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소국의 제2차 세계 대전사
권성욱 지음 / 열린책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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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절반의 역사를 다루지 않습니다. 강대국이 아닌 국가들. 절반 그 이상의 나라들의 2차 세계대전사를 다룹니다. 사방이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우리나라가 어떻게 이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지 현실적인 고민을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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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소국의 제2차 세계 대전사
권성욱 지음 / 열린책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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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세계대전’이란 단어를 처음 들었던 어릴 적, 머릿속으로 자연스러 떠올랐던 상황이다. 이것은 영화 <킹스맨>에서 귀 뒤에 심은 칩으로 인해 전 세계 사람들이 난투극을 벌인 풍경을 상상했던 것과 같다. 국가와 국가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곳과 사정없이 싸우는 그런 풍경 말이다.

그러나 말에서 풍기는 대로 상상하기 보다 현실을 토대로 생각하면 세계대전이란 말은 그래도 정확한 규정 같다는 생각을 했다. 국가라고 할 수 있는 조직들이 몰린 곳은 유럽이었고 그 외 근대적인 문명국이라 하면 (논란이 될 수 있는 말이겠으나) 대개는 식민지 아니었던가. 격전은 유럽 대륙과 태평양에서 벌어졌지만, 그 싸움을 위해 동원된 유무형의 자원들을 생각하면 이것은 세계대전이 맞다. 

그러나 이 책 <약소국의 제2차 세계 대전사>는 그 ‘유무형의 자원들’이란 납작한 말로 전쟁의 양상들을 나열하기 보다, 약소국이 처한 상황을 중심으로 입체적으로 전쟁의 양상을 보여준다. 세계대전이란 거대한 파고 앞에서 이들이 했던 일련의 선택들과 그 선택으로 인해 파생된 결과들이 크고작은 파장이 돼 거대한 전쟁에서 어떤 영향과 최종적인 결과를 만들어 냈는지 추적한다. 이 소국들이 내린 결정의 중요성을 영국, 프랑스, 소련, 독일급으로 끌어올리는 서사적 무리수를 던지기보다는 주요국들이 만들어 낸 주전장의 가장자리에서 벌어졌던 사건에 주목함으로써, 2차 대전이란 거대한 사건을 보다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돕는다.


약소국들의 선택


2차세계대전의 서사는 그간 주요 국가들로만 쓰였다. 워낙 거대한 사건이기에 그들만으로도 충분한 이야기는 가능했다. 물론, 종종 나온 콘텐츠 중에는 당시의 숨어있던 영웅들을 조명한 것도 있다. 단순히 어떤 전투의 영웅을 기리는 것이 아닌, 히틀러가 숨긴 유물을 찾는데 기여한 군인들(영화 <모뉴먼츠맨>), 전쟁의 참상을 모험적으로 전한 사람(영화 <페르시아어 수업>), 독일군의 암호룰 플기 위해 노력했던 천재(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등등. 재밌기는 하지만 내게 이런 이야기들은 전쟁의 큰 흐름을 보여주는 데는 늘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야기적으로 흥미롭지만, 실질적으로 독자 입장에서 전쟁을 메타적으로 바라보는 데는 한계를 가진 콘텐츠들이라 생각했다.

책을 읽기 전에도 그랬지만 어렸을 적, 2차 세계대전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왜 국가들은 많은데 연합군에 소속된 국가도, 추축국에 속한 국가도 왜 이리 적은가?”였다. 2차 세계대전을 더 깊이 파고들면 이 아이러니는 더 강해진다. 사실상 유럽 전선에서도 태평양 전쟁에서도 싸워 승리를 얻어낸 것은 미국뿐이었다. 추축국 또한, 유럽에선 독일과 이탈리아가 있었지만,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탈리아와 관련된 이야기는 거의 보이지가 않는다. 

이 책은 바로 이런 궁금증을 해소해준 책이다. 먼저 추축국 진영을 보자. 무솔리니는 히틀러와 어깨를 나란히 할 것 같은 인물인데, 2차 대전은 하드캐리한 인물은 히틀러였다. 무솔리니는 그렇게 히틀러에게 협조직인 인물이었을까. 저자는 아니라고 한다. 그는 요샛말로 히틀러란 버스를 탄 무임승차자였다. 히틀러가 유럽을 휩쓸고 다닐 때 무솔리니가 한 것은 히틀러를 방해하지 않는 정도였다. 


“알프스 브렌네르 고개에서 히틀러를 만난 무솔리니는 참전을 종용하는 히틀러에게 마지못해 승낙했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다. 독일군이 확실히 우세할 때만 개입하겠다는 것이었다. 히틀러가 영불 연합군을 쉽게 꺾을 것이라고 도무지 믿을 수 없었던 그로서는 힘든 싸움은 죄다 독일에 더맡길 참이었다. 언제나 거득먹거리기만 할 뿐 도무지 믿음직하지 못한 동맹자였지ㅣ만 히틀러는 무솔리니가 연합군의 편에 서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만으로도 흡족해했다.”


2차 대전이 시작되고 나서 독일이 거듭 확장하는 모습을 떠올린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는 예상하기 어렵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추축국으로 같은 편이었고 계속해서 독일의 영토가 팽창하는 그림을 떠올렸다면, 우리는 그들 사이의 동맹이 상당히 단단했을 것이라고 지레 짐장할 뿐이다. 이 책의 좋은 점은 2차 세계대전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나라들의 하나의 말로서만 그 주변국가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국가의 운명을 두고 동등한 관점에서 판세를 읽고 선택을 한 모습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명백하게 약했던 것은 국력이었지만, 그렇다고 강대국만큼의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벨기에는 전쟁 발발 직후 왕실과 내각이 대립했다. 레오폴트 국왕은 파죽지세인 독일군 앞에서 싸울 의지를 잃었고, 내각은 결사항전을 원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2차 대전의 결과를 안다고 해서 레오폴트 국왕의 선택을 비난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공식적인 동맹국도 아니었다. 또한, 이후 덩케르크 철수 작전 때는 벨기에 군이 최전선에서 독일을 막아냈지만, 영국군은 벨기에군까지 챙기며 철수를 한 건 아니었다. 위기 앞에서 저마다의 생존본능이 발현됐고, 협력 보다는 각자가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선택들을 했다. (물론,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히틀러의 느린 판단 때문이었다) 또한, 프랑스에 있던 8만5천의 벨기에 군도 프랑스 붕괴와 함께 괴멸됐다. 


덴마크를 보자. 덴마크는 침공되고 불과 4시간 만에 독일에 굴복했다. 빠른 인정 덕분이었는지, 벨기에는 네덜란드나 폴란드처럼 파괴되는 운명은 피했다. 무고한 국민들에 대한 희생도 없었고 국인들 또한 해방됐다. 독일에 점령된 나라들에 괴뢰 정부가 세워지는 것도 피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편에 붙자 연합군은 덴마크의 해외 영토인 페로제도와 아이슬란드, 그린란드를 봉쇄했다. 외부에서 덴마크로 들어가던 원자재도 끊겼다.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독일이 위기에 몰리자 덴마크 또한 자유군단이란 이름으로 국민들을 징집해 전선으로 보냈다. 전선으로 간 6천명 중 2천명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독일이 유럽대륙의 주도권을 잡는 데 있어 탄력을 받은 순간이었던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의 순간은 어땠을까.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했기에, 으레 국력은 약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과정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도 있었다. 괴벨스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요새 선을 시찰한 후 여길 톨파했으면 엄청난 피를 흘렸을 것이라고 썼다. 히틀러를 타도하고 싶어 했던 독일 장군들 또한 영국의 협조로 독일이 체코를 손쉽게 손에 넣으니 대항할 수가 없었다. 또한,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이었던 베네시는 젊은 시절 합스부르크 제국을 상대로 독립투쟁을 했던 사람으로서 배짱까지 가진 인물이었다. 주변 국가들이 무관심과 방관, 뮌헨 조약을 체결한 영국의 협조, 이후 히틀러에 붙어 체코슬로바키아를 뜯어먹으려는 주변국들에 의해, 어쩌면 2차 세계대전을 막을 첫번째 울타리라고 할 수 있는 장애물은 무력하게 무너졌다.


강대국 못지 않은, 약소국의 현실적 선택들


“전쟁에서 총성이 멈추는 순간은 양심이나 도의가 아니라 어느 한쪽이 먼저 지쳐서 나가떨어지거나 싸울 의지가 완전히 꺾였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나는 이 주장과 비슷한 결의 주장을 최근 이코노미스트에서 봤다. 우러 전쟁이후 피폐해진 러시아의 경제를 다룬 이 기사의 결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전쟁을 끝내진 않을 것”이란 것이었다. 전쟁을 활발하게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없으나, 저자의 말처럼 지도부가 전쟁을 포기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작금의 미국과 이란 전쟁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 있을 것이다.


이 책은 2차 세계대전을 다루고 있지만, 전쟁이란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마주하게 된 약소국의 상황들은 오늘날의 약소국들과 뭐가 그렇게 다를까 싶다. 단순히 우리나라가 주변 강대국들에 치이는 상대적 약소국이란 점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아니다. 독일이 전쟁을 벌이는 데 약소국이라 할 수 있는, 체코,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등의 국가가 먼저 점령된 것은 이들 나라들이 기본적으로 평화에 안주해 있었기 때문이다. 강대국들은 언제나 다른 국가와의 경쟁에서 어떻게 생존할지를 입체적으로 생각한다면, 강대국들은 상대적으로 이런 고민을 덜 할 것처럼 생각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정말 그랬던가?” 강대국의 병력과 맞서든 항복을 하든, 실제 군인들이 문앞까지 쳐들어온 상황에 맞닥뜨린 약소국들은 늦긴 했지만, 적어도 이러한 고민의 정도가 강대국에 비해 결코 얕은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적어도 (영국이란 나라를 기준으로 했을 때) 단지 국력이었다.


이 당시 연합군이든 추축국에 섰던 약소국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답을 주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경각심 정도는 심어준다. 최근 벌어진 이란-미국 간 전쟁이 이란 입장에선 어떤 전쟁인지. 이제는 지지부진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 우크라이나는 어떤 상황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지. 우리는 서구를 중심으로 사고를 할 뿐, 우크라이나나 이란이 처한 상황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콘텐츠를 적게 접하고 있다. 종종 정의감을 가진 사람들의 이들 국가의 ‘민중’의 관점으로 전쟁을 분석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지만, 이 또한 전체적인 모습보다 한쪽이 치우친 모습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역사이기 보단 내가 보기에 그러한 글도 그냥 콘텐츠다. 


이 책은 이미 역사적 결론이 내려진 2차 대전이란 사건에서 약소국들의 모습들은 우리가 지금도 강 건너 불구경하고 있는 현실을 좀 더 우리의 문제를 받아들이고 인식하는 데 도움을 준다. 국제질서가 붕괴하는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전 국제질서가 붕괴 됐을 때 어떤 생각들이 경쟁했는지 그 속사정을 아는 것일 게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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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권력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 탄핵의 정치학
이철희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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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紙 김지호 기자 '한국보도사진전' 대상

 

국정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 계엄령 사태의 책임을 일선 동원된 군인에게 떠넘기고, ‘의원이 아니라 요원이 었다는 주장을 했다. 간첩을 잡았던 국정원 요원을 향해선 음해 공작을 펼치고 있다 한다. 이젠 공적 지위고 뭐고 다 포기하고 이젠 나 하나만 살겠다는 (아직은) 대통령의 모습이다. ‘무책임이란 말로는 부족한, 공직자 이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리조차 회피하려는 양복 입은 불량배의 모습을, 우리는 탄핵 재판이란 거대 정치 이벤트를 통해 실시간으로 보고 있다. 이런 인간에게조차 비용을 들이며 탄핵 재판 서비스를 받게 한다는 것은 민주주의란 제도의 아이러니 아닐까 싶다.

 

이 어이없게 진행되는 변론은 1~2달만 참으면 앞으로는 안 봐도 될 것이다. 그간 대통령 측이 늘어놓은 변론 내용을 비롯해 반복됐던 트롤 짓은 재판 선고기일에 문형배 소장이 절제된 단어와 빈틈없는 논리로 잘근잘근 씹을 것이다. 작금의 뉴스가 답답하고 듣기 싫다면, 재판의 대미를 장식할 헌재의 시간을 기다리면 된다.

 

12·3 내란과 윤석열에 대한 헌법상의 판단은 헌법재판소가 하겠지만, 이 사건은 갑작스레 생긴 정치 이벤트 정도로 치부할만한 건 아니다. 윤석열 탄핵 재판을 누구보다 집중해서 보고, 이를 뉴스 상품으로 팔아야 하는 정치평론가조차 12·3 내란이 우리 헌정 체제의 취약성에 대한 그럴싸한 질문 하나 던진 게 없다고 하지 않은가. 그러나 내란이 일어나기 한 달 전, 탄핵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여는 책 한 권이 세상에 나왔다. 문재인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냈고, 국회의원과 정치평론가로도 활약한 이철희 씨가 탄핵을 주제로 한 자신의 논문을 책으로 낸 것이다.

 

정치적인 재판, 탄핵 재판

 

<나쁜 권력은 어떻게 무너지는가>는 탄핵 관련 뉴스로 지쳤을 사람들이 볼만한 책이다. 현재 탄핵과 관련해 나오는 보도란 시시각각 발표·발견된 이슈를 전달하거나, (좀 더 분석적인 기사라면) 과거 두 차례의 탄핵을 통해 그 결과를 점쳐 보는 것 정도다.

 

책에서 이철희는 노무현, 박근혜의 탄핵 심판이 있었을 때 의회 내 구도와 대중여론이란 틀로 대통령 탄핵이란 제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한다. 책에서 던지는 질문은 간단하다. 탄핵의 성공/실패에 의회와 사회운동은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탄핵 소추 관련해 의회 내 구도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위 질문들은 단순해 보인다. 마치 탄핵 정국 속 의회 내 정당 분포와 광장의 여론을 알려주는 여론조사만을 알면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있어 보인다. 마치 현재 윤석열 탄핵 국면처럼. 하지만 중요 변수로 작용하는 언론 보도와 대통령의 행보, 의원 개개인의 행보 등을 종합하면 탄핵 소추 통과부터 헌재의 판단까지를 판단하는 것은 꽤 풀기 어려운 방정식이 된다. 그리고 이철희는 여기에 더해 탄핵 재판 자체가 정치적 특성이 갖고 있다고 설명한다.

 

탄핵 재판이 정치적이라는 주장은 불온하게 들릴 수 있다. 하원이 탄핵소추를 하고 상원이 심판하는 미국이라면 그럴듯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판사가 주 구성원인 우리나라 헌재에서 판결을 할 때 정치적 고려를 한다는 것은 어떤 결정이든 신뢰하기 어렵다고 생각될 여지가 있다. 판사들은 그간 여론의 영향을 배척하며 법을 통해서만 판단하려 했던 사람들 아닌가. 그러나 이철희는 탄핵 심판이 정치적 특성을 띠는 이유는 국민 의사와 대중적 합의를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무슨 말인가.

 

대개 헌법 조문은 추상성과 개방성을 특징으로 한다. 한국의 헌법도 다르지 않다. 누군가에 의한 권위적 해석이 불가피하다.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탄핵 사유 조항을 중대한 법 위반으로 해석하고, 그 기준에 따라 대통령 파면 여부를 결정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중대성의 판별은 사실상 법적 판단을 넘어서는 차원이다.”

 

탄핵 사유가 얼마나 헌법에 규정된 사유에 근접하는지에 대한 법정 평가와 더불어 대중적 신뢰를 얻고 있느냐는 정치적 평가도 고려해야 한다.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의 법 위반 정도가 중단할 때 탄핵 사유가 된다고 본다. 그런데 그 중대성을 확증하는 정략적 기준이 사실상 없다 보니, 정성적인 측면, 예컨대 국민의 안정적, 초당적 지지 여부를 중시할 수밖에 없다.”

 

정치적 특성 띤다는 의미는, 탄핵 심판이 다른 정치적 사안들처럼 법적 판단에서 벗어나 이해관계를 고려해 적당한 결과물을 만든다는 게 아니다. 법적으로도 논란을 일으킨 부분이 있는 가운데, 탄핵을 했을 때의 득실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국민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의미다.

 

가령 이런 것이다. 노무현 탄핵이 선고되기 전 있었던 총선에선 탄핵이 주요 쟁점이었고, 당시 열린우리당은 어려운 구도 속에서도 과반 의석을 넘기며 집권 여당이 됐다. 박근혜 탄핵 때는 수백만 명이 광장으로 몰려나왔다. 앞서 두 차례의 탄핵이 있었을 때는 헌재를 향해 대중이라 할만한 국민들이 분명한 의사가 직접적으로 표출했다. 윤석열 탄핵을 앞둔 현재, 국민적 지지와 초당적 지지는 이전 탄핵 때보다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지만 헌재가 탄핵을 인용할 국민접 합의 정도는 충분히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헌재가 현재의 인권위나 방통위처럼 작동한다면, 판결에 정치적 특성을 띤다는 특성은 심한 문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헌재가 이들에 휘둘리는 반정치적 선택을 할 것 같지는 않다. 비록 두 번밖에 없었지만, 탄핵 재판 때 헌재를 움직였던 대중의 움직임은 이렇게 극단적이지도 반지성적이지도 나아가 기회주의적이지도 않았다. 모든 시민들이 계엄령이 진행되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대통령의 발언이 거짓이라는 게 하나씩 드러나는 상황에서, 헌재가 이들의 말에 신뢰를 느낄 일은 없어 보인다.

 

중요하다고 하기엔 이젠 헐거워진 제도, 탄핵

 

윤석열의 탄핵은 이제 상수처럼 보인다. 헌재가 내릴 사이다 판결문을 보는 것 외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국회에서 있었던 대통령 탄핵 소추안 통과는 지켜보는 입장에서 변수가 많았고 긴장된 순간이었다. 첫 번째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표결할 때 박찬대 의원은 국민의힘 의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표결 참여를 촉구했고, 악동 이준석은 국민의힘 의원들이 모인 곳으로 찾아가기까지 했다. 정족수가 부족해 표결이 성립되지 않자 국회 앞에 모인 시민들의 아쉬움은 여의도를 가득 메우지 않았던가. 두 번째 표결을 때도 그렇게 낙관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국회 탄핵 소추안 표결은 노무현과 박근혜 때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흥미진진해진다. 박근혜 대통령 때는 모든 과정이 순조로우나 그렇지만은 않았다. 2016년 총선에선 여소야대 국면이 발생했고,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은 친박과 비박으로 금이 간 상태였다. 언론을 통해 공론화된 국정농단 게이트에선 계속해서 새로운 뉴스가 쏟아져 나왔고, 광장에선 의회를 향해 탄핵을 맹렬하게 푸시했다. 야당은 여당 의원들이 상황을 납득할 수 있는 시간을 주며 설득했고, 여당 내부에서도 박근혜를 포기해도 대안으로 생각할 사람을 찾자 큰 이탈표도 생겼다. 탄핵을 막으려는 대중 방패는 진작 없었고, 탄핵소추를 저지할 여당 의원들은 쪼개졌다.

 

박근혜가 2016년 총선, 국정농단 게이트, 광장의 강한 압박으로 탄핵을 막을 방패들이 연이어 격파돼 속수무책으로 밀려난 사례라면, 노무현은 여소야대 국면 해소를 위해 탄핵을 활용했다고 한다. 당시 출발부터가 여소야대 국면이었고 한나라당 의원들은 번번이 대선불복 발언을 하며 국정 운영에 협조하지 않을 자세를 취했다. 민주당 안에서도 노무현을 따르는 의원이 많지 않던 상황에서, 지지가 아직은 남아을 때 정치적 승부를 걸어 무기려한 상황을 일거에 타파하려 했다는 게 이철희의 설명이다. 탄핵을 노리던 한나라당에겐 여권 분열이란 기회를 주고, 민주당에겐 자기들이 선출시킨 대통령의 탈당이란 명분을 주어 탄핵에 참여할 명분을 주었다. 아웃사이더 노무현은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었던 총선과 () 탄핵이란 도박판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며 끝내 승리해 귀환했다.

 

포커게임 플레이어로 3명의 대통령들을 비유해보자. 노무현, 박근혜, 윤석열은 탄핵이란 국면에 모두 다른 리더십과 행보를 보였다. 정치 생명을 올인(All-in)한 노무현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밖근혜는 이 판에서 자신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카드를 폴드(Fold)하며 정치판에서 떠났다. 윤석열은 탄핵 재판 와중에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등 틸트(Tilt) 상태에 들어갔다. “Buck stops here!”는 개뿔.

 

3번의 탄핵에서 각각의 대통령이 보인 모습들은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으나, 민주화 이후 8명의 대통령 중 3명이 탄핵 소추됐다는 사실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다. 노무현, 박근혜, 윤셕을은 모두 여소야대 국면에서는 탄핵을 당했다. 여소야대 국면이란, 대통령 입장에서 늘 탄핵이란 위협을 마주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국면이 돼 버렸다. 물론 이 국면이 예전처럼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하는 데 있어서 야당의 의견을 더 존중하고 국정 운영에 참여하려는 태도로 보이면 약이 되겠으나, 양극화된 정치 지형이 고착화 현재 이런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힘들지 않을까 싶다.

 

여러 요인들이 겹처서 발생한 일이겠으나 급격하게 위축된 경기가 보여주듯 탄핵은 단지 정치 이벤트로만 끝나는 게 아니다. 우리 외교, 안보, 경제에 분명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윤석열이 대통령이었다면 더 문제가 심화될 수도 있었겠으나, 앞으로 늘 대통령 탄핵이 가능하다면 이젠 외교, 안보, 경제의 불확실성은 기본값이 될 수도 있다. 나아가 국회의 의견을 존중하는 대통령이 성과까지 만들어 내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고.

 

현재의 정치 지도자 중에는 김대중처럼 통합을 강조하며 대화와 타협을 통해 결과를 만들 능력이 있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소수가 있으나 그들의 집권은 요원하다. 탄핵은 분명 우리 민주주의를 지키고 나아가 사회를 더 건강하게 만드는 데 있어서의 제도가 돼야 하나, 앞으로의 탄핵은 그것이 올바른 탄핵이라 할지라도 결국 사회를 더 낫게 바꿀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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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전쟁 - 전통주의의 복귀와 우파 포퓰리즘 걸작 논픽션 28
벤저민 R. 타이텔바움 지음, 김정은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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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산 알 가입이란 환호 속에서 우뚝 선 폴의 모습은, 그 집단이 어떤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는지를 보여준다. 수많은 프레맨 앞에서 하늘을 향해 주먹을 쥔 폴의 모습에서 감독은 이게 종교로 만들어진 권력이야란 것을 보여주려는 것 같다.

이 장면은 불온하지만 신선하다. 종교적 예언에 기대어 카리스마로 대중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폴의 모습은 자유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겐 어색해야만 한다. 중요한 결정을 하려면 연극이라 할지라도 대화와 타협을 해야 하며, 지도자는 언제나 견제받아야 한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또한,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얼마나 구린지 언론을 통해 매일 학습하고 있지 않은가. 프레맨이 폴에 환호했던 것은, 그의 잘생긴 외모와 예언을 실현시킬 자가 왔다는 종교적 신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번에 읽은 책 <영원의 전쟁>은 폴처럼 잘생기지도 않고 종교적 신념마저 약한 자유주의 세계에서도 이런 일이 곳곳에서 연쇄적으로 벌어질 수 있음을 암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전통주의라는 세계관을 갖고 최고 권력에 개입하는 인물들의 뒷이야기를 다룬다. 저자는 전통주의를 Tt를 구분해 설명한다. traditionalism은 우리가 보통 전통을 중시하는 감각으로서 보수주의에 일부분으로 볼 수 있다. 전통과 관습을 중시하며 점진적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사고한다. 반면, Traditionalism은 프랑스 철학자 르네 그농이 하나의 세계관을 갖고 만든 이념이다. 현실은 자연스레 창조되고 파괴된다는 윤회 세계관을 갖고 있으며, 그렇기에 문명의 파괴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고(촉진할 수도 있는), 이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번영과 평화를 가져올 메시아 같은 전사를 기대한다.

안 싸워도 될 것으로까지 싸우지만 근본적으로 보수와 진보는 문제 해결의 속도로 갈등을 빚어왔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공감대는 있다. 그러나 전통주의는 그 문제를 방치하거나 더 심화하도록 부채질한다. 물론, 보수와 진보의 역사를 보면 전통주의처럼 교조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공황 시기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정부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독일이나 스웨덴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을 위한 과도기라며 똑같이 아무것도 해선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모두 이념에 기반한 망상이었으며 만약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대공황의 피해를 봤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집단엔 다른 생각을 갖고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통주의자였다면? 아마 때가 됐다며 정말 메시아만을 기다렸을지 모른다.

 

전통주의란 기괴한 창조적 파괴

 

근래 국내에서 전통주의를 정면으로 다룬 책은 임명묵의 <러시아는 무엇이 되려하는가>이다. 몇 년 전 나온 이 책은 러우전쟁을 비롯한 러시아의 그간 행보를 러시아 역사에 내재된 맥락을 중심으로 풀어냈다. 러시아에 대해 내밀하게 알지도 해석할 능력이 없는 언론이 러시아의 행보=푸틴으로 맞춘 것과 달리, 푸틴이 어떤 질서와 사상 안에서 움직이는지를 임명묵으 설명했다.

유럽과 아시아에 어느 한 곳에도 속하지 못해왔으며, 공산주의와 함께 경제마저 수렁에 빠지며 무너진 국가 국민의 깊은 수치심과 비참함을 책은 보여준다. 또한, 푸틴이 집권한 후 변화된 러시아에서 그 국민들이 (간접적일지라도) 어떤 위안을 받고 푸틴이 전쟁이란 극단적 정치적 모험을 벌이는데도 시민들이 침묵으로 동의를 표하는지 설명한다. 임명묵은 수치심·비참함을 느끼던 국민들의 자존감은 경제 재건만이 아니라 무너졌던 정체성이 푸틴의 통치 동안 회복됐다고 봤다. 그리고 두긴은 푸틴의 통치를 전통주의란 큰 그림을 통해 조언하며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한다.

임명묵이 러시아에 초점을 맞추며 전통주의의 문제성을 드러냈다면, <영원의 전쟁>의 벤자민은 전통주의의 세계가 러시아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듯 베넌과 올라부를 통해 자유주의 세계의 문제로까지 가져온다. 저자는 이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세 사람이 서로 교류하며 나눴던 대화 그리고 이들이 전통주의를 왜 필요하는지를 드러냄으로써 전통주의 세계관의 윤곽과 그것이 세계 곳곳으로 퍼질 수 있는 내적 합리성과 현재의 풍토를 갖고 있는지 설명한다.

물론, 세 명의 전통주의자가 연대하며 세상을 바꿀 일은 없을 것이다. 러우전쟁 판세를 보며 두긴은 웃고 있을지 모르나, 베넌은 브라이트바트 뉴스에서도 사임한 상황이다. 올라부는 코로나로 죽었다. 권력의 핵심에 있는 세력 간 연대는 기대하기 힘들다.

그러나 자유주의 세계에서 극우는 분명 포기를 몰랐고 현재는 급격히 성장했다(이런 현상을 보면 잘못됐더라도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뭔가 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현재의 극우는 이 세 사람처럼 그농의 책을 읽고 전통주의에 감화된 자가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나, 유럽에선 극우 세력은 소수에 머물지 않고 주류가 돼 가고 있다. 반이민·자국 우선주의·민족주의 등을 내세우기에 나치와 비슷하다고 하여 철저하게 고립되고 낙인까지 찍어왔으나 이제는 의회란 체제의 질서 안에서 크고 작은 승리를 거두는 단계에 이르렀다. 양당제인 나라에선 트럼프의 당선과 브렉시트로 큰 판을 흔들었다면 다당제 국가에선 점진적으로 의석을 늘리며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권능을 유럽 곳곳에서 획득해 가고 있다.

지금 약진하고 있는 것은 전통주의에 기반한 극우는 아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이들은 지적으로 자신들보다 먼저 도착한 전통주의자를 보며 그들의 품에 안길 것으로 점쳐진다. 전통주의는 모험적인 정치와 사람들의 분노만 자극하는 이들과 달리 가난한 사람들의 울분을 포용할 줄도 않고 하나의 세계관을 통해 그간 이들의 삶을 온전히 인정해준다. 트럼프와 베넌의 관계처럼 이 둘은 갈등도 있겠으나, 선동된 사람들이 누구의 말을 더 신뢰하며 장기적으로 따를지는 그리 어려운 질문은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자신을 대표하는 자로서 광대보다는 위대한 사상을 갖고 거대 비전을 제시하는 자를 선택할 게 뻔하다.

벤저민이 두긴·베넌·올라부를 인터뷰한 이미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전통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 몇몇은 있으나, 전통주의에 기반한 정당이나 세력은 아직 없다. 두긴이 있는 러시아에서도 말이다. 하지만 전통주의자들의 이상처럼 세계는 다극화의 단계로 가는 것처럼 보이며, 미국에서 정권에 상관없이 자국 우선주의의 움직임을 보이자 다른 나라들 또한 이에 동조하고 있다. SNS는 사람들을 연결시키기도 하지만, 그 연결 밖에 있는 고립된 사람도 양상하고 있다. 어느 나라에서나 양극화는 사회의 한 흐름으로 자리 잡았으며 사람들은 원자화 되고 있다. 한 개인의 가난과 고립부터 자국 우선주의란 추세까지. 개인의 울분부터 버려졌다고 생각한 집단의 울분 그리고 세계의 움직임까지. 우리 세계에는 전통주의에 기반한 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심층에서부터 퇴적되는 듯 보인다(물론, 이는 우리가 자유주의 체제란 것을 너무 당연시해 그 밖의 생각을 터부시하는 데서 오는 불안감일 수도 있다).

 

조커? 인셀? 일베? 전통주의자?

 

책의 서평을 영화 듄2의 하이라이트를 활용하긴 했으나, 읽는 내내 생각난 장면은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의 불행을 즐기는 풍조에 관한 것들이다. 남의 불행을 보았을 때 기쁨을 느끼는 심리를 뜻하는 독일어 샤덴프로이데처럼, 소소한 일에 대해선 모두가 이런 감정을 공유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사회 기류란 누군가의 불행을 쌤통이라고 느끼는 것을 넘어선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불행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고, 사이버렉카 처럼 기회가 오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임명묵도 자신의 책 <K를 생각한다>에서 “<조커>에 나오는 아서 플랙처럼,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어떤 성취감도 느끼지 못하는 분노한 이들이 오직 시스템을 파괴하고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증오를 쏟아내는 데서만 성취감을 느낀다면 사회는 어떻게 반응할까?”라고 했다.

그런 생각을 한다. 이건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나의 삶에서 성취할 수 있는 무언가 혹은 행복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을 수 없으니, 예능프로에서 실수하거나 한심한 실수를 해 불행에 직면한 사람들을 보면서 웃듯, 현실의 누군가의 불행을 보며 웃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그리고 이 또한 자신의 처지가 안타까우면 안타까울수록 학습되고 심화될 수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이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통주의라는 게 어느 정도 위안을 주는 부분이 있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위안은 어떤 측면에서 독처럼 위험할 것처럼 보인다. 위안을 느끼더라고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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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미래 - 경제에 현혹된 믿음을 재고하다
장 피에르 뒤피 지음, 김진식 옮김 / 북캠퍼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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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또한 사람들의 인식의 문제다. 사람들이 많이 알지 못하는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이란 책을 통해서 경제에 대한 자신의 이 같은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단순히 마르크스가 이야기 했던 것처럼 기술적으로 기계적으로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닌, 경제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인식에 따라 경제 체제는 계속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의 금융위기가 벌어질 수 있었던 것 또한, 주요하게는 절제되지 않았던 신박한 금융가들의 투기가 있었던 것과 별개로, 미국 시민들은 월스트리트를 비판하면서도 자국 내에서 벌어지는 그와 같은 일들에 대해서 적절하게 규제를 할 수 있는 지도자를 뽑지 못했다. 트럼프와 같은 인물이 처음에는 신자유주의에 대항할 인물처럼 보이기도 했을테지만,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대변할 사람이 아니라, 그 분노 저면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았어야 했다. 샌더스처럼 말이다.

이번에 읽은 책 <경제와 미래>는 우리가 갖고 있는 경제 시스템에 대한 헤게모니를 다룬 책이다. 자동적으로 작동하는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제가 왜 자동으로 작동하는지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 때문인지 경제라는 것을 충분히 수정 가능한 것이라고 보지도 않는다.

어쩌면 경제라는 것은 바꾸기에는 너무 거대한 것이라고 생각할수도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을 바꾸는 게 정말 혁명이고 거대한 변화가 아닐까 싶다. 그 구성원들이 스스로 어떠한 경제적인 질서에 종속돼 살아가는지 고민할 수 있는 능력. 어쩌면 이는 거대 권력이 계속 교체되더라도 시민들의 삶이 바뀌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고민해야 할 문제다. 대선 뒤에 이 책을 읽어보니 정말 이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정말이지 궁금하다.

칼 폴라니를 생각하며

얼마 전 칼 폴라니라는 경제학자를 알게 됐다. 헝가리 출신이고 유대인이었으며 1차 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의 혼란스러웠던 유럽의 모습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미국으로 간 경제학자다. 그리고 그 위대하지만 난해해 이해하는 사람이 극히 적은 책 <거대한 전환>의 저자이기도 하다. 얼마 전 칼 폴라니의 간단한 생애와 그가 쓴 <거대한 전환>이 엑기스만을 요약한 책을 본 일이 있는데, 폴라니의 주장 중 하나가 시장이 사회를 압도했다는 것이다. 이런 말이다. 경제는 시장으로 환원됐고, 시장으로 환원된 경제가 이제는 사회를 압도하고 있다는 말이다.

장 피에르 뒤피의 책 <경제와 미래>는 사회를 압도하게 된 경제의 모습을 비판한 책이다. 그가 이 책을 통해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경제의 전망과 같은 것이 아니다. 또한 경제가 계속 나빠질 것이라는 전망도 아니다. 사회라는 것을 지우고 있느 경제, 그리고 그 경제라는 것을 전부가 돼 버린 시장이 만들어갈 미래가 어떤 디스토피아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 저자는 치열하게 비판하고 있다.

어쩌면 나는 지금 저자가 이야기한 미래의 어느 한 순가에 살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저자가 이 책을 구상하고, 프랑스에서 이 책이 나오고, 그 책을 우리나라에게도 소개해야겠다고 생각한 출판사가, 이 책을 내기까지의 시간. 그리고 내가 다시 이 책을 다시 잡고 읽는데 까지의 기간을 생각하면, 저자가 생각한 경제로 모든 것이 화원된 미래 디스토피아의 한 순간 중 하나에 나는 지금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2024년 현재 내 주변의 경제 그리고 세계의 경제의 모습은 과거 내가 처음으로 교과서를 통해서 경제를 배웠을 때와는 많이 달라져있다. 표면적으로만 자유무역의 기치아래에서 결쟁을 할 뿐 전략 산업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상당부분 보호무역이 강세다. 거시적인 경제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사회 안에서 시민들은 더 이상 금융에 대한 지식 혹은 뒷받침이 없다면 앵간한 현금부자이지 않은 이상 버티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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