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
조국 지음 / 박영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1. 현재 학계에서 합의되고 있는 것은 첫째, 위법수집증거를 유죄인정에 사용하는 것은 적정절차의 보장이라는 헌법상의 요구에 반한다는 점, 둘째 위법수집증거를 배제하지 않고서는 적정절차의 요청에 반하는 수사기관의 불법한 수사를 억지할 수 없다는 점이다. 전자가 ‘피의자, 피고인의 인권침해에 대한 구제라는 회고적 이유’라면, 후자는 ‘장래의 위법수사의 억제, 즉 적정절차에 기한 수사의 확보라는 전망적 이유’이다. 요컨대 위법하게 수집된 자백 및 증거물의 증거능력을 배제함으로써 형사절차에서의 적정절차를 보장하고 ‘사법의 엄결성’(judicial integrity)과 ‘절차의 공정성’(fairness of the proceeding)을 지키고, 수사기관의 위법수사에 대한 유혹을 애초에 차단, 억지하려는 것이 이 법칙의 근거이자 목적이다. (7, 8면)




2. 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의 규범적 근거인 적정절차의 이념... (8면)




3. 적정절차의 이념은 헌법의 직접적 요청이고 처벌위주의 실체적 진실주의는 적정절차의 보장이라는 기본적 이념 아래서 추구되어야 할 소송법에 내재하는 하위목적의 하나로 보아야 한다. 실체적 진실이란 객관적으로 소송세계 밖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적정절차를 철저히 실현해 나가면서 발견되는 소송세계의 창조물이다. 따라서 실체적 진실주의는 이념적으로 적정절차에 의해 제약받으면서 후자의 범위 내에서 추구되어야 한다. (차용석) (8면)




4. 진실은 ... 현명하지 못하게 선호되고 너무 강하게 추구될 수 있으며, 그리하여 너무 많은 대가를 치를 수 있다. (1978년 호주 고등법원 Bunning v. Cross 판결) (9면)




5. 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의 사실적 근거인 위법수사의 억지... (10면)




6. 신동운 교수의 지적처럼, “우리 나라의 형사절차에서의 위법수사관행은 수사기관 내부의 자체통제나 여론의 질책뿐만 아니라 제3의 국가기관인 법원까지도 개입하여 척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단계에 와 있다”는 것이다. 만약 수사기관이 위법하게 수집한 자백과 증거물에 대하여 법원이 그 증거로서의 가치에만 비중을 두어 증거채택 여부를 판단하게 되면, 법원은 위법행위를 묵인하겠다는 신호를 수사기관에게 보내는 셈이며, 이는 법원을 위법수사의 ‘공범’으로 만드는 것이다. (10면)




7. “우리가 우리의 문제점을 수출할 수 없는 것처럼, 해결책을 수입할 수도 없다.” (필립 존슨 교수) (20면)




8. 미국 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의 특징은 자동적, 의무적 증거배제에 있다. (21면)




9. ‘비합리적 수색과 압수’를 통제하기 위한 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 - 1961년 Mapp v. Ohio 판결 (22면)




10. 맵판결은 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의 규범적 근거와 사실적 근거를 제출한다. 즉, 사법의 엄결성(judicial integrity)의 유지와 향후 위법한 경찰행위의 억지(deterence)이다. (24면)




11. 수정헌법 제14조에 기초한 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 - ‘임의성 기준’ ... 궁극적 기준은 2백여 년 동안 영미의 법원에서 유일하게 명백히 확립된 심사기준이다. 즉 ‘임의성 기준’이다. 자백이 자백자의 본질적으로 자유롭고 강요되지 않은 선택의 산물인가라는 기준이다. (25면)




12. 1964년 Massiah v. United States 판결은 상술한 임의성 기준의 퇴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 연방대법원의 6대 3의 다수의견은 변호인과의 접견교통권은 기소후 재판 이전(post-indictment pre-trial) 단계에도 적용되며 ... (28면)




13. 메사이아 판결 5주 후 Escobedo v. Illinois 판결에서 연방대법원은, 변호인과의 접견교통권을 기소 이전(pre-indictment) 단계까지 확장 적용한다. ...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체계라면, 피고인이 변호인을 접견하여 자신의 권리를 자각하고 또한 행사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헌법적 권리의 행사가 법집행체계의 효율성을 방해한다고 하여, 그 체제에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29면)




14. 수정헌법 제5조에 기초한 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 - 1966년 Miranda v. Arizona 판결 (30면)




15. 먼저 법원은 수사기관에게 이하의 네 가지 사항을 피의자신문에 앞서 고지할 의무를 부과한다. (i) 형사피의자, 피고인은 묵비권을 보유한다, (ii) 어떠한 진술도 형사피의자, 피고인에게 반하여 사용될 수 있다, (iii) 형사피의자, 피고인은 수사기관의 신문시 변호인참여권을 보유한다, (iv) 형사피의자, 피고인이 경제적 빈곤 때문에 변호인을 선임할 수 없을 경우에 무료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31면)




16. 포기를 입증하는 중한 책임(heavy burden)은 소추측에 있음을 또한 분명히 하였다. (32면)




17. 생각건대 미국의 자동적, 의무적 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은 개인의 권리를 소수자 집단이 쥐고 쓸 수 있는 ‘정치적 으뜸패’(political trump)로 파악하고, 권리를 공리주의적 산술로 제약하지 않고 드워킨류의 ‘강한 의미’(in a strong sense)로 옹호하는 권리중심 법학(right-based jurisprudence)의 산물이다. ... 권리의 존중은 일정한 희생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며 권리는 그 본성상 효용과 비교형량되는 것이 아니기에, 개인의 권리는 “그 개인의 행동에 대해 다수자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할 경우에도, 그리고 그 행동에 의해 다수자의 형편이 더욱 나빠진다 할지라도” 이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34면)




18. 카르도조 대법관의 통렬한 야유는 유명하다. “경찰관이 실수했다는 이유로 범죄인은 풀려나게 된다. 방을 불법적으로 수색되고, 피살자의 사체는 발견된다. .. 프라이버시는 침해되었고, 살인자는 풀려난다.” (36면)




19. 먼저 미란다 법칙 반대론은 미란다 법칙에 의해서 자백률이 저하되며, 미란다 법칙을 위반한 자백의 증거배제는 다수의 범죄인의 석방이라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분개한다. (44면)




20. 미란다 법칙 반대론은 미란다 판결의 파기, 임의성 기준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면서, 대신 경찰신문과정의 녹화 또는 녹취를 대안으로 제안한다. (47면)




21. 이제 위법수집증거배제는 ‘근본적인 원칙의 채택’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적 유용성에 대한 도구적 계산’으로서의 의미를 더욱 강하게 갖게 된 것이다. (49면)




22. 먼저 버거/렌퀴스트 대법원은 미란다 법칙이 적용되는 상황인 ‘신체구속 하에서의 신문’(custodial interrogation)을 좁게 해석함으로써 미란다 법칙의 영향력을 줄이려 하였다. (53면)




23. 이러한 개괄적 예외가 미란다 법칙의 ‘선명한 방침’(bright line)을 흐리게 만드는 것임은 다수의견도 시인하였던 바인데, 이 예외의 창출은 향후 경찰관이 ‘공공의 안전’을 이유로 미란다 고지를 회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었다. (55면)




24. 허위배재설(신빙성에 기초한 임의성 판단)은 일정한 자백을 증명의 자료로 사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법률적 자격의 문제인 ‘증거능력’(Beweisfaehigkeit)과, 그 자백의 실질적 가치 또는 신빙력의 정도를 말하는 ‘증명력'(Beweiskraft)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 논리에 따르면 피의자, 피고인에 대한 수사기관의 불법행위에 대한 통제는 거의 불가능해지고 자백배제법칙의 적용범위는 현격히 축소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171, 172면)




25. 허위배제설과 단절을 분명히 한 점에서 인권옹호설은 큰 의미를 가지며, 또한 헌법과 형사소송법의 문헌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장점을 갖지만, 이 견해는 여러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첫째로, 자백배제법칙의 근거를 진술거부권의 침해에서만 구함으로써 그 이외의 사유로 자백의 증거능력을 제한해야 할 경우에 대해서는 무방비의 상태가 된다. ... 둘째, 이 견해는 피고인의 주관적 자기결정권 침해 여부에 따라 자백배제 여부를 판단하므로 그러한 사실인정 판단이 용이하지 않고, 증거능력 판단기준의 주관화, 내면화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 (175면)




26. 위법배제설- ‘임의성 기준’으로부터의 탈피와 일체의 위법사유의 포괄 ... 위법한 수사활동으로 획득된 자백은 그 신빙성과 임의성에 대한 판단을 할 것 없이 ‘임의성이 의심스러운 자백’으로 증거능력을 배제하게 된다. (178면)




27. 대법원은 자백의 임의성 판단을 “구체적인 사건에 따라 제반사정을 참작하여 자유로운 심증으로 피고인이 그 진술을 임의로 한 것인지의 여부를 판단”하고 있으며, 이는 제2편 제1장에서 본, ‘상황의 총체성’(totality of the circumstances)을 고려하여 임의성 여부를 판단하는 미국 임의성 기준의 계수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의 총체성’ 기준이 자백배제법칙을 해석하는 기준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형사소송법 제309조는 임의성이 없는 자백의 배제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종의 위법한 수사로 인하여 ‘임의로 진술한 것이 아니라고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는 때 자백의 배제를 요구하고 있다. 즉, 형사소송법은 “위법, 부당한 수사방법의 존부에 대한 의심의 정도는 확신의 정도가 아니라 합리적인 의심의 정도만 있어도 당연히 임의성 없는 자백이라고 판단케 한다는 점에서 매우 엄격한 자백배제법칙을 천명하고 있다.” 헌법 제12조 제7항은 고문 등 위법수사방법에 의하여 “자의로 진술된 것이 아니라고 인정될 때” 그 자백의 증거능력을 배제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형사소송법은 이보다 배제사유를 확장시킨 것이다. (186면)




28. 먼저 1983년의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 판결에서 대법원은 진술의 임의성을 잃게 하는 사정은 ‘특히 이례적인 것’으로 보고, 자백의 임의성은 일단 추정된다는 입장을 제시하였다. ... 피고인은 임의성에 대한 이의제기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자백의 임의성을 의심스럽게 하는 구체적 사실을 들어 임의성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에 의하여 자백의 임의성에 합리적이고 상당한 정도의 의심이 있을 때 비로소 검사에게 그에 대한 거증책임이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임의성 추정론’은 거증책임이 검사에게 있다는 입장을 약화시킬 위험성이 농후하다. 이재상 교수의 지적처럼, “임의성에 의심이 있는 경우 증거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임의성에 의심이 있을 때에 비로소 검사에게 거증책임이 있다는 것은 임의성의 거증책임이 검사에게 있다는 것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판례의 ‘임의성 추정론’은 미란다 판결의 기초, 즉 인신구속하의 신문은 ‘본래적으로 강제적인 압력’을 내포하고 있다는 ‘강제에 대한 확정적 추정’과 정반대의 입장이다. (187, 188면)




29. 1990년대 말 이후 대법원은 자신의 ‘임의성 추정론’을 공식적으로 폐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입장의 판결을 내놓은 바 있다. “... 그 임의성에 다툼이 있는 때에는 그 임의성을 의심할 만한 합리적이고, 구체적인 사실을 피고인이 입증할 것이 아니고 검사가 그 임의성의 의문점을 해소하는 입증을 하여야 한다.” 저자는 이러한 변화에 적극 찬동한다. 그렇지만 판례의 ‘임의성 추정론’은 공식적으로 폐기되어 자백의 임의성에 대한 거증책임은 검사에게 있음이 분명히 확인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백의 임의성에 대하여 의심을 갖게 하는 사유, 즉 위법사유의 존재의 증명이 불명확한 경우에는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의 원칙에 따라 자백의 증거능력은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188, 189면)




30. 한편 자백의 임의성은 소송법적 사실에 불과하므로 자유로운 증명으로 족하다는 것이 다수설과 판례의 입장이다. 그러나 소송법적 사실과 실체법적 사실을 구별하여 자백의 임의성은 전자에 속하므로 자유로운 증명으로 족하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너무 형식적인 논리라고 생각한다. 임의성의 기초가 되는 사실은 순수한 소송법적 사실과 질적인 차이가 있으며, 유무죄 인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자백사용 여부를 결정하는 역할을 하므로 엄격한 증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189, 190면)




31. 특히 최근(2002년) 대법원은, 불법한 긴급체포에 따른 불법구금 상태에서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의 진술기재는 위법수집증거로서 그 진술에 임의성이 인정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증거능력이 부정되어야 함을 명시적으로 선언하였던바, 각별한 주목을 요한다. (213면)




32. 권위주의 체제 종료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신문과정에서의 고문, 폭행, 협박의 사용은 많은 비판을 받고 그 사용빈도가 줄어들었다고 보이나, 기망의 경우는 비판의 화살에서 빗겨나가 있었던 결과 현재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고 보인다. (215면)




33. 요컨대 피의자의 헌법적 권리와 방어권을 침해하고 판단능력을 훼손하는 수사기관의 기망이 있었던 경우 - 그 ‘상황의 총체성’을 고려할 여지 없이 - 기망이 있었다는 그 자체만으로 자백의 임의성을 의심할 만한 경우이므로 자백의 증거능력은 의무적으로 배제되어야 한다. (220면)




34.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는 무죄추정이 되는 형사피의자, 피고인이 자신의 인권보장과 방어준비를 하기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핵심적 권리로서, 이 권리의 보장 없이 ‘무기평등의 원칙’은 원천적으로 실현불가능하다. (222, 223면)




35. 전체 형사절차 중 수사단계에서의 변호인의 역할은 공판절차에서보다 더 중요하다. (224면)




36. 변호인과의 자유로운 접견은 신체구속을 당한 사람에게 보장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어서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공공복리 등 어떠한 명분으로도 제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헌법재판소 1992. 1. 28. 선고 91헌마111 결정) (224면)




37. 과거 대법원은 변호인과의 접견교통권을 침해하고 획득한 자백의 증거능력을 인정한 바 있으나, 민주화 이후 입장을 변경하였다. 예컨대, 1990년의 일련의 대법원 판결, 즉 세칭 ‘국회의원 서경원 입북 사건 판결’, ‘화가 홍성담 사건 판결’, ‘임수경씨 입북 사건 판결’은 변호인의 접견교통권을 침해하고 획득한 자백이 기록된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부정함으로써 한국판 ‘매사이아 법칙’을 수립해 놓았다. (227면)




38. 비정형적 자백배제사유: 변호인과의 접견교통권 침해, 진술거부권 침해, 약속 (221면 이하)




39. 특히 ‘임의성 없는 자백’이 아니라 ‘임의성이 의심스러운 자백’의 증거능력을 배제할 것을 요구하는 형사소송법 제309조의 실천적 의미는 각별히 강조되어야 한다. (262면)




40. 통신제한조치는 대물적 강제처분보다 프라이버시의 침해의 양과 질이 훨씬 중대, 심각할 수밖에 없으므로 통신제한조치의 신청과 허가는 보다 엄격한 기준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먼저 통신비밀보호법은 범죄를 “계획 또는 실행하고 있거나 실행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제5조 제1항)가 있는 경우에 통신제한조치가 가능하다고 규정하여 ‘충분한 이유’라는 요건을 제시하고 있다. 이 요건은 대인적 강제처분을 위한 영장발부의 요건인 ‘상당한 이유’(형사소송법 제200조의 2-201조)와 대물적 강제처분을 위한 영장발부의 요건인 ‘범죄수사의 필요성’(형사소송법 제215-216조) 사이의 중간적 혐의 정도를 나타내고 있다. (286면)




41. 효용 중심의 법학(utility-based jurisprudence)과 권리 중심의 법학(right-based jurisprudence) 간의 대립은 현대 영미법학 방법론에 있어서 항상적, 근본적 쟁점사안이다. 또한 이는 형사절차에 내재하는 가치체계의 길항문제와는 직,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안인데, 전자가 범죄통제를 중시하는 보수적 ‘법과 질서’(law and order) 진영에 철학적 근거를 제공해왔다면, 후자는 적정 절차를 강조하는 자유, 진보파 진영에 이론적 무기를 공급해 왔다고 거칠게나마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494면)




42. 드워킨은 존 롤즈와 함께 정의와 평등의 정치적, 도덕적 가치를 강조하는 ‘발본적 자유주의’(radical liberalism) 법이론의 양대 지주를 이루는 사상가로서, 그는 벤담/하트 류의 법실증주의, 공리주의의 논변을 근본적으로 부인하고, 권리의 논변을 새로이 수립한다. 드워킨은 이제 고전의 반열에 오른 그의 저작 ‘권리를 심각하게 파악하며’(Taking Rights Seriously)에서, 권리헌장 상의 적정절차, 평등권 및 자기부죄금지의 특권 등 ‘정부에 반대하는 근본적 권리, 헌법에 의하여 법적 권리화된 도덕적 권리’가 존재함을 분명히 하면서, 다수결주의자와는 달리 권리헌장은 설사 다수의 승인이 있더라도 폐기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에게 헌법은 ‘매 세대가 스스로 재해석해야 하는 추상적 도덕관념의 진술’인 것이다. (497, 498면)




43. 허버트 팩커는 1964년의 유명한 논문(Two Models of the Criminal Process)과 이를 기초로 서술된 1968년의 고전적 저작 ‘형사제재의 한계’에서, ‘형사절차의 운영에서 우선을 두고 경쟁하는 두개의 분리된 가치체계’를 추출한다. 즉 ‘범죄통제’와 ‘적정절차’라는 두가지 가치모델이다. (500면)




44.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현 시기 한국 형사소송법학은 어떠한 법철학적 전망과 가치를 채택하여야 하는가이다. (510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의 - 인류의 가장 소중한 유산
오트프리트 회페 지음, 박종대 옮김 / 이제이북스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1. 우리 시대는 세계화의 수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것이 국제법이든 국제 법질서 및 평화 질서에 관한 것이든, 세계적인 경제질서와 사회질서 혹은 서로 다른 문화와 종교들의 공동 생활에 관한 것이든 간에, 정의는 이런 수많은 과제들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결정적인 규준입니다. (한국어판 서문)




2. 파스칼(1623-1662)은 정의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갈라진다고 풍자적으로 확언한다. 왜냐하면 라인 강의 이편과 저편에 서로 다른 정의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팡세, 294) (12면)




3. 문화와 시대를 포괄하는, 여러 문화들 사이에서 인정된 정의 때문에 전체 인류는 정의 공동체라 불린다. 인류에게 공통된 것은 “같은 경우는 똑같이 다루어야 한다”는 평등의 계명에서 시작한다. 이 계명은 자의적인 것을 금지하는 것과 같은 부정적인 형태에서, 그리고 불편부당의 계명과 같은 긍정적인 모습에서, 인격을 묻지 않고 분쟁을 조정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형예술에서는, 기본적 정의의 상징인 유스티시아 여신을 눈을 가린 모습으로 묘사한다. (12, 13면)




4. 몰락하는 서구의 도덕을 가장 날카롭게 비판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인 니체조차도 정의에 더할 수 없을 만큼의 찬사를 바쳤다. “개인적인 상처, 조롱, 중상이 엄습할 때조차 의롭고, 올바른 눈이 가진 고귀하고 명료하면서, 깊고 부드러운 통찰력이 있는 객관성이 흐려지지 않는다면, 정의는 하나의 완성품이며 지상 최고의 걸작이다.” (도덕의 계보, 둘째논문 열한째 단락) (15, 16면)




5. 플라톤은 감각적 욕구, 의지, 이성과 같은 영혼의 세 가지 기본 능력을 아주 분명하게 구별한다. 이 세 가지 능력에 다음의 세 가지 탁월함이나 덕을 상응한다. 욕구에는 절제가, 의지에는 용기가, 이성에는 통찰이나 지혜가 상응한다. 각각의 기본 능력은 자신의 고유한 과제를 수행하며, 영혼에 올바른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는 정의라는 넷째 덕을 필요로 한다. 이때부터 정의는 사주덕Kardinaltugenden에 속하며, 이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움직인다. (27면)




6. 강한 욕구를 지니되 기껏해야 절제의 덕에만 소질이 있는 사람은 수공업자, 농부 또는 상인이 된다. 강한 의지와 용기를 가진 사람은 파수꾼이 된다. 그리고 이성에 탁월한 사람만이 철인왕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 여기서도 정의는 질서를 올바르게 부여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전체 질서를 올바르게 돌본다. (28면)




7. 한 개인이 자신 안에 이성이 지배함으로써 정의롭게 되듯이, 국가는 그 안에서 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시민들이 지배할 때만 정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 “가장 뛰어나고, 가장 의롭고 동시에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가장 왕답게 생각하며, 자기 자신을 왕답게 지배하는 자이다.” (28, 29면)




8. 아리스토텔레스는 묘한 착상으로 소피스트들이 도입한 구분들을 군더더기 없이 정치적 정의 안에 끌어들이는데, 이 구분은 거의 오늘날까지 서구의 법 사상과 정의 사상에 각인되어 있다. 그 구분은 자연적인 것과 법적인 것의 구분으로서(니코마코스 5장), 후에 자연법과 실정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실정법은 합의와 질서에 의존하는 반면, 자연법은 보편성(“이것은 어디서나 똑같은 효력을 지닌다”)과 비임의성(“이러이러한 의견에 의존하지 않는다”)에 의해 구분된다. (33, 34면)




9. ‘수사학’에 따르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가 행동하듯이 크레온 왕의 금지령에 맞서 오빠 폴리네이케스를 매장한 것은 자연적인 의미에서는 옳다. (34면)




10. 한편에서는 어떤 조건들에서 정의가 요구되느냐의 질문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요구에 대한 답변들 중 어느 것이 ‘정의’를 뜻하느냐는 질문이 있다. 앞의 질문에서는 기술하는(서술하는) 적용 조건들이, 뒤의 질문에서는 규제하며(규정적이며) 척도를 제시하는(규준적인) 결정적인 요소들이 추구된다. (35면)




11. 데이비드 흄(도덕원리탐구 3장 '정의에 대하여‘)과 마찬가지로 다른 자유주의 철학자들에게 있어서는 궁핍은 정의를 적용할 수 있는 조건에 속한다. .... 실제로 정의가 풀어야 할 수많은 과제들은 자연 자원의 부족으로 생겨난다. (36면)




12. 다른 한편으로 정의의 모든 과제들이 궁핍과 관련되는 것만은 아니다. 법 앞에서의 평등이 이에 해당하는 사법과 행정의 불편부당함도, 자유주의적 인권과 국민주권, 혹은 권력분리도 궁핍과는 관계가 없다. (37면)




13. 첫째 단계에서 규범적으로 주제가 되지 않은 목표나 목적들은 실용적인 둘째 단계에서는 자신의 행복에 대한 자연스러운 관심에 의해 판단된다. 여기서 ‘좋은’은 ‘어떤 사람을 위해 좋은’을 뜻한다. 개인에 해당된다면 개인 차원에서의 실용적인 평가가 이루어지며, 집단에 해당된다면 공리주의 윤리에 상응하는 사회적 실용성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진다. 공리주의 윤리의 원리인 최대의 집단적 공동선을 최고의 평가 규준으로 간주하는 사람은, 어떤 것이 공동선을 촉진하면서도 정의롭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다. 공리주의는 공동선의 ‘분배’에 대해 무관심하다. (39면)




14. 루만은 ‘잃어버린 범형’이라는 강연(1988)에서 도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의 문제와 관련된 논변을 제시한다. 현대 사회는 상대적으로 자립적인 부분 체계들에서 성립하고, 경제, 학문, 법과 같은 각각의 부분 체계들은 늘 본래적이며 특정하게 기능하는 규범성을 따르므로, 특정한 기능을 지니지 않은 규범성, 즉 도덕은 힘을 잃는다는 것이다. 도덕은 사회를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통합할 수 없으므로, 잃어버린 범형padadigm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55면)




15. 공동선을 극대화하는 공리주의 윤리학은 처음부터 정의의 문제와 관련하여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그 이유는 이 윤리학이 전체 선에 이바지하는 한, 기본권과 인권 같은 정당한 요구까지도 침해하는 것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침해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55면)




16. 일반적으로 공리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공리주의가 공동선을 극대화시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도대체 최대의 공동선이 해당자들에게 어떻게 '분배되어야‘ 하느냐의 문제는 잊어버린다고 말한다. 이런 문제에는 무관심한 채 공리주의 자체는 노예제 사회와 계급제 사회를 허용하는데, 이 제도들은 최고의 집단적 선을 가져오는 한에서만 허용된다. (57, 58면)




17. 여기에는 ‘도덕적인 자기 왜소화’가 놓여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아무리 커다란 공동선이라도 결코 침해해서는 안 되는, 개인에게는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권리들이 있다는 요구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58면)




18. 자연은 우리가 논리적 오류 추리, 이른바 존재와 당위의 오류(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값을 치르더라도, 그것에서부터 초실정(법)적인 규범들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존재이다. (65면)




19. 절차에서는 직접적인 내용이나 결과가 아니라, 상태, 과정, 형식들이 중시된다. 물론 이것들이 목적 자체는 아니다. 이것들은 내용과 결과에 이바지하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이바지함으로써 정당화되므로 ... (69면)




20. “법의 규정은 이렇다. 명예롭게 살며, 남을 해하지 말며,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 주어라.” (75면)




21. 형평은 최고의 법이 최고의 불의로 변질되지 않게 하기 위해, 하찮은 세밀함과 지나친 엄밀성으로부터 법을 보호해 준다. (89면)




22. 형평은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과는 달리, 판단력을 요구한다. (90면)




23. 토마스 홉스(리바이어던, 특히 13-18장)과 존 로크(정부에 관한 두 개의 논문)로부터 장 자크 루소(사회계약론)와 칸트를 거쳐 다시 새롭게 부활하기까지 사회계약은 정치적 정의를 합법화하려는 목적에 다가가기 위한 하나의 사고실험이었다. (97면)




24. 형법은 인권을 구성하는 최초의 초석을 지니고 있으며, 이 초석은 거의 모든 문화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따르는 적극적 권리들을 보호한다. (111면)




25. 사회 정의를 지지하는 여타의 근거들은 교환으로서의 정의를 보완하는 보상적(시정적) 정의에서부터 생겨난다. 첫째 논증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세상에 태어나 타인에게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절실한 상황, 즉 책임이 있는 연장자가 돌보아야만 벗어날 수 있는 곤경에 처한 신생아의 절박함을 상기시킨다. (137면)




26. 헌법에 따르면 독일은 “사회복지” 국가이다. 이와 같은 간결한 선언은 다음의 네 가지 과제를 거치면서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규정된다. 1) 최소한의 생존에 대한 보증, 2) 더 많은 평등의 정립(원칙적으로 재정적 측면을 의미한다), 3) 더 많은 안전의 보장, 4) 복지 향상과 그것에의 참여 확대가 그 과제이다. 과제 1)과 3)은 간략하게 제시된 논증에서 비교적 쉽게 드러나는 반면, 2)와 4)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139면)




27. 사회 정의는 흔히 연대성과 더불어 언급된다. 실제로 연대성은 더 이상 갚을 의무가 없는 정의와 자발적인 인간사랑 사이에서 규범적인 중간 위치를 차지한다. (143면)




28. 적극적 관용을 베푸는 인간은 내적인 자유로부터 폭력으로의 전환이나 적대자를 극복하는 데 집착하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동등함과 상호간의 이해를 토대로 삼는 관계를 추구한다. 인간의 관용은 정당화의 토대가 손상되는 곳, 즉 인권에서 드러나는 모든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이 손상되는 곳에서 비로소 소멸한다. (150면)




29. 유일하게 정당한 불복종은 1) 도덕적, 정치적인 동기를 지니고 있으며, 2) 공개적으로 드러나 있고, 3) 폭력적이지 않으며, 4) 균형 잡힌 수단들을 사용하여 일어난다. 이런 불복종은 5) 유효한 법을 침해하기는 하지만, 6) 완고한 다수에게 호소하여 결정된 정책들을 재고하도록 하는 비상권(예외법)으로서 소수에게 기여하는데, 7) 재고해야 할 결정들은 인권과 시민권 같은 정의의 기본 원리들을 위태롭게 하는 것들이다. ... 8) 모든 형태의 법적인 항의와 반대는 이미 다 사용되었어야 하며, 9) 최소한 간접적으로나마 도덕적, 정치적인 정직함을 증명하기 위해 사람들은 거래에서의 불이득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성공적인 불복종이 입법자에게 개혁의 필요성을 납득시킨 상황에서 다음의 마지막 관점이 생겨난다. 10) 국가가 개혁되는 정도만큼 시민 불복종은 자체의 권리를 상실한다. (181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의 법문화 - 인식.구조.변화 나남신서 1148
김정오 지음 / 나남출판 / 200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문화인류학자들은 기존에 확립된 문화에 대한 접근방법으로는 이러한 현상들을 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기존에 확립된 문화의 개념이 서구중심적으로 형성되었음을 밝혀내고, 초기의 전제들을 해체시키기 시작하였다. 이제 더 이상 문화는 고정된 것, 경계지워진 것, 통합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산되고 경계가 없으며 경쟁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16, 17면)




2. 웅거에 의하면 근대 서구의 인간관은 이성과 욕구의 분열을 전제하며, 이러한 인간관은 두 도덕관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이성의 도덕관과 욕구의 도덕관이 바로 그것이다. (19면)




3. 초기 법문화 탐구를 시도한 학자들에게 가장 커다란 과제는 서구의 법체계와 한국의 전통적 문화 간의 이질적 관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헌법을 위시하여 법전 속에 쓰여 있는 무수한 법규범들은 서양 근대법체계의 내용과 형식을 그대로 담고 있는 데 반해서 그 규범들에 의해 규제, 통제받는 시민들의 행동과 의식은 여전히 한국의 전통, 즉 유교적 전통에 의해서 지배되는 상황이었다. (25면)




4. 1920, 30년대 미국의 법현실주의자들은 미국사회에서 ‘법전 속의 법’과 ‘현실 속의 법’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존재하며, 이러한 괴리의 원천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규범해석에 치우쳐 있는 기존의 법학방법론을 벗어나야 하며, 보다 정확하게 그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법학에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법현실주의자들의 주장이 지니는 보다 급진적 측면은 법학에서 주장되고 있는 자유, 평등의 가치들이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자유주의 법체계에서 주장되는 많은 가치들이 현실적으로 만연되어 있는 불평등과 부자유의 상황을 은폐하는 부정적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이들에 의해서 폭로되었다. (26면)




5. 그러나 한국에서 초기에 법문화를 탐구했던 학자들은 미국의 법지식인들과 완전히 다른 사회적 조건 속에 놓여 있었다. 이들은 경제발전이라는 시대적 과제 앞에서 자신들이 배우고 가르치는 자유주의 헌법의 가치들을 유보할 것을 강요당했다. 또한 그들은 자유와 평등,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등의 가치를 실현할 것을 요구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도 못하였다. 이들은 법이념과 법현실 간의 현격한 차이로 인해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다. (26면)




6. 근대화와 산업화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필히 그 바탕을 이루는 자유주의 법체계를 정착시켜야 할 과제가 놓여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귀중한 전통적 가치들과 제도들을 과감하게 버려야 하는 딜레마에 직면했던 것이다. 이러한 딜레마는 지속적으로 한국의 법문화를 탐구하는 법학자들에게 심리적 콤플렉스로 작용했으며, 아직도 그 효력이 완전히 소진하지 않았다. (27면)




7. 한국 법문화를 탐구하는 데 있어 함병춘 교수의 가장 특징적 관점은 한국의 법문화에 내재해 있는 문화적 논리를 찾아내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그 문화적 논리를 설명할 수 있는 고유한 언어와 방법을 창출해내는 것이었다. 한국의 문화적 전통 위에 이식된 서양의 근대법체계가 야기하는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고유한 문화논리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이러한 문화논리를 설명하는 데 서양의 법개념과 방법론이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함 교수의 출발점이다. (29면)




8. ... 과거의 한국에서 ‘헌법’이나 ‘계약’을 찾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헌법이나 계약에 버금가는 기능을 수행하는 참여자들의 상호관계 패턴을 밝히려고 한다. (함병춘) (29면)




9. 한국인들은 사실의 진위여부를 판단하는 데 있어 칸트의 정언명령과 같은 절대적인 이성의 명령이나 기준에 의해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척도에 의해서 판단한다. (33면)




10. 이처럼 한국인들의 행위를 규제하는 문화적 논리는 계산가능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판단의 근거는 상호관계적 역동성에 근거한다.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담론 그리고 그 담론 속에 담겨질 진실은 옳음/그름, 진실/비진실, 사실에의 일치/불일치 등의 이분법적 판단체계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담론이 전달될 상대방의 감정상태가 더욱 중요한 척도로 작용한다. 또한 상대방의 감정이 독립된 척도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의 관계를 통해서 척도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척도는 다른 말로 하면 감정이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 함 교수는 이러한 감정이입을 영어로 엑스터시(ecstasy)라고 표현하는데, 그가 사용하는 엑스터시는 일반적으로 번역되는 ‘황홀경’이라기보다는 어떤 사건이나 사태에 관련된 사람들의 감정이 어느 순간 하나로 일치하는 무아의 상태를 의미한다. (34면)




11. 타인의 감정이 보다 흔쾌할 때 자신의 감정도 흔쾌할 수 있는 것, 한국인들은 바로 이러한 감정의 융합과 조화를 선호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적 논리 위에서 거짓과 진실, 그리고 거짓과 진실의 효용성이 판단되는 것이다. (35면)




12. 한국의 역사에는 위대한 입법자나 위대한 전설적 판사가 없었다. 진정으로 위대한 관리는 사라들의 마음속에 덕을 심어 놓음으로써 법과 법정을 불필요하게 만든 행정관이다. ... 한국인들은 항상 단죄를 내리는 판사보다도 평화유지자로서의 중재자를 선호하였다. 중재자는 단죄하거나 법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사자들 스스로 자신들의 사안에 적용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내도록 조장한다. (함병춘) (36면)




13. 지난 20여 년 사이에 등장한 세계체제이론은 정치, 경제, 문화의 세계화과정을 설명하면서 인류학에서 즐겨 사용되었던 고립된 사회모델개념을 맹렬하게 비판하였으며, 그 개념의 학문적 유용성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였다. 세계화의 분석, 문화연구의 급속한 확장, 푸코를 위시한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의 권력과 담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도출 등으로 인하여 기존의 문화개념이 거센 도전을 받았다. (53, 54면)




14. 전통적으로 미국의 법문화는 세 가지 주요 전제에 그 뿌리를 두었다. 미국사회에서의 법의 중심적 역할, 법적 과정의 중립성과 합리성, 그리고 법학의 권위이다. (78면)




15.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주류법학이 견지해온 이와 같은 전제들에 대해서 끊임없는 비판과 도전이 거세지기 시작하였다. 비판의 주요내용을 보면, 첫째, 미국사회에서 법이 사회생활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기보다는 오히려 주변적 역할을 하는 데 불과한 경우가 상당하며, 둘째, 법의 중립성 가면의 배후에는 계급과 이해관계가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비법적 힘이 법의 외관을 좌우하는 현실이 무시되어 왔다는 것이다. 셋째, 법학 그 자체가 서 있는 학문적 토대가 대단히 유약하다는 사실이 모호하게 은폐되어 왔다는 것이다. (78면)




16. 법에 대해서 체계적이고 다변학제적인 사회적 탐구를 위한 노력이 1964년 법과 사회학회의 창립을 가져왔으며, 1966년부터 Law & Society Review를 발간함으로써 ‘실제 속의 법’(law in action)에 대한 본격적 탐구가 시작되었다. (79면)




17. 1960년대 이후 미국 법문화의 변화를 갈란터 교수는 ‘결핍에서 범람’으로 특징짓는다. (80면)




18. 첫째, 법과 사회연구는 법문화의 저변으로 접근해왔다. 최상층부에 있는 정책결정자로부터 현장으로, ... 이러한 관심대상의 전환을 통해서 법과 사회연구는 협상이나 타협이 법의 세계에 깊이 침투해 왔으며, 오히려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드러내었다. (81면)




19. 둘째, 실제 속의 법에 대한 탐구는 무수한 법의 주인공들을 발굴해 내었다. 법과 사회연구는 권위적 정책입안자들뿐만 아니라 법의 이용자들과 소비자들에게도 주도적 역할을 부여하였다. .... 법과 사회연구는 다양한 법의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법정들과 규범들을 발굴해 내었다. (81면)




20. 셋째, 법과 사회연구는 왜 법규범들의 공표와 집행에는 예외 없이 간접적이고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들이 수반되는가에 대해서 보다 많은 이유들을 발견해 내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법이 고상한 상징들과 제한된 자원들이 서로 결합되어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라고 갈란터 교수는 지적하였다. (82면)




21. 그러나 법은 직접적 실행보다는 상징체계로서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그 효과를 달성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법은 그 원리들을 실현하는 것이 항상 부분적이고 임시적이라는 점에서 상징적이며, 상징체계로서의 법이 현실 속에서 실제 작용하는 통제체계로서의 법보다 훨씬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82면)




22. 일반적으로 법은 힘의 사용에 의해서 작동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보의 전달, 예상되는 것, 금지되는 것, 허용되는 것, 특정한 행위가 가져올 결과 등에 관한 의사소통을 통해서 작동하는 것이다. (82면)




23. 이러한 법현상들에 대해서 법과 사회연구가 갖고 있는 우선적인 장점은 해명력에 있다고 갈란터 교수는 지적한다. 법과 사회연구가 일차적 형태의 법지식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이유 중 하나는 법원리의 해명력에 도전하는 것이다. 발생한 사건은 법전 속의 법에 알려지지 않은 요인들에 의해서 설명되어야 한다. (83면)




24. 갈란터 교수의 낙관적 진단과는 대조적으로 트루벡 교수는 법과 사회 내에서 위기적 징표들이 나타났다고 진단한다. 첫째, 법과 사회운동이 지적 활력을 상실했다는 두려움이 내부적으로 팽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 둘째, 그러한 우려 속에는 정치적 관심도 들어 있는데, 어떤 이는 법과 사회연구가 그 정치적 발판을 상실하였으며, 정책입안자들의 보조적 역할을 하는 데 불과하다고 지적하였다. ... 세 번째 불안의 원천은 그 운동의 지지기반이 허약하다는 점이다. (83, 84면)




25. 비판법사회학을 촉구하는 그룹은 1982년 이래 매사추세츠 주의 암허스트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일련의 사회과학자들로 구성되었다. (86면)




26. 그(트루벡)은 초기 법과 사회연구가 전제했던 세 가지 기본이념을 결정론(determinism), 보편적 과학주의(universal scientism) 그리고 점진적 개혁주의(untroubled reformism)로 규정한다. (88면)




27. 특히 실베이는 법과 사회연구가 법과 사회와의 관계를 인식해온 전통적 방식에 대해서 세 가지를 비판하고 있다. 첫째, 법과 사회연구는 개별적 법원리들과 그 원리들이 구성되고 적용되는 구체적 상황들을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범주로 다루었다는 것이다. 둘째, 법과 사회연구는 법이념 그 자체를 문제시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법의 경계는 현존하는 법원리와 제도들로 한정되었다. 셋째, 법과 사회연구는 그 연구과제를 법적 효과의 문제에 제한함으로써 그 탐구영역을 문제가 있는 사안들로 한정시켰다는 것이다. 법이 비효과적으로 나타나는 사안들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법체계가 지닌 사회적 의미를 왜곡하게 표상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법과 사회연구는 법체계를 마치 사회질서를 영구적으로 장악하기 위한 투쟁으로 채색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엄청난 합법성의 실체를 희석시켰으며, 현존하는 사회관계와 실천들을 재생산하고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법의 역할을 연구 프로젝트로부터 배제하였다. (89, 90면)




28. ‘이데올로기’나 ‘실천’ 혹은 ‘과정’ 등의 개념들을 사용하는 해석적 행위론은 사회학적 법연구의 새로운 관념을 산출한다. 첫째, 법과 사회 전통은 법을 너무 협소하게 정의하였지만, 이데올로기는 어떤 의미에서 주체들을 구성하는 가치, 관점, 평가적 기준들로 구성된 포괄적 망이다. ... 둘째, 해석적 행위론은 법의 비효과적 측면으로부터 효과적 측면으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 셋째, 해석적 행위론은 법과 사회전통이 중시해온 보편주의로부터 법의 역사성으로의 전환을 촉구한다. (91, 92면)




29. 이러한 형식주의적 분쟁패러다임과는 달리 암허스트 그룹에 참여하는 인류학자들과 다른 학자들은 분쟁연구에 해석적 행위론을 적용하면서 분쟁연구에 중요한 역사적 차원을 수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분쟁과 분쟁해결제도를 사회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인식하기보다는 분쟁이 발생하고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새로운 분쟁패러다임이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95면)




30. 우리의 접근에서 근본적 전제는 분쟁이란 단지 ‘발생하는’ 정적 사건이 아니라 분쟁, 다툼 그리고 공격의 구조는 시대에 따른 변화나 변형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95면)




31. 트루벡 교수는 암허스트의 프로젝트가 갖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첫째, 이들의 연구가 이데올로기나 과정과 같은 개념들을 밝히고 분쟁패러다임을 재구성함으로써 법과 사회의 전통에 결정적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전환은 그 전통이 확립되었던 본래의 명제 중 두 가지, 즉 도구주의와 결정론에 이의를 제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비록 초기 법과 사회인식의 중심축이었던 두 명제에 대해서 기꺼이 도전하고 있지만, 암허스트 참여자들은 여전히 사회과학이 세계에 대한 권위적 기술을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100면)




32. 암허스트 그룹이 한국의 법문화를 연구하는 데 주는 교훈은 법의 미시적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세부적 움직임들에 대한 지식이 우리의 경직된 법지식과 인식을 전환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데 있다. 또한 이 그룹의 학자들이 제시하는 분쟁에 대한 인식의 전환은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법문화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것이다. (101면)




33. 웅거는 근대 심리구조의 핵심이 이성과 욕구의 분열에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이원론적 인간관이 서구의 근대문화를 지배해온 가장 중요한 전제였으며, 나아가서 정치이론의 전제들과 심층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것이다. (106면)




34. 그러나 실제로 진리의 추구는 욕구를 보다 효과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게 해주는, 즉 의지가 이미 선택한 목표를 보다 손쉽게 해주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107면)




35. 사람들이 서로 다른 것은 이들이 세계를 다르게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것을 욕구하기 때문이다. 개인적 정체성의 기초는 사람들이 취하는 선택, 즉 선택하는 목적들이다. (108면)




36. 웅거는 이러한 두 대립적 도덕의 형태가 바로 근대윤리학의 역사에 나타난 전통과 거의 일치한다고 지적한다. 첫 번째 전통은 가치가 욕망의 반영이라고 하는 홉스의 가치관념에서 시작하여 도덕감정의 논리를 추구했던 스코틀랜드 도덕론자들에게 이어졌으며, 벤담에 의해서 공리주의로 재구성되었다. 두 번째 전통은 17세기 합리주의자들에서 그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였으며, 칸트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111면)




37. 욕구의 도덕론은 어떤 욕구들을 다른 욕구들보다 우선해야 할 어떠한 기준도 마련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은 선택의 정당화나 비판의 토대로서 기여하지 못한다. ... 그러므로 욕구의 도덕론은 전혀 윤리적이지 않은 윤리라고 비난받는다. (112면)




38. 이타주의는 가치의 주관성을 거부한다. (120면)




39. 그러나 현대사회에는 형식과 실질의 대립적이고 모순적인 구성요소들이(개인주의-엄격한 규범, 이타주의-기준) 서로 뒤엉켜서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던컨 케네디의 핵심적 지적이다. (121면)




40. 전통적 규범체계를 논의하는 데 있어 가장 커다란 난점은 그것이 과거 우리 사회의 통치근간으로 활용되었던 규범체계의 형태로 존속하고 있지 않으며, 다만 사회구성원들의 의식 속에서 존재한다는 점이다. (125면)




41. 전통규범체계의 장에서는 모든 개인이 항상 타자의 존재를 의식해야 하며, 자신의 행위가 타자에게 미치는 외면적 결과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내면적 평가에 대해서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127면)




42. 최대권 교수의 조사에 의하면, 전통적 농촌의 경우 한 동네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는 법보다는 관습이나 체면 등에 의해서 분쟁이나 갈등이 통제되고 해소되는 데 반해서 마을 간에는 이러한 규범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138면)




43. 우리의 전통적 규범체계는 인간적 관계가 탄탄하게 짜여진 공동체 내에서 가능한 것이었으나, 이러한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섰을 때에는 대단히 배타적 성격을 갖게 되는 한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우리 사회의 규범문화가 보편성을 갖고 성장할 수 없었던 가장 커다란 장애였다고 할 수 있다. (139면)




44. 전통적 규범공동체가 갖고 있었던 한계로서, 첫째, 그 공동체 안에서 살고 있는 구성원들 개개인의 자율성이 상당한 정도로 제약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것은 그 공동체가 갖고 있는 행위규범뿐만 아니라 가치관까지도 동질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자신의 동료들과 다른 행위를 하거나 이질적 가치관을 갖는 것이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둘째, 공동체적 규범의 규범력이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전통공동체가 형성해온 규범은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지, 다른 공동체에 속한 사람에게까지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141면)




45. 적어도 사적 영역에서 우리 사회구성원들은 행위의 기준으로서 전통적 규범체계보다는 자유주의 규범체계에 의거해 행동하는 경향이 높아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일반시민들이 훨씬 빠른 속도로 전통의 가치과이나 규범질서의 틀로부터 벗어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149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법텍스트와 텍스트작업
F. Muller 지음, 이덕연 옮김 / 법문사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1. 실증주의 입장: 법전에 들어 있는 것이 이미 규범들이고, 그 내용은 언어적 의미로서 객관적인 인식이 가능하다. 법률가는 법률에 표현된 바를 해석하고, 주어진 사건에 대한 법률의 의미를 인식하여 적용한다. 법률가의 의미인식이 옳게 진행된다면 그 포섭은 정당화된다. 따라서 법률규정의 효력과 법적 결정의 정당성을 연결해주는 다리는 규범으로서 이미 법률에 들어 있는 법텍스트의 의미에 의해서 주어진다. 이러한 논리형식에서는 “텍스트작업(Textarbeit)" 같은 개념들은 필요없다. (저자 서문, 7면)




2. 법률가의 작업에 관한 이전의 논의에서 법실증주의는 법관이 단지 법률을 적용할 뿐이지 힘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었고, 반면에 결단주의는 판결 속에서 법관의 힘만을 주목하였고 법률 자체에는 아무런 역할도 인정하지 아니하였다. (2면)




3. 법학자의 언어작업의 규칙은 언어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법률가들의 발화 속에서 생성된다. (14면)




4. 언어의 의미는 법률가의 작업과 무관하게 선재하지 아니한다. (17면)




5. 문제는 실제로 법률가들의 텍스트작업을 통해서 법텍스트의 의미가 어떻게 구축되는가 하는 것이다. (18면)




6. 비록 사건에 따라 다를지라도 이러한 법게임의 성공전망이 어느 정도 설 수 있기 위해서 법관은 법적 논쟁에 대한 결정절차에서 언어를 잘 다룰 수 있는 모든 능력과 권한을 활용해야만 한다. 이러한 점에서 법텍스트작업상의 언어게임은 권력투쟁의 게임과 전체적으로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26면)




7. 서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에게 가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법적공방은 당사자들 간에 오로지 승리만을 지향하는 계산된 냉혹함 속에 진행된다. 그들이 법정에서 이끌어 가는 투쟁은 절대적인 효율성의 문법과 경제학에 의해 지배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권리가 아니라, 성공이다. (39면)




8. 이러한 관점에서 여기에서 의미를 말할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장한 바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가 아니라, 그것이 받아들여지는지 여부이다. (47면)




9. “말의 의미”는 “의미의 해명을 통해 주장되는 것” 바로 그것이다. (48면)




10. “철학자들은 흔히 낱말의 의미를 조사하고 분석한다는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한 낱말은 우리 자신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어떤 힘에 의해서 부여되는 의미를 가지고, 따라서 한 낱말의 진정한 의미가 일종의 학문적인 연구분석에 의해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아니 된다. 하나의 낱말은 누군가가 그것에 부여한 의미를 갖는다.‘ (Wittgenstein, Das Blaue Buch) (49면)




11. 법률은 법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언어의 영역에서 법확보를 위한 투쟁의 마당이다. 경쟁관계에 있는 의미들의 대립으로 해서 어의를 둘러싼 투쟁은 언어 속의 법을 둘러싼 투쟁이 된다. (61면)




12. 규칙신봉주의(Regelplatonismus)를 비판한다고 해서 언어규칙의 개념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규칙신봉주의의 오류는 모든 반복의 과정 속에서 동일하게 재생되는 순수한 관행으로만 이해함으로써 그 규칙을 언어현실로부터 유리시킨 점에 있다. 반면에 규칙회의주의(Regelskeptizismus)의 오류는 정반대로 언어현실을 규칙으로부터 분리시킨 점에서 찾아진다. 이에 따르면 주관적인 의도만이 모든 기호의 반복사용을 통해 형성되는 새로운 의미의 유일한 근원이 된다. 언어적 의미의 생성은 규칙준수와 규칙확대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는 실천의 과정으로 이해되는데, 이 두 입장에서는 이 과정이 왜곡된다. 실증주의와 결단주의는 언어이론상으로도 편파적인 왜곡을 보인다. 실증주의 입장에서는 일방적으로 규칙을 강조하면서 실제 언어현상 속에서의 모든 변화는 외면하고, 반면에 결단주의는 단지 그 변화 만을 주목하면서 규칙은 무시한다. (69면)




13. 이 의문에 대한 답의 출발점은 규범텍스트와 사실주장을 판결의 주문(생산되는 법규범의 텍스트)에 연결시키려는 투쟁에서 찾아진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투쟁은 구체적인 사건에 적용되는 규범텍스트의 의미에 관한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사자들의 관심사는 사건에 특유한 주장을 통해 텍스트의 의미에 대한 다른 이해를 배척하고, 자신의 특정한 이해를 관철시키는 것이다. 결국 이 투쟁의 핵심은 언어사용의 양식과 의미에 대한 상이한 주장들이다. (69, 70면)




14. 원래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철학 연구’에 부제로 달려고 한 “우리들의 언어상황”에 대한 모든 논의는 항상 ‘차이’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는 명제하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70, 71면)




15. “우리는 언어와의 투쟁 속에서 언어를 수단으로 투쟁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법언어에 관한 언급은 바로 법의 언어적 기초의 이중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Wittgenstein, Ueber Gewissheit) (73면)




16. 이에 따르면 결국 우리의 논의는 법에서 출발하여 언어를 경유하여 힘에 이르렀다. (99면)




17. 실제로 해석은 규범텍스트 속에 이미 존재하는 것을 단순히 재생해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법문을 형성하는 것이다. 텍스트의 의미는 결코 해석과 무관한 것이 아니고 또한 그 자체가 독자적인 객관적 척도로서 해석의 정당성을 보장해줄 수는 없다. (103면)




18. 실증주의가 법의 전환 속에 존재하는 힘을 부인한다고 하면, 결단주의는 힘의 적용 속에 내포되어 있는 법형식성을 부인한다. 결국 법실증주의나 결단주의의 논리에 따르면 법과 힘의 관계는 외재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와 달리 법과 힘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내재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116면)




19. 규칙에 대한 적용의 관점에서 보면 법은 우선 매개체이다. ... 이 투쟁의 특징은 투쟁과정에서 특정한 형식에 따르는 범위 내에서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한 모든 가능한 수단이 다 동원될 수 있다는 점이다. 동시에 법은 게임의 틀이 유지되는 한에서만 구체적인 실천과 연계되어서 항상 전환될 수 있는 상태에 있다. (116면)




20. 법실증주의에서도 전제되고 또한 결단주의에서도 강조되는 식으로 힘에 대하여 법을 분리, 대립시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오히려 양자가 서로 감염시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117면)




21. 요컨대, 순수법학이론이 아니라 법과 언어 및 힘, 이들 상호간의 구별이 간명한 것일 수 없다는 점을 제대로 파악하는 이론이어야 비로소 현실성있는 법이론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117면)




22. 중요한 표제어는 더 이상 법의 “발견(Findung)"이 아니라, 법작업이다. 여기에서 주목하는 바는 법률가의 소극적인 자세나 규범정립자인 의회에 종속되는 수동적인 책임이 아니라, 법작업자로서의 적극적인 자세와 그에 다른 책임이다. (120면)




23. 규범텍스트들은 아직 규범적으로 작동될 수 없다. 그들에게 부여되어 있는 것은 기술한 바 있는 의미의 ‘효력(Geltung)'일 뿐이다. 규범텍스트는 나중에 창출될 범규범텍스트의 선례이고, 구체화작업을 위한 기초자료일 뿐이다. (125면)




24. 구조화 법이론에 따르면 입법자는 장래의 결정을 미리 선결하는 법규범을 제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입법자는 규범 텍스트를 제시할 뿐이다. 입법자에 의해 채택된 규범텍스트의 사용양식은 의미창설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그것을 확정할 수는 없다. 이러한 범주에서 구체화작업의 진입자료인 규범텍스트는 단지 “효력” 만을 갖는다. 구속력 있는 의미에 해당하는 “규범성”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133면)




25. 구조화 방법론은 존재와 당위, 규범과 사건, 규범과 현실에 대한 단절적 이원주의나, 법의 적용을 포섭과 삼단논법으로 이해하는 사고와 법전 속에 선재하는 규범을 구체적으로 만드는 구체화작업을 비롯한 기타 전통적인 법학사의 유산들과의 결별을 제안하는 데 그치지 아니한다. 이 방법론의 입장에서는 법문상의 한계에 관한 전통적인 관점, 즉 - 언어의 속성에 따른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건, 언어의 사용에 따른 사회적인 것으로 보건 또는 언어학자들의 권위적인 주장에 따른 것이건 - 규범텍스트에 사전에 주어진 제한하는 힘이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는 관점의 지양을 요구한다. (138, 139면)




26. 주관주의적 학설에서는 입법자의 의지를 법해석의 준거점과 그 한계로 보고, 반면에 객관주의적 학설은 그 대신에 법률의 의지를 강조한다. (139면)




27. 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결정하고, 그 이해에 대하여 한계를 제시할 수 있는 인식대상으로서 텍스트의 본질은 존재하지 아니한다. 텍스트의 본질 그 자체도 우리에게는 텍스트로서 주어지고 또한 그것은 해석에 앞서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에 예속된다. (141, 142면)




28. 입법자의 의지도, 법률의 의미도 어떤 한계를 설정하지 아니한다. 이 한계는 언어 자체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언어의 실행 속에서 형성된다. (143면)




29. 결국 텍스트의 의미와 법률작업의 한계는 언어학적으로 “경쟁적인 어의학”(kompetitive Semantik)의 범주 속에서 현출된다. 법률가의 활동은 하나의 어의학적 투쟁 속에서 특정한 텍스트의미를 관철시키는 것이다. ... 따라서 이 해석활동의 한계에 대한 질문은 새롭게 제기되어야만 한다. 사전상의 문언적 한계를 제시하는 전통적인 법률학적 환상과는 달리 특정한 텍스트해석은 언어 자체를 통해서 주어지는 한계에 의해서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언어활동 속에서 형성되는 한계를 통해서 제한되는 것일 뿐이다. (147면)




30. 법문상의 한계는 논증에 앞서서, 즉 사전에서 의미의 예들을 찾아봄으로써 설정될 수 있는 한계가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실제 토론의 과정 속에서 비로소 설정된다. 또한 이 한계는 예컨대 현존하는 의미의 실체로 주어지는 텍스트의 내적인 속성도 아니다. 작업의 대상인 기호의 연쇄가 관련되는 논증문화 및 헌법적인 요청과 연결되는 과정 속에서 그 규준이 설정되는 상대적인 크기로 주어진다. (148, 149면)




31. 한편의 조심스러움과 또 한편 법률구속을 떨쳐버리는 뻔뻔스러움의 조화 (152면)




32. 방법론상의 신뢰성의 요청은 옳은 결정일지라도 그에 대한 충분한 논증을 요구한다. (169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ROUTLEDGE Critical THINKERS(LP) 1
토니 마이어스 지음, 박정수 옮김 / 앨피 / 200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좀 더 고상한 차원에서 보자면, 통일된 자아 대신 분열된 주체를, 명증한 자기 의식 대신 무의식의 욕망을 강조하는 정신분석학은, 데카르트, 칸트, 헤겔로 대표되는 근대 이성 중심주의를 넘어서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한 분파로 받아들여진다. 정신분석학적 용어로 표현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증상들은 ‘억압된 것의 회귀’이다. 서양 중심주의에 의해 억압된 동양으로의 회귀, 이성 중심주의에 의해 억압된 자연, 광기, 몸의 회귀, 일자에 의해 억압된 분열하는 복수성의 회귀, 질서에 의해 억압된 생성과 혼돈의 회귀 ... (역자서문, 7면)




2. 정신분석학은 모든 현상(증상)에는 원인(외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명백히 자유의지에 따른 행위로 보이는 것도 실은 무의식적 원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정신분석학의 기본 전제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자기 의식의 주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자유의지의 외관이 은폐하고 있는 무의식적 타자의 욕망을 규명하는 것이 정신분석학의 해석학적 과제이다. (역사서문, 9, 10면)




3. 정신분석학이 정치학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체의 필연성을 절대화하거나 주체의 자유를 절대화하는 형이상학적 이데올로기에 감춰진 권력과 향락을 폭로하고, ‘실체는 주체’라는 유물변증법의 원리에 입각하여 실천을 조직하는 것이 정신분석학의 정치적 과제이다. (역자서문, 10면)




4. 지젝의 이 ‘놀라운 명민함’은 그의 놀람에서 비롯된다. 정말이지 그는 끊임없이 놀라서 묻는다. 왜 모든 것이 이와 같은가? 물론 지젝의 놀람은 일종의 전략이다. 그의 주장대로, 비판적 사고의 토대는 의혹과 경계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 (‘이것은 그와 같다’, ‘법은 법이다’ 등)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 순간, 우리가 현실로 대면하고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묻는 순간, “철학은 시작된다”. (22면)




5. 일상생활의 천박한 측면과 대중문화를 이론화하는 가운데 지젝은 전통철학의 한계를 드러낸다. ... 그래서 지젝이 다루는 대상은 철학 담론 내의 구멍, 곧 보통 적합한 이론적 제재를 구성하기 위해 이론의 영역에서 배제해온 것들이다. 이런 구멍을 다루는 행위가 일탈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가 철저하게 보수적인 관점, 즉 전통적인 철학의 관점을 견지하며 그것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25면)




6. 지젝의 특징적 제스처 중 하나는 부정의문문으로 자신의 해석을 공식화하는 것이다. (26면)




7. 지젝이 다른 사상가의 영향을 받은 분야는 주로 철학, 정치학, 정신분석학이다. 각 분야마다 그에게 주된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는데, 철학에서는 게오르그 헤겔, 정치학에서는 칼 마르크스, 정신분석학에서는 자크 라캉이다. (43면)




8. 지젝의 변증법은 한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음양에서부터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문화 전체가 진리는 절대적이라서 ‘네가 사물의 한면 만을 보고 내가 다른 면을 본다면 너와 나의 분열을 조화롭게 화해시켜 두 관점을 포괄하는 중용의 길도 존재한다.’는 생각에 입각해 있다. 그러나 지젝에게 진리는 언제나 차이의 매끄러운 소멸이 아니라 모순 속에서 발견된다. 이를 ‘모순어법적 사유방식’이라 부를 수 있다. (46면)




9. 자기 자신을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선언하는 지젝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이 갖는 가치와 진실을 확신하며, 더 나은 방법으로 사회를 조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다. (49면)




10. 그는 이데올로기를 개인들이 사회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정의한다. 이런 폭넓은 정의는 일찍이 사회적 역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규명 안에서 충분히 제기한 것이지만, 개인들에게 작동하는 방식은 해명된 바가 없었다.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의 본능적이고 심리적인 과정 속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이런 과정에 대한 이론을 발견하는 게 관건이다. 지젝은 자크 라캉에게서 그 이론을 발견한다. (51면)




11. 이런 동일화과정은 언뜻 안정된 통합 과정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이에게 예기된 통일성과 조화를 파괴하는 끔찍한 변덕의 힘으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아이의 자기 감각과 아이가 동일시하는 통일된 이미지 사이에는 항상 간극이 존재한다. 자아는 유아 자신이 아직 갖지 못한 힘을 가정하는 동일화를 통해 형성되기 때문에, 자아는 구성적으로 자기 자신과 자기 이미지 사이의 불일치로 찢기고 부서져 있다. 그래서 다른 것을 자신과 같은 것으로 화해시키려는 끝없는 노력이 남게 된다. (54면)




12. 왜 ‘끝없는’인가? 일단 어른이 되면 자아는 자신의 성격을 바꾸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일부분은 계속해서 처음의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성과 전체성을 찾고자 한다. 그래서 상상계는 넓은 의미에서 영원한 자기 찾기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자기 통일의 신화를 수립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본과 유사물의 사례를 융합시키는 과정이다. 그래서 상상계는 라캉과 지젝에게 항상 경멸의 시선을 받는 세계이다. 우리에게는 안됐지만, 라캉은 현대사회를 정점에 도달한 상상계로 본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강박되어 자신과 자신의 창조물을 세계 위에 둔다고 보기 때문이다. (54면)




13. 상징계는 언어로부터 법에 이르는 모든 사회적 체계들을 포함하는 가장 광범위한 세계이다. 상징계는 우리가 보통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의 긍정적인 부분을 구성한다. 상징계는 사회의 비인격적 틀로서, 거기서 우리는 다른 인간 존재들과 함께 특정한 공동체 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가령 대다수의 사람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상징계에 등록된다. 이미 이름이 정해지고, 가족이나 사회경제적 집단, 젠더, 인종 등에 소속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라캉은 상징계가 의미화 사슬signifying chain, 혹은 기표의 법law of signifier에 의해 통합되며,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 상징계 속에 갇혀 있다고 지적한다. (55면)




14. 언어는 자기 자신의 폐쇄된 세계를 형성하는 독립된 시스템이다. 다시 말해서, 언어는 경험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구성한다. (56면)




15. 지젝은 일관되게 라캉의 ‘소타자’와 ‘대타자’ 사이의 구분을 받아들인다. 소문자 ‘o(ther)'로 표기되는 타자는 항상 상상적 타자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자아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아를 가리킨다. 이에 반해 대문자 ’O(ther)'로 표기되는 ‘대타자’는 개별 주체들이 경험하는 상징적 질서를 가리키거나, 상징게로 대리표상되는 다른 주체를 가리킨다. 가령 법은 상징적 질서의 일부인 제도로서, 그 자체로 대타자이다. 경찰 역시 법이라는 제도를 대리표상하기 때문에 대타자이다. 경찰의 타자성은 경찰이 법의 대리자 혹은 법의 장소 점유자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따라서 이런 타자성은 동일화 과정으로 내면화될 수 없다는 점에서 상징계의 타자성보다 훨씬 더 극단적이다. (58면)




16. 실재계는 알 수 없는 삶의 영역을 가리킨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앎 전체는 언어를 통해 매개되어 있기 때문에 실재계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결코 직접적으로 세계를 알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실재계는 언어에 의해 포획되기 이전의 세계이다. (59면)




17. 이처럼 실재는 묘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세계의 각 부분적 요소들을 지시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라캉은 실제는 상징화에 저항한다고 쓴다. (60면)




18. 상징계는 실제계에 대해 작용한다. 라캉이 말했듯, 상징계는 실재계를 절단한다. 그것은 무수하게 다른 방법으로 실재를 분절한다. 그래서 실재를 인식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어떤 것이 상징화에 적용되지 않는 순간을 주목하는 것이다. (60면)




19. 에이즈에 대한 모든 해석은 그것을 상징화하기 위한 시도이며,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실재에서 어떤 메시지를 찾아내려는 시도이다. 실재는 무감각하고 무의미하다. 그것은 단지 있을 뿐이며, 의미는 오직 상징계의 현실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61면)




20. 실재와 상징계의 관계에서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만약 상징계가 실재에 대한 불완전하고 불충분한 재현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실재를 직접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 주체들은 사라질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만약 모든 것이 정확히 이해된 그대로라면, 모든 것이 자체의 충만함 속에서 온전히 파악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이 세계를 보는 방식과 내가 보는 방식 사이에 어떤 불일치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기표가 완벽하게 모든 기의와 부합한다면, 모든 기호가 모든 지시대상과 일치한다면, 결코 의미화 연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실재와 완전히 일치하는 상징적 질서 만이 존재할 것이다. 우리를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 우리를 주체로 만드는 것은 의미화 연쇄이며, 그에 대한 우리의 결정이다. 그것이 사라지면 그에 따라 우리 주체도 사라진다. 그래서 만약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에이즈가 CIA의 음모라는 것, 모든 인간 존재는 원숭이와 같은 부류라는 것, 새싹이 식물 세계의 가장 멋진 생산물이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인간 존재나 주체가 아닌 단지 상징적 질서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자동기계나 로봇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물리적으로 탈물질화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결정하고 선택하고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우리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63면)




21. 상징계에 맞서는 ‘실제의 철학자’ 지젝은 ‘실제의 철학자’라고도 불린다. ... 여기서 염두에 둘 점은, 지젝은 거의 언제나 상징계와의 관계 속에서 실재를 다룬다는 점이다. 이것은 지젝의 작업에 개성을 부여하는 특징 중 하나이다. 지젝이 국제적인 비평 무대에 등장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이론가들은 상징계와 상상계의 관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대 지젝은 실재와 상징계 사이의 적대성에 관심을 돌림으로써 성차적, 이데올로기적, 윤리적, 탈근대적 형상들 속의 주체를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었다. (65, 66면)




22. 지금까지 살펴본 두 주체 모델은 주체성을 과대평가하거나, 반대로 객관성을 과대평가하는 양 극단에 놓여 있다. 완성된 주체라면 자신의 존재를 위한 개별성의 영역을 보존하는 동시에, 우리가 거처해야 할 장소로서 어떤 비개별성의 토대 위에 발을 딛고 있음으로써 둘 간의 생산적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79면)




23. 라캉의 기본 개념인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를 이해한 사람이라면, 셸링에 대한 논의에서도 드러나듯 지젝이 항상 이 세 개념을 가지고 철학자들을 해석한다는 사실을 알아챌 것이다. 지젝 자신도 몇 차례 인정했듯, “내 작업의 핵심은 독일 관념론을 되살리기 위한 탁월한 지적 도구로 라캉을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88면)




24. 지젝에게 독일 관념론의 근본 통찰은, 어떤 것의 진실이 언제나 자기 외부에 있음을 발견한 데 있다. 가령 우리 경험의 진실은 우리 자신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계와 실재계, 즉 우리의 외부에 있다. 우리는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없으며, 자신이 진실로 누구인지 발견할 수 없다. 우리가 자신을 볼 수 없고, 자신이 진실로 누구인지 알 수 없으며, 자신의 고갱이를 응시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진실이 언제나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갱이는 다른 어딘가, 항상 우리보다 앞서 존재하는 상징적 구조와 그 상징계에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부정해야 하는 실재계 속에 있다. (89면)




25. 언급된 위험의 치명적인 공통점은 그것들이 ‘제조된 위험’이라는 점이다. 즉, 인간이 자연세계에 개입함으로써 만들어진 결과이다. 이런 개입은 너무나 심대하여 이젠 더 이상 자연 스스로 치유하고 해법을 찾기를 바랄 수도 없게 됐다. 왜냐하면 이런 위험들은 자연 자체의 탈선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런 위험의 발생 확률을 낮추기 위해 우리는 또다시 과학기술의 개입을 늘릴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은 또 다른 예측 불허의 결과들을 양산한다. 한 마디로, 우리는 한 가지 위험의 감소가 또 다른 위험의 발생으로 이어지는, 환경을 통제하려는 새로운 시도가 또다시 새로운 불확실성을 양산하는 ‘자기재귀적인’ 올가미에 사로잡혀 있다. (101면)




26. 지젝에 따르면, 탈근대성을 이해하는 열쇠는 이 ‘재귀성(reflexivity)'에 있다. 우리는 우리가 짠 거미줄에 걸려 있다. 과학자들과 정부 관료들 모두 이렇게 제조된 위험들이 일으킬 재난의 정도와 범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그 위험들이 너무 복잡해서가 아니라 너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101면)




27. 불투명성은 오늘날의 사회가 전적으로 ‘재귀적’이라는 사실, 의존할 만한 확고한 토대를 제공하는 어떠한 자연이나 전통도 없다는 사실에 기반해 있다. (102면)




28. 우리는 지금 완벽하게 주관적인 세계,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물어볼 수 있는 세계, 자연세계나 전통과 관습 어디에도 실질적인 기반을 두고 있지 않은 세계에 살고 있다. (102면)




29. 지젝에게 재귀성의 보편화가 지닌 핵심적인 측면은 대타자의 최종적인 붕괴, 사회제도,관습, 법 등 공동 네트워크의 붕괴이다. 지젝은 이런 붕괴를 라캉의 신에 관한 설명과 비교한다. 라캉은 오늘날 신이 죽은 게 아니라 언제나 죽어 있었는데, 다만 신 자신이 그 사실을 알지못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하게, 대타자는 애초부터 물질적 존재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언제나 죽어 있었다. 지금까지 대타자는 순전히 상징적, 허구적인 질서였던 것이다. (103면)




30. 우리는 대타자의 말(상징계 속에서 입고 있는 옷)보다는 (실제로 벌거벗은 것을 보는) 우리 자신의 눈을 믿는다. 지젝은 이를 위선을 벗어던진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라,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 자체가 해체되는, 우리가 의도한 것 이상의 결과가 초래되는 상황으로 본다. 상징적 효력이 치명적으로 손상되는 상황 말이다. (104면)




31. 내 인격의 서로 다른 측면들은 상징적 질서 속에서 동등한 지위를 갖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나 자신의 사회, 경제적 위치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상징적 효력을 공표하는 대타자에 의해 등록된 자기 혹은 자기들이다. (106면)




32. 가장 분명한 효과는 대타자의 권위가 사라짐으로써, 우리가 더 이상 자연이나 전통의 주체가 아닌 선택의 주체가 된다는 점이다. (107면)




33. 우리는 모두 무엇을 선택하든지 절대적으로 자유롭다. 이 지점에서 지젝은 자율적 주체에 대한 믿음이 지닌 위험성과는 별도로, 오늘날 우리 삶에서 증가하는 ‘재귀화reflexivizaton'와 그로 인한 상징적 효력의 붕괴 역시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문제들 중 하나는 점차 강화되고 있는 ‘복종에 대한 집착’이다. 지젝은 우리가 더 이상 대타자의 법에 종속되지 않게 되면, 이런 공식적인 권위의 상실을 벌충하기 위해 ‘사적인 법’이나 지배종속 관계에 호소하기 쉽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지젝은 가학-피학(사도마조히즘)적인 성애의 증가를 든다. (108면)




34. 가령 욕망은 그 자체로 불만족을 나타내기 때문에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라캉 이론의 상식이다. (108면)




35. 지젝에 따르면, 이 모든 경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위험사회 이론가들이 간과해 온, 주체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재귀성’이다. 이론가들은 탈근대적 주체의 재귀적 자유를 찬미하기에 바빴지, 주체가 그런 와중에 ‘언제나 이미’ 존재하는 재귀성으로 그 자유를 화해시킨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109면)




36. 우리는 소위 관용적인 서구 사회에서 이를 목격할 수 있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향락의 이미지와 쾌락에 대한 몰두를 보면, 이젠 더 이상 성적 쾌락이 금지되어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지젝의 말처럼, 성적 희열은 이미 공식 이데올로기의 지위를 차지했다. 더 나아가 이제는 섹스를 즐기라고 강요받는다. 이 뻔뻔함, “즐겨라!”는 이 명령은 초자아의 귀환을 표시한다. (109면)




37. 우리에게는 아무런 해석 규칙이나 규범도 없다. 따라서 대타자의 붕괴가 이를 보상하기 위해 무수히 작은 타자들, 혹은 부분적인 대타자들을 발생시킨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지젝은 그 증거를 과학기술의 성과에서 비롯된 윤리적 딜레마들을 해결하기 위해 자꾸 전문가 위원회를 찾는 경향에서 찾는다. 이런 위원회의 증가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상징적 금기들의 부재를 시사한다. 이런 상징적 금기들의 부재 때문에, 각종 윤리위원회들은 사이버 스페이스, 유전자생물학, 의학 등에 관한 규제 원칙들을 창안해야 한다. ... 이런 윤리적 난제들에 대한 해명 책임을 이들 위원회에 떠넘김으로써, 개별 주체들은 본래 자기들 몫이었던 해명의 자유가 주는 부담을 털어버린다. (114면)




38. 대타자의 소멸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의 상실이 가져온 참을 수 없는 자유를 회피하기 위해 타자의 타자를 구성하도록 만든다. 그런데 반대로, 만약 타자의 타자를 믿는다면 우리는 대타자를 진지하게 취급할 필요가 전혀 없다. 따라서 우리는 냉소와 믿음을 동시에 동등한 무게로 드러낸다. (115면)




39. 우리는 돈이 그 자체로는 아무 가치가 없음을 안다. 그것은 단지 간접적인 부의 표현이고, 그 가치는 사회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제3세계의 노동착취 공장에 반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치 돈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인양 행동한다. 지젝은 이처럼 자기 잘못을 알고 있으면서도 변함없이 계속되는 행동이 ‘이데올로기적 환영’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데올로기는 ‘앎’이 아니라 ‘행함’의 차원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나이키 신발이 제3세계 노동착취 공장에서 생산됐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나이키 신발을 사 신고 있는 것이다. (133면)




40. 환상 속에서 실현된 욕망은 오직 충족의 지연에 의해서만, 욕망의 영속화를 통해서만 ‘만족된다’. 욕망이 만족되자마자 욕망은 완수되었기 때문에 사라진다. (181면)




41. 욕망의 문제는 직접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타자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181면)




42. 아프간 소녀의 편지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아프간은 근본주의의 중심이자 우리나라의 적이라는 우리의 ‘지식’에 의해 왜상적으로 뒤틀려 있다. 인종적 ‘타자’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언제나 우리 자신의 혈통이라는 인종적 얼룩에 종속되어 있다. (188면)




43. 우리는 ‘타자’와 공유하고 있는 어떤 보편적 특질 때문에 그들을 존중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우리와 공유하지 않는 것 때문에, 즉 우리와 다른 환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 (199면)




44. 지젝의 통찰이 지닌 탁월함은 라캉적 패러다임에 기대면서도 그것을 헤겔과 마르크스에 공명시켜 녹여냈다는 점이다. (207면)




45. 데리다의 작업이 시간의 비동일성에 대한 광범위한 분석이라면, 지젝의 작업은 자기동일성의 결여를 분석한다고 할 수 있다. 둘 다 전체의 보전을 방해하며 거기에서 돌출해 나온 요소가 존재한다. (210면)




46. 지젝 이후의 라캉 정신분석학은 주로 상상계를, 몇몇 경우에는 상징계를 주목해왔다. 그러나 지젝 이후 우리의 관심은 이 두 계와 실재계의 상호작용에 모아졌다. 이것은 주체의 위상을 변경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211면)




47. 개별적인 가치를 무시한 것의 반대 급부로 보편적인 예외의 성취 가능성조차 부정하고 오직 특수한 것만을 평가하는 오늘날, 헤겔은 분명 구시대 철학자로 보인다. 지젝은 그런 주장들에 존재하는 전체성(전체에 대한 개념)과 전체주의(전체의 무제한적 지배) 사이의 혼돈을 혐오한다. (212면)




48. 순수한 객관성이 존재하지 않는 만큼 순수한 주관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215면)




49. 데리다의 모든 저작은 시간의 비자기동일성을 해명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데리다에 따르면, 주체의 경험은 결코 자기 자신과 동시 발생적이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자기분열적, 혹은 자기분할적이다. 이는 주체가 자신의 경험을 제 자신에게 재현하는 방식인 언엉 관한 이론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215면)




50. 지젝은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 사이의 방법론적 유사성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킨다. 지젝이 주장하듯이, 두 분야의 토대는 물질적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이론을 공식화하려는 데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를 개선시키고자 하며, 정신분석학은 환자의 상태를 개선시키고자 한다. (219면)




51. 지젝에 따르면, 푸코는 국가권력을 사회에 포함될 자와 배제될 자를 선별하는 강제의 작인으로 본다. (220면)




52. 지젝에 대한 가장 폭넓은 비난 중 하나는 그 비판의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224면)




53.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정체성 집단들이 오직 자신들만의 특수한 불평등 개선에 집중할 때 전체오의 상호관계를 놓친다고 비판하고, 반대로 정체성 집단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관계의 총체성에만 몰두한 나머지 개별 국민들의 구체적인 욕구를 간과한다고 주장한다. (227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