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자연의 비밀 연대 - 위기의 시대,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움을 향한 새로운 시선
페터 볼레벤 지음, 강영옥 옮김, 남효창 감수 / 더숲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페터 볼레렌의 전작을 읽어 본 기억이 있다. 이전 책의 읽은 <자연의 비밀 네트워크>. 뭔가 의미심장한 제목의 책이고, 책의 표지 또한 아름다워서 꼭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 저자의 전작인 <자연의 비밀 네트워크>는 보이지 않는 자연의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땅속의 작은 미생물에서부터, 그 미생물을 보지도 못할 하늘을 나는 새까지.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할 존재들간에는 어떠한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는지, 또 이런 네트워크 안에서는 어떤 상호작용이 일어나며, 결과론적으로 공생을 하는 환경이 만들어 지는지. 알려준 책이 <자연의 비밀 네트워크>였다.

이번 책 <인간과 자연의 비밀 연대>는 독특한 책이다. 그런데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에. 책의 제목을 한번 보도록 하자. 책의 표지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우리는 아직 자연과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문장에서 누구나 그렇겠지만, 가장 사람들의 눈길을 잡을 단어는 아마 아직일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계속해서 자연의 도움 없이도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인공으로 만든 자연을 통해, 자연을 사유화의 대상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바로 이 같은 현 상황 때문이다. 인공으로 만든 자연이 아닌, 과연 온전하 자연이 우리에게 뭘 해줄 수 있을지. ‘라는 존재는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지. 이 책 <인간과 자연의 비밀 네트워크>를 통해 알고 싶었다.

 

인간과 자연의 비밀 네트워크

 

인간과 숲의 밀접한 관계는 언어에서 또 메아리친다. 첫 번째 연관성은 우리 손에 들린 책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나는 책이라는 제품이 아니라, 독일어로 책을 의미하는 Buch라는 단어를 말하는 것이다. 이 단어의 스펠링에서 어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고, 그림 형제가 퍼뜩 떠오르기 때문이다.” - 163pp

 

이 책 <인간과 자연의 비밀 네트워크>는 솔직히 읽는 내내 약간 과장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책이다. 저자의 이전 책을 읽었을 때 느껴지는 것은, 환상적인 네트워크의 모양이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곳, 인식하지 못하는곳, 보지 못하는 곳, 느끼지 못하는 곳에서 은밀히 이뤄지는 상호작용이 어떻게, ‘라는 숲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풍성하게 만드는지 보여준 책 이었다. 하지만 이 책 <인간과 자연의 비밀 네트워크>는 솔직히 이전 책만큼의 강력한 상호작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 현재 인간과 자연이 어떠한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 과거의 이야기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우리 일상에서 자연과 관련된 것들이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책은 알려준다. 또한 불과 같이, 인간이 불을 통해서 자연과 상호작용을 어떠한 방식으로 하는지 이 책은 알려준다. 그래서 이 책은 현재의 이야기이기보다, 과거의 이야기에 가깝다. 과거에는 우리 인간이 자연과 얼마나 진득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여파가 현재는 어떻나 형태로 우리의 일상에 남아있는지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과거 인간과 자연의 관계라고 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책의 내용을 뻔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인간이 자연에서 의식주를 구한 것처럼, 원시시대에 자연속에서 인간의 삶만을 조명했다고 누군가는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야기한다면, 분명히 그런 측면이 있지만, 그런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 한 조각이었다. <자연의 비밀 네트워크>에서, 그 수많은 동물들이 자연과 상호작용 하고, 자연을 더욱 번영하게 만든 것처럼, 우리 인간 또한 그런 기여를 한 적이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가장 재미있는 지점은 바로 이것이다. 과거 우리 인류는 단순히 자연을 경외의 대상으로만, 혹은 지금처럼 지배의 대상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결과론적으로 그러한 방향으로만 가지 않았다는 것을, 이 책은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얀 까마귀 SF가 우릴 지켜줄 거야 3
박지안 지음 / 허블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얀 까마귀>. 참 재미있는 책이다. 책의 도입부를 읽을 때는 내 고등학교 때를 회상케 했다. 만약 야자시간에 이 같은 책을 읽고 있었다면, 지나가던 감독관 선생님이 나를 과연 가만히 놔두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여성BJ가 나오고 VR게임을 하는 게 나온다. 분명히 선생님은 이 자식이 저급한 게임소설을 읽네!”라고 하면서 머리를 툭 때리며 벌을 세웠을지 모르겠다.

내가 생각해도 당시에 친구들이 읽었던 책들은 솔직히 저급하긴 했다. 내가 읽었던 것은 박성호 작가의 <아이리스>라는 작품(?)이었다. 박영웅이라는 아이가 판타지세계로 덜어져 아이언 이그리드인가 하는 마법사에게 마법을 물려받고, 사기캐릭터가 돼, 몰락한 제국을 재건하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소설 외에 내가 제대로 읽은 소설은 아마 없을 것이다. 재미있게 <아이리스>를 읽긴 했지만, 돌이켜보면 그 게임소설이나 판타지소설들은 선생님이 이야기한데로 실제 저급하긴 했다. 그리고 그 저급성이란, 문학적 기술이 뒷받침되기는커녕, 그냥 사람들의 본능만 자극하는 작품으로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일본 만화에서 주로 나오는 벗은 여성들이 나오는 모습이나, 끊임없이 강해지는 주인공과 같이 말이다(물론, 일본 만하라고 해서 다 한심한 축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코노스바(물론 이 만화도 재미있긴 하다)와 같은 것이 대표적인 것일테고, 라이트노벨과 같은 것에 선생님들이 이야기 한 저급한 것으로 분류될 수 있는게 많을 것이다). 별 테크닉 없이 원초적인 방향으로 가는 그런 서사를 가리켜서 선생님들은 저급하다라 표현한 것일 테다.

하지만 이번에 읽은 책 <하얀 까마귀>는 그런 저급한 소설들과 견줄게 되지 못한다. 전체적인 짜임새도 긴장감이 넘쳐 흐른다. 그리고 세계관 또한 나름 적절한 것 같기는 하다. 특별히 이 소설이 갖고 있는 메시지는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워낙 스토리가 탄탄해서인지, 읽고 난 후에 메시지가 과연 필요할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얀 까마귀

 

어떻게 이 작품을 설명해야 할까. 솔직히 다른 작품들에게는 미안하지만 ‘SF가 우릴 지켜줄 거야시리즈 중에 가장 오락적으로는 재미있었던 작품이 <하얀 까마귀>였다. 세계관이 특별할 것은 없었다. 주인공이 가상 공간으로 덜어져, 자신의 과거에 있었던 특정 사건으로 되돌아 간다는 것. 어쩌면 이 설정은 VR이 실제 존재하고, 뇌에 대한 부분적 자극이 가능해진 오늘날에는 가까이 온 미래 같지만, 기본적인 스토리의 구조는 과거부터 타임머신을 탄다거나, 영화 <인셉션>처럼 꿈을 꾼다거나, 아니면 판타지적 요소로서 악마천사가 나타나 주인공을 도와준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자주 나온 스토리였다. 하지만 형식적으로 VR이나 BJ와 같은 것들을 이용하지 않았다. 저자가 게임에 참가하면서 채팅의 방식을 통해 사람들이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거나, 도중에 PD가 개입하는 모습들은, 글쓴이가 선택한 형식을 잘 짜임새 있게 썼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또한, 저자는 어쩌면 스토리와 크게 관계없을 이 같은 채팅이나 PD의 개입과 같은 설정들을, 현재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표현들을 사용하여 실감나게 분위기를 조성했다(난 특히, “누가 죽었다는 거야? 설명 좀 해줘이거 진짜 재밌다. 나 팝콘 들고 왔음과 같은 부분을 읽으면서는 정말 현웃이 터졌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강점은 메인 스토리의 짜임새라고 나는 생각한다. 준오와 아영. 결과론적으로 보면, 대개 우리는 둘 사이의 갈등을 여고괴담과 같이, 여성들간 갈등하는 스토리를 통해 많이 봤을 것이다. 한 남자를 두고 두 친구간 우정이 금이 가는 일도 있을 것이고, 한 쪽이 다른 한쪽에 경쟁심 혹은 질투심을 느끼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솔직히 이 같은 경우들은 여성뿐만이 아니라 남성을 소재로 했어도 정말 뻔한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는 글의 배치를 통해서 한꺼번에 해당 문제를 보여주지 않았다. 글의 앞 부분에서는 왕따였던 준오가 학교에서 겪는 어떻게보면 미스테리하면서도 호러같은 일들을 보여주었고, 뒷부분에 가서 준오와 아영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는지 보여주었다. 다시 한 번 돌이켜보면, 이 부분에서도 솔직히 앞에서 준오가 괴물이 된 선생이나 친구들에게 쫓기는 모습은 뒤에 올 내용과 인과관계를 단단하게 맺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해당 부분은 글을 읽는 사람에게 호기심과 김장감이 생기도록 만든 부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하얀까마귀의 뜻이다. 책에서는 이렇게 쓰여 있다. “까마귀는 원래 아름다운 흰 깃털을 가진 아폴론 신의 심부룸꾼이었지. 그런데 어느 날 까마귀는 심부름 도중 한눈을 팔다 늦어버렸고, 이유를 추궁하는 아폴론에게 그의 아내가 간통을 했다는 거짓말을 해버려. 까마귀의 말만 믿고 자신의 아내를 죽인 신은 나중에 까마귀를 까맣게 태워 죽였지. 그 뒤로 모든 까마귀의 깃털이 검은색으로 변했다는 거야.” 여기에서 하얀 까마귀는 준오를 뜻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에서 아폴론신은 누구일까. 아영일까? 아니면 선생님? 아니면 주노를 보고있는 수많은 사람들? 글쎄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하얀 까마귀>라는 책의 제목은 어찌됐든 양치기 소녀보다는 훨씬 센스있는 제목처럼 들린다.

그리고 진짜 마지막으로. 이 글은 참고로 열긴 결말이다. 결말의 바로 전 장에서는 주노가 결정했다는 장면이 나오지만, 결말에서는 잊어버렸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오락성 높은 소설이기 때문에, 분명 임펙트는 있는 것 같긴 한데... 뭐랄까. <독립의 오단계>처럼 (무리수를 둬서라도) 결말을 내는 게 더 오락의 맛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깃털 SF가 우릴 지켜줄 거야 1
김혜진 지음 / 허블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담백했다. 그리고 산뜻했다. 물론 나는 <깃털>을 읽으면서도 앞에 읽었던 두 SF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독립의 오단계>와 비교하며 읽었던 것 같다. 하지만 메시지의 담백함과 산뜻함으로 봤을 때, 이 소석 <깃털>만한게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깃털 X TRS가 돌보고 있다 X 백화

 

이 세 작품에는 적당한 긴장감이 있었다. ‘깃털에는 왜 그 사나이는 세영을 불렀을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긴장감이 소설 전반에 흐르고 마지막에 해소됐다. 또한 소설 전반에 흐르고 있던 긴장감이 해소되고, 자신의 로봇 새를 통해 장래를 할 때 소설이 주었던 메시지는 정말 마음에 들었다. 조에를 단순히 장례를 이용할 때 쓰는 도구로만 사용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에 소설의 세계관과 잘 버무려서 적절히 이용했던 것 같다. 단백하게 산뜻했다. 책 전면에 배치되는 글이어서 그런지, 뭐 하나 딱히 군더더기를 짚을 만한 게 없었다. 솔직히 다소 아쉬운게 있었더면, 조류독감 때문에 전세계가 초토화된 게 다소 아이러니 했다. 그러나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소설 내용적으로는 비극적이었으나, 참으로 귀여운 설정이고 실용적인 설정(?)이 아니었나 싶다.

‘TRS가 돌보고 있다에는 “TRS가 정말 자신이 돌보고 있는 할머니를 죽일 것인지”, “성한은 정말 자신의 엄마를 죽인 TRS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인지”, “TRS의 운명은?”이란 긴장감이 단계적으로 흘렀다. 솔직히 만약에 TRS가 자신이 요양하고 있던 할머니를 죽은 뒤에, 그것은 엄청나게 진보적인 행동으로 미화했다면, 난 솔직히 이 전에 읽었던 <독립의 오단계>와 같은 평가를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TRS가 돌보고 있다의 서사는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았고, 메시지에만 충실하지도 않았다. 살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TRS가 성한에게 자유를 준 것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엄청난 일을 벌인 것에 대한 적절한 수습을 스토리로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백화는 다른 두 작품에 비해서 다소 긴장감이 떨어졌던 작품이긴 하다. 아마 이는 해인이 진주에게서 아가미가 생기고 있다는 사실을 미리 말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도 혹평할 만큼 그렇게 나쁜 작품은 아니었다.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 보다 스펙타클한 점이 있었고, 섬세한 배경을 갖고 있었다고나 할까. 단순히 세계관과 기술의 변화만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는 설정이 신박했던 것 같기도 했다. 마지막에 해인이 죽는 것은 다소 아쉽긴 했다. 뭔가 진주가 그녀를 도와줄만한 게 없었을까?(아마 이루카에게 맡겼다면 어떤 말도 안되는 설정을 붙여서라도 살렸을지 싶긴 하다)

 

한국 SF?

 

아마 내가 처음으로 접한 SF작품은 <스타쉽 트루피스>일 것이다. 아니다 <쥬라기 공룡>일지 모르겠다. 아닌가. <로보캅>이 먼저라고 해야 하나. <로보캅>은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처음 접한 SF가 아니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뭔가.. SF에 한국과 관련된 게 있는 작품을 나는 거의 접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왠지 한국적SF 아니 한국SF를 보고 있으니 감흥이 상당히 새롭다. 단순히 외국SF영화에 잠깐 등장하는 한국 배경이 아닌, 우리의 정서를 관통하는 세계관과 이야기로 만들어진 SF가 존재한다는 게, 뭐랄까. 새롭고 신기하다라는 말 이상으로 나는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찌보면 앞에서 많이 비판하긴 했어도, 우리나라에서만 유난스러운 페미니즘의 모습을 보여준데 있어서 <독립의 오단계> 또한 참으로 한국적SF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깃털>을 재밌게 읽어서 그런지 다음으로 읽을 책 <하얀 까마귀> 또한 정말 기대된다.

 

Ps. 책의 표지와 관련해 한 가지 아쉬운점이 있다. 나는 작가들의 작품들이 작품 그 자체로 홍보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책의 뒤편에는 민규동 감독, MBC SF 앤솔러지 드라마 <간호중> 원작소설수록이라는 홍보 문구가 있는데, 나는 민규동의 권위가 아닌 작가가 만든 세계 그 자체의 권위로 작가가 인정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립의 오단계 SF가 우릴 지켜줄 거야 2
이루카 지음 / 허블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메시지가 이야기를 앞설 때...

 

종종 SNS에서 가오가 몸을 지배할 때라는 짤들을 보면 현웃이 터졌다. 가오를 잡기위해서 방독면도 쓰지 않고 가스실에 들어가는 사람처럼, 아무리 봐도 무리한 행동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서 무리수를 두는 행동을 말이다. 오늘 본 책 <독립의 오단계>는 남자의 시선에서 보자면 그럴수도 있고, 또 여성이 시선으로 보면 그렇지 않을수도 있는 소설이다.

SF소설 책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재 소설책과의 만남은 김초엽 작가가 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이었다. 김 작가의 책을 읽을 때, 솔직히 이야기하면 환상적인 여행을 한 것 같았다. 끊임없이 넚어지는 이야기의 세계관, SF라는 것을 단순히 하나의 소재로만 활용한 게 아닌, SF에 관한 세계관을 계속 끌고와서, 재미있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작은 이야기속의 세계관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전에 내가 쓴 김 작가의 소설을 보면 이런 것들이 잘 드러나 있다. 다만, 당시 소설을 읽을 때 다소 불만이 있었다면, 김 작가가 금수저처럼 보여서 가난한 여성을 다룬 작품들이 소설 속에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 이었다. 디스토피아 혹은 유토피아아의 모습을 보는 여성들은 대개 선택받은 여성들이었다. 그런 부스러기 같은 불만을 잡아내는 것을 제외하고는, 김 작가 소설의 주인공들이 여자인 것은 대수롭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읽은 책 <독립의 오단계>는 남성 입장에서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가고아 몸을 지배할 때의 소설 버전이라고 생각했다. ! 이것을 바꿔 말하면 메시지가 이야기를 앞설 때라고 이야기하는 게 좋을지 모르겠다.

 

이루카의 3개의 단편소설

 

첫 번째 작품은 그거려니 하고 읽었던 것 같다(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처음으로 읽었던 SF소설이 김초엽의 작품이라서 그런지..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서 보는 것 같다. 처음부터 너무나도 객관적으로 다른 소설들에게는 너무 높은 디폴드 값을 정한 게 아닌지 싶다). 가혜라의 자식이기에 자유롭지 못했던 가재민의 문제는, 솔직히 현실 속 금수저의 자식들과 비교해봐도 딱히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나는 A796을 폐기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벌어진 활극도 재미있었다. 특히, 미래가 도래했을 때 정말로 논쟁적일지 모를 인공지능을 사람과 같이 대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것은 정말로 흥미로웠다(물론, 해당 재판을 보면서도 가혜라의 입장을 전적으로 옹호했다. 가혜라가 좋아서라기보다, 인공지능을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 자체가 뭔가 실제로 디스토피아가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록, 나는 저자가 해당 소설을 통해서 던지는 메시지에 동의를 하지 못하지만 나름 재미있게 읽었다.

<새벽의 은빛 늑대>도 나름 괜찮았던 작품이다. 이 책의 뒷부분에 작가의 말을 보면 저자 또한 바이크를 타는 사람으로 보이기에, 적당히 현실적 상황과 잘 버무려서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특히, 마지막 은빛 늑대’(ㅋㅋㅋ. 사실 엄청 유치한 작명이긴 하다. 남자들이 이렇게 이름을 만들었다면, 여성들의 비웃을을 받았을지 모르겠다)들이 경기장을 빌려 바이크를 타는 이야기는 마치, 영화 <매드맥스>에 나왔던 할머니들이 저절로 떠올랐던 것 같다. 영화에서는 몇 명의 할머니들밖에 살아남지 못했던 것이 마음 아팠었던 것 같은데, <새벽의 은빛 늑대>를 보면서 약한의 힐링을 받았다고나 할까.

문제는 마지막 작품이었다. 솔직히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큰 점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루나벤더의 귀가>. 키야~~ 얼마나 좋은 소설의 제목인가 싶었는데, 3작품중에서 가장 형편없었던 게 이 작품이었다는 생각이다.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메시지가 이야기를 앞선 작품이 이 작품이었던 것 같다. 왜 문보라, 백진주, 고유리는 자신들을 가족이라 칭했을까. 왜 게임상에서는 유저들에게 자매라는 이름이 나왔을까. 좋다.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나 또한 피를 나눈 사람들끼리만 가족이 되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에는 이 세명이 가족이라고 느낄 수 있을만한 정보가 상당히 부족하다. 문보라와 고유리의 관계는 이해할 수 있어도(그러나 솔직히 고유리의 과거를 설명할 때 왜 악몽 같던 결혼 생활이란 텍스트는 왜 고유리에 대한 배경설명을 하면서 나오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백진주가 등장한 것은 그야말로 갑툭튀였다. 또한, 서로를 이해하는 친구로 설정을 하면 될 것을 가족이란 것을 강조하는 모습은 마치, 여성 부족주의를 연상케 했다. ! 물론, 이 소설에서 언급된 백진주를 도와주기 위해서 유저들이 루루골드를 보낸 것 또한 그랬다.

물론 나는 이 소설을 선입견을 쓰고 본 것 같다. 없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소설은 김초엽의 작품처럼 내 선입견을 사뿐히 즈려밟고 갈 정도로 뛰어난 작품도 아닌 게 사실이니. SF라는 세계관의 확장은 전혀 없었다. 3소설 전반에 걸쳐서. 정해진 세계관 안에서, 특정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상황과 적절히 섞었을 뿐이랄까. 또한, 그 메시지 특별히 3번째 소설이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소설을 읽으면서, “적어도 글이란 이렇게 써야하는 것이구나(글빨 있다)”스토리를 만들고는 있구나!”와 같은 생각은 했던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상의 무기가 되는 논리 수업 - 세상의 교묘한 말들로부터 나를 지키는 61가지 논리 도구들
마이클 위디 지음, 한지영 옮김, 헨리 장 추천 / 반니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상의 무기가 되는 논리수업! 이란 책의 제목을 딱 봤을 때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일상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논리는 그다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은 논리보다 선동이다. 논리적 오류가 많은 특정한 상황을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또한 이러한 방식의 합리화를 통해서 사람들을 선동한다. 논리란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 일상에서 그리 쓸만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 책 <일상의 무기가 되는 논리 수업>을 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 책을 일상과는 괴리된 곳을 관찰한는데 있어 이 책을 이용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기자가 되고 싶다. 기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하는 주장에 대하여 논리적 맹점을 파고 들어야 한다. 하지만 기자들이라고 하여 나는 그들이 상당히 논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기자와 언론은 사람들이 비논리적으로 움직이게 하는데 전문적인 조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들이 되고 싶지는 않다. 아마 그것은 이상일지 모르겠다. 내가 논리적으로 글을 쓰고, 사람들 또한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것. 하지만 나는 내 기대가 실현되기를 바라기 위해 이 책 <논리 수업>을 읽었다.

 

논리 수업

 

솔직히 나는 이 책에 나와있는 응수하는 법에는 별 기대가 없었다. 아니, 어저면 나는 해당 페이지에 들어갈 수 있는 레벨이 스스로 아니라고 생각했다. 책을 읽는 내내 내가 가장 흥미로워 했던 부분은, 오류의 종류와, 논리적 허점이었다. ‘응수하는 법이전에 나는 어떤 오류가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또는 논리적 오류가 있다고 누군가가 지적한들 나는 해당 부분의 논리적 허점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가장 중요한 부분. 내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인지하기 위해 나는 이 책을 들었다.

이 책에서 읽었던 것 중에 가장 인상깊었던 논리 문제는 아마도 허수아비 죽이기 였다. 예전에 글을 쓰면서 해당 문제는 이미 지적받은 바 있었다. 하지만 가령 예를 들면, 아무도 내가 지적한 문제가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나만 혼자서 해당 문제가 위험하다고 여겨셔 나는 이것을 해결했으니, 잘한 것이다 라고 하는 것. 이런 게 허수아비 죽이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해당 문제에 대한 인지를 나는 좀처럼 하지 못한채 매번 억울해할 허수아비들만 수 없이 죽였다. 허수아비 죽이기에 대하여 일반화된 논리적 문제를 지적받은 것.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첫 번째로 느꼈던 보람이라면 보람일 것이다.

이 책 <논리 수업>은 긴 책은 아니다. 또한 해당 논리의 문제점과 이에 대한 대안 또한 그렇게 폭넓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은 가볍게 우리가 일상(?)에서 겪게되는 다양한 논리적 오류에 대해서 가볍게 터치하며 깨달을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철학과 출신이다. 무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철학 학사학위를 받았다. 치열한 논리적 쟁의를 통해서 순수한 진리에 도달하려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 책에 있는 61개의 오류가 설명해주는 듯 하다.

비록 얇은 책이기에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서 더 자주 봐야하는 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