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좀 더 고상한 차원에서 보자면, 통일된 자아 대신 분열된 주체를, 명증한 자기 의식 대신 무의식의 욕망을 강조하는 정신분석학은, 데카르트, 칸트, 헤겔로 대표되는 근대 이성 중심주의를 넘어서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한 분파로 받아들여진다. 정신분석학적 용어로 표현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증상들은 ‘억압된 것의 회귀’이다. 서양 중심주의에 의해 억압된 동양으로의 회귀, 이성 중심주의에 의해 억압된 자연, 광기, 몸의 회귀, 일자에 의해 억압된 분열하는 복수성의 회귀, 질서에 의해 억압된 생성과 혼돈의 회귀 ... (역자서문, 7면)
2. 정신분석학은 모든 현상(증상)에는 원인(외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명백히 자유의지에 따른 행위로 보이는 것도 실은 무의식적 원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정신분석학의 기본 전제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자기 의식의 주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자유의지의 외관이 은폐하고 있는 무의식적 타자의 욕망을 규명하는 것이 정신분석학의 해석학적 과제이다. (역사서문, 9, 10면)
3. 정신분석학이 정치학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체의 필연성을 절대화하거나 주체의 자유를 절대화하는 형이상학적 이데올로기에 감춰진 권력과 향락을 폭로하고, ‘실체는 주체’라는 유물변증법의 원리에 입각하여 실천을 조직하는 것이 정신분석학의 정치적 과제이다. (역자서문, 10면)
4. 지젝의 이 ‘놀라운 명민함’은 그의 놀람에서 비롯된다. 정말이지 그는 끊임없이 놀라서 묻는다. 왜 모든 것이 이와 같은가? 물론 지젝의 놀람은 일종의 전략이다. 그의 주장대로, 비판적 사고의 토대는 의혹과 경계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 (‘이것은 그와 같다’, ‘법은 법이다’ 등)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 순간, 우리가 현실로 대면하고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묻는 순간, “철학은 시작된다”. (22면)
5. 일상생활의 천박한 측면과 대중문화를 이론화하는 가운데 지젝은 전통철학의 한계를 드러낸다. ... 그래서 지젝이 다루는 대상은 철학 담론 내의 구멍, 곧 보통 적합한 이론적 제재를 구성하기 위해 이론의 영역에서 배제해온 것들이다. 이런 구멍을 다루는 행위가 일탈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가 철저하게 보수적인 관점, 즉 전통적인 철학의 관점을 견지하며 그것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25면)
6. 지젝의 특징적 제스처 중 하나는 부정의문문으로 자신의 해석을 공식화하는 것이다. (26면)
7. 지젝이 다른 사상가의 영향을 받은 분야는 주로 철학, 정치학, 정신분석학이다. 각 분야마다 그에게 주된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는데, 철학에서는 게오르그 헤겔, 정치학에서는 칼 마르크스, 정신분석학에서는 자크 라캉이다. (43면)
8. 지젝의 변증법은 한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음양에서부터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문화 전체가 진리는 절대적이라서 ‘네가 사물의 한면 만을 보고 내가 다른 면을 본다면 너와 나의 분열을 조화롭게 화해시켜 두 관점을 포괄하는 중용의 길도 존재한다.’는 생각에 입각해 있다. 그러나 지젝에게 진리는 언제나 차이의 매끄러운 소멸이 아니라 모순 속에서 발견된다. 이를 ‘모순어법적 사유방식’이라 부를 수 있다. (46면)
9. 자기 자신을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선언하는 지젝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이 갖는 가치와 진실을 확신하며, 더 나은 방법으로 사회를 조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다. (49면)
10. 그는 이데올로기를 개인들이 사회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정의한다. 이런 폭넓은 정의는 일찍이 사회적 역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규명 안에서 충분히 제기한 것이지만, 개인들에게 작동하는 방식은 해명된 바가 없었다.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의 본능적이고 심리적인 과정 속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이런 과정에 대한 이론을 발견하는 게 관건이다. 지젝은 자크 라캉에게서 그 이론을 발견한다. (51면)
11. 이런 동일화과정은 언뜻 안정된 통합 과정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이에게 예기된 통일성과 조화를 파괴하는 끔찍한 변덕의 힘으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아이의 자기 감각과 아이가 동일시하는 통일된 이미지 사이에는 항상 간극이 존재한다. 자아는 유아 자신이 아직 갖지 못한 힘을 가정하는 동일화를 통해 형성되기 때문에, 자아는 구성적으로 자기 자신과 자기 이미지 사이의 불일치로 찢기고 부서져 있다. 그래서 다른 것을 자신과 같은 것으로 화해시키려는 끝없는 노력이 남게 된다. (54면)
12. 왜 ‘끝없는’인가? 일단 어른이 되면 자아는 자신의 성격을 바꾸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일부분은 계속해서 처음의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성과 전체성을 찾고자 한다. 그래서 상상계는 넓은 의미에서 영원한 자기 찾기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자기 통일의 신화를 수립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본과 유사물의 사례를 융합시키는 과정이다. 그래서 상상계는 라캉과 지젝에게 항상 경멸의 시선을 받는 세계이다. 우리에게는 안됐지만, 라캉은 현대사회를 정점에 도달한 상상계로 본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강박되어 자신과 자신의 창조물을 세계 위에 둔다고 보기 때문이다. (54면)
13. 상징계는 언어로부터 법에 이르는 모든 사회적 체계들을 포함하는 가장 광범위한 세계이다. 상징계는 우리가 보통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의 긍정적인 부분을 구성한다. 상징계는 사회의 비인격적 틀로서, 거기서 우리는 다른 인간 존재들과 함께 특정한 공동체 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가령 대다수의 사람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상징계에 등록된다. 이미 이름이 정해지고, 가족이나 사회경제적 집단, 젠더, 인종 등에 소속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라캉은 상징계가 의미화 사슬signifying chain, 혹은 기표의 법law of signifier에 의해 통합되며,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 상징계 속에 갇혀 있다고 지적한다. (55면)
14. 언어는 자기 자신의 폐쇄된 세계를 형성하는 독립된 시스템이다. 다시 말해서, 언어는 경험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구성한다. (56면)
15. 지젝은 일관되게 라캉의 ‘소타자’와 ‘대타자’ 사이의 구분을 받아들인다. 소문자 ‘o(ther)'로 표기되는 타자는 항상 상상적 타자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자아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아를 가리킨다. 이에 반해 대문자 ’O(ther)'로 표기되는 ‘대타자’는 개별 주체들이 경험하는 상징적 질서를 가리키거나, 상징게로 대리표상되는 다른 주체를 가리킨다. 가령 법은 상징적 질서의 일부인 제도로서, 그 자체로 대타자이다. 경찰 역시 법이라는 제도를 대리표상하기 때문에 대타자이다. 경찰의 타자성은 경찰이 법의 대리자 혹은 법의 장소 점유자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따라서 이런 타자성은 동일화 과정으로 내면화될 수 없다는 점에서 상징계의 타자성보다 훨씬 더 극단적이다. (58면)
16. 실재계는 알 수 없는 삶의 영역을 가리킨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앎 전체는 언어를 통해 매개되어 있기 때문에 실재계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결코 직접적으로 세계를 알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실재계는 언어에 의해 포획되기 이전의 세계이다. (59면)
17. 이처럼 실재는 묘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세계의 각 부분적 요소들을 지시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라캉은 실제는 상징화에 저항한다고 쓴다. (60면)
18. 상징계는 실제계에 대해 작용한다. 라캉이 말했듯, 상징계는 실재계를 절단한다. 그것은 무수하게 다른 방법으로 실재를 분절한다. 그래서 실재를 인식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어떤 것이 상징화에 적용되지 않는 순간을 주목하는 것이다. (60면)
19. 에이즈에 대한 모든 해석은 그것을 상징화하기 위한 시도이며,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실재에서 어떤 메시지를 찾아내려는 시도이다. 실재는 무감각하고 무의미하다. 그것은 단지 있을 뿐이며, 의미는 오직 상징계의 현실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61면)
20. 실재와 상징계의 관계에서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만약 상징계가 실재에 대한 불완전하고 불충분한 재현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실재를 직접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 주체들은 사라질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만약 모든 것이 정확히 이해된 그대로라면, 모든 것이 자체의 충만함 속에서 온전히 파악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이 세계를 보는 방식과 내가 보는 방식 사이에 어떤 불일치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기표가 완벽하게 모든 기의와 부합한다면, 모든 기호가 모든 지시대상과 일치한다면, 결코 의미화 연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실재와 완전히 일치하는 상징적 질서 만이 존재할 것이다. 우리를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 우리를 주체로 만드는 것은 의미화 연쇄이며, 그에 대한 우리의 결정이다. 그것이 사라지면 그에 따라 우리 주체도 사라진다. 그래서 만약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에이즈가 CIA의 음모라는 것, 모든 인간 존재는 원숭이와 같은 부류라는 것, 새싹이 식물 세계의 가장 멋진 생산물이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인간 존재나 주체가 아닌 단지 상징적 질서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자동기계나 로봇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물리적으로 탈물질화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결정하고 선택하고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우리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63면)
21. 상징계에 맞서는 ‘실제의 철학자’ 지젝은 ‘실제의 철학자’라고도 불린다. ... 여기서 염두에 둘 점은, 지젝은 거의 언제나 상징계와의 관계 속에서 실재를 다룬다는 점이다. 이것은 지젝의 작업에 개성을 부여하는 특징 중 하나이다. 지젝이 국제적인 비평 무대에 등장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이론가들은 상징계와 상상계의 관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대 지젝은 실재와 상징계 사이의 적대성에 관심을 돌림으로써 성차적, 이데올로기적, 윤리적, 탈근대적 형상들 속의 주체를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었다. (65, 66면)
22. 지금까지 살펴본 두 주체 모델은 주체성을 과대평가하거나, 반대로 객관성을 과대평가하는 양 극단에 놓여 있다. 완성된 주체라면 자신의 존재를 위한 개별성의 영역을 보존하는 동시에, 우리가 거처해야 할 장소로서 어떤 비개별성의 토대 위에 발을 딛고 있음으로써 둘 간의 생산적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79면)
23. 라캉의 기본 개념인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를 이해한 사람이라면, 셸링에 대한 논의에서도 드러나듯 지젝이 항상 이 세 개념을 가지고 철학자들을 해석한다는 사실을 알아챌 것이다. 지젝 자신도 몇 차례 인정했듯, “내 작업의 핵심은 독일 관념론을 되살리기 위한 탁월한 지적 도구로 라캉을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88면)
24. 지젝에게 독일 관념론의 근본 통찰은, 어떤 것의 진실이 언제나 자기 외부에 있음을 발견한 데 있다. 가령 우리 경험의 진실은 우리 자신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계와 실재계, 즉 우리의 외부에 있다. 우리는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없으며, 자신이 진실로 누구인지 발견할 수 없다. 우리가 자신을 볼 수 없고, 자신이 진실로 누구인지 알 수 없으며, 자신의 고갱이를 응시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진실이 언제나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갱이는 다른 어딘가, 항상 우리보다 앞서 존재하는 상징적 구조와 그 상징계에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부정해야 하는 실재계 속에 있다. (89면)
25. 언급된 위험의 치명적인 공통점은 그것들이 ‘제조된 위험’이라는 점이다. 즉, 인간이 자연세계에 개입함으로써 만들어진 결과이다. 이런 개입은 너무나 심대하여 이젠 더 이상 자연 스스로 치유하고 해법을 찾기를 바랄 수도 없게 됐다. 왜냐하면 이런 위험들은 자연 자체의 탈선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런 위험의 발생 확률을 낮추기 위해 우리는 또다시 과학기술의 개입을 늘릴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은 또 다른 예측 불허의 결과들을 양산한다. 한 마디로, 우리는 한 가지 위험의 감소가 또 다른 위험의 발생으로 이어지는, 환경을 통제하려는 새로운 시도가 또다시 새로운 불확실성을 양산하는 ‘자기재귀적인’ 올가미에 사로잡혀 있다. (101면)
26. 지젝에 따르면, 탈근대성을 이해하는 열쇠는 이 ‘재귀성(reflexivity)'에 있다. 우리는 우리가 짠 거미줄에 걸려 있다. 과학자들과 정부 관료들 모두 이렇게 제조된 위험들이 일으킬 재난의 정도와 범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그 위험들이 너무 복잡해서가 아니라 너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101면)
27. 불투명성은 오늘날의 사회가 전적으로 ‘재귀적’이라는 사실, 의존할 만한 확고한 토대를 제공하는 어떠한 자연이나 전통도 없다는 사실에 기반해 있다. (102면)
28. 우리는 지금 완벽하게 주관적인 세계,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물어볼 수 있는 세계, 자연세계나 전통과 관습 어디에도 실질적인 기반을 두고 있지 않은 세계에 살고 있다. (102면)
29. 지젝에게 재귀성의 보편화가 지닌 핵심적인 측면은 대타자의 최종적인 붕괴, 사회제도,관습, 법 등 공동 네트워크의 붕괴이다. 지젝은 이런 붕괴를 라캉의 신에 관한 설명과 비교한다. 라캉은 오늘날 신이 죽은 게 아니라 언제나 죽어 있었는데, 다만 신 자신이 그 사실을 알지못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하게, 대타자는 애초부터 물질적 존재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언제나 죽어 있었다. 지금까지 대타자는 순전히 상징적, 허구적인 질서였던 것이다. (103면)
30. 우리는 대타자의 말(상징계 속에서 입고 있는 옷)보다는 (실제로 벌거벗은 것을 보는) 우리 자신의 눈을 믿는다. 지젝은 이를 위선을 벗어던진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라,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 자체가 해체되는, 우리가 의도한 것 이상의 결과가 초래되는 상황으로 본다. 상징적 효력이 치명적으로 손상되는 상황 말이다. (104면)
31. 내 인격의 서로 다른 측면들은 상징적 질서 속에서 동등한 지위를 갖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나 자신의 사회, 경제적 위치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상징적 효력을 공표하는 대타자에 의해 등록된 자기 혹은 자기들이다. (106면)
32. 가장 분명한 효과는 대타자의 권위가 사라짐으로써, 우리가 더 이상 자연이나 전통의 주체가 아닌 선택의 주체가 된다는 점이다. (107면)
33. 우리는 모두 무엇을 선택하든지 절대적으로 자유롭다. 이 지점에서 지젝은 자율적 주체에 대한 믿음이 지닌 위험성과는 별도로, 오늘날 우리 삶에서 증가하는 ‘재귀화reflexivizaton'와 그로 인한 상징적 효력의 붕괴 역시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문제들 중 하나는 점차 강화되고 있는 ‘복종에 대한 집착’이다. 지젝은 우리가 더 이상 대타자의 법에 종속되지 않게 되면, 이런 공식적인 권위의 상실을 벌충하기 위해 ‘사적인 법’이나 지배종속 관계에 호소하기 쉽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지젝은 가학-피학(사도마조히즘)적인 성애의 증가를 든다. (108면)
34. 가령 욕망은 그 자체로 불만족을 나타내기 때문에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라캉 이론의 상식이다. (108면)
35. 지젝에 따르면, 이 모든 경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위험사회 이론가들이 간과해 온, 주체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재귀성’이다. 이론가들은 탈근대적 주체의 재귀적 자유를 찬미하기에 바빴지, 주체가 그런 와중에 ‘언제나 이미’ 존재하는 재귀성으로 그 자유를 화해시킨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109면)
36. 우리는 소위 관용적인 서구 사회에서 이를 목격할 수 있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향락의 이미지와 쾌락에 대한 몰두를 보면, 이젠 더 이상 성적 쾌락이 금지되어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지젝의 말처럼, 성적 희열은 이미 공식 이데올로기의 지위를 차지했다. 더 나아가 이제는 섹스를 즐기라고 강요받는다. 이 뻔뻔함, “즐겨라!”는 이 명령은 초자아의 귀환을 표시한다. (109면)
37. 우리에게는 아무런 해석 규칙이나 규범도 없다. 따라서 대타자의 붕괴가 이를 보상하기 위해 무수히 작은 타자들, 혹은 부분적인 대타자들을 발생시킨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지젝은 그 증거를 과학기술의 성과에서 비롯된 윤리적 딜레마들을 해결하기 위해 자꾸 전문가 위원회를 찾는 경향에서 찾는다. 이런 위원회의 증가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상징적 금기들의 부재를 시사한다. 이런 상징적 금기들의 부재 때문에, 각종 윤리위원회들은 사이버 스페이스, 유전자생물학, 의학 등에 관한 규제 원칙들을 창안해야 한다. ... 이런 윤리적 난제들에 대한 해명 책임을 이들 위원회에 떠넘김으로써, 개별 주체들은 본래 자기들 몫이었던 해명의 자유가 주는 부담을 털어버린다. (114면)
38. 대타자의 소멸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의 상실이 가져온 참을 수 없는 자유를 회피하기 위해 타자의 타자를 구성하도록 만든다. 그런데 반대로, 만약 타자의 타자를 믿는다면 우리는 대타자를 진지하게 취급할 필요가 전혀 없다. 따라서 우리는 냉소와 믿음을 동시에 동등한 무게로 드러낸다. (115면)
39. 우리는 돈이 그 자체로는 아무 가치가 없음을 안다. 그것은 단지 간접적인 부의 표현이고, 그 가치는 사회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제3세계의 노동착취 공장에 반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치 돈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인양 행동한다. 지젝은 이처럼 자기 잘못을 알고 있으면서도 변함없이 계속되는 행동이 ‘이데올로기적 환영’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데올로기는 ‘앎’이 아니라 ‘행함’의 차원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나이키 신발이 제3세계 노동착취 공장에서 생산됐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나이키 신발을 사 신고 있는 것이다. (133면)
40. 환상 속에서 실현된 욕망은 오직 충족의 지연에 의해서만, 욕망의 영속화를 통해서만 ‘만족된다’. 욕망이 만족되자마자 욕망은 완수되었기 때문에 사라진다. (181면)
41. 욕망의 문제는 직접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타자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181면)
42. 아프간 소녀의 편지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아프간은 근본주의의 중심이자 우리나라의 적이라는 우리의 ‘지식’에 의해 왜상적으로 뒤틀려 있다. 인종적 ‘타자’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언제나 우리 자신의 혈통이라는 인종적 얼룩에 종속되어 있다. (188면)
43. 우리는 ‘타자’와 공유하고 있는 어떤 보편적 특질 때문에 그들을 존중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우리와 공유하지 않는 것 때문에, 즉 우리와 다른 환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 (199면)
44. 지젝의 통찰이 지닌 탁월함은 라캉적 패러다임에 기대면서도 그것을 헤겔과 마르크스에 공명시켜 녹여냈다는 점이다. (207면)
45. 데리다의 작업이 시간의 비동일성에 대한 광범위한 분석이라면, 지젝의 작업은 자기동일성의 결여를 분석한다고 할 수 있다. 둘 다 전체의 보전을 방해하며 거기에서 돌출해 나온 요소가 존재한다. (210면)
46. 지젝 이후의 라캉 정신분석학은 주로 상상계를, 몇몇 경우에는 상징계를 주목해왔다. 그러나 지젝 이후 우리의 관심은 이 두 계와 실재계의 상호작용에 모아졌다. 이것은 주체의 위상을 변경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211면)
47. 개별적인 가치를 무시한 것의 반대 급부로 보편적인 예외의 성취 가능성조차 부정하고 오직 특수한 것만을 평가하는 오늘날, 헤겔은 분명 구시대 철학자로 보인다. 지젝은 그런 주장들에 존재하는 전체성(전체에 대한 개념)과 전체주의(전체의 무제한적 지배) 사이의 혼돈을 혐오한다. (212면)
48. 순수한 객관성이 존재하지 않는 만큼 순수한 주관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215면)
49. 데리다의 모든 저작은 시간의 비자기동일성을 해명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데리다에 따르면, 주체의 경험은 결코 자기 자신과 동시 발생적이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자기분열적, 혹은 자기분할적이다. 이는 주체가 자신의 경험을 제 자신에게 재현하는 방식인 언엉 관한 이론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215면)
50. 지젝은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 사이의 방법론적 유사성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킨다. 지젝이 주장하듯이, 두 분야의 토대는 물질적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이론을 공식화하려는 데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를 개선시키고자 하며, 정신분석학은 환자의 상태를 개선시키고자 한다. (219면)
51. 지젝에 따르면, 푸코는 국가권력을 사회에 포함될 자와 배제될 자를 선별하는 강제의 작인으로 본다. (220면)
52. 지젝에 대한 가장 폭넓은 비난 중 하나는 그 비판의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224면)
53.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정체성 집단들이 오직 자신들만의 특수한 불평등 개선에 집중할 때 전체오의 상호관계를 놓친다고 비판하고, 반대로 정체성 집단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관계의 총체성에만 몰두한 나머지 개별 국민들의 구체적인 욕구를 간과한다고 주장한다. (22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