화 과정에서 합의의 매체로서 없어서는 안될 언어를 대체하여 목적합리적 행위를 조종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동일한 상징 매체가 루만의 커뮤니케이션 이론으로 도입되면서 그 적용 범위가 확대되고, 돈과 권력뿐만이 아니라 진리, 사랑, 종교적 믿음, 예술, 문명적으로 표준화된 ‘기본가치’ 등이 이 매체에 속하게 되고, 그 중심 역할이 커뮤니케이션의 선택을 조건 지움과 동시에 동기유발 수단이 됨으로써, 성공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오늘날 바로 이러한 매체를 통해 이루어진다(Luhmann, 1984, S. 222).




30. 원인귀속행위(Attributionsvorgang)를 기준으로 하여 위험과 위해의 개념차이를 밝힌다. 어떤 피해가 자기원인귀속(Selbstzurechnung)일 경우에는 위험(본문에서는 ‘모험’)이고, 타자원인귀속(Fremdzurechnung)일 경우에는 위해(본문에서는 ‘위험’)이다. (44면)




31. 이러한 분석의 차원에서 볼 때 지식의 증대와 테크놀로지 발달을 통한 결정가능성의 확대는 문제들을 위해영역(본문에서는 ‘위험영역’)에서 위험영역(본문에서는 ‘모험영역’)으로 전가시킨다. 이로써 생기는 문제 해결의 출발점은 사회적 규범화이다. 위험을 예상한 모험영역에서의 합리성(이성적 행위) 요구가 그것이다. (44면)




32. 사회는 자신의 환경과(mit/with) 커뮤니케이션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보처리 능력에 따라 단지 환경에 대해(ueber/about) 커뮤니케이션을 수행할 뿐이다. (51면)




33. 복잡성은 선택의 강요이며, 선택의 강요는 우연성이요, 우연성은 위험(본문에서는 ‘모험’)이다(Luhmann, 1984, S. 47) (59면)




34. 모든 발언은 다른 가능성으로부터의 선택을 실현시키며, 다음 발언의 선택을 제공하는 새로운 연계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이렇게 커뮤니케이션 사건은 우연성을 감소시킴과 동시에 다음에 나타날 커뮤니케이션의 진행을 재생산한다. (70면)




35. 이해는 커뮤니케이션이 중단될 필요 없이 다양한 가치에서부터 시작해 완전한 오해까지 수용할 수 있는 변수로서 파악한다. (73면)




36. 커뮤니케이션의 구조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은 더 이상 과거 역사에 침전물이나, 문화적으로 전수된 가치나 가치의 내면화와 같은 사회화 과정에 소급해서 찾을 수 없다(Luhmnan, 1984, S. 150). 그 답은 이제 커뮤니케이션 내부 시각으로부터 발전되어야 한다. 주어진 질서의 보장에 근거하지 않고 커뮤니케이션은 그 구조를 진행 과정에서 함께 창조해야 한다. 곧 그 구조는 스스로 획득된다. (7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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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음에서 함으로 - 베른하르트 푀크르젠과의 대담, 인지생물학의 거장 움베르또 마뚜라나가 선언하는 인지 패러다임의 새로운 전환, 다알로고스총서 3
베른하르트 푀르크젠 외 지음, 서창현 옮김 / 갈무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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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있음에서 함으로의, 대상의 본질에서 그것의 생산과정으로의 재정향(re-orientation)... (푀르크젠, 11면)




2. 그를 매혹시킨 것은, 그리고 그가 탐구하고자 한 것은 무엇보다도, 현실을 산출하는, 즉 현실을 앞으로 내어 놓는 바로 그 조건들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며, 단순하게 주어지는 것도 없다. 모든 것은 그것의 특별한 기원과 발전에 준거할 수 있고, 또 그것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푀르크젠, 11면)




3. 우리는 우리가 어떤 실수를 저지를 때에는 우리가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알지 못한다. 실수는 현재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실수는 나중에 일어난다. (16면)




4. 실수는 잘못이 아니다. 실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량의 실패도 아니다. 실수는 우리의 한계를 보여주지 않는다. 실수는 우리의 ‘함들’의 과정에 대한 성찰로서 발생한다. (16면)




5. 나는 내가 구분했던 모든 것을 발생시킨 과정들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고, 사물들이 어떠한가(본질)를 묻는 대신에 그것들을 발생시킨 과정들에 대해 묻기 시작했으며, 내가 타당하다고 간주했던 대답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사용했던 기준들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 책은 물음의 변화에 대한 역사이다. 즉,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어떤 것이란 내가 그것을 무엇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나는 어떤 기준을 사용하는가?’라는 물음으로 이행하는 역사이다. (19면)




6. 나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전환 속에서, 관찰자가 또 다른 초월적 실체들을 설명 및 추론을 위한 도구들로 사용하는 하나의 초월적 실체로서 홀로 존재한다는 것을 선험적으로 받아들였던 형이상학적 태도를 버리고 있었으며, 관찰자란 일상적인 삶 속에서의 자기 자신의 ‘함들’의 영역을 자기 자신의 모든 성찰을 위한 출발점으로 이용하면서 자기 자신의 구분의 계기에서 존재하게 된다는 형이상학적 태도를 채택하고 있었다. (29면)




7. 말해질 수 있는 모든 것은 누군가에 의해 말해지는 것이다. (39면)




8. 말해지는 것은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그것을 말하고 있는 사람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관찰자와 독립적인’ 실재와 관련해서, 그 것이 존재한다는, 게다가 명백하게 주어진 것으로 간주된다는 주장을 타당한 것으로 만들어 줄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 누구도 외부의 실재 또는 진리에 접근할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39, 40면)




9. 자신의 주장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의 근본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믿기와 알기를 혼동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정말 인간으로서 가질 수 없는 능력들을 갖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40면)




10. 이 외부 실재가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바로 이 주장이 그 자체로 근본적으로 불합리하고 무의미한 관념임이 곧바로 드러날 것입니다. 이 주장은 어떤 식으로건 타당한 것으로 될 수 없습니다. 물론 그와 같은 절대적 실재를 인식하는(know)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여전히 그것의 존재를 주장하는 철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관찰자와 독립적인’ 준거점의 확실성을 정말이지 포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철학적 배경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41면)




11. 하지만 내가 ‘말해지는 모든 것은 관찰자에 의해 말해지는 것이다’라고 주장할 때, 나는 또 다른 핵심적인 질문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실재, 진리, 그리고 존재의 본질에 대한 전통적인 철학적 담론체계를 변화시킵니다. 이 질문은 주어지는 것으로 간주되는, 그리고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외부 실재의 연구와는 더 이상 관계가 없습니다. 나는 관찰자로 작동함으로써 관찰자의 작동들을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언어 속에 살아감으로써 언어를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말함으로써 말하기를 보다 정밀하게 서술하고 싶었습니다. 요컨대, 우리 자신의 바깥에서부터 설명하고자 하는 것에 우리가 접근할 길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41, 42면)




12. 나는 관찰자를 내 사고의 출발점으로서 이용합니다. 어떠한 존재론적 전제도 두지 않은 채 말입니다. (42면)




13. 관찰자는 자신이 ‘하는’ 것을 ‘합니다.’ 그에게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신념의 문제이지 확실한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그것을 보는 사람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42, 43면)




14. 오직 신만이 그것을 할 수 있겠죠. 신은 관찰하지 않고도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43면)




15. 관찰자는 모든 것의 원천입니다. 관찰자가 없으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관찰자는 모든 지식의 기초입니다. (43면)




16. 관찰자와 관찰하기의 작동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나는 하나의 연구 주제를 도입하고, 동시에 그것을 다루는 방식을 특징지우려 합니다. (44면)




17. 언어는 감옥이 아닙니다. 언어는 하나의 존재 형식이며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이자 방법입니다. (45면)




18. 심지어 우리는 마치 우리가 우리 자신과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외부의 관점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관찰할 수 있는 거처럼,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합니다. (46면)




19. 오직 구분하는 것만이 존재합니다. (48면)




20. 나는 종종 내 자신을 - 진지하게, 그러나 장난스럽게 - “슈퍼 실재론자”라고 부릅니다. 무수한 동등하게 타당한 실재들의 존재를 믿는 ‘슈퍼 실재론자’라고 말입니다. (53면)




21. 그렇지만 어떤 사람의 진정한 지혜는 영속적인 자기고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찰의 역량에, (특정한 상황들을 정확하게 지각해 내는 것을 방해하는) 이러저러한 신념들을 rlRJ이 버릴 수 있는 자발성(willingness)에 있다는 것이 내 견해입니다. (54면)




22. 내가 볼 때 ‘관찰하기’란, 자기가 무언가를 관찰하는 데 관련되어 있다는 자각과 함께 언어를 필요로 하는 인간적 작동입니다. (55면)




23. 우리들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우리는 관찰자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55면)




24. “객관성이란, 관찰하기가 주체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주체의 망상이다. 객관성에 호소하는 것은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인기가 있는 것이다.” (하인쯔 폰 푀르스테르, 56면)




25. 순환적인 사고가 내 정신의 건전함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이해를 증대시켰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59, 60면)




26. 내가 설명하고 싶은 것은 작동들입니다. (61면)




27. 우정, 상호존중, 그리고 협력이 나타납니다.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합니다. 일원 우주(universe)는 다원 우주(multiverse)로 바뀝니다. 이 다원 우주 안에서는 무수한 실재들이 타당성의 다양한 기준에 준거해 타당합니다. (64면)




28. 모든 존재(Being)는 관찰자들의 ‘함’을 통해서 구성된다는 존재론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설명의 길을 따른다면, 우리는 우리가 결코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고 무수한 가능한 실재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한 실재들 가각은 완전히 정당하며 타당합니다. (65면)




29. 그들(나머지 10억 사람들)은 ‘어쩌면’ 괄호 친 타당성의 길을 따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찰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들은 차이들을 존중할 것이고, 자신들이 진리의 유일한 소유자라고 주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를 즐길 것입니다. 그들은 더불어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차이나는 문화들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68면)




30. 확실성들이, 그리고 절대적 진리에 대한 믿음이 필연적으로 다른 방식의 사고를 억압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말인가요? ... 때때로 나는, 우리가 자신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믿음이 ‘제국주의로의 초대’로 이해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71면)




31. ‘무엇이 사실인지를 모두 알고 있다. 올바른 대답, 올바른 삶의 방식, 참된 신에 대해 모두가 알고 있다.’ 이러한 태도가 가져올 수 있는 결과는,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사람들이 느낀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고, 위대한 이념을 얻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고 있는 이러한 태도는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해주고, 그들을 저속한 범죄자들로부터 구별시켜 줍니다. (72면)




32. 우리는 귀담아 듣지 않고 그들을 공격합니다. (72면)




33.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선택의 필연성에 직면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 것인지를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며, 가능성들의 무한성을 한계지어야 한다.’ 이것은 실재론자들의 경우에는 쉽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결정할지 명령하는 것이 객관적인 필연성들이라고 간단히 주장할 테이니까요. (73면)




34. 내가 볼 때 관용에 호소하는 것은 매우 불쾌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괄호 없는 객관성의 길로 편향된 표현입니다. 관용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정당한 것으로 되어야 한다고 이미 결정해버린) 다른 사람들에 대한 거부와 폄하를 잠깐 동안 연기하고 유예하자고 제안하는 것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그저 관용하는 사람들은 당분간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만, 언제나 자신들의 등 뒤에 칼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74, 75면)




35. 하지만 괄호 친 객관성의 길을 따르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세계관을 경의를 가지고 대하게 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릴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그들의 실재들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근본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75면)




36.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행위들을 위한 지반들을 제공하기 위해 어떤 초월적 실재나 진리에 호소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책임을 충분히 자각하면서 행동합니다. (75면)




37. 소위 윤리적 법률과 규범들 조차도 성찰의 가능성을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개인적으로 책임 있는 행동의 토대들을 제거하고 복종을 요구합니다. 더 면밀히 살펴보면, 그것들은 폭정(tyranny)을 위한 또 하나의 표현에 불과합니다. (78, 79면)




38. 미적인 유혹과 관련해서 나에게 남겨진 유일한 일은 거저, 완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나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말하고 있는 것과 내가 하고 있는 것 사이의 불일치(discrepancy)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82면)




39. 외부세계는 신경체계 그 자체의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바의 유기체의 신경체계 안에 이러한 변화들을 유발할 수 있을 뿐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외부 세계가 자기 자신을 근본적이고, 참된 형태로 신경체계에 전달할 수 있는 가능한 길이란 원칙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97면)




40. 이 체계 안의 어떠한 변화도 단지 유발될 뿐이지, 전적으로 외부 세계의 특질들이나 성질들에 의해 결정되거나 확정되지 않습니다. (98면)




41. 신경체계는 폐쇄적인 체계로서 작동합니다. (99면)




42. 오직 관찰자들만이 내부와 외부, 또는 투입과 산출을 구분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내적 과정들 및 유기체에 가해지는 외적 자극의 충격, 또는 역으로 외부 세계에 가하는 유기체의 충격을 규명할 수 있습니다. (99면)




43. 결정적인 것은 오직 관찰자만이 한계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02면)




44. 폐쇄(성)는 물리적 개념이 아닙니다. 단지 내적 동학의 자기준거적 작용을 특징지울 뿐입니다. (105면)




45. 인지는 관찰자들에 의해 이해되고 확립됩니다. 지식은 객관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관찰자에 의존하는’ 생산물로서 나타납니다. (106면)




46. ‘살아 있는 존재에게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그것의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외적 작용체의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논평하는 관찰자의 시각에서, 살아 있는 존재가 속해 있는 섭동들(perturbations)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113면)




47. 선생님의 이런 개념화는 정체성(동일성)과 변화, 안정성과 변형에 대한 고전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군요.... ‘어떤 것이 어떻게 변화를 겪으면서도 여전히 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48. 선택을 한다는 것은 (동시에 나타나는) 최소한 두 개의 다른 상황들을 관찰 및 비교하고, 그런 뒤에 (이러한 상황들 사이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자기의 전망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전제합니다. (123면)




49. ‘폐쇄적이고, 구조적으로 결정된 체계들인 우리가 조화로운 방식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138면)




50. 타자준거적 체계들의 본질적인 특징은 그것들이 자기들 외부의 목적을 위해 기능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52면)




51. 오토포이에시스(autopoiesis). 그것은 자기생산을 의미합니다. 그리스 단어인 autos(자기)와 poiein(생산하다, 창조하다)으로 이루어져 있죠. 나는 생명체계를 본질적으로 특징짓는 것에 대한 나의 생각을 하나의 개념으로 성공적으로 집약시켰습니다. (155면)




52. 나는 니클라스 루만에게 말했습니다. “나를 독일에서 유명하게 만들어줘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내 생각들을 그런 식으로 활용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의 사회현상들의 특징들에 대한 문제에서부터 출발하기를 제안하는 바입니다. 사회라는 개념은 역사적으로 볼 때 생명체계들의 자기생산이라는 생각보다 선행합니다. 사회는 논쟁의 제1차적인 주제였습니다. 자기생산과 사회체계들은 훨씬 나중에 나타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를 분석하는 데에서 나타난 모든 연관된 현상들을 먼저 다루고, 오직 그 다음에 그것들이 자기생산 개념에 의해 보다 자세하게 밝혀질 수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170, 171면)




53. 문제는 단순합니다. 니클라스 루만이 자기생산 개념을 사회현상들을 설명하는 원리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술되어야 할 과정들도 사회현상들도 밝히지 못하고 그것들을 모호하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171면)




54. 그(니클라스 루만)는 현상들이 유사하다고, 상황들이 비교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옮지 않습니다. (171면)




55. ‘관찰자와 관찰대상, 아는 자와 아는 대상은 분리할 수 없는 통일체(단일체)를 형성한다.’ (227면)




56. 나는 성찰의 자유를 제약하지 않는 독립적인 생활방식을 더 좋아합니다. 경쟁할 필요가 없다면 자신만의 특별한 재능에 의지할 수 있고, 자기 고유의 기준에 따라 그리고 자기 자신의 책임을 기초로 하여 행동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논문을 더 많이 출간했는지, 승진을 했는지, 고위직을 획득했는지, 더 많은 실험들을 수행했는지에 대해 더 이상 의존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사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의 기대에 맞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경쟁에 참여한다면 스스로를 다른 사람의 작업 기준에 자신을 복종시키고 그것들을 자신을 위한 적절한 표준 자질들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245면)




57. 아웃사이더들은 자신들의 삶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특별한 원리들에 의존하라는 어떠한 압력도 받지 않고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이데올로기에도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며, 성찰할 수 있는 모든 기회들을 자유롭게 향유합니다. 아웃사이더들은 편견 없이 참여하고, 그래서 자기 앞에 나타나는 것을 지각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인사이더들을 뛰어넘는 이점을 그들에게 제공합니다. (252, 253면)




58. 왜냐하면 어느 날 한 친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네가 사람들을 확신시키려 애쓰면 애쓸수록, 너는 점점 더 믿을 수 없게 되는 거야.’ 나는 그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259면)




59. 철학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것’의 토대들에 대해 성찰한다는 것을 뜻한다는 게 내 주장입니다. (304면)




60. 나는 내 고찰들이 이해하기에 특별히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받아들이기에 특별히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말하자면, 이해가능성의 문제는, 내 견해로는, 실제로 수용가능성의 문제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사람들은 자기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과 듣거나 읽고 싶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309면)




61. 존재의 근본적인 조건은 신뢰입니다. (321면)




62.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특징들은 자신과 서로를 존중하면서 공존의 기획과 형태 위에서 더불어 살아가고 더불어 작업하는 인간들 -시민들-을 포함합니다. (325면)




63. 선생님은 - 합리적인 논증들이 아니라 - 감정들을 본질적으로 결정적인 힘들(forces)ㅇ로 간주하는 것 같은데요. ... 감정들이 우리를 인도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를 ‘모든 것을 감싸는’ 방식으로 변호시키는 사람들은 좀더 면밀한 고찰을 통해, 그들이 사실상 자신들의 기저에 존재하는 감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는 점을 인식합니다. (332면)




64. 내게 인간들은 감정들을 부정하거나 정당화할 목적으로 자기의 마음과 합리성을 이용하는 감정적 동물입니다. (332면)




65. 생물학은 우리에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334면)




66. 역으로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식으로 행동한다면, 이번에는 당신이 그들로부터 존중을 받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어린이를 신뢰한다면, 그 아이가 이번에는 당신을 신뢰할 것입니다. (33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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