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권력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 탄핵의 정치학
이철희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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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紙 김지호 기자 '한국보도사진전' 대상

 

국정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 계엄령 사태의 책임을 일선 동원된 군인에게 떠넘기고, ‘의원이 아니라 요원이 었다는 주장을 했다. 간첩을 잡았던 국정원 요원을 향해선 음해 공작을 펼치고 있다 한다. 이젠 공적 지위고 뭐고 다 포기하고 이젠 나 하나만 살겠다는 (아직은) 대통령의 모습이다. ‘무책임이란 말로는 부족한, 공직자 이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리조차 회피하려는 양복 입은 불량배의 모습을, 우리는 탄핵 재판이란 거대 정치 이벤트를 통해 실시간으로 보고 있다. 이런 인간에게조차 비용을 들이며 탄핵 재판 서비스를 받게 한다는 것은 민주주의란 제도의 아이러니 아닐까 싶다.

 

이 어이없게 진행되는 변론은 1~2달만 참으면 앞으로는 안 봐도 될 것이다. 그간 대통령 측이 늘어놓은 변론 내용을 비롯해 반복됐던 트롤 짓은 재판 선고기일에 문형배 소장이 절제된 단어와 빈틈없는 논리로 잘근잘근 씹을 것이다. 작금의 뉴스가 답답하고 듣기 싫다면, 재판의 대미를 장식할 헌재의 시간을 기다리면 된다.

 

12·3 내란과 윤석열에 대한 헌법상의 판단은 헌법재판소가 하겠지만, 이 사건은 갑작스레 생긴 정치 이벤트 정도로 치부할만한 건 아니다. 윤석열 탄핵 재판을 누구보다 집중해서 보고, 이를 뉴스 상품으로 팔아야 하는 정치평론가조차 12·3 내란이 우리 헌정 체제의 취약성에 대한 그럴싸한 질문 하나 던진 게 없다고 하지 않은가. 그러나 내란이 일어나기 한 달 전, 탄핵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여는 책 한 권이 세상에 나왔다. 문재인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냈고, 국회의원과 정치평론가로도 활약한 이철희 씨가 탄핵을 주제로 한 자신의 논문을 책으로 낸 것이다.

 

정치적인 재판, 탄핵 재판

 

<나쁜 권력은 어떻게 무너지는가>는 탄핵 관련 뉴스로 지쳤을 사람들이 볼만한 책이다. 현재 탄핵과 관련해 나오는 보도란 시시각각 발표·발견된 이슈를 전달하거나, (좀 더 분석적인 기사라면) 과거 두 차례의 탄핵을 통해 그 결과를 점쳐 보는 것 정도다.

 

책에서 이철희는 노무현, 박근혜의 탄핵 심판이 있었을 때 의회 내 구도와 대중여론이란 틀로 대통령 탄핵이란 제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한다. 책에서 던지는 질문은 간단하다. 탄핵의 성공/실패에 의회와 사회운동은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탄핵 소추 관련해 의회 내 구도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위 질문들은 단순해 보인다. 마치 탄핵 정국 속 의회 내 정당 분포와 광장의 여론을 알려주는 여론조사만을 알면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있어 보인다. 마치 현재 윤석열 탄핵 국면처럼. 하지만 중요 변수로 작용하는 언론 보도와 대통령의 행보, 의원 개개인의 행보 등을 종합하면 탄핵 소추 통과부터 헌재의 판단까지를 판단하는 것은 꽤 풀기 어려운 방정식이 된다. 그리고 이철희는 여기에 더해 탄핵 재판 자체가 정치적 특성이 갖고 있다고 설명한다.

 

탄핵 재판이 정치적이라는 주장은 불온하게 들릴 수 있다. 하원이 탄핵소추를 하고 상원이 심판하는 미국이라면 그럴듯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판사가 주 구성원인 우리나라 헌재에서 판결을 할 때 정치적 고려를 한다는 것은 어떤 결정이든 신뢰하기 어렵다고 생각될 여지가 있다. 판사들은 그간 여론의 영향을 배척하며 법을 통해서만 판단하려 했던 사람들 아닌가. 그러나 이철희는 탄핵 심판이 정치적 특성을 띠는 이유는 국민 의사와 대중적 합의를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무슨 말인가.

 

대개 헌법 조문은 추상성과 개방성을 특징으로 한다. 한국의 헌법도 다르지 않다. 누군가에 의한 권위적 해석이 불가피하다.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탄핵 사유 조항을 중대한 법 위반으로 해석하고, 그 기준에 따라 대통령 파면 여부를 결정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중대성의 판별은 사실상 법적 판단을 넘어서는 차원이다.”

 

탄핵 사유가 얼마나 헌법에 규정된 사유에 근접하는지에 대한 법정 평가와 더불어 대중적 신뢰를 얻고 있느냐는 정치적 평가도 고려해야 한다.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의 법 위반 정도가 중단할 때 탄핵 사유가 된다고 본다. 그런데 그 중대성을 확증하는 정략적 기준이 사실상 없다 보니, 정성적인 측면, 예컨대 국민의 안정적, 초당적 지지 여부를 중시할 수밖에 없다.”

 

정치적 특성 띤다는 의미는, 탄핵 심판이 다른 정치적 사안들처럼 법적 판단에서 벗어나 이해관계를 고려해 적당한 결과물을 만든다는 게 아니다. 법적으로도 논란을 일으킨 부분이 있는 가운데, 탄핵을 했을 때의 득실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국민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의미다.

 

가령 이런 것이다. 노무현 탄핵이 선고되기 전 있었던 총선에선 탄핵이 주요 쟁점이었고, 당시 열린우리당은 어려운 구도 속에서도 과반 의석을 넘기며 집권 여당이 됐다. 박근혜 탄핵 때는 수백만 명이 광장으로 몰려나왔다. 앞서 두 차례의 탄핵이 있었을 때는 헌재를 향해 대중이라 할만한 국민들이 분명한 의사가 직접적으로 표출했다. 윤석열 탄핵을 앞둔 현재, 국민적 지지와 초당적 지지는 이전 탄핵 때보다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지만 헌재가 탄핵을 인용할 국민접 합의 정도는 충분히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헌재가 현재의 인권위나 방통위처럼 작동한다면, 판결에 정치적 특성을 띤다는 특성은 심한 문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헌재가 이들에 휘둘리는 반정치적 선택을 할 것 같지는 않다. 비록 두 번밖에 없었지만, 탄핵 재판 때 헌재를 움직였던 대중의 움직임은 이렇게 극단적이지도 반지성적이지도 나아가 기회주의적이지도 않았다. 모든 시민들이 계엄령이 진행되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대통령의 발언이 거짓이라는 게 하나씩 드러나는 상황에서, 헌재가 이들의 말에 신뢰를 느낄 일은 없어 보인다.

 

중요하다고 하기엔 이젠 헐거워진 제도, 탄핵

 

윤석열의 탄핵은 이제 상수처럼 보인다. 헌재가 내릴 사이다 판결문을 보는 것 외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국회에서 있었던 대통령 탄핵 소추안 통과는 지켜보는 입장에서 변수가 많았고 긴장된 순간이었다. 첫 번째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표결할 때 박찬대 의원은 국민의힘 의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표결 참여를 촉구했고, 악동 이준석은 국민의힘 의원들이 모인 곳으로 찾아가기까지 했다. 정족수가 부족해 표결이 성립되지 않자 국회 앞에 모인 시민들의 아쉬움은 여의도를 가득 메우지 않았던가. 두 번째 표결을 때도 그렇게 낙관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국회 탄핵 소추안 표결은 노무현과 박근혜 때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흥미진진해진다. 박근혜 대통령 때는 모든 과정이 순조로우나 그렇지만은 않았다. 2016년 총선에선 여소야대 국면이 발생했고,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은 친박과 비박으로 금이 간 상태였다. 언론을 통해 공론화된 국정농단 게이트에선 계속해서 새로운 뉴스가 쏟아져 나왔고, 광장에선 의회를 향해 탄핵을 맹렬하게 푸시했다. 야당은 여당 의원들이 상황을 납득할 수 있는 시간을 주며 설득했고, 여당 내부에서도 박근혜를 포기해도 대안으로 생각할 사람을 찾자 큰 이탈표도 생겼다. 탄핵을 막으려는 대중 방패는 진작 없었고, 탄핵소추를 저지할 여당 의원들은 쪼개졌다.

 

박근혜가 2016년 총선, 국정농단 게이트, 광장의 강한 압박으로 탄핵을 막을 방패들이 연이어 격파돼 속수무책으로 밀려난 사례라면, 노무현은 여소야대 국면 해소를 위해 탄핵을 활용했다고 한다. 당시 출발부터가 여소야대 국면이었고 한나라당 의원들은 번번이 대선불복 발언을 하며 국정 운영에 협조하지 않을 자세를 취했다. 민주당 안에서도 노무현을 따르는 의원이 많지 않던 상황에서, 지지가 아직은 남아을 때 정치적 승부를 걸어 무기려한 상황을 일거에 타파하려 했다는 게 이철희의 설명이다. 탄핵을 노리던 한나라당에겐 여권 분열이란 기회를 주고, 민주당에겐 자기들이 선출시킨 대통령의 탈당이란 명분을 주어 탄핵에 참여할 명분을 주었다. 아웃사이더 노무현은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었던 총선과 () 탄핵이란 도박판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며 끝내 승리해 귀환했다.

 

포커게임 플레이어로 3명의 대통령들을 비유해보자. 노무현, 박근혜, 윤석열은 탄핵이란 국면에 모두 다른 리더십과 행보를 보였다. 정치 생명을 올인(All-in)한 노무현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밖근혜는 이 판에서 자신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카드를 폴드(Fold)하며 정치판에서 떠났다. 윤석열은 탄핵 재판 와중에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등 틸트(Tilt) 상태에 들어갔다. “Buck stops here!”는 개뿔.

 

3번의 탄핵에서 각각의 대통령이 보인 모습들은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으나, 민주화 이후 8명의 대통령 중 3명이 탄핵 소추됐다는 사실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다. 노무현, 박근혜, 윤셕을은 모두 여소야대 국면에서는 탄핵을 당했다. 여소야대 국면이란, 대통령 입장에서 늘 탄핵이란 위협을 마주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국면이 돼 버렸다. 물론 이 국면이 예전처럼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하는 데 있어서 야당의 의견을 더 존중하고 국정 운영에 참여하려는 태도로 보이면 약이 되겠으나, 양극화된 정치 지형이 고착화 현재 이런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힘들지 않을까 싶다.

 

여러 요인들이 겹처서 발생한 일이겠으나 급격하게 위축된 경기가 보여주듯 탄핵은 단지 정치 이벤트로만 끝나는 게 아니다. 우리 외교, 안보, 경제에 분명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윤석열이 대통령이었다면 더 문제가 심화될 수도 있었겠으나, 앞으로 늘 대통령 탄핵이 가능하다면 이젠 외교, 안보, 경제의 불확실성은 기본값이 될 수도 있다. 나아가 국회의 의견을 존중하는 대통령이 성과까지 만들어 내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고.

 

현재의 정치 지도자 중에는 김대중처럼 통합을 강조하며 대화와 타협을 통해 결과를 만들 능력이 있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소수가 있으나 그들의 집권은 요원하다. 탄핵은 분명 우리 민주주의를 지키고 나아가 사회를 더 건강하게 만드는 데 있어서의 제도가 돼야 하나, 앞으로의 탄핵은 그것이 올바른 탄핵이라 할지라도 결국 사회를 더 낫게 바꿀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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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전쟁 - 전통주의의 복귀와 우파 포퓰리즘 걸작 논픽션 28
벤저민 R. 타이텔바움 지음, 김정은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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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산 알 가입이란 환호 속에서 우뚝 선 폴의 모습은, 그 집단이 어떤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는지를 보여준다. 수많은 프레맨 앞에서 하늘을 향해 주먹을 쥔 폴의 모습에서 감독은 이게 종교로 만들어진 권력이야란 것을 보여주려는 것 같다.

이 장면은 불온하지만 신선하다. 종교적 예언에 기대어 카리스마로 대중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폴의 모습은 자유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겐 어색해야만 한다. 중요한 결정을 하려면 연극이라 할지라도 대화와 타협을 해야 하며, 지도자는 언제나 견제받아야 한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또한,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얼마나 구린지 언론을 통해 매일 학습하고 있지 않은가. 프레맨이 폴에 환호했던 것은, 그의 잘생긴 외모와 예언을 실현시킬 자가 왔다는 종교적 신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번에 읽은 책 <영원의 전쟁>은 폴처럼 잘생기지도 않고 종교적 신념마저 약한 자유주의 세계에서도 이런 일이 곳곳에서 연쇄적으로 벌어질 수 있음을 암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전통주의라는 세계관을 갖고 최고 권력에 개입하는 인물들의 뒷이야기를 다룬다. 저자는 전통주의를 Tt를 구분해 설명한다. traditionalism은 우리가 보통 전통을 중시하는 감각으로서 보수주의에 일부분으로 볼 수 있다. 전통과 관습을 중시하며 점진적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사고한다. 반면, Traditionalism은 프랑스 철학자 르네 그농이 하나의 세계관을 갖고 만든 이념이다. 현실은 자연스레 창조되고 파괴된다는 윤회 세계관을 갖고 있으며, 그렇기에 문명의 파괴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고(촉진할 수도 있는), 이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번영과 평화를 가져올 메시아 같은 전사를 기대한다.

안 싸워도 될 것으로까지 싸우지만 근본적으로 보수와 진보는 문제 해결의 속도로 갈등을 빚어왔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공감대는 있다. 그러나 전통주의는 그 문제를 방치하거나 더 심화하도록 부채질한다. 물론, 보수와 진보의 역사를 보면 전통주의처럼 교조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공황 시기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정부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독일이나 스웨덴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을 위한 과도기라며 똑같이 아무것도 해선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모두 이념에 기반한 망상이었으며 만약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대공황의 피해를 봤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집단엔 다른 생각을 갖고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통주의자였다면? 아마 때가 됐다며 정말 메시아만을 기다렸을지 모른다.

 

전통주의란 기괴한 창조적 파괴

 

근래 국내에서 전통주의를 정면으로 다룬 책은 임명묵의 <러시아는 무엇이 되려하는가>이다. 몇 년 전 나온 이 책은 러우전쟁을 비롯한 러시아의 그간 행보를 러시아 역사에 내재된 맥락을 중심으로 풀어냈다. 러시아에 대해 내밀하게 알지도 해석할 능력이 없는 언론이 러시아의 행보=푸틴으로 맞춘 것과 달리, 푸틴이 어떤 질서와 사상 안에서 움직이는지를 임명묵으 설명했다.

유럽과 아시아에 어느 한 곳에도 속하지 못해왔으며, 공산주의와 함께 경제마저 수렁에 빠지며 무너진 국가 국민의 깊은 수치심과 비참함을 책은 보여준다. 또한, 푸틴이 집권한 후 변화된 러시아에서 그 국민들이 (간접적일지라도) 어떤 위안을 받고 푸틴이 전쟁이란 극단적 정치적 모험을 벌이는데도 시민들이 침묵으로 동의를 표하는지 설명한다. 임명묵은 수치심·비참함을 느끼던 국민들의 자존감은 경제 재건만이 아니라 무너졌던 정체성이 푸틴의 통치 동안 회복됐다고 봤다. 그리고 두긴은 푸틴의 통치를 전통주의란 큰 그림을 통해 조언하며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한다.

임명묵이 러시아에 초점을 맞추며 전통주의의 문제성을 드러냈다면, <영원의 전쟁>의 벤자민은 전통주의의 세계가 러시아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듯 베넌과 올라부를 통해 자유주의 세계의 문제로까지 가져온다. 저자는 이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세 사람이 서로 교류하며 나눴던 대화 그리고 이들이 전통주의를 왜 필요하는지를 드러냄으로써 전통주의 세계관의 윤곽과 그것이 세계 곳곳으로 퍼질 수 있는 내적 합리성과 현재의 풍토를 갖고 있는지 설명한다.

물론, 세 명의 전통주의자가 연대하며 세상을 바꿀 일은 없을 것이다. 러우전쟁 판세를 보며 두긴은 웃고 있을지 모르나, 베넌은 브라이트바트 뉴스에서도 사임한 상황이다. 올라부는 코로나로 죽었다. 권력의 핵심에 있는 세력 간 연대는 기대하기 힘들다.

그러나 자유주의 세계에서 극우는 분명 포기를 몰랐고 현재는 급격히 성장했다(이런 현상을 보면 잘못됐더라도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뭔가 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현재의 극우는 이 세 사람처럼 그농의 책을 읽고 전통주의에 감화된 자가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나, 유럽에선 극우 세력은 소수에 머물지 않고 주류가 돼 가고 있다. 반이민·자국 우선주의·민족주의 등을 내세우기에 나치와 비슷하다고 하여 철저하게 고립되고 낙인까지 찍어왔으나 이제는 의회란 체제의 질서 안에서 크고 작은 승리를 거두는 단계에 이르렀다. 양당제인 나라에선 트럼프의 당선과 브렉시트로 큰 판을 흔들었다면 다당제 국가에선 점진적으로 의석을 늘리며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권능을 유럽 곳곳에서 획득해 가고 있다.

지금 약진하고 있는 것은 전통주의에 기반한 극우는 아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이들은 지적으로 자신들보다 먼저 도착한 전통주의자를 보며 그들의 품에 안길 것으로 점쳐진다. 전통주의는 모험적인 정치와 사람들의 분노만 자극하는 이들과 달리 가난한 사람들의 울분을 포용할 줄도 않고 하나의 세계관을 통해 그간 이들의 삶을 온전히 인정해준다. 트럼프와 베넌의 관계처럼 이 둘은 갈등도 있겠으나, 선동된 사람들이 누구의 말을 더 신뢰하며 장기적으로 따를지는 그리 어려운 질문은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자신을 대표하는 자로서 광대보다는 위대한 사상을 갖고 거대 비전을 제시하는 자를 선택할 게 뻔하다.

벤저민이 두긴·베넌·올라부를 인터뷰한 이미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전통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 몇몇은 있으나, 전통주의에 기반한 정당이나 세력은 아직 없다. 두긴이 있는 러시아에서도 말이다. 하지만 전통주의자들의 이상처럼 세계는 다극화의 단계로 가는 것처럼 보이며, 미국에서 정권에 상관없이 자국 우선주의의 움직임을 보이자 다른 나라들 또한 이에 동조하고 있다. SNS는 사람들을 연결시키기도 하지만, 그 연결 밖에 있는 고립된 사람도 양상하고 있다. 어느 나라에서나 양극화는 사회의 한 흐름으로 자리 잡았으며 사람들은 원자화 되고 있다. 한 개인의 가난과 고립부터 자국 우선주의란 추세까지. 개인의 울분부터 버려졌다고 생각한 집단의 울분 그리고 세계의 움직임까지. 우리 세계에는 전통주의에 기반한 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심층에서부터 퇴적되는 듯 보인다(물론, 이는 우리가 자유주의 체제란 것을 너무 당연시해 그 밖의 생각을 터부시하는 데서 오는 불안감일 수도 있다).

 

조커? 인셀? 일베? 전통주의자?

 

책의 서평을 영화 듄2의 하이라이트를 활용하긴 했으나, 읽는 내내 생각난 장면은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의 불행을 즐기는 풍조에 관한 것들이다. 남의 불행을 보았을 때 기쁨을 느끼는 심리를 뜻하는 독일어 샤덴프로이데처럼, 소소한 일에 대해선 모두가 이런 감정을 공유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사회 기류란 누군가의 불행을 쌤통이라고 느끼는 것을 넘어선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불행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고, 사이버렉카 처럼 기회가 오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임명묵도 자신의 책 <K를 생각한다>에서 “<조커>에 나오는 아서 플랙처럼,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어떤 성취감도 느끼지 못하는 분노한 이들이 오직 시스템을 파괴하고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증오를 쏟아내는 데서만 성취감을 느낀다면 사회는 어떻게 반응할까?”라고 했다.

그런 생각을 한다. 이건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나의 삶에서 성취할 수 있는 무언가 혹은 행복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을 수 없으니, 예능프로에서 실수하거나 한심한 실수를 해 불행에 직면한 사람들을 보면서 웃듯, 현실의 누군가의 불행을 보며 웃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그리고 이 또한 자신의 처지가 안타까우면 안타까울수록 학습되고 심화될 수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이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통주의라는 게 어느 정도 위안을 주는 부분이 있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위안은 어떤 측면에서 독처럼 위험할 것처럼 보인다. 위안을 느끼더라고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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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미래 - 경제에 현혹된 믿음을 재고하다
장 피에르 뒤피 지음, 김진식 옮김 / 북캠퍼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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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또한 사람들의 인식의 문제다. 사람들이 많이 알지 못하는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이란 책을 통해서 경제에 대한 자신의 이 같은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단순히 마르크스가 이야기 했던 것처럼 기술적으로 기계적으로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닌, 경제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인식에 따라 경제 체제는 계속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의 금융위기가 벌어질 수 있었던 것 또한, 주요하게는 절제되지 않았던 신박한 금융가들의 투기가 있었던 것과 별개로, 미국 시민들은 월스트리트를 비판하면서도 자국 내에서 벌어지는 그와 같은 일들에 대해서 적절하게 규제를 할 수 있는 지도자를 뽑지 못했다. 트럼프와 같은 인물이 처음에는 신자유주의에 대항할 인물처럼 보이기도 했을테지만,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대변할 사람이 아니라, 그 분노 저면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았어야 했다. 샌더스처럼 말이다.

이번에 읽은 책 <경제와 미래>는 우리가 갖고 있는 경제 시스템에 대한 헤게모니를 다룬 책이다. 자동적으로 작동하는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제가 왜 자동으로 작동하는지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 때문인지 경제라는 것을 충분히 수정 가능한 것이라고 보지도 않는다.

어쩌면 경제라는 것은 바꾸기에는 너무 거대한 것이라고 생각할수도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을 바꾸는 게 정말 혁명이고 거대한 변화가 아닐까 싶다. 그 구성원들이 스스로 어떠한 경제적인 질서에 종속돼 살아가는지 고민할 수 있는 능력. 어쩌면 이는 거대 권력이 계속 교체되더라도 시민들의 삶이 바뀌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고민해야 할 문제다. 대선 뒤에 이 책을 읽어보니 정말 이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정말이지 궁금하다.

칼 폴라니를 생각하며

얼마 전 칼 폴라니라는 경제학자를 알게 됐다. 헝가리 출신이고 유대인이었으며 1차 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의 혼란스러웠던 유럽의 모습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미국으로 간 경제학자다. 그리고 그 위대하지만 난해해 이해하는 사람이 극히 적은 책 <거대한 전환>의 저자이기도 하다. 얼마 전 칼 폴라니의 간단한 생애와 그가 쓴 <거대한 전환>이 엑기스만을 요약한 책을 본 일이 있는데, 폴라니의 주장 중 하나가 시장이 사회를 압도했다는 것이다. 이런 말이다. 경제는 시장으로 환원됐고, 시장으로 환원된 경제가 이제는 사회를 압도하고 있다는 말이다.

장 피에르 뒤피의 책 <경제와 미래>는 사회를 압도하게 된 경제의 모습을 비판한 책이다. 그가 이 책을 통해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경제의 전망과 같은 것이 아니다. 또한 경제가 계속 나빠질 것이라는 전망도 아니다. 사회라는 것을 지우고 있느 경제, 그리고 그 경제라는 것을 전부가 돼 버린 시장이 만들어갈 미래가 어떤 디스토피아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 저자는 치열하게 비판하고 있다.

어쩌면 나는 지금 저자가 이야기한 미래의 어느 한 순가에 살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저자가 이 책을 구상하고, 프랑스에서 이 책이 나오고, 그 책을 우리나라에게도 소개해야겠다고 생각한 출판사가, 이 책을 내기까지의 시간. 그리고 내가 다시 이 책을 다시 잡고 읽는데 까지의 기간을 생각하면, 저자가 생각한 경제로 모든 것이 화원된 미래 디스토피아의 한 순간 중 하나에 나는 지금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2024년 현재 내 주변의 경제 그리고 세계의 경제의 모습은 과거 내가 처음으로 교과서를 통해서 경제를 배웠을 때와는 많이 달라져있다. 표면적으로만 자유무역의 기치아래에서 결쟁을 할 뿐 전략 산업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상당부분 보호무역이 강세다. 거시적인 경제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사회 안에서 시민들은 더 이상 금융에 대한 지식 혹은 뒷받침이 없다면 앵간한 현금부자이지 않은 이상 버티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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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를 위한 변론 - 지속가능한 지구생태계와 윤리적 육식에 관하여
니콜렛 한 니먼 지음, 이재경 옮김 / 갈매나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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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일군의 젊은 청년들이 피켓을 들고 들어와 밥을 먹고 있는 손님들을 향해 찝찝한 단어들을 마구 던졌다. 그들의 소란에 점원들은 뛰어나와 경찰을 부르며 시위를 하러 들어온 이들을 밀쳤다.

“음식이 아니라 폭력입니다”라는 시위는 우리나라에서만 있었던 것도 아니오, 해당 구호만을 통해서 시위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어떨 이들은 ‘치킨 자격증’ 시허망에 나타나 “닥 먹지 말라”는 기습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들은 단순히 구호만이 아니라, 공장에서 가공된 생닭처럼 하얀 옷을 입구 피칠갑을 한 채로 여렇시 바닥에 뒹구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이들이 들고 있던 시위 문구는 “배민이 말한 닭은 진지하게 죽어간다”였다.

과거에 읽은 책 중 피터 싱어라는 사람이 쓴 <동물 해방>이란 책이 있었다. 이른바 동물권을 주장하는 책이었다. 해당 책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란 공리주의에 입각해 쓰여졌다. 긴 책이었지만 단숨에 읽히긴 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의 물음표는 딱히 사라지진 않았다.

나 또한 무차별한 살생을 좋아하진 않는다. 또한 비건들 앞에서 생고기를 뜯어먹는 한 서양 청년을 모습을 볼 때면 “저런 Freak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는 비건들의 이러한 시위가 올바르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혹시 흙바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리틀 포르스트>에 나오는 주인공이 서울에 살면서 편의점 음식으로 끼니를 떼우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들이 먹는 음식은 제대로 된 따뜻한 저녁 한상이나, 좋은 레스토랑의 좋은 음식이 아니다. 도시에서 생활하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 기운을 얻을 수 있는 이러저래 뒤섞인 육류가 주 성분이다. 매일 이런 음식으로 끼니를 떼우는 사람들 중에는 굳이 채식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여러 화학조미료와 이런저런 고기들이 뒤섞여 나온 제품이 아니라, 신선한 체소들로만 이뤄진 식사를 원하기도 할 것이다. 샐러드처럼 말이다. 그런데 안그래도 배가 고픈 이들 앞에서 만약에 “당신이 먹는 것은 폭력”이라고 떠드는 사람이 있다면,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번에 읽은 책 <소고기를 위한 변론>을 나는 “음식이 아니라 폭력입니다”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시위 현장에 나가기 전 한번 즈음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육식은 우리 사회에서 유희가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는 먹을 수밖에 없게 되기도 했다. 또한, 육류를 생산하는 사람들 또한 농산물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가치사슬 안에서 우연하게도 자신들이 들어선 길에서 삶을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강남에서 자신의 몸을 만들기 위해서 철저하게 채식을 하면서도 좋은 영양상태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쩔 수 없이 그 반대편에는 육류가 주식이 된 어쩔 수 없는 혹은 자의든 타의든 자연스럽게 육류를 생산하게 된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비건이라는 사람들은 이 사람들을 너무 매몰차게 그리고 윤리적으로만 다루고 있는 게 아닌가.

이 책 <소고기를 위한 변론>에서는 소고기를 중심으로 해서 벌어지는 각종 논쟁을 다룬다. 여기에는 비단 공장식 축산이란 산업적 윤리적 측면만이 아니라 소를 많이 키울 경우 자연헤 해를 입힌다는 과학적 논쟁도 책은 다루고 있으며 저자는 이러한 사건들을 다루면서 과학적 사실을 하나하나씩 들어서 판단을 내린다. 

동물 해방론자 혹은 비건 등. 나는 이들 또한 어쩌면 현재 사회에서 불가피한 어떤 가치에 휘말린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보다 자신들이 서 있는 세상의 위치를 더 잘 인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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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 30대 기자와 60대 연금학자가 주고받은 한국인의 노후 이야기 서해문집 사회과학 시리즈
전혜원.오건호 지음 / 서해문집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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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무너지고 있다, 지금 현실은 대다수의 보통사람은 그래도 안전할 거란 심리적 마지노선마저 붕괴된 후다. 사회 해체의 단계다.

길거리에서 페지 줍는 노인들을 보고 있자면 <비밀의 숲>에서 이창준의 편지의 내용이 머리에서 재생된다. 그리곤 혼잣말로 정말 답이 없는걸까...’를 뱉는다.

올해 신간 <연금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은 반복해서 보는 장면과 반복되기만 하는 혼잣말에 대한 무게감 있는 답을 찾고자 빌린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은 노후 빈곤이라는 구조화되고 방치된 사회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성실하게 하는 책이다.

 

오늘만 살겠다는 진보, 내일을 고민하는 진보

 

연금을 주제로 한 전혜원 기자와 오건호 박사의 대화는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과 보험료율을 몇 퍼센트로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만 반복되는 국민연금의 문제를, “노후 빈곤 경감을 위해 어떻게 제도를 구성하고 총체적으로 운영할 것인가?”의 문제로 확장시키고 그 답을 하나하나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연금을 둘러싸고 우리가 매번 마주하는 정보란 으레 다르지 않다. 지난 94일 정부의 국민연금 개혁안이 발표된 후 상당수 언론은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에 초점을 맞춰 보도했다. 숫자를 바꾸는 안이 발표된 것이니 그렇게 보도하는 것은 일면 당연하다. 그러나 노후 빈곤 완화를 다각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구조개혁 문제는 이번 발표 이전에도 없었다. 현 정부가 모수가 아니라 구조개혁을 해야 한다고 얘기할 때도 구조개혁이 무엇인지 언급하는 수준에서 다뤄질 뿐이랄까.

 

같은 국민연금 문제를 다루지만, 전 기자와 오 박사의 이번 작업이 의미와 차별성을 발생시키는 부분은 여기다. 이들은 넓은 시야에서 해당 문제를 바라볼 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제도의 지속가능성을 어떻게 상상해야 하고 어떻게 미래에 그려나가야 하는지를 짚는다. 그렇다고 연금 문제의 주전장이 되는 디테일 또한 빗겨나가는 게 아니다. 더 확장된 고민 아래서 디테일한 문제들을 보다 다각적으로 건드린다.

 

이들은 지속가능한 연금운영을 위해서 다른 연금(공무원·사학·군인)과 국민연금을 통합하자는 아이디어를 검증하고 그 아이디어 내 우선순위를 따진다. ‘국가가 연급을 지급보장하겠다는 말의 함정을 짚고 연금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정년연장의 한계도 지적한다. 국민·퇴직·기초연금을 어떻게 조합해 노후 빈곤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책은 연금을 둘러싼 온갖 그럴듯한 의견과 주장들을 이런 식으로 찬찬히 논파한다.

 

그러나 연금을 중심으로 한 수많은 질문 중 전 기자와 오 박사는 가장 얘기하고 싶은 문제는 바로 진보의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에 대한 집착이다. 이 문제는 3(‘더 내고 더 받자는 주장이 감춘 것들)의 주제이기도 하지만, 전 기자는 에필로그에서 오 박사는 프롤로그에서 직접 이 문제를 언급했다. 이 책의 컨셉인 대담이란 연극이 아니라 직접적인 메시지로 말이다. 진보의 소득대체율 인상 집착이란, 보험료는 그대로 두고 소득대체율을 올려서 노인 빈곤 문제를 해결하자는 아이디어다. 또한, 국민연금이 고갈된 뒤에는 세금을 투입하고. 그러나 이에 대해 오 박사는, 보통 보수주의자들이나 내뱉을 주장을 한다. 미래세대에 부담이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현 세대가 소득대체율의 수혜를 받고자한다면 자기 세대에만이라도 보험료율 인상 같은 부담을 져야 하는데, 이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한, 오 박사는 소득대체율을 올린다고 해 모든 노인이 수혜 받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국민연금을 받기 위해서는 최소 가입 기한을 채워야 하는데 제도의 역사가 길지 않아 이를 충족한 65세 이상 노인은 전체의 절반밖에 되지 않고, 제도가 바뀌더라도 이미 은퇴한 가입자에겐 소급 적용도 안 된다는 것이다. 소득대체율만 높였을 때 이득을 보는 사람도 65세가 되지 않았으면서 국민연금에 가입했던(대부분 제도권에 있었을)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진보는 국민연금 수혜가 이들에게 돌아가는데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를 숨기는 것인지 아니면, 그럼에도 필요하다는 것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한 가지 더. 오 박사는 적립방식의 한계를 수용하고 그해 걷은 보험료로 국민연금을 지급하자는, 부과방식 전환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현재의 적립방식이 애초에 국민연금의 고갈을 염두해 두었고, 서구 선진국들도 부과방식으로 국민연금을 지급하고 있기에, 보험료율 인상 같은 시민들이 부담을 느낄 방안을 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나 오 박사는 서구의 경우 부과방식으로의 전환이 2차대전 동안 기금을 다 썼고 자본주의의 황금기에 인구구조는 안정적이었기에 부과방식 전환이 완만했다고 설명한다. 오 박사의 다른 칼럼을 찾아보면 KDI를 비롯해 국가 연구 기관들도 보험료율을 올리고 소득대체율을 낮추면서 적립방식을 유지하는 것이 제도 운영의 목표였다고 한다.

 

국민연금은 제도 내부에서 가입자들이 균형 보험료율을 책임지고, 제도 바깥에서 인구구조 개선에 힘쓰면 지속가능하 재정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재정 안정은 한 번 달성했다고 끝난 게 아닙니다. 국민연금이 존속되는 한 예상 밖의 인구·경제 변수가 언제든 지속가능성을 위협할 수 있어요. 그때마다 재조정이 요구되겠죠. 필요 이상의 갈등과 실기를 피하기 위해 자동안정화 장치를 고려해 봄 직합니다. 결국 지속가능한 재정을 위한 연속개혁입니다. 조세에 기반한 기초연금은 세대 간 연대라는 원칙에 따라 해당 시점의 국가재정이 책임지되, 초고령사회에 맞춰 지급 범위를 좁혀야 합니다. 퇴직연금은 와전 적립식 연금이니 제도 내부에서 재정균형을 추구하고요.”

 

책의 결론은 명확하다. 구조개혁이란 큰 틀로 봤을 때 (의도치 않게 사회적인 요인에 의해) 역진적인 결과를 발생시킬 수밖에 없는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은 올려선 안되고, 가난한 노인들을 위해 용돈 연금이란 비판을 받는 기초연금을 올리고, 퇴직자들이 안정적으로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을 받을 수 있게 퇴직연금에 가입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연금의 보험료율은 올리고. 그리고 이러한 세 제도를 활용하는 안에 대해 두 사람은 노후 빈곤을 위한 세 개의 지팡이라고 부른다.

 

그간 연금은 개혁되지 않아 여러 제안들이 있었다. 부과 방식으로의 전면적 제안, 공론화 위원회의 결론을 따르자는 의견, KDI에서 발표한 신·구연금 분리 제안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제안들은, “개혁이 되지 않으니, 미래 일은 미래세대가 알아서 하도록 생각을 포기했다거나, “위원회의 상징성에 책임을 방기한 방안혹은 기술적인 대안등이라 비판받았다. 차분한 대안이 없기에, 특정 그룹의 사람들이 내놓은 아이디어의 차력쇼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65세까지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이 책의 이러한 결론은 사람들에게 노인빈곤과 재정이 고갈될 위기에 처한 연금을 어떤 균형 아래에서 지속가능하게 풀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도 오 박사가 내놓는 결론도 상당히 만족하고 납득가능하고.

 

올드패션한 기자가 한 일

 

이 작업물은 참으로 소박하다. 올드패션하다. 대담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것이고, 형식도 역동적이지 않다. 기자가 질문하고 학자가 답한다. 화려한 인포그래픽은커녕, 단순한 그래프 몇 개가 전부다. 두 사람 중 어느 한쪽도 유명한 사람은 아니다. ‘억까라면 이 작업물이 편향적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기자는 연금 문제에 대해 중립성을 잃었으며 특정 주장에 대해 프로파간다를 한다며(어그로의 시대에 이런 거라도 있으면...).

 

그런데 콘텐츠의 형식이 달라지면 사람들은 그 문제의 본질에 더 관심을 가지는가? “대한민국 완전 망했네요같은 짤처럼 화려하거나 재밌거나 엉뚱한 파생물에 더 관심을 가지진 않나? 특정 문제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을 최대한으로 끌어준다는 측면에서 이런 콘텐츠나 짤의 역할은 상당하지만, 어째 문제에 대한 대중과 언론의 관심은 그 형식이란 임계점 너머로는 못 넘어가지 않나?

 

이 책은 그 제목부터 표지까지 특기할 만한 것이 없지만, 내용을 읽다 보면 대담을 진행한 기자의 용기와 내공, 성실함을 느끼게 된다. 무슨 말인가. 시사 콘텐츠, 특히 복잡한 제도를 다룬 콘텐츠는 시민들이 머릿속으로 그릴만한 차원에서 이야기가 풀리고 또 그 진행이 유지되는 경우는 드물다. 독자들은 흔하지 않은 단어와 그 단어를 중심으로 맥락이 만들어지면 사람들은 머릿속으로 그리는 작업을 포기한다. 아니면 어색하게나마 (외워지지도 않을) 암기를 시도하던가. 연금과 관련해 비슷한 기사들이 쏟아졌어도, 매번 나오는 얘기가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에서 멈추는 이유도 같을 것이다.

 

그러나 전 기자는 여기서 다른 선택을 했다. “끝까지 질문한다”, “깊이있게”, “돌직구로 표현될 수 있는 질문들을, ‘연금에 대해 말하지 않는 사실들을 향해서도 던졌다. 이런 수식어들은 보통 지사형 기자들에게 붙는 것이나, 이런 식의 질문들이 제도의 문제로 향했을 때, 우리는 그간 감각하지 못했던 불의와 마주하게 된다. 불의란 특정한 사람의 의도에 의해 발생할 수도 있으나, 잘못된 시스템에 대해 모두가 침묵하면서 공공연하게 허용되기도 하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전 기자는 어려운 문제에 대한 집요한 질문을 통해 기자가 어떻게 불의와 맞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가령, 전문가의 전문분야를 주제로 기자가 점진적으로 확장하는 대화를 이어나가며 전방위적으로 의심하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가? (유튜브 시대에 몇 군데 있긴 하다) 보통의 시사 프로그램이건 기사에서건 기자들이 하는 일이란 주제 관련 말을 만드는 데 주력하고 그중 뾰족한 주장을 뽑는 데 주력한다. 기자의 낮은 전문성은 인터뷰이의 이야기를 100% 뽑는데 실패할 수도 있고, 전문가에게 휘둘리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 기자는 두 문제를 가볍게 피한다. 그는 오 오 박사 주장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자가 돼, 국민연금 운영에 있어서 그의 지식과 지혜를 바닥까지 끌어내려 한다. 몇 개의 날카로운 질문에서 전 기자의 이런 면모가 보이는 게 아니라, 대화가 진행되는 내내 어색함 없는 수준 높으면서 긴장감 있는 흐름이 이어진다.

 

물론, 3번 인터뷰를 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발생했지만, 연극이라 할지라도 이는 필요하다. 이런 좋은 흐름의 텍스트가.

 

쉴 생각이 없다면 편안하게라도 일하자

 

나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편하게 쉬는 시간보다, 그 시간에 한푼이라도 더 돈을 벌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마 국민연금을 더 받더라도 폐지를 줍는 사람들은 폐지를 계속 주울 것이다. 하지만 국민연금을 비롯한 기초연금과 퇴직연금. 이 책의 저자들이 얘기하는 3개의 지팡이가 있으면, 조금 더 무리하지 않고 자신의 노후를 보낼 수 있지 않을가 싶다.

 

Ps. 1

사실, 이 책을 끝낼 즈음 내 SNS에 돌아다녔던 영상 중 하나는 <손석희의 질문들>에서 김희원 한국일보 기자의 언론 옹호 발언이었다. 그의 말 중 귀에 멤돌던 것은 이야기가 되니까 쓰는 것이다!”라는 말이었다. 이는 언론이 좌우 가리지 않고 권력 비판 기사를 쓰는 이유를 설명하던 도중 나온 것이었다(물론, 어용 지식인의 말에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 권력을 비판하는 데서야 맞는 말이긴 하나, 저 이야기를 이번에 읽은 책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기자들에게 되는 이야기라는 것은 정치와의 결부라는 너무 한정적인 배경으로만 작동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서 말한, “모두가 침묵하는 확장해 가는 불의에 대해서는?”에 대해 기자들이 전 기자만큼 성실한 대응을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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